2022년 11월호

[환상극장] 연암과 미치광이 송욱, 더불어 세상을 논하다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입력2022-11-10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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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Gettyimage]

    [Gettyimage]

    “송욱이 도대체 누군가?”

    벗이 찾아와 박지원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송욱이야말로 이 시대의 현자지. 공자를 나무랐다던 저 옛날의 장저와 걸닉을 떠올려보시게나.”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지원이 대답하자 벗이 볼멘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세상을 구하겠단 헛된 꿈을 접고 자기들처럼 농사나 지으며 은둔하자고 권했다던 미치광이들 아닌가?”



    고개를 끄덕인 지원이 서안 위에 쌓인 원고 뭉치를 주섬주섬 정리하며 답했다.

    “그렇지! 송욱은 마치 장저와 걸닉 같은 자일세.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뜻은 비록 갸륵하나 그걸 뒤집어 보면 세상 위에 군림해 보겠단 못된 심보의 다른 모양일 수도 있지. 차라리 장저나 걸닉처럼 세상 밖에서 유유자적하는 삶이 나을 법도 하지 않나?”

    지원의 얼굴을 한참 물끄러미 쳐다보던 벗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나이도 이제 스물이 넘었고, 할아버지 댁에서 기식하는 삶도 슬슬 정리해야 될 것 아닌가? 젊은 아내는 또 어쩔 셈인가? 과거 공부를 시작해도 모자랄 판에 이상한 기인 얘기나 끼적여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으니 정녕 내 마음이 참혹하네.”

    서안을 밀치고 벗의 손을 잡은 지원이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다 뜻이 있어 그러니 염려 마시게. 내가 쓴 송욱 이야기를 읽었나 본데, 그에 대해 자세히 들어보고 싶진 않나?”

    궤변가 송욱

    한양 동쪽 인창방의 마장을 찾아 말을 사고파는 모습을 구경하는 건 지원의 오랜 습관이었다. 거간꾼(마쾌)이 말을 팔려는 자와 사려는 자들을 이리저리 꾀고 주선하는 흥미진진한 광경을 보노라면 전국시대 세 치 혀로 천하를 주물렀던 유세가 소진과 장의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리해 말 구경은 점차 마쾌 구경으로 옮겨가고 말았다.

    셈에 밝고 말주변이 뛰어난 마쾌 중의 마쾌는 단연 송욱이었다. 그렇다고 송욱이 전문 말 거간꾼은 또 아니었다. 그는 한때 과거 공부에 몰두하던 유생이었다. 경서나 외던 송욱이 지필묵을 버리고 미치광이 행세를 하게 된 사연은 지원이 꽤나 긴 시간 동안 그와 안면을 튼 뒤에야 들을 수 있었다.

    언제나처럼 송욱의 능란한 말솜씨를 넋 놓고 바라보던 지원에게 상대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글공부나 해야 할 젊은 선비가 제법 할 일이 없나 보이? 허구한 날 마장에나 나타나고 말이지? 나한테 배울 게 좀 있었나?”

    자신을 알아보는 송욱에게 감격한 지원이 대답했다.

    “글도 본디 말에서 나왔습니다. 성인께서 덕이 있는 자에겐 반드시 말이 있다 하셨으니, 훌륭한 말엔 훌륭한 덕이 깃든 게 아니겠습니까? 대인의 말씀은 조리에 맞으며 공평하고 그러면서도 모두의 이익을 두루 맞춰주는 현명함까지 갖췄으니 천하에 이보다 더한 명문이 어디 있겠습니까?”

    호탕하게 웃고 난 송욱이 자신의 성명을 밝히고선 은근한 음성으로 물었다.

    “나 역시 소싯적엔 학문을 익히던 유자였어. 지금은 세상 모든 천한 일을 가리지 않고 하다가 미친 선비란 소릴 들으며 살고 있지. 그 사연, 어디 한번 들어보겠나?”

    지원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송욱이 거침없이 앞장서며 소리쳤다.

    “그렇다면 술 한잔이 따르지 않을 순 없겠지? 살곶이다리에서 친구 둘을 만나기로 했는데, 어찌 나랑 함께 가려나?”

    지원이 머뭇대며 망설이자 송욱이 다시 말했다.

    “화살로 자넬 맞힐 생각도 없거니와, 설령 맞힌다고 해도 서책에나 빠져 살며 병든 마음만을 꿰뚫을 생각이야. 그럼 그 화살은 병을 다스리는 침인 셈 아닌가? 그도 아니라면 자네의 굽이굽이 찢긴 삶을 이어 붙여줄 바늘이라 해야겠지.”

    빙그레 미소 지은 지원이 송욱의 그림자를 밟으며 사뿐사뿐 살곶이다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한강을 마주한 살곶이다리에 당도한 두 사람은 곧 나타난다는 송욱의 벗 두 명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도록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내 송욱이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은 이미 여기 도착해 있는데, 자네만 모르고 있겠지?”

    이단의 길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지원을 바라보며 싱긋 웃은 그가 다시 말했다.

    “자고로 누군가 왔다고 할 땐 그저 몸만 온 게 아니라 마음까지 데려와야만 진짜 왔다고 할 수 있겠지? 마음을 집에 두고 나오면 그게 어디 사람인가? 그렇게 두 사람의 마음이 만날 때 진정 만난 것이고, 만난 뒤에 여운도 길게 남게 마련이지. 한양 저자를 종일 쏘다니며 1000명을 만났다 한들 그게 과연 만난 것인가? 지금 난 두 벗이 늦는 심정을 헤아리며 마음을 썼고, 자넨 자네대로 두 명을 상상하며 마음을 썼을 거야. 늦는 두 사람은 그들대로 기다리는 내 마음을 짐작하며 서둘고 있지 않을까? 그러니 마음속에서 그 둘은 이미 여기 있는 셈이지.”

    심각한 표정으로 이맛살을 찌푸린 벗이 말했다.

    “자네 말을 들으니 송욱 그 자는 전형적인 이단일세. 말주변은 비록 뛰어나나 그 논리는 저 옛날 말장난으로 세상을 어지럽힌 공손용자나 혜시와 다름이 없네. 그럴듯한 구변으로 흑과 백을 뒤섞고 참과 거짓을 흩어뜨려 결국 성인의 도를 멸시하도록 만들고야 말 걸세.”

    가볍게 한숨을 내쉰 지원이 대답했다.

    “공손용자나 혜시는 이름과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상 사이의 관계를 물었던 거야. 관계가 뒤틀리면 세상 법도도 무너지는 것 아닌가? 또 이름과 실상이 끝내 일치할 수 없는데도 일치할 수 있거나 이미 일치했다고 믿는다면 그 또한 위험한 생각이 아닌가? 공자도 이름과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이 제대로 부합하는지 물으라 하지 않았나? 따라서 공자 같은 성인조차 송욱의 의심 앞에선 자유로울 순 없을 거야.”

    지원을 잔뜩 노려보던 벗이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는 의심할 수 없는 게 세상에 있네. 성현이 남긴 도일세! 그게 담긴 불멸의 전적이 경서고! 자네 설마 그것마저 부정하는 건 아니겠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지원이 천천히 대답했다.

    “난 성현의 도와 경전의 권위를 부정하진 않아. 하지만 성현이 살던 시대는 이미 과거가 됐어. 경전의 말도 변화한 시대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지. 근본은 그대로라 하지만 적용 방식은 요즘 실상에 맞춰 바뀌어야 하네! 미치광이 송욱은 진짜 미치광이가 아니라 우리보다 먼저 세상의 변화를 간파하고 너무 빨리 변화한 자라고 할 수 있겠지.”

    나는 누구인가

    “박지원 자넨 누구지?”

    온몸에 노을빛을 받으며 송욱이 진지하게 물었다. 강바람이 차 옷깃을 여민 지원이 아직 오지 않은 두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를 살곶이다리 저쪽 편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분명히 답할 수 없는 불가의 질문 같습니다.”

    콧방귀를 크게 뀐 송욱이 어린아이에게 말하듯 친절하게 속삭였다.

    “분명히 답할 수 없는 게 아니라 한 번도 제대로 묻지 않았겠지. 박지원은 아무것도 아니야. 내 밖의 무언가에 의지하지 않고 내가 누구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어. ‘나’란 그야말로 텅 비어 있지. 그걸 스스로 채워나가는 게 삶이란 말이지.”

    “어찌 텅 비어 있습니까? 전 수많은 생각으로 넘쳐나고 있는 걸요?”

    “그 생각이란 것을 잘 따져봐. 과연 자네 것이 맞나? 누군가 해줬거나 어떤 책에서 읽었던 건 아니고? 진짜 자기 생각을 해보란 말이지! 남들이 집어넣어 준 쓰레기 같은 지식 말고!”

    멍하니 송욱을 바라보던 지원이 침울하게 물었다.

    “대인께선 그럼 진짜 자신을 발견하셨습니까? 아니면 텅 빈 상태를 받아들이고 풍등처럼 세상 사이를 자유롭게 떠돌고 계신 겁니까?”

    뒷짐을 진 채 한강 건너를 응시하던 송욱이 천천히 대답했다.

    “그 두 가지는 결국 같은 거야. 바람에 날리는 풍등처럼 자유로운 것과 진짜 자신을 만난다는 것은! 속 좁은 유자들의 말에 현혹되지 마. 성현의 말이나 책 속의 진리는 이미 다 지나가 버린 것을 담고 있지. 잠시 참이었지만 세월의 비바람에 닳고 닳아 진즉 낡아버린 거라 이 말이지. 진짜 가치 있는 건 지금이고, 지금을 살며 끝없이 변화하고 있는 나란 말이야. 그러니 나란 죽을 때까지 찾아가야 하는 것이지 설명하거나 정의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란 거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평생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을 위해 자기 터럭 하나 내주지 않겠다던 양주 같은 이기주의자와 뭐가 다르겠습니까?”

    손바닥을 마주 치며 박장대소하던 송욱이 소리쳤다.

    “자기가 텅 비었기에 계속 세상과 어울리며 변화하려는 자가 어찌 이기주의자가 될 수 있지? 천하 만인을 벗으로 여기며 우주 전체를 내 집이라 여기건만 어떻게 이기주의자가 되느냐 그 말이지! 이미 지나간 것으로 꽉 찬 자야말로 진짜 이기주의자가 아닐까? 머리에 잔뜩 똥만을 간직한 채 그게 황금인 줄 알고 잘난 척하는 자야말로 심보 고약한 위선자요, 남을 무시하는 고집쟁이란 거야.”

    友情論

    “송욱 그 자는 필시 불교나 양명학 같은 사특한 생각에 빠진 자가 틀림없네.”

    벗은 분한 표정으로 지원을 쏘아보며 독설을 늘어놓았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였던 지원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럴 수도 있어. 한데 불교나 양명학에도 배울 점이 있다는 건 자네도 아예 부인할 순 없잖은가?”

    분노로 볼살을 떨며 벗이 대답했다.

    “그야 그렇지만 온 세상 모든 사람이 어찌 벗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반상의 도리가 있고 귀천의 다름이 엄연한데. 그럼 우리 같은 양반이 상것과 친구라도 해야 한단 뜻이던가? 어서 말해 보게!”

    머리를 긁적이던 지원이 꽤 망설이다 대답했다.

    “맞아. 그렇게 생각하네.”

    “뭐라고? 이제 보니 자네 단단히 미쳤구먼? 그따위 말은 평등법계니 뭐니 떠드는 중이나 아무 배움 없는 상것까지 요순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양명학 이단이나 하는 말일세! 자네 정녕 사도(邪道)에 빠져 사문난적(斯文亂賊)이 될 텐가?”

    벗의 어깨를 다독이며 분을 누그러뜨린 지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해 보면, 하늘과 땅이 열릴 때 어디 양반과 상것의 구별이 있었겠나? 그건 다 사람이 만든 임시방편 같은 거야. 공자도 과거를 봐서 벼슬하진 않았지 않나? 또 도를 깨닫는 데에 귀천이 어디 있지? 배울 기회만 주면 누구든 요순이 될 수 있음은 선조들도 인정했던 바야.”

    “그렇다면 상것까지 모두 성균관에 들여 가르쳐야 된단 말인 겐가?”

    조탑타와 장덕홍

    고개를 가로저은 지원이 벗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속삭였다.

    “그럴 수는 없겠지. 다만 배움의 길은 다양해. 성인의 가르침을 익혀 조정에 나가는 길도 있지만, 외국어를 배워 역관이 되거나 침술을 익혀 사람 생명을 구할 수도 있는 거야. 길바닥 돌멩이도 잘 보면 제 쓰임새가 있고, 잘 쓰면 커다란 탑을 지탱하는 큰일을 할 수도 있다네. 우정이란 그렇게 제각각 자기 쓸모를 다하는 자들끼리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 같은 거라 이걸세.”

    말 세 필을 가지고 나타난 조탑타와 장덕홍은 송욱에게 늦어 미안하단 말도 없이 서로 낄낄대며 농을 주고받았다. 지원을 힐끗 바라본 두 사람은 흥인문이 닫히기 전 성 안으로 들어가자며 송욱을 다그쳤다. 결국 둘이 자기 말을 몰아 앞장서고 지원과 송욱은 남은 말에 함께 올라타 뒤뚱대며 그 뒤를 쫓았다.

    “안장이 없으니 제법 말 타는 기분이 나는걸.”

    위태로운 자세로 상대의 허리를 부둥켜안은 지원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송욱은 신나게 말을 몰았다. 그가 속삭였다.

    “우린 자주 이렇게 말을 타고 놀지. 꼭 관리만 말을 타란 법이 있나? 조탑타는 시전의 포목상이고, 장덕홍은 운종가에서 집을 사고파는 사쾌지. 모두 게으르기 짝이 없어 가끔씩 걸인 행세하며 지내기도 하고.”

    “걸인 행세를 하다니요?”

    “저자에서 구걸해서 먹고사는 거야. 포목이나 집엔 관심도 없거든. 하늘 아래 가장 귀한 건 마음이고 마음이 편하면 몸에 윤기가 흐르지, 우리 셋은 광통교에서 거지로 살며 진정한 자유를 맛보고 있다고나 할까.”

    흥인문 인근 객사에 빌린 말을 돌려준 세 사람은 성문을 지나 운종가를 거쳐 광통교로 향했다. 다리 아래에 도착한 셋은 거지들 사이에 자리 잡더니 한 거지가 건네주는 음식과 술을 다리가 부러진 낡은 반상에 올려놓고 통음하기 시작했다. 조탑타가 말했다.

    “지원이라 했어? 젊은 양반 나리? 이 송욱이란 놈 조심해. 미친놈이야. 과거 공부하다 갑자기 돌아버렸거든. 얘기 들었나?”

    지원이 고개를 젓자 탑타가 구슬픈 표정을 익살맞게 흉내 내며 말했다.

    “멀쩡한 봄날이었어. 열심히 글을 읽다 깜빡하고 졸았겠다! 근데 자기를 잃어버린 거야!”

    “자기를 잃다니요?”

    “송욱을! 송욱이 송욱을 분실했다고! 그럴 수도 있잖아? 가끔 나도 나를 잃어버렸다가 어렵게 되찾곤 해. 암튼 그 뒤부터 양반 행세가 싫어진 이 친구가 여기 광통교로 찾아오질 않았겠어? 마침 나랑 덕홍이가 맞이해 잘 대해 줬지. 우리랑 있으면 자기가 돌아온다나 뭐라나. 하긴 나도 친구들과 술 한잔 걸치면 그제야 온전히 조탑타가 되더라고.”

    멀뚱히 달을 올려다보던 송욱이 말했다.

    “과거 공부를 할 땐 내가 아니었거든. 몸은 여전히 난데 어쩐지 낮선 거야. 그러더니 아예 몸마저 사라지기 시작했지. 아무리 찾아도 내가 안 보였어! 그래서 나를 찾아 헤매다 광통교에까지 이르렀거든. 여기에서 내 몸이 기다리고 있더군.”

    빙글거리며 웃기만 하던 덕홍이 끼어들었다.

    “송 군이 처음 나타났을 때 충격이 컸지. 내가 어디 있느냐며 묻는데 이건 뭐 광인 그 자체라. 그치만 잘 들어보이 뭐 뜻이 깊은 말 같기도 하고. 그래서 받아줬더니 구걸도 아주 잘하는 거라. 심심할 때 하라고 마쾌들을 소개해 줬더니 아 그것도 잘해! 송욱은 못하는 게 없어. 천하의 기재라!”

    셋은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다 마침내 취해 버렸다. 송욱이 말했다.

    “선비의 사귐을 할 땐 어려운 점이 셋 있었어. 첫째는 늘 상대의 입장이 돼 계산해야 한다는 거야. 그래야 상대를 적으로 돌리지 않고도 내 이익을 취할 수 있거든. 둘째는 상대가 바라보는 날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는 거지. 그의 눈에 비칠 내 모습을 한순간도 놓치면 안 돼. 그러는 찰나에 실수가 생기는 법이지. 셋째는 상대의 눈에 비치는 날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나를 억눌러야 하는 거야. 그러지 않으면 나라고 믿는 그 내가 어색해지거나 문득 부끄러움이 밀려들어 일을 그르치게 되지. 세상을 주무르는 권세가들은 이 세 가지를 잘해 그 자리까지 올라간 거야.”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탑타가 덕홍을 바라보며 물었다.

    “송욱이 말은 늘 어려워. 덕홍이 네가 쉽게 말해 주라.”

    갑자기 거룩한 표정이 된 덕홍이 으스대며 입을 열었다.

    “고것이 군자의 사귐이란 거야. 마음을 주되 상대 빈틈을 노리고, 빈틈은 노리되 오히려 이쪽 빈틈을 크게 보여야 하며, 마침내 상대가 내게 넘어오면 기쁜 빛을 숨기고 마치 세상 전부를 잃은 것처럼 슬퍼해야 하는 거라. 상대가 흐뭇할수록 내 이익은 더 커지며 무심한 듯 내뱉는 아첨하는 말에 그의 애간장은 더욱 타들어 가지. 하나를 주고 셋을 받되, 열을 주고 하나를 받은 것처럼 행동해야 참 군자라 할 수 있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탑타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내가 포목을 팔거나 네가 집을 팔 때 하는 짓과 뭐가 달라?”

    고개를 갸웃한 덕홍이 송욱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거야 송 군이 잘 알 거 아닌가? 해봤으이 함 말해 보래이!”

    얼굴이 붉게 상기된 송욱이 입을 열었다.

    “비슷하지만 다른 게 하나 있지. 너희들은 상대 마음을 움직여 가격을 흥정하지만 군자들은 끝내 아무것도 흥정하지 않은 것처럼 일을 마쳐야 해. 흥정은 무언가 얻고 싶어 하는 거잖아? 얻고 싶은 게 있다는 건 뭔가가 부족하다는 거고. 군자는 자기가 부족한 걸 들키지 않으려 돈에 손도 대지 않지.”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탑타가 갑자기 송욱 얼굴에 침을 뱉으며 소리쳤다.

    “네가 그렇게 살았다니 역겹구나! 똥이 나오면 배가 꺼지고 배가 꺼지면 밥을 찾는 게 인지상정이야. 군자가 배가 안 고픈 척하는 위인들이라면 똥도 누지 않아야만 해. 하지만 그들처럼 냄새나는 똥을 많이 누는 사람들도 없지. 똥지게꾼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대갓집 측간 치우는 거야.”

    또 다른 나

    지원이 해준 송욱 이야기를 다 들은 벗은 머쓱해져 말이 없었다. 그런 상대를 무심히 바라보던 지원이 덧붙였다.

    “난 이 세 사람이야말로 진짜 우정을 논할 만하다고 믿었어. 게다가 우리 사대부들이 고결한 척하지만 이 세상을 직접 움직여 돌리고 있는 건 바로 그들이 아닌가? 어쩌면 우리가 그들에게 기생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네. 그렇다면 송욱은 그저 미치광이나 기인이 아니라 우리의 부족함을 깨우쳐줄 죽비거나 가식에 찌든 세태를 고칠 약석이 아니겠나?”

    무연히 고개를 숙인 벗은 주춤대며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서재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런 벗을 향해 지원이 속삭였다.

    “오늘 나와 함께 광통교에 가보지 않겠나?”

    입술을 삐쭉 내민 벗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네 말의 취지는 충분히 이해했네만, 걸인들과 사귀는 건 몹시 꺼려

    지네.”

    살며시 웃음을 머금은 지원이 말했다.

    “잘 알겠네. 취지를 이해했다니 가쁘군.”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서려 하던 벗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아까 내가 한 질문 말일세.”

    의아한 표정으로 벗을 올려다본 지원이 물었다.

    “무슨 질문 말인가?”

    몸을 돌려 지원을 내려다보며 벗이 말했다.

    “송욱이 누구냐고 묻질 않았나?”

    천천히 일어서서 벗에게 다가간 지원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속삭였다.

    “지금껏 송욱에 대해 얘기한 게 아니었나?”

    피식 웃으며 한숨을 내쉰 벗이 천천히 입을 뗐다.

    “난 자네가 사실을 감추면서 짐짓 해학을 일삼고 있다 여겼네만, 얘길 듣다 보니 정말 이상해서 하는 말일세.”

    “도대체 뭐가 이상하다는 건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지원을 쏘아보던 벗이 말했다.

    “자네가 쓴 글을 읽고 광통교에 찾아간 사람들이 있네. 송욱이 누군지 궁금해서 말일세.”

    “그런데?”

    “그런 자는 없었다네. 조탑타와 장덕홍은 실제 있었다더군. 그래서 말인데, 송욱은 자네가 꾸며낸 인물이거나, 그도 아니면 혹시 자네가 송욱 아닌가?”

    한걸음 뒤로 물러선 지원은 뭐라 말하려고 입술을 벌렸지만 끝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잠시 방바닥만 바라보던 벗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지원의 어깨를 천천히 다독였다.

    * 이 작품은 박지원의 ‘마장전’을 모티프로 창작됐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환상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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