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를 만나기 전에 나는 궁금한 것들을 노트에 메모했다. 그는 어떻게 소설가 ‘은희경’이 됐는가. 작가의 이름은 그의 작품세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는 변신을 꾀하고 싶을 때 이름을 바꾸기도 한다. 에밀 아자르와 로맹 가리는 같은 사람이지만 독자와 평단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은희경은 그런 일을 벌일 것 같지 않다. 그는 자신의 이름 안에서 충분히 자유롭고 아름답다.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하자 그는 뭘 새삼스럽게 인터뷰냐면서 농담을 던지듯이 말했다.
“그냥 쓰지 뭘 인터뷰는 해요. 다 알잖아요.”
나는 속으로 반문했다.
‘나는 정말 은희경을 모르겠어요.’
문학 언저리의 흔적
기억을 더듬어본다. 그래 아마 봄날이었을 것이다. 나는 평론하는 형의 소개로 은희경과 전경린을 동시에 만났다. 이제 막 등단한 신인작가와 만나는 자리였다. 점심을 먹고 차를 마셨다. 그때 평론가 형이 말했다.
“아마도 저 두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될 거야. ‘새의 선물’이 나오면 꼭 읽어봐라. 재미있어.”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됐다. 지난 10여 년 동안의 우리 문학을 이야기할 때 은희경은 독보적인 존재로 거론된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같은 찬란한 탄생이었고, 우리 문학의 축복이었다.
은희경과 인터뷰를 하고 나서 내가 쓰는 3층 작업실에서 창문을 열고 비가 내리는 거리를 본다. ‘비가 내리면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쓰려다 ‘비가 내릴 때만 조금 보고 싶은 사람이 있지’라고 고쳐 쓴다. 조금 전에 은희경을 만나고 왔기 때문이다.
일산의 한 커피숍에서 한 시간만 이야기하자고 했다가 두 시간, 세 시간 이야기가 이어졌다. 딱딱한 문학 이야기보다는 사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편안했다. 나는 그의 문학을 이루었던 것들 언저리를 주로 물어보았고, 그는 즐겁게 대답해주었다. 이 글은 아마도 은희경의 문학 언저리에 묻어 있는 흔적을 더듬어가는 어설픈 산문이 될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저녁식사를 하러 가는 길에 잠시 횡단보도에 멈춰서서 어떻게 소설을 쓰는지 물었다. 그가 말했다.
“저는 초고를 쓰고 많이 고치는 편이에요. 예를 들자면 ‘술이 취하면 그가 그립다.’ 그런데 그건 너무나 상투적이잖아요. 그래서 ‘술 취했을 때나 그가 그립다’고 고치면 조금 낫지요. 다른 소설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저는 초고는 절대 남에게 보여주지 않아요. 초고는 너무나 상투적이니까. 그걸 놓고 고치고 또 고치고 그래서 겨우 한 편 만들어내는 거죠.”
소설 쓸 때 퇴고를 많이 하냐는 우문에 대한 그의 현명한 답변이다. 퇴고 과정에서 상투적인 틀을 깨버리는 것이다. 세상은 상투적이지만, 결코 상투적인 생각으로는 읽어낼 수 없는 비의가 숨어 있다. 그래서 살 만한 것이고, 죽을 만한 것이다.
일필휘지로 한달음에 소설을 써내는 스타일의 작가가 있고, 보고 또 보고 나서야 겨우 한 편을 만들어내는 작가가 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기 전, 나는 그가 전자의 작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정반대였다.
이렇게 나는 그에 대해서 모른다. 아니 우리는 누구나 서로를 모른다. 그것이 친구든, 부부든, 연인이든 모두 자신의 틀 안에서 상대를 끌어들이는 상투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좋은 관계는 그런 진부함을 깨어버리고 진정한 상대를 발견할 때 온다. 부처의 깨달음같이 어려운 일이다.
그를 오랫동안 만나서 조금 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극히 사소한 것들이었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도 잘 알 수는 없다. 물론 이야기 서너 시간 나누고 그를 안다는 것도 오만일 것이다.
작가는 감독인 동시에 배우
저녁을 먹으려고, 가끔 다니던 제주도 음식점을 찾아갔는데 그 자리에 다른 가게가 들어서 있었다. 여기를 다녀간 것도 한참 전의 일이구나 싶었다. 세월은 빨랐다. 결국 가까운 해물탕집으로 갔다. 냄비 위로 낙지 한 마리가 스멀스멀 기어 다니다 뜨거운 국물에 빠져버린다. 식당 아주머니가 가위를 들고 와서는 마법을 부리듯이 산 것을 죽은 것으로 만들어 우리 앞에 내놓았다.
은희경에게는 스파게티나 와인이 어울리는데 내가 대접을 잘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음식 취향을 물었다. 그는 “음식을 가리지 않는데, 맛있는 건 다 좋고 맛없는 건 싫다”고 했다. 누군가 ‘어떤 소설을 좋아해요?’ 하고 물어본다면 이렇게 답변해도 되겠다. ‘좋은 소설이 좋아요. 맛있는 음식처럼.’
“저도 이제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전에는 단 둘이서 밥 잘 못 먹었어요. 여럿이 어울려서 먹었지.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도 잘 먹네요.”
그래, 그는 변하고 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그런데 그는 변화하지 않는 그 무엇을 부여잡고 있었다. 소설에 대한 열정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변하고 있는 것인가. 더 깊고 넓어지는 것인가.
은희경은 자신에게 비루하게 다가오는 삶을 세련되게 재단해서 독자의 마음에 쏙 드는 사이즈로 만들어낸다. 위선이나 위악, 냉소가 그의 작품 결에 배어 있지만, 그것은 인생을 바라보는 그만의 태도다. 가끔 나는 그가 배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작가는 영화로 비유하자면 감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배우이기도 하다. 일인다역의 배우. 작품 속 분신은 결코 다른 사람이 연기해낼 수 없는 작가 고유의 것이다.
그의 소설이 다루는 삶은 우리가 실용서나 자기개발서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삶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뭔가 배우려고 소설을 읽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좋은 소설은 우리에게 삶을 가르쳐준다.
어쩌다가 요즘 유행하는 처세술과 자기경영 우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요즘 독자의 손을 많이 타는 일본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일부러 하지 않았다. 소설은 소설일 뿐, 이제 나는 일본 소설이니 미국 소설이니 프랑스 소설이니 베트남 소설이니 하는 구분을 두지 않으련다. 이것도 어쩌면 어설픈 민족주의고 인종차별일 것이다.
“그건 직접정보인데, 그것의 한계는 너무나 분명해서, 이 복잡하고 미묘한 삶을 살아내려면 자기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좋은 소설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좋은 소설은 어쩌면 직접정보가 제공할 수 없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능력을 일깨워주기도 하니까요.”
차를 타고 가다 횡단보도에 서 있는 그를 두어 번 보았고, 아는 술집을 지나가다 동료 작가들과 어울려 즐겁게 웃고 있는 그를 보기도 했다. 한번은 가족과 백화점에 갔다가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적이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일산으로 이사를 온 것은 신춘문예에 당선된 1995년이다.
세상을 향한 다이어트 북
그의 신간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를 받아들고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오디오 북으로 제작된 ‘날씨와 생활’도 들어보았다. 표제작인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를 읽고서 이건 완전히 다이어트 교범이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물론 소설은 다이어트에 대한 산문이 아니다. 하지만 비만으로 고생하는 이 세상을 향한 다이어트 북이긴 하다.
우리는 아름답게 보여지길 원한다. 이 소설은 아름답게 보이고 싶으나 결코 그럴 수 없었던 한 뚱뚱하고 고독한 남자의 내면 고백이다. 그리고 독자는 은희경이라는 소설가 자신의 다이어트 체험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미리 일러주고, 잠시 그 소설의 세계로 들어가본다.
소설의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보티첼리의 걸작, 비너스의 탄생은 축복받지 못한 출생을 한 소설 속의 주인공 ‘나’의 비만과 대비된다. 비만증 환자인 나는 어쩌면 현대인의 결핍을 상징하는 거대한 비곗덩어리인지도 모른다.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왜 인간을 고독하게 하는가? 그리고 아름다움이 왜 나를 멸시하는가?
소설 제목은 릴케의 시 ‘두이노의 비가’의 한 구절 “우리가 그토록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는 이 구절에 대해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숭배하는 한 그것 때문에 멸시당하게 돼 있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고 했다.
때가 돼야 뜨문뜨문 찾아왔던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주인공은 서른다섯 살에 다이어트를 시작한다. 그는 아름다워지고 싶다. 비너스의 탄생을 꿈꾸는 그의 다이어트는 드디어 성공한다. 탄수화물, 단것으로 대표되는 맛있는 음식을 거부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것은 아버지라는 상대를 향한 성공적인 공격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죽는다.
아버지의 상가에 가서 주인공은 그동안 참았던 국밥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다. 몸이 원하는 것을 거부하지 못한 그는 다른 친척들이 뚱뚱하지 않은 자신을 알아보고, 한술 더 떠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을 듣고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아버지의 영정 앞으로 걸어가 당신이 돌아가기 전까지 알았던 뚱뚱한 내가 아닌 날렵하고 ‘아름다운’ 나를 보여주려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뚱뚱한 아이만을 기억하는지 아무런 표정이 없다. 단지 죽은 자여서일까. 아니면 인간은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을 보는 것일까. 아버지의 영정에 절을 하고 나서 갑작스럽게 밥알을 토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자신이 그토록 바라고 동경하던 아름다움이 자신을 멸시하고 있다고 느끼고서다.
모든 현대인은 비너스를 동경한다. 그것이 이 물질주의 세상에서 아름다움의 기준이다. 그러나 가만히 한번 생각해보자, 그 아름다움이 한번이라도 나를 격려하거나 축복한 적이 있나. 우리는 몸이 뚱뚱하든 빼빼 말랐든 모두 이 아름다움에게 멸시를 당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세상을 향한 은희경의 구토는 차라리 속 시원하다.
작품에 대한 느낌은 이야기하지 않고, 어떻게 다이어트에 대해 이렇게 많은 정보를 얻었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미국에 있는 딸아이를 위해 온 가족이 다이어트한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남편과 자신만 성공하고 딸아이는 실패했다면서 웃었다. 그 끝에 이 소설은 몸과 문명의 딜레마를 다룬 것이라고 짧게 끊어 말했다.
영리한 척하지만 어수룩한 소녀
나는 작가의 어린 시절을 반드시 물어보고 꼭 쓴다. 그것은 이 연재의 공통분모다. 내가 작가의 어린 시절을 궁금해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그들의 작품세계로 들어가는 열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론가의 안목으로 전문용어를 통해 그의 작품을 설명할 필요는 없다. 작품은 라디오를 켜면 그저 들려오는 음악처럼 독자에게 먼저 스며야 한다.
먼저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우선 나는 그가 ‘새의 선물’에 나오는 아이와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너무 일찍 삶의 비의를 보아버린 그런 영악한 소녀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그는 차라리 ‘아름다움을 경멸한다’라는 작품집에 수록된 소설 ‘날씨와 생활’에 나오는 소녀처럼 영리한 척하지만 어수룩한 소녀였다고 했다. 그럼 평범했다는 이야기인데 글쎄?
그의 고향이 배경이 됐다고 믿어지는 소설 ‘비밀과 거짓말’을 보면 그는 비교적 자세하게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지난 가을 어느 비 오는 날 고향에 갔다. 중학교 때 떠나온 뒤로 서너 번밖에 가지 않았다가, 아버지가 선산에 묻히신 요즘 들어 가끔씩 들르는 곳이다. 여느 때처럼 읍내를 그냥 지나치려다 옛집 근처에 이르러 불현듯 차를 세우고 말았다. 전혀 알아볼 수 없게 달라진 동네의 어느 집 아래 비를 그으며 아무 생각 없이 문패를 보는데, 순간 거짓말처럼 옛 주소가 떠올랐다. 대낮인데도 아저씨가 환히 불을 밝혀놓고 김을 내뿜으며 다림질에 열중한 세탁소에 먼저 들어갔다. 그리고 철물점과 동장네 흑염소집을 거쳐, 옛집 주소지에 가보니 성인용품점이 나왔다. 빗줄기가 굵어졌다. 길을 건너 당산나무를 찾아보았는데 사방이 건물에 꽉 막혀서 가지를 오므리고 있었다. 이런 것은 소설에 쓰지 않았다.”
그가 소설에 쓰지 않은 것들은 앞으로 씌어질 것들이 아닐까?
고향에 대해 그는 소설에서 ‘어느 지역에서 자랐는가가 아니라 어떤 신분으로 자랐는가가 그 사람을 결정한다’고 쓴 적이 있다. 자신도 모르게 향기처럼 새어 나오는 것이 그의 소설일 수도 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1960년대의 고창읍이다. 시골에서 자란 소녀인데, 그에게는 그런 냄새가 배어 있지 않다. 우선 고창이라는 마을 자체가 여느 마을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시골 속의 도시랄까? 부모님도 당시로서는 상식적인 분들이 아니었다. 자식이 많은 것이 자랑이던 시절에 가족계획으로 1남2녀를 낳고 잘 돌보았다.
그는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자랐다. 그때는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는 일이 흔하지 않았다. 그러한 호칭에서도 집안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은희경의 ‘아빠’는 은희경에게 전폭적인 신뢰와 사랑을 준 것 같았다.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민주적인 아빠, 멋쟁이 아빠, 그래서 가끔씩 어머니의 속을 썩이기도 하는 아빠다. 지금도 아빠가 오토바이를 타던 때를 떠올린다. 그리고 아이의 의견을 물어보는 민주적인 환경에서 세계 명작동화를 비롯한 많은 책을 읽어 문화적으로 풍부한 유년 시절을 보낸다. 어머니도 보통 어머니는 아니었다고 했다. 집안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슬픈 왕따의 기억
서울에서 사온 예쁜 구두와 원피스를 입고, 귀엽고 예쁜 아이는 자란다. 질투하는 동네 친구들은 흙을 던지고 구두를 밟기도 했단다. 일종의 ‘왕따’를 당한 것이다. 그러나 은희경의 낙천성이랄까, 아니면 영리함이랄까, 크게 상처 받지는 않은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소설을 쓰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따돌림당해 고통 받는 주인공이 자주 등장해 ‘실은 그때 상처가 컸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상처는 감출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지울 수는 없는 것이다. 한번은 반 아이들과 일주일 동안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못한 일이 있었다며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말했다.
“속상하다기보다는, 그냥 슬펐다.”
예쁜 소녀 은희경은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아이들이 놀아주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잘 안 놀아준다고 부모님께 이야기해도, 그건 네가 너무 똑똑하고 예쁘니까 그런 것이라고 슬쩍 넘겨버린다. 결국 자신이 해결해야 했다.
여기에 그의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가 있다. ‘네가 알아서 해’는 앞으로 살아가는 데 중요한 힘이 된다. 그는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간다. 하지만 이 시절에 뭔가에 몰두한 적은 없다고 했다. 어떤 일이든 적당히 잘했다는 정도로 표현했다. 하지만 아이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잘해야 했고, 그런 자신에게는 항상 불안했다. 은희경은 인간관계에 대해 두려워하고 서투른 아이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자 그의 이미지가 선을 그으면서 형성된다. 굳이 해리포터 시리즈로 자신의 삶을 바꾼 조앤 롤랭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작가에게 시련은, 아니 인간에게 잔혹한 운명의 시련은 이미 예정된 코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에게도 분명 어떤 시련기가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사춘기 때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한다. 이것은 우리네 일일 드라마의 공식이기도 하다. 이런 평범함 속에서 그는 비범하게 자란다. 아버지는 건축사무소 사장에서 지방 공사 현장의 십장으로 삶의 굴곡을 겪는다.
이러한 삶을 표현하는 가장 문학적인 단어는 ‘야반도주’일 것이다. 필자의 경우에는 아버지가 당시 안정적인 직장이던 은행에서 나와 사업을 하다 실패하는 바람에 고등학교 때 야반도주를 한 적이 있다. 야반도주는 인간의 몸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 일과를 끝내고 편안하게 쉬거나 잠을 자야 할 몸이, 가장 긴장된 스트레스와 불안감으로 떨면서 움직인다.
이때의 기억은 당시 긴장했던 근육의 결에 새겨진다. 정신은 이러한 근육의 결에 따라 움직인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당시의 정황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현관에 떨어진 신발 한 짝까지도, 문턱에 걸려 멍이 들었던 발가락의 아픔까지도. 하지만 그의 야반도주는 차라리 동화적이다.
“아마 중2 때였을 거예요. 식구들이 다 가야 되는데, 나는 못 가겠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다음날 성당에서 무용발표도 해야 하고, 적어도 친하게 지낸 친구에게 작별인사는 해야 했거든요. 아버지와 상의했더니 그러라고 했어요. 그래서 식구들은 먼저 떠나고 저는 그 다음날 무용도 하고 친구와 작별인사하고 나서 버스를 타고 혼자 갔어요.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현실의 세계와 동화의 세계가 혼재된다. 빚쟁이, 낯익은 친척 어른들의 독촉, 그야말로 어린 소녀에게는 참혹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그는 유니크하게 받아들이고, 동화적인 소녀의 꿈을 잃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서 느낀 강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이미지는 이러한 소녀 시절을 통과하고 나서 형성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소설가는 자신의 몸속에 있는 것들을 꺼내놓는 사람들이다. 그가 비록 23세기의 세계를 그린다 하더라도 20세기를 살고 있다면 20세기의 몸속에 있는 피와 땀인 잉크를 찍어 쓴 것이다.
몇천원 남은 통장
지금도 소설을 쓰다보면 이때의 경험이 손가락 끝에서 묻어나온다. 최근의 소설 ‘날씨와 생활’에서 소녀가 월부 책장수에게 보여준 불안감이 그것일까? 그러나 “당신은 참으로 강한 사람 같다”는 내 말에 그는 예쁘고 환한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아니에요. 사소한 것에 상처 받는 그런 여자이지요. 하지만 어떤 큰 문제가 닥치면 의외로 차분하게 그 상황을 주시하는 것 같기는 해요. 작은 일에는 속 좁고 예민하면서 큰일에는 오히려 대범해지는 거죠.”
작가의 말 이외에는 자신에 대한 글이나 산문을 잘 쓰는 않는 그는 문예지의 한 특집에 자전적인 소설을 한 편 썼다. ‘서정시대’다. 이 소설은 1997년 현장 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이었고, 그의 성장기를 엿볼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그에게 서정시대는 결혼을 기점으로 끝난다. 그는 결혼이 자신을 진정으로 변화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내 인생에서 결혼 전까지가 서정시대였던 것 같아요. 여자, 아니 남자들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데 결혼하면서부터 진정한 의미에서 독립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결혼과 출산 이 두 가지가 생의 전환점이 됐던 것 같습니다. 그런 것 있지요. ‘열심히, 성실히 하면 성공한다.’ 하지만 살다보면 어디 그런가요. 그런 상식적인 것들이 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을 보는 안목 같은 것들이 생기는 것 같아요. 상식의 틀을 깨는 것 말이죠.”
10만원과 100만원을 잘 구분하지 못했던 그는 결혼하고 나서 변화했다. 결혼하고 나서 3년 만에 애 둘을 낳고 마이 홈을 마련한 것이다. 서울 둔촌동에 전세를 얻으러 갔다가, 융자를 받아서 사는 것이 어떻겠냐는 부동산 업자의 제의에 고생할 각오하고 많은 융자를 끼고 집을 샀다.
‘이자를 낼 수 있을까’ 하는 남편의 걱정은 그의 걱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 집을 사버렸다. 이런 자신감은 역설적으로 돈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자신감이다. 돈이 두려워서 돈을 버는 것이다. 은희경은 신혼 때에 부부가 월급의 반 이상을 저축하는 삶을 살았다.
결혼하고 나서도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다. 경제적으로도 힘든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소녀 시절부터 은희경 특유의 배짱이랄까, 동화적인 상상력 같은 행동이 그를 버티게 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갑자기 시댁 식구들이 예고도 없이 집에 찾아온다. 마침 돈이 없다. 비는 내리고, 아이는 울고, 다른 여자 같았으면 비극적인 생각을 했을 일이다. 그러나 은희경은 달랐다. 아이를 조용히 재우고, 통장에 있는 몇천원을 찾기 위해 우산을 쓰고 은행까지 걸어가 돈을 찾아서, 그 돈으로 가게에서 주스를 사 가지고 와서 대접해서 보낸다.
이 이야기는 내가 “은희경씨는 정말 부자지요. 집도 여러 채 있고, 재테크도 잘하지요?”라고 농담으로 던진 말에 즉각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어쩌면 많은 독자도 그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문인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을 정도다. 그의 세련된 이미지 때문이다. 은희경은 명품을 들고 다닐 것 같은 그런 이미지다. 그의 모습에서는 어느 한구석 궁상이 자리잡을 틈이 없어 보인다.
이미 ‘이상문학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 경력과 베스트셀러를 꾸준히 냈으니 다들 그렇게 짐작하지만, 그 역시 가난한 작가의 반열에서 그리 멀리 벗어나 있지는 않다. 부부가 맞벌이를 해서 누릴 것은 조금 누리는 그런 것일 뿐이다.
“글쓰기가 무서워요”
그는 오랫동안 생각하고 집중적으로 글을 쓴다. 우리의 일상을 자세히 관찰하고 충분히 느끼고, 그 생각을 한참 자신만의 공간에 놓고 치대고, 밟고, 짓이기고, 어루만지다가 드디어 펜을 잡는 것이다. 이렇듯 지난한 과정은 독자로 하여금 그의 소설을 쉽게 읽을 수 있게 한다. 예술가의 고통은 감상자의 즐거움이다. 감상자는 어쩌면 예술가의 고통을 즐기는 잔혹한 사람들인지 모른다.
“학교 졸업하고 뭐 되는 일이 없었어요. 직장운도 없었고, 결혼생활도 예상과는 너무 달라 무척 외로웠죠. 하지만 저는 주어진 상황을 탓하기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내 방식대로 해석을 하지요. 그래, 걱정과 불안들아 한번 내게 와보라. 내가 처리해주마. 내 손에는 펜이 있고, 그 펜으로 삶을 다룹니다. 소설가가 되고 나니까 모든 것이 더 좋아진 것 같아요.”
돈에 시달리는 생활을 하다가 독자의 사랑으로 어느 정도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을 때, 가장 즐거웠던 것은 돈 걱정을 안 해도 되는 것이었다면서 활짝 웃었다. 돈 걱정 해본 사람은 그의 이러한 단순한 말에 얼마나 공감할 것인가. 나도 빨리 이런 경험 좀 해보고 싶다고 말했고, 우린 웃었다.
사랑이 없다면 작품도 없다. 이 말이 과언일까. 사랑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무엇일까.
“한때는 유일하고 영원한 사랑이 결혼으로 이뤄지는 것이라고 믿었는데, 결혼은 아마도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 같기도 해요. 그렇다고 다시 할 수도 없지요. 결국 사람들은 순간을 살지요. 결혼이 됐건 재혼이 됐건 자기 자신의 내면이 단단하지 않으면 실패의 연속일 거예요. 제 소설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사랑이 불가능한 줄 알지만 끊임없이 원하는 것이 인간의 일이다.’ 이 정도로 정리하죠.”
그에게는 마흔이 넘었는데도 결혼을 안 하고 있는 동생이 있다. 동생이 너무 이상적인 남자를 찾는 것 같아 이런 농담을 했다고 했다.
“우선 결혼하고, 그 사람은 결혼한 다음에 찾아.”
이 말은 우리가 사랑에 대한 환상을 지나치게 크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뜻이라고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은희경은 의외로 소심하다. 겁이 많고 글을 두려워한다. 그것이 무서워 피하는 자세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건방지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을 알면 누구나 이해하리라.
“저도 작가인데 글쓰기가 왜 이렇게 무서워요? 청탁이 오면 더럭 겁부터 나요. 무슨 작가가 이런지 몰라요. 그래서 그런 걸 감추려고 소설 속에서 능청을 부리는지도 모르지요.”
‘새의 선물’이라는 작품은 그야말로 그의 인생에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수상작을 발표할 때마다 독자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수상자는 한국 문학에 주요한 작가로 거듭나는 문학동네 소설상의 1회 수상작이고, 1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꾸준히 독자의 마음에 다가가는 스테디셀러다. 이 소설과 요즘에 낸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 은희경은 이렇게 말했다.
“‘새의 선물’에서 세상을 보이는 대로 보지 않는 태도로 소설을 썼다면,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에서는 삶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 것 같아요.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현실에 대해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소설 쓰기가 직업이어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그는 낯선 경험을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 ‘일단 경험하고 보자’가 그의 삶의 태도다. 요즘에는 육군 문화 자문위원도 하고 있다고 한다. 어떤 제의가 오면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자명하다. 그는 자신이 잘 모르는 세계에 자극을 받는다.
“누군가가 잘못했다고 했을 때 그 행위를 보고 내가 옳고 그 사람이 틀렸다고 생각하기보다. ‘그 사람에게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라는 식으로 마음의 폭을 넓히는 겁니다.”
은희경은 깨어 있는 사람이다. 어찌 보면 깍쟁이 같아 보이는 세련된 이미지에서 점점 생을 받아들이는 치마폭을 넓히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편협한 세계에서 벗어나 삶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려는 노력인 것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 역시 변화하고 있다. 예전에는 누군가가 이야기해 주기를 기다렸다면, 이제는 먼저 전화를 걸어서 말을 건네는 것이다. 이것은 숨겨왔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행위다.
신중해진 걸음걸이
그는 오로지 소설만을 쓴 작가다. 다른 직업에 비해 고독한 일이기도 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동료 작가들을 떠올리고, 자신보다 더 고독한 어떤 존재를 떠올린다고 했다.
“그래, 누군가도 나처럼 이렇게 살 거야. 아니면 더 지독하게.”
그는 “작가는 세상에 속아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세상에 살짝 속아준다는 말은 경직된 엄숙주의에 대한 은희경 식의 표현이다. 일종의 유쾌한 반란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런 경력과 명성을 가지고 있는 작가 중에서 유일하게 산문집을 내지 않은 작가이기도 하다. 이유를 물어보니 단순하게 쓰기가 힘들어 그런다고 했다. 뭔가 미진했지만 그냥 넘어간다. 대신에 그는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전 소설가로 사는 게 좋아요. 이것만 잘하면 되니까 말이죠. 그런데 최근에는 산문을 쓰기로 했어요. 이제 좀 다른 장르의 글을 쓰는 법도 알아야 겠다는 생각을 한 겁니다. 이제는 여러 가지 상황이 바뀐 것 같아요. 전 이제 문학소녀가 아니라, 일로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여러 장르의 글을 소화해내는 것도 능력이죠.”
그는 최근 시사주간지에 ‘은희경의 유쾌한 편견’이라는 타이틀로 산문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1회 제목이 재미있다. ‘이순재는 되고, 신성일은 안되는 이유’다.
‘야동순재’로 이순재는 야동을 보는데도 사람들은 좋아하고, 신성일은 왜 젊은 여자 이야기만 해도 난리를 부리는 것인가. 그것에 대해 그는 발랄한 산문을 쓴다. 그는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
그의 집 앞에서 광화문으로 가는 버스가 있기에 약속을 주로 광화문으로 잡는다. 버스 안에서 책을 읽는 것보다는 지나가는 사람과 풍경을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엿듣기도 한다. 일종의 잡념인데, 이것들이 은희경의 머리와 마음속에서 치고받다가 어떤 과정을 거쳐 정제되고 한 편의 소설이 나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거듭 상식적인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상식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얼마나 절차탁마하는지는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는 요즘 감사하는 일이 많다고 했다. 후배들과 친구들이 열어준 재미난 출판기념회도 했다고 자랑했다. 홍대 근처에서 모여 풍선을 매달아 놓고 작은 잔치를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소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로 퀴즈 쇼까지 했다고 한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어서 조금 어색했지만 무척 재미있었다고 한다.
평론가 신형준씨는 은희경의 이번 책을 읽고 나서 이렇게 썼다.
“초기 은희경의 소설들은 면도칼 같아서 읽는 중에 여러 번 당신을 긋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것은 기꺼이 즐길 만한 통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녀의 소설은 칼이 아닌 척하는 칼이어서 당신은 베이고 있는 줄도 모르는 채로 깊이 베이게 될 것이다. 쉽게 알아보기 힘든 어떤 힘이 밀고 들어와, 조용히 빠져나가고, 마침내 피 흐를 때, 비로소 당신은 그것이 칼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독창적인 소설 미학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하나. 이 소설의 장르는 그래서 그냥 ‘은희경’이다.”
그의 소설은 이 ‘은희경’을 보여준다. 나는 사실 그의 이번 소설이 칼 같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은희경의 걸음걸이를 떠올렸다.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걸음걸이는 이번 소설집에서 천천히 가면서 신중했다. 그 신중함에 나는 두려웠다. 빨리 달려가지 않아, 독자의 반응이 어쩔지 궁금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 번 더 삶에 대해 생각하는 그의 이야기를 독자가 금방 받아들일 수 있을지, 아니 은희경의 열광적인 팬이 아닌 그냥 독자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그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은희경의 매력
아마도 이 인터뷰를 마지막으로 그는 다른 작품을 쓰기 위해 떠날 것이다. 원주에 있는 토지문학관에서 그는 중편 분량의 소설을 쓸 것이다.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도 여러 군데서 전화가 왔다. 그는 다른 약속이 있어 스케줄을 잡지 못했다. 일본에 가야 한다는 말도 들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이상하게 이야기를 하고 나니 다른 때와는 달리 그와 헤어지기가 싫었다. 소년처럼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의 소녀 시절을 들으면서도 나는 은희경을 몰래 훔쳐보는 시골 아이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서울에서 사온 반짝거리는 구두를 신고, 나비 같은 원피스를 입은 은희경, 황순원 선생의 ‘소나기’에 나오는 소녀 같은 아이. 아, 이것이 은희경의 매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강한 작가다. 이 매력이 독자에게도 그대로 갈 것이다. 그러나 해는 지고 있다.
“해질녘이 되면 불안감이 엄습하곤 해요. 어릴 적에는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죠.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지는 그런 시간이죠.”
이제 은희경도 나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그러나 보고 싶은 사람이 가장 강렬하게 불타는 석양 속에 타오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일산은 석양이 아름다운 도시다. 그를 보내고 나는 자동차로 자유로를 달렸다. 일산의 저녁 해는 크고 붉다.
|
“보이는 것, 냄새, 감촉, 맛, 듣는 것, 지성…. 나는 내 연장들을 거둔다. 밤이 됐고, 하루의 일은 끝났다. 나는 두더지처럼 내 집으로 땅으로 돌아간다. 지쳤거나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피곤하지 않다. 하지만 날이 저물었다.…”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렇게 자서전의 문을 열었다.
자기 삶의 문을 닫는 그 순간에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책의 처음을 열었듯이, 은희경은 날이 저물어 집에 돌아가서 또 다른 신생의 날개를 펼칠 것이다. 그의 소설은 바로 그 자신이다. 우리는 그의 이번 작품집을 통해서 아름다운 ‘선물’을 받는다. 기쁘고 신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