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선우의 시는 여린 듯 강렬하고 수줍은 듯 관능적이다. 그녀의 시에서 절로 배어나오는 물기는 어둡고 따뜻한 자궁 속에서 출렁거리는 양수에 가깝다. 그녀의 여성성이 발산하는 새로운 빛은 이 양수의 풍요로움에서 비롯된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그랬다. 어디 가는 게 싫다. 사실은 방에 쇠창살을 박아놓고 스스로를 감금하고 싶은 심정이다. 살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자꾸만 나가서 놀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안중근 의사의 자취를 찾아가는 답사여행이기에 일에 가깝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급한 일들이 밀려 있는데도 용기를 냈다.
마음에 맺힌 시들
막상 하얼빈행 비행기를 타자 마음은 무거웠지만, 지금 아니면 또 언제 가보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딜 가더라도 짐을 들기 싫어하는 내가 김선우 시집을 넣은 것은 그녀의 시가 좋아졌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를 읽으면서 시를 섬세하게 읽은 지가 오래됐구나 싶었다. 특히 후배 시인들의 시는 어느 사이엔가 내 관심에서 멀어졌다. 언제부터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그런 내 마음에 김선우의 시가 몇 편 쏙쏙 들어왔다.
토담 아래 비석치기 할라치면
악아, 놀던 돌은 제자리에 두거라
남새밭 매던 할머니
원추리 꽃 노랗게 고왔더랬습니다.
뜨건 개숫물 함부로 버리면
땅속 미물들이 죽는단다
뒤안길 돌던 하얀 가르마
햇귀 곱게 남실거렸구요.
-시 ‘할머니의 뜰’ 중에서
처음엔 시를 눈으로만 읽다가 어느 순간부터 마음에 맺힌 시들을 조용히 소리 내어 읽었다. 그녀의 시를 소리 내어 읽으면 기분이 좋아져 흥얼거리기도 한다. 나는 답사를 하는 동안에 혹시 지루한 시간이 생긴다면 그녀의 첫 시집을 소리 내어 읽어볼 생각이었다.
하얼빈에 도착해서는 그녀의 시집을 읽지 못했다. 하루 이틀이 바쁘고 고단했다. 하얼빈 일정을 끝내고 다롄으로 가는 밤 열차 안에서야 나는 그녀의 시집을 꺼내들었다. 밤 9시에 기차를 타서 잠이 들었고, 새벽 2시쯤 깨어 열차 침대머리 맡에 있는 작은 등을 밝혔다.
차창으로 보이는 밖은 어두웠다. 차창은 거울이 되어 내 모습을 비춰줬다. 잠시 내 모습을 보았다. 지금 우리는 만주 벌판을 지나고 있다. 내 옆에서 잠자던 일행이 말했다. 만주 벌판, 저기 어디쯤에서 ‘개장수’들이 말을 타고 달렸을 것이다. 이 기찻길로 안중근 의사가 뤼순으로 압송됐다. 그는 창밖을 조금 보다가 문을 열고 담배를 피우겠다면서 나갔다. 나는 잠시 안중근 의사 생각을 하다가 김선우의 시집을 아무 생각 없이 펼쳐들었다.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나는 가끔 한다고 했습니다.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벌 나비를 생각해야만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얼레지…
- 시 ‘얼레지’ 중에서
내가 좋아하지 않는 시다. 이 시를 읽으면 나는 사라지고 시 속에 나오는 벌 나비라는 남성 혹은 곤충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는 내가 좋아하는 시다. 왜냐하면 나의 옛 애인을 생각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자신과 추억과 직접 관련이 있는 시를 읽다가 그 추억이 떠오르면, 그 시는 읽는 이에게 위안이 된다.
나는 한때 시를 쓰면 성급하게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 읽어주곤 했다. 한밤중이었다. 수화기를 통해 천천히 소리 내어 읽어주면 간혹 그녀는 탄식 어린 한숨을 내뱉곤 했다. 그녀는 아마도 딱히 내 시가 좋아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연인이 시를 읽어주는 그 목소리가 좋아서였을 것이다. 그 순간 우리 둘 사이에는 작은 우주가 탄생한다. 둥글고 원만하고 적당히 어두운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소리를 내면 공명이 일어나 멀리 퍼져나간다. 그때 연인의 목소리는 마르크스나 레닌의 문장일지라도 달콤하게 들리게 마련이다. 간혹 그녀의 탄식 소리에 젊은 나는 저절로 발기됐다.
나는 ‘물방울의 기억’이라는 시를 쓰던 날, 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읽어준 적이 있다. 그녀가 내 시를 들으면서 짧게 신음소리를 내자 나는 벌 나비처럼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그녀의 꽃봉오리는 활짝 열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번은 시를 읽어주다가 방문을 열어놓고 기다리는 그녀의 방으로 달려간 적도 있다. 20년이나 지난 일이다. 아니, 20년이 더 지난 일이다.
만주 벌판을 지나는 중국 열차 침대칸에서 누운 자세로 시집을 들고 낮게 소리 내어 읽었다. 그리고 시집을 덮고 뒤표지를 보았다. ‘시힘’ 동인이자 그녀의 좋은 선배인 나희덕 시인이 뒷말을 썼다. 김선우의 시를 잘 보고 쓴 시인의 직관이 돋보이는 글이다.
‘촉촉하게 젖은 꽃잎을 연상시키는 김선우의 시는 여린 듯 강렬하고 수줍은 듯 관능적이다. 그녀의 시에서 저절로 배어나오는 물기란, 젊음의 소산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어둡고 따뜻한 자궁 속에 출렁거리고 있는 양수에 가깝다. 그녀의 여성성이 발산하는 새로운 빛은 이 양수의 풍요로움에서 비롯된다. 그 속에 숨쉬고 있는 너무도 많은 누이와 어머니와 노파들은 각기 태아이면서 동시에 산모이고 산파이기도 하다. 그 둥근 생명들을 산란하기 위해 그녀는 지금 운주(雲住)에 누워 있다. 곧 물의 살을 찢고 눈부신 가시연꽃이 필 것이다.’
운주사 가시연꽃
희귀하게도 식물 중에서 1속1종인 가시연꽃, 크게는 연꽃잎이 2m가 넘기도 한다. 언젠가 전라도 어디에서 가시연꽃을 본 적이 있다. 그 가시연꽃은 부처가 이 세상에 와 잠시 앉았다 간 자리처럼 넓고 컸다. 각성한 부처의 마음자리는 그 크기와 형태를 짐작할 수 없는 것이지만 거대한 가시연꽃잎을 보면, 그 자리에서 피어 오른 연꽃을 보면 인간의 각성이란 저런 것이지 싶을 때가 있다. 연꽃잎 중앙으로 피어오른 가시연꽃은 관능적이면서도 초월적이다. 김선우는 저런 시를 쓰는구나 싶다. 나는 아주 잠시 그 연꽃잎에 맺히는 물방울이 됐다가 떨어졌다. 김선우는 스물아홉이라는 나이에 가시연꽃을 찾아 운주로 떠난 모양이다.
가시연꽃을 찾아 단 한 번도 가시연꽃 피운 적 없는 운주사에 가네 참혹한 얼굴로 나를 맞는 불두, 오늘 나는 스물아홉 살.
이십사만칠천여 시간이 나를 통과해갔지만 나의 시간은 늙은 별에 닿지 못하고 내 마음은 무르팍을 향해 종종 사기를 치네 엎어져도 무르팍이 깨지지 않는 무서운 날들이 만가도 없이 흘러가네
운주에 올라, 오를수록 깊어지는 골짝, 꿈꾸는 와불을 보네 오늘 나는 열아홉살,
잘못 울린 닭 울음에 서둘러 승천해버린, 석공의 정과 망치 티끌로 흘어졌네 거기 일어나 앉지 못하고 와불로 누운 남녀가 있어 출렁, 남도 땅에 동해 봄 바다 물 밀려오네
참 따뜻하구나, 물속에 잠겨 곧 피가 돌겠구나
걷지 못하는 부처님 귀에 대고 속삭였네 달리다쿰, 달리다쿰! 누가 내 귀에 대고 소녀여 일어나라, 일어나라! 하였지만
-시 ‘雲住에 눕다’ 중에서
시 몇 편을 읽고 시집을 펴서 얼굴을 가리고 다시 잠을 청했다. 그날 나에게 만주 벌판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어둠뿐이었다. 그 터널과 같은 어둠 속에서 야간열차는 나를 한없이 먼 곳으로 데리고 가는 공간이었다. 잠결에 덜거덩거리는 기차 바퀴 소리는 ‘일어나라, 일어나라’라는 환청으로 들리기도 했다. 만주 벌판을 달리는 뚜거덕거리는 말 발자국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선잠이 들자 침대가 관처럼 느껴지면서 몸이 무거워졌다. 이대로 어디론가 갔으면 싶었다. 이대로 그냥 어디론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그 어디론가… 하다가 까마득히 잠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머물고 싶지 떠나고 싶지 않았다.
꾀꼬리버섯
중국 여행을 마치고 서울에 도착해서 하루 쉬고, 토요일 오전 11시30분에 망원동 소재 커피하우스 ‘감’에서 그녀를 만났다. 커피 향이 좋은 집이다. 젊은 주인이 갓 볶아낸 커피는 망원동 지리에 어두워 주차할 공간을 찾아 헤매다 짜증난 기분을 환기시켰다. 그녀는 조금 늦게 나타났다. 약속시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활짝 웃었다. 이미 몇 잔의 커피를 마셔 몸에 스며든 카페인 탓인지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사람들에게서 그녀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인지, 악수를 하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첫인상이 무척 선하고 눈망울이 크고 맑았다. 우선 지금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왠지 한군데 머물러 있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금은 용인에 살고 있어요. 아는 선배가 잠시 비운 집에 머물고 있지요. 그 선배가 돌아오면 다시 춘천이나 원주 같은 곳으로 가려고요.”
그녀는 작은 도시들을 좋아한다. 짐작한 대로 역시 유목민이었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사는 게 좋다면서 자기 집을 갖는다는 게 부담스럽다고 했다. 그럼 당연히 짐도 적으리라 짐작해본다. 유목민들이 철마다 거처를 옮기기 위해 집을 만들지 않듯, 스님들이 바랑 하나 메고 운수납자의 길을 떠나듯, 그녀 역시 작은 가방 하나에 자기 짐을 다 꾸릴지도 모를 일이다.
길 위에서 시를 노래하는 시인들이 있다. 세상의 모든 성자는 길 위에서 죽었다. 그들에게 집은 잠시 머물다 가는 방일 뿐이다. 그녀의 첫 번째 방인 유년시절이 궁금했다. 시인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은 강원도 강릉이다. 산과 바다, 달과 물방울이 그곳에 있었다. 그녀의 음성이 물방울처럼 톡톡 터지면서 좁은 커피하우스가 향기로워진다. 그래 그녀의 모습은 새벽이슬에 젖은 꽃잎 같다.
“산과 바다를 맨발로 다니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아이들과 깨 벗고(옷 벗고) 마구 쏘다녔지요.”
태어난 곳은 강릉 외곽에 있는 ‘당두마을’이다. 엄마가 시집올 때 정말 숟가락, 젓가락밖에 없었던 가난하고 소외된 마을이었다. 하지만 어린 선우에게는 어머니의 자궁처럼 충만한 공간이었다. 당두집 초가 지붕이 조금씩 함석집 지붕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성장한다.
산에서 놀다가 자전거를 타고 가까운 바다로 나가 놀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날씨를 살피면서 비가 올지 안 올지를 예감했고, 비가 온 다음날에는 산에 올라가 버섯을 따서 먹기도 했다. 꾀꼬리버섯을 따서 먹었다고 하는데 그 버섯이 어떤 버섯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사전을 찾아보니 미국과 유럽에서 널리 유통되는 유명한 버섯이었다. 그 꾀꼬리버섯을 어린 시절에 칼국수에 넣어 먹었는데 맛있다고 일러줬다.
관능적인 시어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어떤 소설가는 콘크리트 벽에서 온갖 환경 호르몬에 시달리면서 학원으로만 전전하는 요즘 아이들에게 삶의 내성이 생길지 걱정스럽다고 했다. 사람으로 태어나 뼈가 굵어지고 살이 올라오는 그 시기에 흙이나 바다에서 풍겨오는 훅한 냄새를 맡으면서, 산에 올라가 비 온 다음날 고개를 내민 꾀꼬리버섯을 뜯어 칼국수에 넣어 먹으면서, 사람은 이렇게 자라야 되는 거 아닌가. 산과 바다와 달과 물방울 속에서 말이다.
지금 우리들은 닭고기, 쇠고기 통조림처럼 자라고 있다. 하루 종일 닭장 속에 갇혀서 밤에도 낮인 줄 알고 백열등 아래에서 부지런히 사료만 먹는 식용 닭들. 마당에 돌아다니는 벌레 한번 쪼아보지 못하고 초고속으로 자란 닭들은 다리도 날개도 못 쓰고 바로 고기가 되어버린다. 쇠고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 고기를 먹는다. 병든 쇠고기, 닭고기를 먹고 몸이 병드는 건 둘째 문제인지도 모른다.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의 영혼이 그렇게 사육당하고,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영혼이 병든 고깃덩어리가 되는 세상에서 시인은 백과사전에나 나오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시국이 이래서인지 나는 김선우가 조근조근 이어가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었다. 그곳은 우리가 서둘러 돌아가야 할 곳이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초등학교 2학년 무렵, 당두집에서 강릉 시내에 조금 더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갔어요. 이사하던 날, 트럭 하나가 앞장을 서고, 엄마는 함지박을 이고 이불을 지고, 우리 자매들은 집안의 작은 물건 하나씩 들고 또랑또랑 엄마 뒤를 따랐지요. 이사를 가서 보니 기와집이었어요. 마당에 후박나무와 석류나무가 있었어요. 그저 평범한 작은 기와집이었는데, 엄마는 무척 행복해하셨지요. 하지만 제겐 강릉이라는 도시, 즉 시내와는 가까워졌지만 산에서는 멀어졌다는 박탈감이 생겼어요.”
당두마을에서 교동마을로 이사를 가는 풍경이다. 김선우는 이 집을 ‘교동집’이라고 불렀다. 교동집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있었다. 초딩 시절부터 고딩 시절까지 지냈으니 교동집은 시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김선우 시에 나오는 엄마, 할머니, 여인들은 이 교동집에 있는 후박나무, 석류나무와 같은 존재다.
대담하고 관능적인 시어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녀가 고교시절부터는 조금 자유분방한 문학소녀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슬쩍 문학을 일찍 시작했느냐고 물었다. 나와 내 친구들은 고교시절에 조금 조숙하게 놀았으니까, 그리고 그 시절의 문학소녀들도 조금은 그러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학교와 집에 선을 그어놓고 그 선을 넘어가지 않는 모범생이었다.
집 근처 남자고등학교 앞 향교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었다. 온통 남학생들의 무거운 시선을 받으면서 그 길을 지나가곤 했는데, 일요일처럼 학생들이 없는 날이면 그 은행나무를 보러갔다. 그리고 역시 자전거를 타고 가서 본 경포 난설헌 생가와 경포 바다 그리고 안목 바다를 이야기했다. 안목 바다는 꼭 한번 가보세요 라고. 안목 바다에 간다면 오랜만에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들까, 싶었다. 그런 마음이 든다고 시가 나오는 건 아니지만.
그녀는 문득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은 자신의 열렬한 지지자인 아버지는 그 시절엔 김선우가 문학을 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범생으로 지낸 고등학교 시절에 유일한 상처가 있어요.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거지요. 아빠가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셨는데, 우리 일곱 아이를 데리고 힘드셨을 거예요. 지금에야 이해되지만 학비 때문에 국립대 사범대학 아니면 진학불가라는 아빠 말씀에 처음으로 제가 반기를 들었어요.”
오줌 멀리 보내기
‘여자가 중·고등학교 선생으로 살면 최고의 인생이다’라는 아버지의 생각은 18세 김선우의 가슴에 큰 상처로 남았다. 그리고 형제가 모두 일곱이라는 말, 딸이 여섯이고 막내가 아들이라는 말, 대학 진학 문제를 포함한 집안의 모든 정성은 막내인 아들에게 쏠린다는 말, 거기엔 사연이 있었다. 큰오빠가 중학교 때 사고사를 당하자 딸만 셋인 어머니는 아들을 낳으려 했다. 그리고 김선우를 낳았다. 태몽과 산모의 걸음걸이 등등 하여간 김선우는 당연히 아들인 줄 알고 태어났다. 자신의 태생 이야기를 그녀는 시로 노래했다.
오빠가 죽지 않았으면 나는 태어나지 않았겠지요? 어린 내가 묻고 늙은 내가 물끄러미 죽은 나를 바라본다 내 몸속의 날갯짓들을 살려내려고 햇살이, 봄 햇살이 자꾸 내 가슴을 간질러 오빠가 죽은 해 아버지가 심었다는 늙은 복숭아나무가 자꾸 진물을 흘린다 봄 뱀이 둥치 아래 허물을 벗어놓고 사라지고 아픈 가지 끝에서 호랑거미가 거미줄을 뽑고 여전히 나는 발과 다리가 시리지만, 햇살 알레르기를 앓는 붉은 반점 몇 낱이 내 가슴에 연꽃을 피웠다 엄마가 다시 태어나려는지 꽃 진 자리가 환장하게 가렵고, 늙은 복숭아나무의 시름, 그 다디단 진물 옆을 벌들이 난다.
- 시 ‘다디단 진물’ 중에서
그녀의 이름 역시 선숙이나 선예가 아닌 선우다. 인물 검색을 해보면 남자가 수두룩하다. 김선우는 집안에서 남자로 태어났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자로 태어났고, 유목민이 됐고, 시인이 됐다.
지금이야 지나간 옛이야기가 됐지만, 집안에 대를 이어야 할 남자가 꼭 필요하던 시절, 김선우에게는 그것이 상처로 남은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남자처럼 자랐다고 했다. 남자아이처럼 옷 입고, 백일 사진, 돌 사진을 찍었다. 남자아이들과 ‘깨 벗고’ 놀았다.
“아주 어릴 적 남자아이들과 노는데, 애들이 서서 오줌 멀리 보내기 놀이를 하더라고요. 저도 따라 하려고 하는데 시켜 주질 않아서, 동네 감나무 아래에 가서 오줌 멀리 보내기를 연습한 적도 있어요. 하지만 멀리 나가지는 않고 속옷이 다 젖어서 그걸 숨기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속상했어요.”
나는 ‘선우씨, 요즘에는 오줌 방울 튈까봐 변기에 앉아서 소변 보는 남자도 많아요’ 하려다가 말았다. 그렇다면 이 모범생을 시인으로 만든 사람이 있지 않나 싶었다. 시인은 누가 만들어주는 게 아니긴 하지만, 곁에 있음으로써 문학의 문을 열게 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감성적으로 예민한 성장기에 멘토 같은 학교 선배나, 독서광인 언니가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둘째언니의 출가
김선우와 이야기를 제일 많이 나눈 사람은 열한 살 차이가 나는 둘째언니였다. 대학진학 문제로 아버지와 갈등할 때, 둘째언니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녀는 김선우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출가’를 했다. 내가 ‘시집’을 갔느냐고 물어보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아니요. 산으로 출가했다고요. 스님이 됐다고요”라고 했다.
나는 왜 여자가 출가하면 시집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남자라면 당연히 산으로 갔을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 나 역시 남성 중심의 사고방식에 절어 있구나 싶었다. 아이고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싶은데 그녀는 빙긋 웃으면서 둘째언니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머니는 불자이긴 하지만 자식이 출가하는 걸 만류했다. 하지만 김선우는 어릴 적부터 종교적인 기질이 다분했던 언니의 출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학승이 되어 지금도 산 속에서 공부하는 언니는 행복하게 살고 있다.
김선우는 결국 아버지 뜻대로 춘천에 있는 국립강원대학교 사범대학에 진학한다.
“그때 산으로 올라간 둘째언니가 있었으면 제게 큰 힘이 됐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니는 분명히 저를 응원했을 거예요.”
둘째언니가 문학도였다. 시와 희곡을 쓰던 문학도. 언니의 책을 통해 책을 읽기 시작했고, 고교시절에 그녀는 독서광이었다. 그때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만났다고 했다. 내 친구들 중에는 고교시절에 읽은 독서량으로 지금을 버티는 친구가 많다.
그녀 역시 그 시절에 책을 엄청 읽은 모양이다. 독서를 통해 만난 수많은 영혼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앞길을 열었을 것이다. 그녀는 비록 눈치 채지 못했을지라도, 김선우라는 꽃잎을 촉촉하게 적셨을 것이다. 김선우 시집을 읽다 보면 드문드문 나타나는 불교 이야기들은 둘째언니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책, 즉 좋은 영혼을 만나고 나면 가슴이 젖어 저절로 배어나오는 ‘거시기’가 있다. 그게 시가 되기도 소설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시인이 될 거라는 구체적인 생각은 하지 못했다. 시는 대학에 들어가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
“왜 시를 썼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시를 발표한 기억은 나요.”
꿈꿀 수 있는 세상
그녀는 대학시절을 ‘극좌 빨갱이’로 살았다. 동기는 우연히 보게 된 1980년 광주 사진. 사진 한 장이 그녀를 거리로 내몰았다. 어린 시절 당두동, 소녀시절 교동 집에서 형성된 자연친화적인 세계관은 극심한 균열을 맞게 된다. 세상은 비가 오고 나면 버섯이 피는 자연스러운 세상이 아니었다. 그곳은 온갖 폭력과 더러운 욕망으로 가득 찬, 부숴버려야 할 대상이었다. 그녀는 생의 벌통을 건드려버린 것이다. 터진 벌통에서 튀어나온 벌떼가 그녀의 여린 피부에 침을 꽂았다. 둘째언니가 출가를 했듯, 그녀 역시 현실 세계를 구하기 위해 거리에 나가 구호를 외치며 나름의 생을 열심히 산다.
“한 세계가 완전히 박살난 거지요. 내가 알고 싶어하는 세계 이외에 또 다른 세계의 잔혹함을 보고 말았어요.”
대학엔 ‘순수문학’ 동아리만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문예운동 동아리를 만들어서 가두시를 쓰기 시작했다. 운동권 시인이 된 것이다.
“그 시절 저는 두 개의 시 세계를 가지고 있었어요. 하나는 거리에서 쓴 가두시, 하나는 조용히 내면으로 침잠한 뭐랄까, ‘일기장 시’라고나 할까요. 저에게 시를 발표하도록 도와준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순수문학 동아리 친구들이었어요. 그들은 저희들의 시를 보고 그게 시냐, 운동가냐, 문학성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뭐 이런 논지의 비판을 한 거지요. 그래서 제가 그래, 문학성이라는 게 뭔지 보여주마라는 생각으로 학내 문학상에 응모했어요. 문학상이니까 문학성이 있는 작품이 뽑힐 거잖아요. 학내 문학상이었지만 도내에 있는 다른 대학에서도 응모할 수 있는 규모의 상이었기에 공정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시 ‘검불을 태우며’로 당선되고, 그녀의 의도대로 가두시가 아닌 문학성이 있는 시(?)를 쓴다는 걸 보여줬다. 지금 되돌아보면 퍽 유머스러운 장면이다. 문학성이란 무엇인가. 집회시, 가두시가 됐건 노동해방시가 됐건, 서정시가 됐건 시는 이러한 잣대로 잴 수 없는 깊이와 높이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보다 대학생 김선우에게 다가온 것은 그 시를 보고 학생들이 보내 온 팬레터였다. 자신의 시를 읽는 독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란다.
“그땐 누가 넌 뭐가 되고 싶니, 라고 물어보면 그냥 ‘좋은 사람’이라고만 했어요. 좀 바보스러웠지요. 구체적인 직업에 대한 생각이 없었지요. 그러다가 도대체 인간이란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어요. 졸업을 하고 나서도 세상은 그리 좋은 곳이 아니었고, 또다시 아프고, 그래서 사는 게 힘들어서 내가 정말 꿈꿀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그게 없다면 내 생을 견딜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시인이 되려고 했다.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폭설주의보 내린 정초에
대관령 옛길 오른다
기억의 단층들이 피어올리는
각양각색의 얼음꽃
소나무 가지에서 꽃숭어리 뭉텅 베어
입 속에 털어넣는다, 火酒 -
싸아하게 김이 오르고
허파꽈리 익어가는지 숨 멎는다 천천히
뜨거워지는 목구멍 위장 쓸개
십이지장에 고여 있던 눈물이 울컥 올라온다
지독히 뜨거워진다는 건
빙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
붉게 언 산수유 열매 하나
발등에 툭, 떨어진다
때론 환장할 무언가 그리워져
정말 사랑했는지 의심스러워질 적이면
빙하의 대관령 옛길, 아무도
오르려 하지 않는 나의 길을 걷는다
겨울 자작나무 뜨거운 줄기에
맨 처음인 것처럼 가만 입술을 대고
속삭인다, 너도 갈 거니?
-시 ‘대관령 옛길’ 전문
1996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이 시 이외에 10편의 시를 같이 발표하고 그녀는 시인이 됐다. 직업이 생긴 것이다. 지독하게 뜨거워져 빙점에 도달한 그녀의 시세계는 이미 그녀의 시를 기다리던 사람이라도 있는 것처럼 좋은 반응을 얻었다. 첫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을 출발로 ‘도화 아래 잠들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세 권의 시집을 냈고, 2004년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등단한 지 10년이 지나도록 3권의 시집을 냈으니 작가로서 과작(寡作)이다. 하지만 이 세 권의 시집은 곁에 두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좋은 시집이다. 시인이 되고 나서 그녀의 인생은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우선은 시가 혼란스럽던 나를 구했다,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시를 쓰면서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고, 때마침 적절한 시기였어요. 시를 쓰면서 내 몸과 자아가 함께 성숙했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행복했어요. 첫 시집을 내고 나서 좋은 말도 많이 들었고요. 그리고 원고료 있잖아요. 첫 원고료를 받아들고 놀랐어요. 그때부터 소비에 대한 욕망을 줄이면서 조금 적은 돈으로 살려고 해요. 남 하는 거 다 하고 싶은 마음을 버리고 사는 거지요. 그런 헛된 욕망에서만 벗어나도 사는 데 그렇게 많은 돈이 드는 건 아니잖아요.”
등단하고 나서부터 그녀는 시인으로 자급자족하면서 살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도 하지 않았으니 자기 먹을 건 자기가 챙겨야 되는데, 아무리 소비를 줄여도 김선우같이 예쁜 여자가 특별한 직업 없이 3권의 시집으로 10년을 살 수는 없는 일.
“소설을 한번 써보라”
그녀는 신문 연재를 비롯한 산문을 썼다. ‘물밑에 달이 열릴 때’ ‘김선우의 사물들’ ‘우리, 사랑할래요?’ ‘내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을 비롯해 제법 많은 산문을 썼고, 제법 팔았다. 독자는 그녀를 시와 더불어 산문을 잘 쓰는 작가로 인식하고 있다. 그녀의 산문정신은 시인의 여가가 아니다. 그녀의 산문은 시와는 또 다른 매력이 뚝뚝 떨어진다. 호흡이 깊고 정갈하면서 할 말 다하는 능청스러움도 있고, 관능적이면서 때론 너무나 여리고 섬세한 감각이 읽는 이를 놀라게 한다.
어느 날, 소설가 조세희 선생이 신문에 실린 그녀의 짧은 글을 보고 전화를 했다.
“이 글을 쓴 시인이 누군지 궁금해. 만나서 한번 이야기하고 싶네.”
문단 대선배이자, ‘난쏘공’의 작가 조세희의 전화를 받고 가슴 설레지 않을 후배가 어디 있을까. 그녀 역시 너무나 기쁜 일이었지만 숫기도 없어, 전화 받고 달랑 달려갈 배포가 없었다. 어찌어찌 하다가 전화를 받은 지 3년 만에 조세희 선생을 뵙게 됐다.
그 자리에서 조세희 선생은 김선우 시인에게 “소설을 한번 써보라”고 했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시인에게 소설이라니… 제 시집이 별로였나요?”라고 걱정스럽게 말하자 조세희 선생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이 사람이 소설을 쓰면 뭔가가 나올 것 같아서 그런다고 말했다. 그리고 좋은 시인이면서 좋은 소설가가 되는 일도 가능하다고 덕담을 던졌다. 필자가 듣기에 예지력이 빛나는 말씀이다. 필자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
그녀는 3번째 시집을 내고 나서는 바깥에 시 발표하는 일을 자제하고 있다.
“시집을 내고 나서 인도에 3번째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시인으로서 한 고비를 넘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앞날이 갑자기 막막해지더군요. 3번째 시집은 시인으로 등단한 지 10년이 되던 해에 출판했는데, 이제는 내게 여유가 필요하다는 자성을 한 거지요. 그동안 시 청탁이 오면 시를 쓰고, 발표하고, 발표한 시를 모아서 시집을 내고 하는 일들이 형식의 틀에 갇혀 있어 답답했거든요. 그래서 당분간은 가능하면 시 쓰는 시간을 줄이고 있어요. 그런데도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차올라 온몸이 간질간질할 때가 있는데 꾹 참아요. 그 참는 시간도 행복하고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느낀 것인데, 그녀 주위에는 묘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그 긴장감이 주위의 공기를 신선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긴장감을 터뜨리면서 그녀는 말했다. 시를 쓰고 싶은 마음과 참고 있는 마음이 서로 잡아당기고 있는 팽팽한 고무줄 같다. 그 시간 위를 그녀는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다. 마음속에 시상이 떠올라도 그 마음을 꾹 누르고 있으니 오히려 점점 더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보고 싶은 사람 못 보게 하면 환장하는 거와 같은 이치다. 그녀는 요즘 이런 느낌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뭔가 개운치 않다. 김선우가 단지 그러한 느낌만을 즐길 것 같지는 않다.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시를 쓰지 않은 시간에 뭘 한 것일까. 그녀가 말했다.
“장편소설 원고를 실천문학사에 넘기고 지금 제목을 정하는 중이에요.”
그럼 그렇지, 그녀는 그간 장편소설을 썼다. 그리고 그 원고를 지금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건물 위층에 있는 실천문학사에 넘겼다. 아하, 그렇구나 장편소설을 썼구나. 뭔가 답답하던 가슴이 툭 터졌다. 어떤 동기가 있었을까. 그녀는 담담하게 말해줬다.
현대무용가 최승희
그녀가 쓴 어른들을 위한 동화인 ‘바리공주’를 읽고 한 영화사에서 현대 무용가 최승희에 대한 시나리오 작업을 부탁했다. 평소 최승희에 관심이 있었던 그녀는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 평양까지 가서 최승희에 대한 취재를 해 시나리오를 써서 넘겼다. 그런데 막상 시나리오를 쓰고 나니, 이 물건을 소설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나리오는 문학적인 상상력이 제한될 수밖에 없기에 마음이 답답했다. 그 마음을 소설로 풀어낸 것이다. 시나리오 작업을 통해 이미 소설을 쓰기 위한 모든 준비는 끝난 상태. 그녀는 침착하게 한 권의 장편소설을 썼고, ‘시힘’ 동인이자 실천문학사 편집장인 손택수 시인과의 인연으로 소설을 실천문학사에 넘기게 된 것이다.
나는 그녀의 ‘바리공주’를 읽고 나서 그녀가 소설을 쓸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오히려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좀 늦게 작품이 나온 셈이다. 그녀와 소설 제목에 대한 이야기를 신나게 나눴다. 그녀에게는 첫 장편이니 한편으로는 긴장될 법하다. 그런 마음 때문인지 그녀는 문득,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이 장편소설을 쓰는 동안, 앞으로 쓰고 싶은 장편소설이 3권 정도 제 몸으로 들어왔어요.”
이런, 그렇다면 이 장편소설은 이제 그녀 소설의 시발점인 셈이다. 이야기를 하다 궁금한 마음에 소설의 첫 문장이 뭐냐고 물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긴 조금 있으면 책으로 읽을 수 있는데 뭘 그리 서두르나 싶었다.
2011년은 무용가 최승희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6·25전쟁, 월북, 북한 무용예술가, 그리고 숙청. 이미 일제 강점기에 세계적인 무용가로 이름을 남긴 최승희는 우리 예술가 중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그녀에 대한 다양한 책이 이미 출간되었고 앞으로도 출판될 것이다. 그중에서 김선우의 소설이 우뚝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최승희는 어떤 의미에서든 그냥 사라질 수 없는 인물이에요.”
몸속에 잠든 소설
며칠 후 소설 제목이 ‘나는 춤이다’로 정해졌다는 연락이 왔다. 6월 하순경에는 그녀의 소설책도 세상을 향해 던져질 것이다. 김선우는 자신의 몸속에 잠든 소설을 깨워 세상으로 내보냈다. 김선우에게 시란 무엇인가, 소설이란 무엇인가라고 묻지 않는다. 대신 이 시를 인용한다.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 시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전문
그녀의 문학은 꽃 피우는 일이다. 처음부터 그녀 일이었다는 듯, 뜨겁고 아득하다. 김선우와 장시간 이야기를 하면서 술을 마시듯, 커피를 마셨다. 몸이 나른하고 정말 낮술에 취한 것 같다. 중간에 돼지고기를 조금 먹기는 했지만 배는 부르지 않았다. 이제 시간이 되어 그녀는 실천문학사로 올라가야 하고, 나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야 한다. 내가 커피에 취한 것 같아서인지 그녀는 나를 배웅해주었다.
앞장서서 걸어가는 여자의 등을 보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싶을 때가 있다. 이야기를 마치고 헤어지는 길에 잠시 그녀가 내 앞에서 걸어간다. 문득 “김선우!”라고 부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부르지 않았다. 그녀는 잘 가라고 인사를 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실천문학사로 올라갔다.
우물처럼 동그란 눈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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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이야기를 나눈 커피 집으로 다시 간다. 뭔가 떨어뜨린 거 같아서다. 내가 뭘 떨어뜨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아무것도 없다. 나는 조금 전까지 이곳에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눴다. 커피를 10잔 정도는 마셨나 보다. 케냐, 더치, 만델링, 여러 종류의 커피를 다향하게 마셨다.
한참 커피에 빠져 있을 때, 내가 로스팅한 커피를 시음하느라 낮술에 취하듯, 커피에 취해 초저녁에 뻗어버린 적이 있다. 문득 그 시절이 떠올랐다. 그 시절에 나는 커피에 관한 소설을 쓰고 있었다.
의자에 다시 앉아 김선우가 앉았던 자리를 본다. 김선우의 동그란 눈동자는 우물 같았다. 사람을 마주 본다는 거, 특히 눈동자를 바로 보고 이야기한다는 거, 참 오랜만이다. 난 이야기를 나눌 때, 보통 그 사람의 눈동자 조금 아래를 보고 이야기한다. 그게 편하다. 그런데 처음 만난 김선우와는 똑바로 쳐다보고 이야기했다. 눈동자, 커피, 산, 바다, 고갯길, 그리고 김선우, 시, 커피, 향기로운 토요일 오후였다. 일어나 걸어가는데 ‘내 다리뼈로 퉁소를 만들어줘’라는 김선우의 시 구절이 떠오른다. 어디선가 나지막히 슬픈 피리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