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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생각

라면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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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생각
주말오후 ‘기아 체험’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라면 생각이 났다. 기아까지는 아니지만 먹을거리가 턱없이 부족하던 어린 시절, 라면은 끼니를 때우던 제2의 쌀이었다. 저물녘, 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라면 서너 개씩을 옆구리에 끼고 돌아오던 친구들을 만나곤 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집이 우리집만이 아니었다. 지금은 부엌 찬장에 라면 서너 개씩 놓아두지 않은 집이 없지만 예전에는 그런 여유도 없었다. 사들고 가는 라면 개수를 보면 자연스럽게 그 집 식구수도 가늠되던 시절이었다.

입 하나 줄여도 시원찮은데 그 무렵 우리집은 그야말로 군식구들로 넘쳐났다.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서울로 올라온 사촌들이 운전을 배우고 기계를 다루는 기술을 익힐 동안 우리집에 기숙했다. 서울이란 낯선 곳에서 그들에게 비빌 언덕이란 우리집밖에 없었다. 우리집은 비록 변두리이기는 하지만 서울에 있는 마당 딸린 번듯한 집으로 아버지 명의였다. 어머니와 아버지 쪽 사촌들은 서로 일면식이 없었지만 같은 방을 썼다. 말투는 물론 성격도 다르니 한 방을 쓰기가 편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던 사촌들이 어느 날부터 불쑥불쑥 상대편 사투리를 내뱉어 사람들을 웃겼다.

아버지의 박봉으로 군식구들 입까지 감당하긴 어려웠다. 밥상에 밥보다 라면이 올라오는 횟수가 많아졌다. 때마침 국가 정책으로 혼분식(混粉食)이 장려되던 참이었다.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서양 사람처럼 키가 큰다는 말이 돌았다. 우리집은 낱개 포장된 라면을 사지 않았다. 다섯 개가 한 묶음인 덕용 포장의 라면을 한 끼에 두 봉지나 끓였다. 냄비에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석유 곤로 옆에 앉은 어머니는 열 봉지의 라면을 일일이 반으로 분질러 놓았는데 그 양이 만만치 않았다.

여름이면 석유 곤로에 끓이지만 겨울이면 연탄불에 끓였다. 라면 열 개를 끓일 수 있는 커다란 알루미늄 냄비가 집에 있었다. 직경이 길어 아궁이에 겨우 들어맞던 그 냄비는 아파트로 이사 오던 어느 해에 어머니가 미련 없이 버렸다.

화력이 세지 않아 연탄불에 올려놓은 라면은 한쪽에서는 삶아지면서 한쪽에서는 불어터지기 시작했다. 밥상에 올라오면 라면의 특색인 꼬불꼬불한 면발은 거의 풀어져 있었다. 대청 마루 가득 앉아 김치 하나를 반찬으로 뜨거운 라면발을 후루룩거리던 얼굴 검은 사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여전히 내 곁에는 라면이 있었다. 학교 매점의 라면 맛은 특이했다. 주문을 받고 일일이 끓여낼 시간이 없었기에 면을 미리 삶아뒀다가 손님에게 낼 때 따로 끓여둔 라면 국물을 부어줬다. ‘스프’를 같이 넣고 끓이는 라면 맛과 대번에 차이가 났는데, 아직도 나는 가끔 이런 방법으로 라면을 끓여 먹는다. 면발에서 우러나는 기름기를 버리기 때문에 느끼한 맛이 줄어든다. 라면 한 그릇에 여러 명의 여학생이 달라붙었다. 머리를 박고 허겁지겁 라면을 먹었다. 꼬불꼬불한 면발을 입으로 빨아들이다가 하얀 교복에 라면 국물이 튀는 일이 다반사였다.

꼬불꼬불한 면발은 라면의 특성이다. 곱슬곱슬하게 파마한 머리를 보고 아이들이 ‘라면 머리’라고 불렀다. 라면 생산 과정에서 라면을 날라주는 컨베이어의 속도를 라면이 나오는 속도보다 느리게 하면 가닥이 꼬불꼬불 위로 겹쳐 올라간다고 한다. 이렇게 면발을 꼬불거리게 만드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선 부피가 줄어 포장하기에 편리하다. 영양가를 높이면서 유통 기간을 늘리려면 튀김 공정에서 빠른 시간에 기름을 많이 흡수해 튀겨야 하는데 꼬불꼬불한 면의 빈틈으로 수분이 재빨리 증발한다. 또한 그 틈으로 뜨거운 물이 스며들어 조리 시간을 짧게 해주는 효과도 있다.

나는 우리 학교 매점 라면을 좋아했다. 한눈에도 눈이 어두워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늘 라면을 끓여내셨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매점을 둘러싼 괴괴한 소문이 돌았다. 라면과 함께 인기 메뉴이던 오징어 튀김을 만들면서 할머니가 오징어 다리를 튀긴다는 것이 그만 눈이 어두워 쥐꼬리를 튀겼다나 어쨌다나. 이런 근거 없는 소문도 라면 인기를 사그라들게 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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