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환의 모색’ : 장회익·최장집·도정일·김우창, 생각의 나무, 328쪽, 1만5000원.
미국발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근간을 뒤흔들어놓았다. 이제 신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금융공학기술은 폐기 처분될 처지이고, 공적 임무를 망각한 미국 월가의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은 전면 재검토 대상이 됐다. 작금의 상황에서 문명의 정치학은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사유와 성찰의 작업
세계 금융위기에서 촉발된 불확실성과 위기감은 우리 삶의 양식을 전면적으로 되돌아보게 하고 새로운 문명을 기획하도록 강요한다. 전환의 모색은 바로 사유와 성찰의 작업이다.
21세기 전환시대의 지적·성찰적 모색은 정치·경제·과학·인문과학을 관통하는 통합적 철학과 전 지구적 감수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들의 발언은 추상적인 거대 담론에 머무르지 않으며 생태환경, 여성, 노동, 에너지, 식량, 금융위기의 문제와 결합하여 함께 실천하는 동시에 그것을 넘어가고자 하는 진정한 삶과 미래사회의 기획이다.
새로운 문명의 기획이 복합적이고 통합적인 성찰을 전제로 한다면, 오늘날 학문과 지식의 조건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학문과 지식의 조건은 미세한 전문화를 지향하면서 자본에 철저히 복무하는 수행적 지식이 되어버린 상황이다.
학문과 지식의 생산구조는 거대 관료기구와 신자유주의식 기업 모델을 닮아가고 있다. 오늘날 지식 생산양식의 모델화, 즉 전문화-프로젝트-수익모델화는 기존 학문의 인식론적 바탕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삶과 존재와 같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정교하게 조직된 사회 시스템 속에 작동하는 유일한 원칙은 실용의 수익모델이다. 저마다 경주마처럼 시야가 가려진 채 단기 이익이라는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상황이다. 맹목성을 향한 동력은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는, 거의 종교적인 믿음이다. 현재의 삶이 어떻든 간에 이익과 수익이 보장되면 모든 것이 ‘선(善)’이며, 위악적인 것이 정말 악이 될 수 있다는 징표일 것이다. 시장은 신(神)이자 선이며, 지상의 척도다.
도정일 교수의 글에서 우리는 시장경제의 지극히 추상적이고 전체주의적이며 폭력적인 성격을 읽을 수 있다. 시장주의는 동원체제이고 억압적 기제로 작동한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추상적 합리성이 구체적인 삶을 대체하고 있다. 시장경제가 만들고 추동하는 경쟁과 경쟁력의 서사는 시대정신의 스토리텔링이다.
창조성, 수월성, 행복 담론 등 시대의 키워드도 바로 경쟁력 담론의 종속변수일 뿐이다. 무한경쟁은 승자와 패자를 확연히 구별하는 척도이며 희생제의적이고 폭력적이다. 누군가 탈락하고 희생돼야 하므로 폭력의 서사성을 지닌다.
신자유주의 시장 이데올로기는 삶 자체를 억압하고 무시하며 공포의 서사를 낳는다.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 구도는 바로 모방과 선망의 서사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20대 80의 사회’의 승자를 모방하라, 이것이 시대의 모럴이자 명령이다. 개인은 경쟁의 가파른 사닥다리에서 떨어지지 않고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생존의 논리를 깊숙이 내면화한다. 치열한 사유나 논의는 실종되고 선망의 욕망이 넘실거린다. 열정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신자유주의 이윤추구적 파토스나 다름 없다.
따라서 행복의 조건인 ‘지금 여기의 삶’은 저당 잡히고 미래로 자꾸만 던져진다. ‘프로젝트’(pro-ject 미래로 던지다)가 이 시대의 중요한 키워드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카르페 디엠’이 그토록 호소력을 지니는 것도 현실이 그와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한국에서 불가능하다.
‘하루’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음미할 거룩한 시간은 매우 럭셔리하다. 삶의 시간은 둥글고 온전하지만 우리의 시간은 지극히 파편화되어 있다. 마치 아이젠슈타인의 변증법적 몽타주 기법을 보는 듯하다. 한국에서의 삶은 광고와 매우 닮아 있다. 선정적이고 충격적인 이미지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변증법적으로 판타스틱한 느낌을 만들어낸다. 판타지 영상물의 범람은 바로 이 시대의 징후적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