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상계’는 펜을 가지고 칼에 대항했다. 지성의 무기를 가지고 권력의 아성에 육박했다. ‘사상계’에는 계몽의 메시지가 있었고, 비판의 언어가 있었다. 독재에 항거하는 자유의 절규가 있었고 관권에 대결하는 민권의 필봉이 있었다.”(안병욱, ‘칼의 힘과 펜의 힘’, ‘사상계’ 1969년 12월호)

그러나 어느덧 2008년, 지금의 50대조차 ‘사상계’ 세대는 아니다. ‘사상계’ 이후 세대다. 이 말은 50대까지는 정기구독이나 서점 구입을 통해 ‘사상계’를 바로 구해 읽고 ‘사상계’와 실시간대로 함께 산 세대가 아니라는 뜻이다. 50대 이후 세대의 경우 지금은 사라져버린 청계천 고서점이나 대학도서관의 장서 보관용 서가에서 갱지로 만들어 바삭바삭 마른 옛 ‘사상계’를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읽어본 경험이 전부일 것이다. 아마도 그들 연배는 어린 시절 ‘사상계’라든지 ‘씨의 소리’ 같은 비판 저널리즘이 불온한 빨갱이 잡지인 줄 알고 자랐을지 모르겠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통과된 유신헌법에 의거해 처음 발표된 ‘긴급조치 1호’로 제일 먼저 구속되어 형을 받은 분이 전(前) ‘사상계’ 발행인인 장준하 선생님이었다.…나로서는 경제건설에 눈부신 성과를 올리고 무장공비와 싸우는 데 여념이 없는 훌륭한 대통령에게 이유도 없이 비방(?)을 일삼는 잡지나 그 발행인을 왜 그냥 감옥에 가두는 정도로 그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홍윤기 동국대 철학과 교수)
그러나 이들 세대는 대학에 들어가 우리 사회와 국가와 민족, 그리고 세계의 진실에 대해 조금씩 눈떴을 것이다. 진리로 가득 차도 모자랄 그들의 소중한 영혼이 체계적 야만성으로 오도된 독재자의 이데올로기적 권력장치를 통해 철저하게 세뇌되고 오염됐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장준하와 ‘사상계’에 대해서도 그러했을 것이다.
1970년대 들어 5년의 간격을 두고 ‘사상계’와 장준하의 부음이 잇따랐다. ‘사상계’와 장준하의 죽음은 우리의 현대사, 나아가 시민의식의 민주적 성장과 민족통일의 발전과정에 있어 중대한 국가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민주주의 국가 운영을 통해 그 내용을 풍부하게 채워나가고 분단체제를 돌파해야 할 사상적 기축이며 동력이 될 두 진지가 붕괴됨으로써 그 후의 세월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천박한 폐쇄사회로 줄달음쳤는가. 장준하와 ‘사상계’를 오늘 역사 속에서 꺼내 보는 것만으로도 실용만능의 기회주의적 정신풍토에 대한 성찰과 모색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
“내가 벨 ‘돌베개’를 찾는다”
장준하는 1918년 8월27일 평북 정주에서 목사이던 장석인의 4남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삭주 대관보통학교 5학년에 들어가 이듬해인 1932년 이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평양에 있던 숭실중학에 입학했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천 신성중학교로 전학해 졸업한 후 1938년 정주에 있던 신안소학교 교사로 3년 동안 지냈다.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간 장준하는 동양대학 철학과 예과를 거쳐 1941년 일본신학교에 입학했다. 장준하가 입학할 무렵 전택부, 문익환, 김관석, 박봉랑 등이 같은 학교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