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2년 일본 출생. 2000년 작고<br>홍익대 건축과 졸업<br>1979년 상파울로비엔날레, 1980년 프랑스 파리비엔날레 참가<br>전 큐빅디자인연구소 소장
특히 서구의 비디오아트는 그 출발부터 반(反)미학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무정부주의적인 플럭서스 정신과도 닿아 있다. 백남준(1932~2006)과 볼프 포스텔(1932~1998)은 그린버그의 모더니즘이 누리던 교조적 권력을 부정하면서 소위 ‘반(反)고급예술’을 주창했던 플럭서스 그룹의 일원이었다. 이들에 의해 시작된 서구 비디오아트는 시각적으로는 플럭서스의 유전인자를 받아 충격적이지만 미학적으로는 개념적이거나 논리적인 부분이 결여돼 있어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반면, 한국의 비디오아트는 시작된 시기와 문화적, 경제적 환경이 서구와는 현저하게 다르다. 텔레비전과 테크놀로지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에 있다 할 수 있지만 한국적, 동양적인 사유체계 속에서 나름대로 독특한 형식과 내용을 담아냈다. 서구의, 또는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와는 다른 면모를 한국 비디오아트의 대부라 할 박현기(朴鉉基·1942~2000)는 보여주었다.
매력 있는 도구
백남준이 ‘오브제가 우리를 상실하게 만드는’ 시대의 상징으로 텔레비전을 선택했다면 이들 작품은 ‘ TV 아트’에 더 가깝다. 이후 1965년 소니사가 휴대용 비디오카메라를 시판하면서 비디오는 새로운 표현 수단이자 매체가 되었다. 비디오는 드로잉과 회화처럼 흔한 매체가 되었고 모니터, 폐쇄회로의 테이프에서 설치조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에 비디오 테크놀로지가 적용됐다.
비디오의 열린 접근성은 작가는 물론 일반인에게도 새로운 예술적 실험과 시도를 가능하게 했다. 비디오아트는 새로운 도구로서 주목받으며 연극적인 요소와 음악적인 요소, 빛과 행위를 포함하는 총체적인 예술로 자리 잡아갔다. 이후 컬러TV를 거쳐 소형화된 캠코더 시대로 이어지면서 멀티미디어에서 인터미디어로 진화한다.

카메라가 피사체를 촬영하자마자 비디오는 시간을 박제화한다. 그래서 관객은 비디오가 제시하는 통시성과 동시성을 함께 인식하면서 순간과 영원은 동일하다는 동양적 사유의 표현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작가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관객의 입장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습관적으로 익숙한 이미지를 통해 그것의 실체를 접하고 있다는 믿음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대상과 재현의 동일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대상을 재현한 이미지는 그 대상의 또 다른 현현(顯現)일 뿐 그것 자체는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시각예술의 한계이자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서 재현과 실재, 나타남과 보여짐, 보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의 간극에서 비롯되는 같음과 다름 등 그동안 그를 괴롭히던 문제들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비디오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는 당시 화단을 풍미하던 추상표현주의나 앵포르멜(Informel) 등 인간 내면을 시각화하는 회화의 한계를 실감하면서 새로운 미술의 본질적인 문제에 집착한다. 당시 박현기를 비롯한 많은 작가는 ‘예술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했다. 즉 자기수양과 자기완성이 예술행위의 목적이었다. 이는 서구의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부족과 전통 문인화 정신이 결합해 나타난 과도기적인 현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현기에게 비디오란 매체는 재현과 실재, 초월적인 자아와 존재론적 의미를 동시에 구현하면서도 독창성을 담보해낼 수 있는 매력 있는 도구가 되어주었다. 그는 1974년 대구 미국문화원 자료실에서 백남준의 ‘Global Groove’를 처음 본 순간부터 비디오아트의 가능성에 빠져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