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아파트는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신분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한다. 저자가 말하는 신분의 차별이란 바로 아파트의 소유 여부가 사회적 계층을 구분하는 사회적 배제와 포섭의 기제를 말한다. 아파트 거주자와 주택 거주자의 차이는 바로 서구적 근대의 생활양식을 일상화한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의 차이이며, 이는 곧 발전과 저발전의 차이다.
초기 저층 아파트가 별다른 인기를 끌지 못했던 이유도 그 자체가 충분하게 서구적 생활양식을 대변하지 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1990년대 들어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비로소 아파트는 한국사회의 중요한 계층적 코드가 된다. 아파트 거주자는 자동차를 갖고 있으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들어간다. 여기에 아파트를 관리해주는 관리인과 경비가 항상 대기하고 있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가사도우미가 집안일을 해주러 온다.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지만 비슷한 교육수준과 수입, 소비행태를 지닌 이웃들과 친밀하지 않은 이해공동체를 형성해 계층적 단결력을 과시하고 이를 통해 지속적으로 자신의 계층적 귀속성을 확인한다.
프티부르주아의 자기만족
저자가 말하는 아파트의 개폐식 삶과 사회공동체는 이러한 중산층이라는 사회계층적 이데올로기와 프티부르주아적인 가족중심주의가 혼합되어 있다. 부녀회로 대표되는 아파트 단지의 집단주의는 중산층의 여타 계층에 대한 사회적 배제이며, 치맛바람으로 대표되는 가족중심주의는 아파트 내부의 개인주의와 경쟁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파트는 이 시대 한국인의 계층적 로망이며 서구적 근대성을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중산층의 배타적 공간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아파트를 반사회적이고 반공동체적이며 반인간적인 시멘트 건축물이라고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항상 가슴 한켠에서는 앞마당이 있고, 사랑방이 있으며, 뒤에는 장독대가, 옆에는 텃밭이 있는 한적한 시골 전원주택을 꿈꾸지만,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역설의 주거공간이 바로 아파트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아파트의 한국적 토착화는 현실을 박차고 일어설 수 없는 도시 프티부르주아의 자기만족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저자가 언급한 한국 아파트의 온돌문화, 베란다 문화, 거실문화, 방과 부엌의 구조 등이 설득력 있는 이유는 이러한 아파트의 한국적 토착화가 불편한 과시적 서구적 생활양식과 익숙한 전통적 생활양식을 공존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파트의 내부는 남이 쉽게 들여다볼 수 없는 완벽한 사적 공간이다. 어차피 내가 아파트에 산다는 사실이 대외적으로 과시될 수 있는 한, 보이지 않는 실내 주거공간이 어떤 형태를 갖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 책은 한국 아파트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사회문화적 분석서다. 근대 이후 한국의 사회 발전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변화를 아파트라는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현상을 통해 독자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인, 그러나 결코 결론이라고 할 수는 없는 ‘10장 아파트와 미래한국’을 제외하면, 별다른 주장을 하고 있지 않다. 저자는 1장에서 9장까지 개인적 주장을 가능한 한 배제한 채 독자에게 아파트라는 현상을 차분하고 시각적으로 흥미롭게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10장은 좀 생뚱맞고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며, 오히려 전체적으로 이 책이 주는 흥미로운 분위기를 깨뜨리고 있다. 현재의 주택분배 체제가 좌파 진보주의 이데올로기의 온상이 될 수 있다거나 좌파 포퓰리즘의 득세를 막기 위해 주택정책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은 이 책이 쭉 전개해온 아파트를 매개로 형성된 중산층의 소시민주의, 집단적 배타주의, 가족중심주의와 모순적인 관계에 있다. 고층 아파트에 살고 있는, 또는 살고 싶어하는 세대들의 의식 속에 좌파가 얘기하는 사회적 연대와 진보가 들어설 자리는 별로 없다.
고층 아파트로 대변되는 허구적 중산층의식이 사회자본 기능을 하고, 아파트 사회자본을 지키기 위해 거주민이 전투적 이익집단이 되는 사회에서 좌파 진보주의 이데올로기는 아파트 담장 밖의 이야기며, 좌파 포퓰리즘은 아파트 담을 넘을 수 없다. 한국사회에서 아파트는 서구 생활양식을 발전으로 받아들이는 가치지향이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이 시대의 계층적 로망으로 존속할 것이다. 전상인 교수의 ‘아파트에 미치다’는 제목만큼 파격적이고 재미있는 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흥미로운 시도이며, 사회과학의 대중화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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