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에서 대중성과 예술성을 갖췄다고 평가받는 할리우드 영화의 포스터에는 으레 금색의 대머리 사내가 한두 명 이상 서 있게 마련이다. ‘오스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대머리 사내는 예전부터 하나의 권위를 상징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닥터 지바고’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등은 모두 ‘오스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왠지 한 번쯤 봐줘야 하는 영화가 되었으며 그 권위는 지금도 여전하다. 미국영화가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미국이 아무리 쇠락의 길을 걷는다 한들 말이다.
먹고살기도 빠듯한데 남의 나라 배우나 ‘꿈의 공장’과 같은 얘기들이 무슨 소용이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지금이야말로 스타와 꿈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아카데미 시상식이 시작된 1929년은 미국 대공황의 원년이다. 그리고 지금, 자동차산업이 붕괴되고 은행들은 허덕거리며 실업률이 높아만 가는 이 총체적인 난국 속에서도 미국의 영화산업은 그 어느 때보다 건재하다. 최근 한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에 비해 미국 내 영화표 판매량은 17.3% 증가했다고 한다. 어쩌면 잠시라도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 스크린으로 도피하고 싶은 이가 그만큼 많은 건지도 모른다.
불황에도 “The show must go on”
그런 점에서 올해 제81회 아카데미에서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선전은 의미심장하다.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음악상 등 8개의 오스카를 거머쥔 이 영화는 사실 예전의 수상작에 비하면 상당히 ‘낯선’ 작품이다. 일단 영국과 인도의 합작품이라는 점이 그렇다. ‘트레인스포팅’ ‘28일 후’를 만든 감독 대니 보일은 영국 출신이며 수많은 인도 발리우드 영화의 음악을 맡은 인도인 A.R.라만을 비롯해 출연자 전원이 영국 혹은 인도 출신이다. 스토리 또한 인도 뭄바이의 빈민가를 배경으로 한 고아 청년이 퀴즈쇼에 나가 백만장자가 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주인공은 결국 돈방석에 앉고 흠모하던 여인까지 얻는다. 그리고 화려한 한바탕 춤 잔치가 영화의 대미를 장식한다. 색다른 외양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하면 된다’ ‘꿈은 이뤄진다’는 고전 할리우드 영화(혹은 미국)의 공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8) ‘디파티드’(2006)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5) 등 지난 몇 년간 비교적 ‘어두웠던’ 최우수작품상 수상작들과 달리 말이다. 시상식 역시 ‘잠시 복잡한 생각은 접고 즐기자’는 분위기가 강했는데 크리스 록, 존 스튜어트와 같이 시사풍자에 능한 코미디언들이 사회를 맡아 식 중간 중간 할리우드 시스템에 대해 비판 섞인 농담을 던지곤 했던 예전과 달리 올해는 머리 아픈 풍자도 없었다. 올해 처음 아카데미 시상식 사회를 본 ‘엑스맨’ ‘반헬싱’의 휴 잭맨은 행사 내내 신나게 노래하고 춤을 췄다. 대공황 시기 화려하기 그지없던 아카데미 시상식처럼 말이다. 하긴 “The show must go on(쇼는 계속되어야만 한다)”은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제 1원칙 아닌가.
꿈의 오스카, 꿈을 이룬 사람들
물론 할리우드가 파는 꿈의 진실성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꿈은 꿈을 낳는다는 것’. 지난 2월 코닥 극장에 모인 영화인들 역시 한때는 할리우드 영화와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면서 스타의 꿈을 키워갔을 것이다. 지난 1991년 ‘사랑과 영혼’으로 아카데미 최우수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우피 골드버그(그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헤티 맥대니얼 이후 흑인여성으로는 두 번째 아카데미 수상자다)도 그랬다. 어린 시절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그는 시상식장에 모인 스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As a little kid, I lived in the projects and you‘re the people I watched. You‘re the people who made me want to be an actor. I‘m so proud to be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