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쪽에 바쁜 일정이 잡혀 있다면 몰라도, 드문 바깥나들이를 꼭 재미없는 고속도로만 이용해서 할 까닭은 없다. 하여 강릉을 가긴 가는데 시간을 좀 넉넉히 해서 강원도 내륙을 거쳐 가보기로 한다. 정선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 장평 인터체인지를 나와 평창을 거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좀 더 고요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곁들이고 싶으면 진부 인터체인지에서 나와 33번 국도를 타는 것이 좋다. 수항리 유원지와 가리왕산을 거쳐 정선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오대천 맑은 계곡이 시종 나란히 하는 데다 교통량마저 적어 차 부리는 이가 운전의 재미까지 가질 수 있는 멋진 코스다. 정선에서 아우라지를 거치고 청옥산-두타산의 산 고갯길을 넘어 동해시로 가는 42번 국도도 마찬가지다. 아직 문명의 때를 묻히지 않은, 강원도의 청정 속살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리왕산 높은 곳의 무덤 하나
그 봄날, 사람 내왕마저 뜸한 가리왕산을 올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산의 원시적 적요며 산행 후 아랫마을 가겟집 평상에서 쳐다본 별 하늘의 장관과 함께 잊히지 않는 풍경 하나가 있다. 해발 1500m가 넘는 가리왕산의 8부 능선쯤에서 우연히 만난 무덤 하나가 그것이다. 더러 산꼭대기에 앉은 무덤을 보긴 했지만 이렇듯 높은 산 중턱에 마련된 묏자리는 거의 본 적이 없다. 이곳이 어떤 명당이기에 드센 바람과 구름장을 마다않고 만년유택으로 잡았는지 모를 일이지만, 원기 왕성한 생사람도 오르기 힘든 곳에 굳이 조상의 영면 자리를 만든 욕심 많은 효심이 안쓰럽게 여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무덤은 지대의 높은 점에서는 산꼭대기의 그것들과 다를 바 없지만, 크게 다른 점 하나가 있었다. 대개의 산꼭대기 무덤이 묘비는커녕 표석 하나 세우고 있지 않은 것이 예사인 데 반해, 이 무덤만큼은 윤이 나는 표석 하나를 꼿꼿이 세워놓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에 새긴 문자가 지극히 단출해 수상쩍은 느낌마저 주었다. 앞뒷면 어디에도 그 흔한 이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덤의 주인이 누구이며 어느 때 만든 것인지 알 도리가 없다. 대제학(大提學), 딱 세 글자뿐이다. 하늘 가까운 곳에 앉은 무덤이 대제학 벼슬 하나만 달랑 표시하고 있으니 그 기이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홍문관의 수장인 대제학 자리는 비록 품계에서는 정승 판서의 아래지만, 문신이라면 누구나 탐을 내는 영예로운 벼슬이다. 그대는 누군가, 어느 시대 어느 임금과 더불어 살았는가, 죽어서도 관직명은 자랑스레 밝히면서 어찌해서 이름을 숨기는가, 무슨 곡절이 있어서 이 높은 곳에 누웠는가? 정상을 향해 걷던 나는 뜻밖의 표석에 이끌려 무덤에 다가갔다. 등에 진 짐을 벗고 땀을 훔치며 주위를 관망했다. 땅바닥에는 고산초 이파리들이 융단처럼 덮여 있었다. 다른 데 비해 꽤 완만한 평지가 펼쳐져 있는 걸 봐서 예전에 암자 하나쯤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명당을 선점한 다른 집안의 무덤이 있었거나.
대제학의 후손은 선조의 영예로운 직함만으로는 생계를 감당할 수 없었다. 고단함이 극에 다다른 어느 때 과객 하나가 말했다. 가리왕산 꼭대기 부근에 퇴락한 암자가 있느니라, 그곳이 후대 발복의 천하 길지이거늘. 그날 밤, 후손은 대제학 할아버지의 유해를 수습해 천리 길을 걸었다. 재를 넘고 강을 건너 이윽고 가리왕산에 올랐다. 달빛 교교한 밤, 절 마당에 투장(偸葬, 암매장) 하는 때는 산짐승마저 숨을 죽였다.
새치 같아 아니 흑판에
백묵으로 마구 그은 선들 같아
어느 땐 뼈다귀들처럼 보이기도 해
자작나무 숲 그것 때문에
겨울 산이 더 검은지 몰라
오래 흩어졌던 길들이 빽빽이 모여
숲을 이룬 걸까 다 닳아빠지면
뼈다귀만 남는 걸까 중얼중얼
염불 소리 들려
기도 소리 같기도 하고
그렇게 뼈다귀마저 다 갈아 마시면
어디로 가게 되지
반쯤 무너진 봉분이 문득
발걸음을 멈추게 해
한 입 베어 먹은 사과처럼 보이는 그 앞에서
가로막는 것의 외로움을 생각하는 중이야
햇살이 발등에서 차곡차곡
눈을 감고 있어
-강윤후 시 ‘자작나무 숲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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