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오전 10시 반, 윤기철이 사무실에서 정순미와 서류를 체크하고 있다. 업무과는 인력관리와 생산품의 입출, 경비 지급과 공장의 효율적 운영까지를 맡는 핵심 부서다. 공장 전반을 다 체크할 수 있는 부서인 것이다. 그래서 잘 짜인 조직이 아니면 월권 문제가 발생하지만 용성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
“생산과에서 내일부터 4시간 연장근무를 시작하는군요.”
윤기철이 말하자 정순미가 서류 한쪽을 손끝으로 짚었다. 검지 손톱이 분홍빛이다. 갸름한 손톱이 손가락을 닳았다. 나란히 앉았기 때문에 정순미가 곧 손가락을 치웠지만 미세한 동작에서도 향기가 맡아졌다. 이건 체취가 절반 이상 섞인 독특한 냄새다.
“인원이 150명 정도가 모자라기 때문에 4반, 5반은 연장 작업 못 합니다.”
정순미가 서류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4시간 이상 연장근무를 하면 능률이 오르지 않거든요. 납기는 20일 후로 다가왔는데 생산량을 맞추기 힘들 것 같아요.”
그렇다면 나머지는 더 비싼 임가공비와 항공료까지 부담하고 칭다오 공장에서 생산해야 한다. 그것은 법인장이 결정할 사항이다. 윤기철이 머리를 돌려 정순미를 보았다.
“우리가 생산인력 증원을 요청한 지 5년이 넘었는데 증원이 안 되는 이유는 뭘까요?”
그때 정순미가 윤기철을 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바로 20㎝쯤 앞에 떠 있다. 눈동자 안에 자신의 얼굴이 오목렌즈처럼 박혀 있는 것이다. 그때 정순미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정순미의 얼굴이 조금 굳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개성 근처의 노동력이 부족해요?”
불쑥 그렇게 물은 것은 정순미가 어떻게 나오나 보겠다는 의도가 컸다. 개성 근처는 물론이고 황해도 지역에서도 인력난이 심하다. 인력이 부족하다고 아무나 끌어들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윤기철의 시선을 받은 정순미가 대답했다.
“그것도 전 잘 모르겠는데요.”
사무실 안에는 생산과장이 보조사원하고 둘이서 샘플을 정리하고 있을 뿐 주위에 사람은 없다. 이윽고 시선을 뗀 윤기철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기본적인 문제를 바로잡아야 하는데, 그래야 회사나 근로자도 득일 텐데.”
“윤 과장님.”
오후 1시 반, 숙소에서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서던 윤기철이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멈춰 섰다.
몸을 돌린 윤기철은 낯익은 작업반장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반장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대표 동지가 제1상담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는데요.”
“아, 예.”
제1상담실은 외빈용이다. 상담실로 들어선 윤기철은 안쪽에 앉은 조경필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조경필도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밝은 웃음이다.
“윤 과장님, 커피 한잔 하십시다.”
“아, 좋습니다.”
따라 웃은 윤기철이 앞쪽에 앉았다. 조경필은 이미 인스턴트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쥐고 있다.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정순미가 쟁반을 들고 들어섰다. 그 순간 윤기철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는다. 정순미가 윤기철 앞에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놓더니 테이블을 돌아가 조경필의 옆에 앉았다. 그때까지 조경필은 웃음 띤 얼굴로 기다린다. 여유 있는 모습이다. 이제 윤기철도 의자에 등을 붙이고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폈다. 턱도 들려져서 시선이 비스듬히 내려졌다. 입술에도 희미하게 웃음기가 떠오르고 있다. 그때 조경필이 말했다.
“처음이라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데 정순미 동무는 그런 건 잘 모릅니다.”
조경필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앞으로 그런 질문은 저한테 해주시지요. 성의껏 대답해드릴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윤기철은 어느덧 자신의 어깨가 내려져 있음을 깨달았다. 고수(高手)다. 조경필은 강약 조절에 능란한 것이다. 상대를 파악하고 기를 꺾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만일 이번에 조경필이 강하게 나왔다면 윤기철은 커피잔을 던질 준비도 되어 있었다. 싸움은 해본 놈이 잘한다. 양아치를 이기려면 양아치보다 더 악착같이 구는 방법뿐이다. 그런데 조경필은 선수를 쳤다. 심호흡을 한 윤기철의 시선이 정순미에게로 옮겨졌다.
“처음이니까 말씀드리는데 그런 것까지 보고할지는 몰랐습니다.”
그 순간 정순미의 눈 밑이 붉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눈은 윤기철을 응시한다. 도대체 무슨 말이냐는 표정이다. 그때 조경필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앗하하, 그래요. 처음이니까 다 연습한 것으로 넘어갑시다. 자 됐습니다.”
여전히 주도권은 조경필이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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