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입 공부를 하다가 지칠 때쯤이면 나는 방구석에 덩그러니 서있는 통기타를 들었다. “너의 침묵에 메마른 나의 입술/ 차가운 내 얼굴에 얼어붙은 내 발자국….”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양희은의 노래였다. 서투르게 어쿠스틱 통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 순간만큼은 입시 스트레스도 추위도 몰랐다. 끝자락인 “저엉녕 저엉녕 너를 사랑했노라”를 부를 때쯤이면 문득 나의 미래를 상상하곤 했다. 혹시나 노래 제목처럼 비극적인 사랑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지만 나는 순진한 십대 고교생일 뿐이다.
양희은스러운 클래식 포크
양희은, 지금 세대에게는 그저 TV에 나와 수다나 떠는 펑퍼짐한 아줌마로 보일지 몰라도 이 땅의 기성세대에게는 무한한 의미를 던지는 이름 석 자다. 청바지를 입고 기타를 들쳐 멘 청순하고 늘씬한 청년문화의 상징으로 떠오른다.
청춘의 시절, 공부방 구석에는 세고비아 기타가 우두커니 서있고, 세광출판사에서 나온 노래책들은 ‘성문종합영어’와 ‘수학의 정석’ 사이에 당연히, 그리고 보란 듯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 노래책에는 기타 코드가 명기됐는데 386세대 대부분이 그 책들을 보며 혼자 기타를 익혔다.
그 중심에 있는 노래가 양희은이 부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C-A min-D min-G 코드 네 개만 알면 별 어려움 없이 칠 수 있어 기타 초보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연습곡. 슬로 록으로 분류되는 노래는 단출한 코드 덕분에 기타를 배우기에는 딱 들어맞았다. 마치 골프에 입문할 때 레슨 프로의 지시에 따라 달랑 7번 아이언 클럽만 한 달 내내 휘두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양희은이 부른 노래는 아주 많다. 이 면에 소개했던 김민기의 ‘아침이슬’도 대중에게는 양희은 노래로 인식된다. 헤르만 헤세의 글에 곡을 붙인 ‘작은 연못’과 ‘하얀 목련’ ‘한 사람’ ‘들길 따라서’, 미국 민요 ‘Merry Hamilton’을 번안해 부른 ‘아름다운 것들’ 등이 생각난다. 그는 포크 음악이 주류음악으로 자리매김하던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여가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양희은은 조금 애매한 모습을 띠었다. 가수라기보다는 TV에 뻔질나게 등장해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수다를 떠는 이웃집 아줌마 같은 모습을 보인다. 뒤늦게 아름아름 알려진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는 물론 의심할 바 없는 명곡이지만, 1970~80년대의 청아한 톤은 사라지고 우스갯소리나 쏟아내는 그렇고 그런 대중 연예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양희은의 존재감을 유지해주는 노래가 있다. 바로 ‘한계령’이다. 노랫말이 주는 깊은 울림과 계절적인 쓸쓸함, 비장미까지 잘 버무려진 ‘한계령’은 양희은의 음색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노래다. 그래서 대중에게는 클래식 포크쯤으로 인정된다. 실제로 어느 조사에서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1위에 등극하기도 했다. 시인들이 좋아한다는 말은 곧 노랫말이 기성 시 못지않게 서정적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다. 양희은의 노래로 가장 유명하지만 무려 40여 명의 가수가 리메이크해서 불렀다. 이 땅의 웬만한 가수는 모두 이 노래를 불렀다는 의미다. 소프라노 신영옥 등 클래식 가수까지 덩달아 부르고 있다. 그뿐 아니다. 소설가 양귀자는 동명의 소설 ‘한계령’을 발표했고, 이 작품은 중등 교과서에 실려 그 위력을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