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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선생’ 詩에 붙인 ‘민중의 애국가’

김종률 ‘임을 위한 행진곡’

‘백 선생’ 詩에 붙인 ‘민중의 애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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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사 애국가’ ‘민중의 애국가’ ‘어두운 시대의 진혼곡’….
  •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 시청 앞 광장, 종로거리, 선술집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었다.
  • 민중운동가 백기완이 쓴 시에 대학가요제 출신 대학생이 곡을 붙였다.
  • 월드컵 응원가로도 쓰인 이 노래는 요즘 동남아 국가들의 시위 현장에서 심심찮게 흘러나온다는 소식이다.
‘백 선생’ 詩에 붙인 ‘민중의 애국가’

광주시립묘지 이한열 열사 묘지, 멀리 보이는 조기 태극기가 눈길을 끈다.

1980년대에는 ‘애국가가 2개’란 말이 있었다.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가 다 있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1980년대를 살아온 지금의 기성세대에게는 정말 그랬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되는 ‘진짜 애국가’가 있었고,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로 시작되는, 진짜 애국가보다 더 자주 불리던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유사(pseudo) 애국가’가 있었다.

재야운동가 백기완 선생이 말을 붙이고 김종률이 곡을 만든 이 노래는 가사의 높은 서정성과 투쟁성,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비장미에다 운동권 가요로는 보기 드물게 멜랑콜리한 곡조로 인해 이 땅의 재야운동가, 대학생, 노동자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으며 퍼져나갔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인 100만 인파가 시위 시작과 끝을 알리며 부른 노래는 ‘진짜 애국가’가 아닌 바로 이 노래였고, 경찰의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군의 아버지 박기정 씨가 아들의 재를 뿌리며 부른 것도 이 노래였다. 어려웠던 시절, 경찰은 마지못해 시위대를 막았고 시위대는 동년배 전경들을 증오보다는 측은함으로 상대했다. 부상자가 속출했지만 그래도 서로서로 무언의 교류가 있었다. 화염병과 최루탄 속에서도 우정은 꽃피고 한판 엉킨 뒤 도시 뒷골목에서는 담배를 나눠 피는 모습도 종종 눈에 띄었다. 그런 시절의 노래였다.

수출된 운동가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음성적으로 불리던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이후 상당 기간 운동권은 물론 일반 대중에게도 사랑을 듬뿍 받았다. 시위 진압에 지친 전경들이 단체회식 때 부른 것도 이 노래였고 한동안 화이트칼라들이 연말 송년모임 때 마지막으로 부른 것도 이 노래였다. 심지어는 강남 룸살롱의 ‘나가요 걸’들도 다투어 불렀다. 나중에는 제3세계 운동권으로 수출되기도 했다니 한류의 원조쯤 된다고나 할까.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와 함께 1980년대를 관통한 이 노래는 운동권 가요도 대중가요가 될 수 있다는 첫 사례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래방에서, 봄·가을 직원단합대회에서 스스럼없이 불렀다. 사이가 안 좋은 사람도, 사내 라이벌도 이 노래를 부르는 순간만큼은 모두가 동지였다고들 한다. 맞다. 한 시절, 모두가 한마음으로 불렀다.

그런 만큼 이 노래는 별명도 많다. ‘민중의 애국가’ ‘우리 시대 마지막 민요’ ‘어두운 시대의 진혼곡’…한결같이 암울한 시대의 산물임을 드러낸다. 당초 이 노래는 독립곡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노래극 ‘넋풀이’에 삽입된 곡이다. 탄생 뒷얘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여러 매체에 등장한 줄거리를 종합해보면 대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980년 민주화의 기쁨과 기대도 잠시, 군부의 등장으로 패배감과 자괴심의 깃발만 나부끼던 1981년 늦가을, 광주 운암동 소설가 황석영의 집 2층 구석방에 이 지역 문화운동패 10여 명이 모여들었다. 황씨를 비롯해 윤만식 전 놀이패 ‘신명’ 대표, 오창규(전남대 연극반 출신), 임희숙, 대학가요제 출신의 김종률(당시 전남대 경영학과 4학년) 씨 등이었다. ‘빛의 결혼식’으로 이름 지은 노래극 ‘넋풀이’ 제작을 위한 모임이었다.

‘빛의 결혼식’은 광주항쟁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도청에서 숨진 윤상원 씨와 그의 대학 후배로 1979년 겨울 노동현장에서 숨진 박기순 씨의 영혼결혼식을 모델로 했다. 밀폐된 골방에서 꽹과리, 징, 기타, 카세트 녹음기 같은 소도구만 갖고 작업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노래극이 대강 완성됐다.

그러나 노래극의 마지막 부분에 들어갈 ‘부활의 노래’를 만드는 일이 난산이었다. 영혼 결혼식의 주인공인 두 남녀가 자신들의 죽음 때문에 괴로워하는 산 자들을 격려하는 노랫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고민 끝에 누군가가 당시 지하유인물에 실린 재야운동가 백기완 씨의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 묏 비나리’를 찾아냈다.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리리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굽이치는 강물은 안다….”

입에서 입으로

황석영이 시 구절을 노랫말에 맞게 고친 뒤 김종률 씨가 밤샘 작업 끝에 곡을 붙였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완성된 노래가 불려지자 방 안 곳곳에서 흐느낌이 배어나왔고, 그것은 마침내 통곡의 외침으로 변했다.

이들의 외침은 4개월 후인 1982년 봄 전국 대학의 집회와 노동 현장에서 거대한 함성으로 되살아났다. 비밀리에 복제된 테이프를 입수한 대학가 노래패, 연극 동아리들에 의해 소개된 노래는 서슬 퍼런 당국의 단속과 탄압에도 불구,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그날 이후 모든 집회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필수곡으로 자리매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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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동률 |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석재현 | 사진작가, 경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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