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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는 神을 기억하는 작업”

현역 최고령 시인 황금찬

“詩는 神을 기억하는 작업”

6/6
경주(慶州)를 지나면서



저녁노을 피는

하늘가엔

먼 사연(詞緣)이 잠이 들고





들국화(花)

산길엔

牧童(목동)만 내린다



첨성대(瞻星臺) 안압지

돌아가는

나그네 봇짐에 어스름이 실리고



어디를 갔느냐

아득히 불러도

서라벌(徐羅伐) 천년(千年) 배 떠난 나루!



더불어 다른 시인의 시 한 편도 추천을 부탁드렸다. 역시 청록파 시인들 작품을 이야기하면서 조지훈 선생의 시를 말씀하셨다. 이제는 제목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면서 웃었다. 하여간 선생은 조지훈의 시가 제일 좋다고 하셨다. 선생의 초기 시를 보면 청록파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작품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선생의 초기 시를 보니 문득 우리 시의 원형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 새 우리는 시가 전해주는 저 울림과 여백의 공간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조지훈의 영향이 분명한 선생의 초기 시 한 편은, 시란 가만히 오래 들여다보면서 완상(玩賞)하는 도자기와 같다는 것을 알게 했다. 절제된 우리말과 한자어의 절묘한 조화, 편의상 한글 옆 괄호안에 한자 표기를 했지만, 원문 그대로 한자와 같이 읽으면 그 맛이 더 깊다.

우리 글을 쓰지 못하는 시절도 아니지만, 우리 글이 전해주는 맛과 정취 깊은 울음을 즐기지 못하는 시대가 됐다. 선생은 그것을 아쉬워하셨다. 그런 의미에서랄까. 나는 선생의 다음 시집이 무척 기다려진다. 첫 번째 독자로 줄을 서서라도 그 시집을 사고 싶은 마음이다.

잠시 낮잠을 잔 것 같아

선생은 동성고등학교에 재직하면서 자주 다니던 혜화동 마로니에공원을 사랑하신다. 이제는 마음만 움직이고 몸이 힘들어 혜화동에 자주 나가시지는 못한다. 대신에 자택 근처에 있는 커피집 ‘인투 커피 into coffee’에 일주일에 서너 번 가시곤 한다. 이 집에는 선생의 시가 걸려 있다. 그 밑에 앉아 선생의 말씀을 들었다.

동숭동 옛 서울대 문리과대학 교정에 있는 마로니에 나무가 유명하듯이, 강북구 우이동에선 솔밭공원이 유명하다. 동네의 시인들이 지켜낸 공원이라고 자랑하신다. 건축업자들이 소나무를 뽑아버리고 그 자리에 주택을 지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시인들이 모여 소송을 제기해 기어이 공원을 지켜낸 것이다.

선생과의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해서 잠시 그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소나무는 100년의 시간을 견디는 일이 한결같다.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서 긴 세월 지나가는 사람들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다.

선생은 이제 솔밭공원의 한 그루 소나무처럼 세월에 무심하다. 지팡이에 의지해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는 몸을 부축해드리면서 거칠고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났다. 오랜만에 천천히 걸었다. 선생과 보폭을 맞춰 건널목만 건너면 되는 짧은 거리를 가는 동안 ‘소걸음으로 천리를 간다’는 옛 선비들의 말씀이 떠올랐다.

“선생님, 어떠세요. 이제 100년 사시는 건데요.”

“아이고, 눈물 나게 고맙고…, 잠시 낮잠을 잔 것 같아. 허허.”

나는 생각했다. 선생의 100년은 짧다 하지만 나의 하루는 너무나 길었다. 어쩌면 지나간 1000년보다 더 긴 것이 살아 있는 자들의 하루일 것이다. 최근에 본 영화의 주인공이 한 말처럼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 누구의 인생이든 간에 말이다. 지금 선생과 걷고 있는 이 시간, 이 보도, 길거리의 가로수, 아기 엄마와 신생아의 보행 등등. 저것이 바로 살아가는 자들이 오늘 하루를 걸어가는 걸음걸이다.

선생은 하루를 나이테처럼 간직하고 있다. 우리 시의 거목이 드리운 그늘 아래서 한나절 잘 쉬었다. 그늘이 깊고 넓어서 온 세상을 돌아다니고 온 나그네가 쉬기 좋은 곳이다. 선생이 평생 의지한 시란 그런 것이 아닐까.

선생 댁에 도착했다. 문 앞까지 모시고 가겠다고 하니까 만류하신다. 공동주택 현관에서 집까지는 선생이 스스로 가시겠다 한다.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서 가, 어서 가, 하시면서 등을 보이신다. 나는 그냥 서서 선생이 가시는 모습을 보았다. 모두 여덟 계단이다. 선생은 천천히 여덟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잠시 후, 초인종 소리가 들리고 다정한 손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선생이 문을 닫고 들어가셨나보다. 조용하다. 이젠 내가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오늘 하루는 참 길었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긴데, 선생의 100년은 어떤 것일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신동아 2015년 8월호

6/6
원재훈 | 시인 whon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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