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호

음예(陰톣)공간에서 펄떡이는 물고기 조경란

“슬픔이 슬픔을 만나면 온기가, 아픔이 아픔을 만나면 에너지가 돼요”

  • 원재훈 시인 whonjh@empal.com

    입력2008-04-05 14: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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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경란의 별자리는 염소자리다. 염소자리는 맨발로 돌산을 오르는 자리다. 그저 묵묵히 올라가는 고행의 자리다. 그의 문학역정이 그랬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은 고흐가 그린 그림 같다. 붓 터치가 강렬하고 두껍고, 아름답고, 또 무섭다. 아름다움은 두려운 것이다.
    음예(陰톣)공간에서 펄떡이는 물고기 조경란
    광화문 하늘을 구름이 덮어 어둡다. 음예공간이다. ‘음예(陰·#53667;)’는 구름이 하늘을 덮어 어둡다는 말인데,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일본 전통 건축 공간을 음예로 설명한다. 그리고 일본의 된장국에서부터 변소, 칠기, 일본인의 피부까지 음예라는 말로 풀어낸다. 그의 음예는 그늘도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름한 것, 즉 중성적인 빛을 의미한다. 빛이 어둠을 만나 머무르면서 깊어지는 공간이다.

    사람들의 삶에도 이러한 음예공간의 시절이 있다. ‘음예공간예찬’의 미학적인 설명을 얻어 오지 않더라도, 인생의 구름이 마음의 하늘을 덮는 시기가 간헐적으로 찾아온다. 그 음예를 통해 아름다움이 탄생한다.

    장편소설 ‘혀’를 읽고, 광화문에서 작가 조경란(趙京蘭·39)을 만나 와인 두 잔을 마시고, 메모하고, 그녀를 먼저 보냈다. 그녀는 신경숙을 만나 종로로 영화를 보러 갔다. 나는 자작나무가 보이는 광화문의 와인집에 홀로 앉자 음예공간을 떠올렸다.

    조금 전, 그녀가 앉았던 자리에 떨어져 머문 이야기가 윙윙 귓가를 맴돌았다. 마치 잠자리처럼 날아오르는 음성들, 어떤 것은 눈에 보이기도 한다. 그 순간에 눈에 보이는 음성을 나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촛불이 타오를 때 주변 공기의 결을 떨리게 하는 공기 물결 같다.

    그녀는 고등학교 3년과 20대 초반의 5년, 두 시절을 음예의 공간으로 보냈다. 그녀는 이 시절을 어둠으로 보고 다시는 되돌리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거기에는 엷은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건 분명히 음예다. 그 음예의 공간에서 그녀는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뒤척였던 것이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는 뒤척일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 그 시절이 오늘의 작가 조경란을 만들었다.



    피차 커피에 관심이 있어, 내 친구이기도 한 커피 이야기로 긴장을 풀었다. 그녀는 내내 단정하고 예쁘게 앉아 있었다.

    무방비 상태인 여자

    좋은 와인을 생산한다는 프랑스 어떤 지역에서는 일부러 포도나무를 척박한 땅에 심는다고 한다. 지표면에 물이 많이 고이고 토양이 좋은 곳에서는 포도나무 뿌리가 지표면의 오염된 물을 빨아들이기에 일부러 거칠고 마른 땅에 심는다. 그러면 뿌리는 살기 위해 더욱 깊이 내려가고, 깊은 곳에서 빨아올린 맑은 물로 좋은 포도 열매를 맺는다. 우리나라에도 ‘비가림 포도’가 있다. 흙에 물이 고이는 것을 농부가 가려줌으로써 포도나무 뿌리가 지표면의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한 포도다. 조경란의 음예는 이러한 포도나무와 같았다.

    “제겐 청춘이 없었어요. 친구들이 푸른 기운을 내뿜으며 활개를 치고 다닐 때 전 뭘 해야 할지 몰랐고, 그래서 방 안에서 책을 읽었어요. 가끔 광화문 교보문고나 서울대 앞 대학서점에서 책을 사는 게 외출의 전부이던 시절이었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어요.”

    5일도 아니고, 5개월도 아니고, 5년을 방 안에 ‘처박혀’ 있었던 그녀. 외로움은 길들지 않는다. 뿌리가 있어 흙이 척박할수록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는 법이다.

    그녀의 외로움은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 수 없어 하던 그녀에게 찾아온 다정한 손님이었다. 그 손님과 한참 마주 앉아 있었다. 벙어리 같던 손님이 말했다. 책 읽어.

    “책 속에 길이 있다고들 하잖아요. 정말로 책 속에 길이 있었어요. 그 시절에 책을 읽어 이 길을 걸을 수 있었어요. 철학책과 심리학책들을 읽곤 했는데, 간혹 문학서적을 읽기도 했지요. 문학은 창작보다 평론을 먼저 읽었어요. 그때 만난 영혼의 멘토가 작고하신 김현 선생이에요.”

    음예(陰톣)공간에서 펄떡이는 물고기 조경란
    그리고 책읽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좋은 책이란 다음에 읽을 책을 알려주는 책이죠. 김현 선생을 만나고 나서부터 문학서적을 섭렵하기 시작했는데, 마치 감자줄기에 감자가 달려 나오듯이 구체적인 세상이 제 앞에 나왔어요. 저를 문학의 길로 이끌어준 분은 책을 통해 만난 그분입니다.”

    삶에 대해 전혀 무방비 상태인 여자가 책 속에서 자신의 길을 발견했다. 만약에 다른 길로 빠졌다면…, 지금의 조경란은 없다. 하여간 그녀는 그런 시절을 보내다가 스물세 살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 부엌에 있던 개다리소반을 들고 와 그 앞에 앉아 노트를 펼치고 시를 썼다.

    이 장면은 클로즈업되어야 한다. 햇볕을 받지 않아 그녀의 얼굴은 희고 여위었을 것이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지 않아 말투는 어눌했을 것이다. 주로 자기 자신과 하루 종일 이야기했을 것이다. 외출을 하지 않았으니 옷은 계절을 몰랐을 것이다.

    힘겨웠던 실연의 아픔

    그런 여자가 새벽에 일어났다. 물방울 속에서 태어난 비너스처럼 그녀는 세상을 향해 말을 걸었다. 세상은 그녀를 아름답게 보았다. 그녀가 입을 열어 주위의 것들을 둘러보면서 호명하기 시작한다. 그 최초의 언어가 시였다. 작가 조경란이 탄생하는 신성한 시간이다. 새벽빛을 응시하는 그녀의 둥글고 검은 눈동자가 떠오른다. 시간 역시 검고 풍성한 그녀의 머리카락처럼 길게 자라 있다.

    외부로 향한 문을 걸어 잠그고 잠수함을 타고 심해로 내려가 살던 그녀를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식구들, 특히 부모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그녀는 아버지를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시인이 되고 싶었던 목수라고 했다. 그때 아버지가 이런 말을 했다.

    “그냥 내버려두자. 저렇게 놔두면 언젠가 뭘 하지 않겠나.”

    그녀는 독신이다. 결혼에 대해서는 별생각이 없다. 지금의 삶에 변화가 오기를 바라지 않는다. 만약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주부가 되어도 잠시 행복했다가 생의 어느 순간 부엌을 뒤집어엎고 뛰쳐나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건 또 다른 세계를 부숴버리는 일이고, 유리잔이 깨질 때 그 조각의 날에 베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하지만 인생은 알 수 없는 것, 만약에 운명적인 사내를 만나 결혼을 하더라도 부모님과는 같이 살고 싶다고 했다.

    딸만 셋이었기에 다른 딸들은 다 부모 곁을 떠났다. 그래서 맏딸인 자신이 부모 곁에서 지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이다. 부모 사랑이 각별한 것은 그 고통의 기간에 묵묵히 자신을 품어준 고마움에 대한 사랑이다.

    그녀에겐 완벽주의자 기질이 있었다. 사랑을 하면 온전히 몰두하는 스타일, 그래서 10여 년 전 첫 연애에 실패했을 때 무척 힘겨웠다고 했다. 그 실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실연을 크게 해서, 다시는 그 뜨거운 불에 손 집어넣고 싶지 않다”고 했다.

    실연을 해 처참하고 참담한 기분으로 일주일 이상 식음을 전폐하고 거의 죽을 뻔한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골방을 뒹굴 때, 이명처럼 들려오던 죽음의 노래들. 그 참담한 공간은 평면이 아니라 수직으로 끊임없이 떨어지는 입체다.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으면 한없이 가라앉는 것 같은 가위눌림.

    그러나 사랑의 속성은 어찌할 수가 없다. 그것은 봄바람처럼 불어오는 것이기에, 방문을 열고 나간다면 다가오는 것이기에, 하늘을 올려다보면 빛나는 별빛이기에 어찌할 수가 없다. 그녀는 말했다.

    “불타는 사랑을 하던 시간도 좋지만, 사랑을 하고 있지 않는 시간도 좋아요.”

    “너, 시는 안 되겠다”

    23세에 그녀는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 이 ‘공부’는 대학입시를 의미한다. 서울예전 문예창작학과를 25세 되던 1994년에 입학한다. 필자가 대학을 졸업하고 석사학위 준비를 할 나이에 그녀는 대학 신입생이 되었다. 그리고 이전의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 1학년 동안은 시를 열심히 썼다. 그때 같이 학교를 다니던 동기들은 조경란을 이상하게 보았다고 한다.

    “동기들이 ‘경란 언니는 간첩이다’라고들 했어요.”

    음예(陰톣)공간에서 펄떡이는 물고기 조경란
    골방에서 벗어나지 못한 패션 감각은 한여름에도 긴소매 옷을 입고 다니고(우리 대학시절에는 한여름에 긴 외투나 두꺼운 군용 야전점퍼를 입고 다니는 것이 문예적인 행동이기도 했다), 사회성이 없어 학생들 간의 농담을 ‘쌩까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학생이었다. 예쁘장한 여자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농담을 못 받아들이는 모습을 그려보니 웃음이 나기도 한다.

    지금 내 앞에 앉은 세련된 패션 감각의 조경란과 그 시절의 조경란은 다른 여자인 것이다. 우리 몸의 세포는 태어나고 죽는다. 과학적으로 인간의 몸은 10년을 주기로 다른 몸이다. 하물며 정신이야 오죽하겠는가. 고여 있지만 않다면 1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를 수 있다. 정신의 세포는 오로지 내 마음으로 다스릴 수 있기에, 그것은 또한 보이지 않기에 바꾸기가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

    그녀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이미 고인이 된 오규원 시인을 비롯해, 김혜순 시인, 남진우 시인, 평론가 류보선, 박혜경 등이 강의를 했다. 이렇게 그녀는 청춘의 고치에서 벗어났다. 20대 초반의 5년, 그리고 고교시절 3년 자신을 방에 가뒀던 그녀는 날개를 달았다. 시를 향해 비상하는 검은 날개의 제비나비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시 쓰기에 몰두하던 어느 날, 서울예전 교지 편집실에서 그녀의 운명을 바꾸는 천둥 같은 한마디를 듣는다. 스승인 김혜순 시인이 한마디를 툭 던진다. 고요한 연못에 떨어지는 빗방울이다.

    “경란아. 너, 시는 안 되겠다.”

    연못 위에 떨어진 물방울이 그 고요함을 흔들어 모든 것이 흔들리듯, 그녀는 스승의 한마디를 ‘온전히’ 알아들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시의 족쇄를 풀어버린다.

    “시는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죠. 각별한 재능이 있어야 절창이 나온다고 봐요. 타고난 것이 있어야 되지만, 소설은 다르죠. 소설은 인내와 용기만 있으면 쓸 수 있어요.”

    이 말은 그녀가 소설가라는 말이다. 시인은 반대로 소설가가 타고난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화가나 작곡가에게도 적용된다. 재능이 쏠리는 곳이 있다. 조경란은 소설에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됐다.

    그녀는 시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지만,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시가 그녀를 놓아주었다고 생각했다. 가난한 시가 예쁜 경란을 놓아주었다. 나보다 더 좋은 소설을 만나라고. 젊은 날 새벽녘에 시를 만나 지독한 사랑을 하고 나서인지, 소설을 만나서는 습작을 그리 많이 하지 않고 등단한다. 그 다음해 쓴 ‘불란서 안경원’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 당선, 대학 2학년 때 덜컥 소설가가 되었다.

    시가 그녀를 놓아주다

    이탈리아나 칠레에서 배를 타고 건너온 와인 병을 따고 시음을 하고 커다란 와인 잔에 붓고 그것을 흔들어 잠자는 풍미를 일깨우듯, 지금 우리의 와인 잔에 탐스럽게 고여 있는 잘 숙성된 와인 같은 그녀의 이력을 살펴본다.

    단편으로 등단한 그해에 제1회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수상한다.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문학적인 행로다. 당선작은 ‘식빵 굽는 시간’이다. 이 시기에 지난해 출간한 소설 ‘혀’를 구상한다. 그때 ‘혀’를 쓰지 못한 이유는 당시 음식을 소재로 한 영화가 판을 치던 형국이라 부화뇌동하기 싫어서였다.

    그렇게 10여 년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에 창작집 ‘불란서 안경원’ ‘나의 자줏빛 소파’ ‘국자 이야기’ 등의 소설집과 중편소설 ‘움직임’, 산문집 ‘조경란의 악어 이야기’ 같은 책을 내고 독자와 교감했다. 현대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올해 그녀의 문학상 수상 이력이 하나 더 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요즘은 단편집 ‘풍선을 샀어’ 원고를 매만지고 있다. 이 책은 5월쯤 독자를 찾아갈 예정이다.

    단편집 ‘국자 이야기’를 2004년 겨울에 출판하고 나서 다시 암울한 시기가 찾아왔다. 잦은 여행 때문이었다. 2004년부터 외국에 나갈 일이 많이 생겼다. 그간 암울했던 시기를 벗어나 날개를 달았으니 그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파김치가 됐다고 한다.

    “몸이 책상을 떠나 있으니까 마음이 골목 밖을 나가 돌아다녔어요. 그러다 보니 집에 돌아와서도 마치 호텔방에서 자는 것처럼 문을 걸어 잠그기까지 했지요. 그래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이 힘들어지더군요.”

    작가는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인간이다. 책상을 깨물고라도 앉아 있어야 된다는 카프카의 말처럼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았지만, 앉아도 잘 되지 않았다.

    “전 몸 에너지가 약한 편인데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그걸 다 써버린 느낌이에요. 점점 나이가 든다는 이야기인데, 그게 좋아요. 그건 20대의 힘듦이 빠져나간다는 소리잖아요.”

    블로그의 힘

    음예(陰톣)공간에서 펄떡이는 물고기 조경란
    그래도 썼다. 혼자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면 어디론가 숨어버리는 습관이 있다고 했다.

    “작가는 글 쓰는 순간에 마치 배우처럼 그 캐릭터가 내면화해야 하는데, 그 캐릭터가 내 안에 들어오지 못하더군요.”

    소설가로서 힘껏 쓰기는 했는데, 뭔가 어긋나서 글이 잘 안 되는 시기였다. 그 시기에 쓴 소설들이 바로 단편집 ‘풍선을 샀어’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작품들을 책으로 엮으려 다시 읽으면서 그때의 자신이 온전히 보이는 소설이라고 자평을 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소설가에게 소설 이외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지난했던 시간들도 작품만 썼다면, 아니 쓰려고 했다면 소설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번에 출간될 작품집은 그런 의미에서 작가에게 새로운 분수령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어떻게 쓸 것인가를 새록새록 고민한 지난 3년이 슬럼프이긴 했지만, 작가에겐 필요한 시간일 것 같기도 하다고 했다.

    그녀는 밀란 쿤데라의 문장을 또박또박 말했다.

    “소설가란 지금까지 살아온 생의 벽돌을 허물고 새로운 집을 짓는 자이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새로운 창작집과 더불어 장편소설 ‘혀’를 염두에 두고 있어서가 아닐까. 그녀는 이 소설을 쓰고 나서 세 가지가 고마웠다고 한다.

    우선은 지독한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어 고마웠고, 두 번째는 12년 전에 쓰고 싶었던 소설을 쓸 수 있어 고마웠고, 세 번째는 독자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다. 만약 이 소설이 독자에게 외면당했다면 기가 죽었을 텐데 독자의 반응이 좋아서 기분이 좋다는 이야기다. 그녀는 이 소설을 통해 인터넷 블로그의 힘을 알았고, 신작소설 낭독회를 통해 막연하게 멀리 있던 독자의 눈빛과 음성을 들음으로써 행복했다.

    “소설가가 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낭독회에서 만난 독자들과 대화하는 동안 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꼈고, 앞으로 더 좋은 작가가 돼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됐지요.”

    마치 긴 터널을 빠져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요즘은 일을 하고 싶다며 미소지었다. 이젠 소설도 잘 된다. 올여름에 단편을 쓰고 나서 장편소설을 쓸 생각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쓰러진 바로 그 자리에서 손을 집고 일어난다. 엉금엉금 기다가도 두 손을 짚고 일어나는 순간이 있다. 이젠 실패나 평가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편안한 마음을 가지길 나는 바랐다.

    입속의 붉은 잎

    소설 ‘혀’에 대한 이야기는 책을 읽기 전에 이미 풍문으로 들려왔다. 광화문 ‘문사철’ 사무실에서 같이 지내는 깐깐한 출판평론가 이권우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책을 읽고 나선 아이처럼 좋아하는 이권우. 마침 그는 조경란의 ‘혀’에 대한 신문 서평을 쓰고 있었다. 나는 이권우의 안목을 믿는다. 그는 이 소설이 대단히 뛰어난 작품이라고 호평했다. 그는 서평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혀’는 파국에 이르는 괴이한 사랑 이야기다. 탐닉에 가까운 미각 이야기를 날실로, 집착하는 사랑 이야기를 씨실로 삼아 소설을 직조한다. 탐닉과 집착, 그리고 파국이라…. 어쩐지 잘 차려진 이야기의 성찬 같지 않은가. 결혼식 피로연장에 차려진 뷔페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감각들, 쾌락들과 뒤섞일 수 있으며 다른 쾌락들의 부재를 달래줄 수도 있는’ 의미의 성찬 말이다.”

    필자는 ‘혀’를 읽으면서 칼을 보았다. 부엌과 키친과 주방을 넘나들면서 주인공이 만들어낸 온갖 요리가 우리들의 혀 위에서 춤을 춘다. 이 책은 핥아먹어야 한다. 그런데 자꾸 혀가 뭔가에 베인다. 만져보니 피가 나는 것 같다. 이 소설은 조경란의 ‘칼의 노래’이기도 하다. 이토록 섬세한 날이 있던가. 그녀가 잘라낸 혀는 컴컴하고 어두운 공간인 입속에 있는 붉은 혀다. 붉은 혀는 생명을 상징한다. 반대로 검은 혀는 죽은 자의 혀다.

    요리사의 칼

    음예(陰톣)공간에서 펄떡이는 물고기 조경란
    전쟁터에서 입을 벌리고 전사한 병사의 혀는 검은색이다. 6·25전쟁 학도병 출신인 우리 아버지는 기형도의 시집 제목을 보고 얼굴을 찡그리셨다. ‘입속의 검은 잎’. 그것은 죽은 자의 혀다. 그러나 조경란의 혀는 ‘입속의 붉은 잎’이다. 그것은 요리가 될 수도 있는 싱싱한 생명이다. 입을 다물면 어두워 죽은 공간인 입 안에 혀가 있음으로써 이와 입천장과 목구멍이 모두 싱싱하게 살아 있을 수 있다.

    혀가 없는 입속은 거세당한 사내이고, 성욕 잃은 여인이다. 그녀의 소설엔 싱싱하게 퍼덕이는 혀를 요리하는 칼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칼로 보았다. 음식과 감각과 사랑에 대한 모든 서사와 수사는 결국 절묘한 요리에 대한 묘사로 나타나지만, 그 요리를 하는 요리사의 손에 늘 들려 있는 칼, 이것은 장군의 칼보다 예민하고 섬세하고 아름답다. 다시 말해 훨씬 뛰어난 칼이다.

    장군의 칼이 전쟁의 칼이고 사람 죽이는 칼이라면, 이 칼은 생명의 칼이고, 사람 살리는 칼이다. 사람의 생명은 다른 생명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이것는 먹이 사슬에 걸려 있는 모든 생명체의 공동 운명이다. 단, 인간은 칼을 이용해서 요리한다.

    이것은 짐승의 발톱이나 맹금류의 부리가 아니다. 짐승이 오로지 먹기 위해 사냥하고, 죽어가는 짐승의 목덜미를 물어뜯는다면 요리사의 칼은 우리가 먹은 음식을 만들기 위한 도구, 즉 한 단계 위에 존재한다. 칼은 인간의 도구이면서 신의 손이다.

    신에게 손이 있다면 때에 따라 느낌에 따라 변화하면서 날카롭기도 하고 무디기도 한 요리용 칼일 것이다. 전투용 칼이 살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딱딱하고 가련한 남성의 칼이라면 요리사의 칼은 때에 따라 전투용이 되기도 하는 유니크하면서도 창조적인 여성의 칼이다. 날이 잘 선 요리사의 칼은 컴컴한 우주의 한가운데를 갈라내고, 거기에 빛을 쏟아 붓는 아름다운 태양이다.

    홍송 책상

    이 소설의 말미에 있는 작가의 말을 본다.

    “어느 날, 원고를 쓰다 말고 우두커니 식탁에 앉아 주먹만한 파르마산 치즈덩어리를 칼을 들고 깎아나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약간 길쭉하고 동글동글한, 작은 치즈 덩어리가 손바닥 안에 남았다. 그것은 사과나 달걀처럼, 누군가의 수줍은 혓바닥처럼 둥그런 모양이었다. 나는 만약 문학에도 형태라는 게 있다면 지구나 태양, 혹은 달이나 사과처럼 둥글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외부의 압력에 가장 강하며 내용물을 가장 잘 보호할 수 있는 건 역시 구(球)의 형태일 테니까. 문학 안에서,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에 있었다.”

    작가는 결국 칼 한 자루 들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한다. 우두커니 칼을 들고 치즈를 깎아나가는 그녀를 상상해보라. 상상력을 발동하자면, 칼과 구의 관계는 동아시아 신화의 창조주인 반고가 들고 있는 도끼가 되기도 한다. 반고는 아득한 시간을 구 안에 갇혀 있다가 단박에 도끼를 들어 자신을 둘러싼 구를 죽 갈라버리고 나온다. 한 아이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탄생하는 모습이나 다름없다.

    여성의 성기를 태곳적 창조주가 낸 칼자국으로 볼 때부터 사람은 성숙해진다. 그곳이 성스러운 장소인 것은 만물의 탄생이 이뤄지는 반고의 구가 찢어진 자리이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태어난 사람은 빈손이고, 동아시아의 창조신 반고는 도끼, 즉 칼을 들고 있었다. 동양의 천재 노자 역시 깊은 생각을 이 칼자국을 통해 이야기한다.

    이 칼이 놓인 장소인 부엌, 주방, 키친이 이 소설의 배경이다. 이 작품의 해설을 꾸며주신 김화영 선생의 글을 인용한다.

    “소설의 서술은 두 연인이 ‘키친’에서 시작해 레스토랑 ‘주방’을 거쳐 다시 헤어진 두 여인이 마지막으로 마주 보는 ‘키친’으로 돌아온다. 시작과 끝이 서로 만난다. 그러나 시작은 사랑이었지만 끝은 미움과 죽음이다. 다른 한편에서 보면 소설은 공간적으로 레스토랑 주방이라는 상대적으로 개방된 장소로부터 요리사와 미식가 두 사람만이 마주 대하고 있는 극히 사적이고 밀폐된 초점으로 환원 집중됨으로써 극적 긴장감이 상승하는 과정을 밟고 있다.”

    그리고 부엌에는 할머니가 있고, 우리 요리가 간간이 있다. 이 소설에서 할머니는 이탈리아, 프랑스 요리에 힘겨운 나에게(내가 이 요리들에 낯설고 잘 모른다는 말이다.) 소금과 같은 인물이었다. 주인공의 미각을 일깨워준 대장금 같은 할머니, 얼마나 고마운 분인가. 필자의 안목으로는 읽고 나서도 그 이름들을 잘 알 수 없는 서양 요리 중심의 이 소설을 읽는 동안 할머니의 등장은 시큼한 묵은 김치의 웅숭깊은 맛과, 시원한 김치말이국수, 따뜻한 쌀밥 한 그릇이다.

    옥탑방 이야기

    ‘혀’는 할머니의 딸인 한 여자가 한 여자의 혀를 맛있게 요리하는 소설이다. 언제쯤 한 여자가 한 여자의 혀를 요리하는지 그걸 찾아 읽어가다 보면 소설 속에 7월이 오고, 소설은 끝난다. 소설의 마지막에는 요리사의 손에서 흘러내린 땀방울과 독자의 가슴에서 흘러내린 진홍색 피 묻은 칼날이 선연하다. 여자란 참으로 아름다운 존재다. 만질 수 없는 영혼처럼 아름답고 기이하다.

    “여기 나는 이 좁은 방에 있지만, 나는 문학과 함께 그 크기를 잴 수 없는 무한한 공간인 내 ‘머리 속’에 있다. 여기가 나의 ‘방’이고, 이것은 나 자신을 성찰하는 방이며, 창조의 신비한 공간이 될 것이다.”

    조경란이 쓴 산문 ‘자기만의 방’에서 인용한 글이다. 이 글에 등장하는 방은 그녀의 아버지가 지어준 옥탑방 시절을 이야기한 것이다. 목수인 아버지가 손수 지은 집에 옥탑방을 만들었다. 그때 옥탑방 방문을 열고 동네 풍경을 내려다보면서 딸 중에서 누군가 이 방에서 글을 쓰면 좋겠다고 했고, 옥탑방을 쓰던 막내가 중국으로 유학 간 사이에 맏딸 조경란은 짐을 옮겨놓고 소설 창작을 했다. 아버지의 오랜 소원이 이뤄진 것이다.

    장편 ‘혀’는 2005년 5월부터 3개월 동안 옥탑방이 아닌 집 근처 반지하 고시원에서 썼다고 했다. 집 안에 있으면 들려오는 사랑스러운 조카의 소리에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드디어 살고 있는 집 근처에 자기만의 방을 얻었다. 그곳에서 봄에 발표한 소설 ‘밤이 깊었네’를 썼다. 그 집필실에는 세 가지, 텔레비전과 인터넷과 전화가 없다. 몸에 지닌 휴대전화만 꺼놓으면 완전한 고립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 공간에서 커피를 내려 마시고 글을 쓰는 거지요. 전 욕심이 많지 않아요. 한 사람이 다 가질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좋은 남자, 자동차, 오피스텔 같은 거 말이지요. 신이 제게 한 가지만 선택하라면 바로 이 시간, 글을 쓸 수 있는 삶을 선택하겠어요.”

    그동안 4인용 식탁에서 글을 써온 그녀는, 자신의 방을 얻고 나서 맘에 드는 책상을 구했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본 목수를 찾아가 자신의 책상을 짜달라고 했다. 한옥 문짝을 전문으로 짜던 장인은 그녀의 작품을 읽어보고 선선히 책상을 짜줬다고 한다. 책상은 홍송(紅松)으로 만들었다. 단단하고 촘촘한 소나무 결이 살아 있는 책상을 손으로 매만지면서 그녀는 그 책상 위에서 행복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홍송의 나이테만 봐도 저절로 긴장감이 생겨요.”

    그녀는 지난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아버지와 친할머니 이야기를 많이 했다. 작품에도 아버지 이야기는 ‘코끼리를 찾아서’를 비롯해 많이 등장한다. 아버지를 빼놓고는 쓸 수 없는 글이 있다고 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아내가 둘이다. 그녀의 첫 번째 친할머니는 당신의 생일날 가엾게 돌아가셨다. 그리고 두 번째 할머니, 아버지와 배다른 형제들의 이야기는 문학적이고 소설적이다.

    아버지의 눈물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사우디아라비아로 일하러 갔다. 중동 공사 열기가 뜨겁던 시절, 그녀의 아버지 역시 그 대열에 서 있었다. 뜨거운 사막의 일터에서 집안에 있는 식구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어린 시절, 집 안에는 남자가 없었어요. 어머니, 그리고 저희 세 자매가 있었지요. 그때 집에 큰 항아리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엔 우리 식구들의 편지가 가득 찼지요.”

    카세트테이프에 음성 편지를 담아 보내기도 했다. 아빠, 저희들은 잘 있어요. 공부 잘하고, 엄마 말 잘 듣고…같은 내용이었다. 돌이켜 보면 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이 자신에게 소설을 가르쳐준 것 같다고 했다.

    그녀의 2006년 겨울은 무척 힘겨웠다.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갔는데, 어두운 거실에 아버지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어둠 속에 있는 모습에 잠시 놀랐다가 이내 가슴이 서늘해졌다. 아버지의 등과 어깨가 상처 입어 둥지에서 떨어진 새의 날갯죽지처럼 흔들렸다. 조심스럽게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왜 그렇게 앉아 계세요?”

    아버지가 커다란 등을 들썩이면서 대답했다.

    “아버지는 인생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 같구나.”

    그녀가 울먹이면서 대답했다.

    “그러세요. 제 인생도 실패한 것 같아요.”

    조경란은 서서, 아버지는 앉아서 같이 울었다.

    그녀는 검고 둥근 눈동자로 와인 잔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언젠가 저도 아버지와 같은 나이가 되어 저렇게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지요…. 슬픔과 슬픔이 만날지라도, 만날 수가 있다면 그건 온기가 되고, 고통과 고통이 만나 에너지가 되듯이 말입니다.”

    그녀의 집에 전세를 사는 여자가 있었다. 현역 판사인데, 부전공으로 명리학을 공부했다. 그녀가 어느 날 문득 우리 친구해요, 하고 말을 걸어왔고,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점을 봤다. 그녀는 조경란의 사주에 다른 사람에게는 드문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우선 고독(孤)이 2개, 문(文)이 2개, 나무가 네 그루 들어서 있다.

    고행의 염소자리

    그래서일까. 그녀는 나무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나무가 많은 여자에게는 불을 가진 남자가 좋다는 명리학적인 인생 해석이다. 불을 많이 가진 남자가 조경란에게 다가갔으면 좋겠다. 그녀의 재능과 사랑을 활활 태웠으면 좋겠다. 그녀는 자작나무가 좋다고 했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자라는 자작나무는 나이테가 촘촘해 좋은 목재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녀의 별자리는 염소자리다. 염소자리는 맨발로 돌산을 오르는 자리다. 그저 묵묵히 올라가는 고행의 자리다. 염소자리는 토성을 둘러싼 냉혹한 별자리다.

    그녀는 운동을 한다. 운동을 하면 몸에 탄력이 생길 뿐 아니라, 그 몸의 기운으로 문장에 탄력이 생긴다고 했다. 소설은 육체의 힘이 필요하다. 단단하고 탄력 있는 몸에서 그런 문장이 나온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맥주와 같은 맛있는 음식을 즐기기 위해서다. 매일 50분 정도 요가를 하고, 간간이 훌라후프를 한다.

    그녀의 집필습관은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에 잠을 자는 것이다. 자정 즈음에 맥주와 비스킷으로 요기를 하고 새벽 서너 시에 훌라후프를 돌리기도 한다. 간혹 선배 소설가 신경숙이 새벽에 ‘너 지금 훌라후프 하니?’라는 문자를 보내오기도 한다. 새벽에 문자를 보내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럼 그녀는 ‘네, 어떻게 아셨어요?’라고 답신한다. 그 말을 하는 모습을 보니 소녀 같다. 지독한 소설 ‘혀’를 쓴 작가에게 저런 면이 있나 싶어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점심약속을 꺼린다. 전형적인 올빼미 스타일의 글쓰기다.

    그녀와 와인을 마시는데, 술잔을 빙글빙글 돌려보라고 했다. 어색하게 따라 하는데, 큰 와인 잔에 와인이 흘러내린 흔적이 남았다. 조금 전 잔을 타고 올라왔던 와인이 내려가고 그 흔적이 남았다.

    “이걸 와인의 눈물이라고 해요. 멋지죠. 와인의 눈물.”

    그리고 몇 가지 간단하게 와인 마시는 법을 배웠다.

    “와인은 둘이 마실 때 좋아요. 두 사람이 와인 잔의 둥근 면을 부딪쳐 건배를 해요. 그때 잔이 울리는 소리가 좋거든요. 잔이 부딪칠 땐 서로의 눈을 보아야 해요.”

    그대로 따라 했다. 야, 이건 참 괜찮은 술이군 하는 생각과 더불어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반짝 빛난다. 그녀는 술을 좋아한다고 했다. 주량도 상당한 모양이다. 그녀가 좋아하는 술은 “맥주, 와인, 폭탄주, 차가운 정종” 네 가지다.

    와인에 대한 이야기를 받아 적었다. 잔에 따라 술맛이 달라진단다. 그 효과는 아마도 찻잔과 같은 모양이다. 냉수는 사발, 막걸리는 탁배기, 소주는 소주잔, 정종은 도꾸리, 와인은 풍만한 여인의 몸을 닮은 와인 잔이다. 커피 역시 마찬가지다. 나 역시 내가 좋아하는 커피 잔에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 행복하다.

    그녀는 이제 불혹의 나이다. 40세는 모든 인간에게 각별한 나이다.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기도 하다. 내 주위에 있는 많은 친구가 40세에 중요한 결정을 했다. 나 역시 안락한 공간을 떠나 방랑을 시작했다. 지난한 생이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작가로서, 여자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유연해지는 나이 같기도 해요. 그리고 생에 대해서 일희일비하고 싶어요. 행복한 상태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해요. 즐거운 일이 오면 즐기고, 바늘처럼 나를 찌르면 아프고, 행복을 즐길 줄 알아야 고통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팽팽한 긴장의 줄

    조경란은 고흐가 그린 그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붓 터치가 강렬하고 두껍고, 아름답고, 또 무섭다. 아름다움은 두려운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고흐 이야기도 했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고 했다.

    “내 그림이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에서 얼마나 뒤처져 있는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게 고통스럽다.”

    그녀는 미국 여행길에 하버드대 미술관에서 사온 고흐 엽서를 집필실 책상 앞에 붙여놓았다. 그녀는 이 고흐의 글에 공감했다. 자신 역시 그런 심경이지만, 좌절하지 않고 비하하지도 않고, 내가 쓰고 있는 소설이 바로 작품이라고 생각하면서 쓴다.

    고흐의 작품이나 조경란의 작품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은 그러하다. 더불어 이러한 자의식이 없다면 자신은 무너질 것이라고 했다. 예술가는 어느 순간에도 긴장감을 놓으면 안 된다. 예술가는 늘 그러한 팽팽한 긴장의 줄을 절벽에서 부여잡고 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 줄을 놓아버린다면 깊은 골짜기로 굴러 떨어져 소리 없이 사라진다. 무섭고도 가여운 생명의 끈이 팽팽할수록 거기에서 울리는 소리가 깊고 아름답게 떨리면서 파장을 만들어낸다. 그 파장이 독자의 가슴에 마음결로 스며들 때, 예술가는 비로소 안도하고 두 발을 쭉 편다.

    카프카는 소설가란 글이 안 써지는 순간일지라도 책상을 이로 물고라도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녀의 홍송 책상이 더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은 조경란의 페르소나가 그 자리에 앉아 뿌리를 깊게 내릴 때다.

    1990년대 나는 광화문에서 한시절을 보낸 적이 있다. 서소문에 직장이 있었고, 미혼이었다. 퇴근하고 나서 직장 동료나 친구들과 광화문에서 술을 먹고 밥을 먹었다. 광화문 뒷골목 감자탕집이나 허름한 선술집들은 저녁에서 밤으로 이어지는 나의 또 다른 삶의 공간이었다. 밝은 대낮에 서소문 일터에서 일을 하고, 해가 지면 광화문 뒷골목을 어슬렁거렸다.

    돌이켜 추억하니 그것은 음예공간이기도 했다. 빛과 어둠이 서로 뒤섞여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공간, 그 음예공간에 유독 반짝이는 고양이 눈빛이 있다. 한겨울날, 뭔가에 상심해서 술에 취했다. 힘든 몸을 가누기 어려워 광화문의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오다 골목길의 계단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때 고양이 한 마리가 내 앞을 휙 지나갔다. 섬광처럼 빛나는 눈동자, 나는 그 순간 무언가를 보았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면서 고양이가 사라진 어둠 속을 응시했다. 골목길은 컴컴했다. 그 고양이는 잠시 나에게 사랑을 보여줬던 것일까.

    “사랑은 음악이고 음식”

    사랑이 나에게 무엇이었을까? 조경란의 책 ‘혀’를 점을 보는 심경으로 펼쳐본다. 조경란씨 뭐라고 좀 말해봐. 247쪽이 펼쳐진다. 연필로 줄을 그어 놓은 이런 문장이 있다.

    “사랑은 음악과 같았다. 배우지 않고도 그것에 대한 이해와 감동을 느낄 수 있으며 머리와 가슴이 동시에 반응하는, 사람은 음식과 같았다. 실제로 먹어보지 않고도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침이 고이고 식욕이 느껴지는. 사랑은 음악이고 음식이다. 환희에 찬 아우성이 온몸으로 느껴지고 밀어닥쳤다 탄식하게 하고 고양되며 격렬하게 하는, 혼란에 빠질 수 있으며 갈망으로 목이 타오르게 하는, 단순하게 시작되어 더 이상 숨죽이고 있을 수 없게 하는, 온몸을 자극시키는 아름답고 관능적인 것. 정신적인 만족감과 육체적인 만족감을 동시에 주는 것.”

    이 문장을 옮겨 쓰니 드보르자크 8번 교양곡 3악장을 듣고 싶어진다. 의자에서 일어나 턴테이블로 간다. 천으로 LP판을 잘 닦아내고 날카로운 바늘을 음반 위에 올려놓았다. 음악을 들려주는 턴테이블의 바늘이 요리사의 작은 칼처럼 보였다.

    음악을 들으면서 허기가 져 사과를 과도로 깎았다. 붉은 사과 껍질이 벗겨진 자리에 과즙이 묻어 과도를 타고 흐르다 멈춘다. 문득, 눈물이 난다. 고양이 눈빛이 반짝거린다. 밤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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