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호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함석헌

‘고난의 민중역사’ 풀무질해 동서양 사상 융합

  • 윤무한 언론인, 현대사연구가 ymh6874@naver.com

    입력2008-07-31 14: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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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 사상’으로 잘 알려진 함석헌은 독자적 사관(史觀)으로 체계적 통사를 쓴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바로 그 책. 해석의 특이함과 독창성으로 당대에는 인정조차 받지 못했지만 6·25, 4·19, 5·16, 그리고 군부독재 시대를 거치는 과정에서 민중사관의 토대를 만든 역사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너무나 다재다능했던 그는 신학자이자 언론인이기 전에 탁월한 역사학자였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함석헌
    의사를 배우려다 그만두고, 미술을 뜻하려다 말고, 교육을 하려다가 교육자가 못되고, 농사를 하려다가 농부가 못되고,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성경을 연구하자 하면서 성경을 들고 있으면서 집에선 아비노릇 못하고, 나가선 국민노릇 못하고, 학자도 못되고, 기술자도 못되고, 사상가도 못되고….”

    ‘수평선 너머’라는 시집 서문에 그려진 함석헌(咸錫憲·1901~ 1989)의 자화상이다. “지사여 유인(幽人)이여 원망하거나 한탄하지 말라 / 예부터 대재(大才)는 쓸 곳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라는 두보(杜甫)의 ‘고백행(古柏行)’의 마지막 절에서 함석헌을 연상하는 사람도 있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가슴에 화살 맞은 사람’으로 함석헌의 내면적 풍경을 짚어내면서 “모순! 모순덩어리, 그게 바로 함석헌의 앉은 방석!”이라고 했다. 과연 함석헌의 삶은 이렇게 보면 이런 것 같고 저렇게 보면 저런 것 같아서 금강산의 만물상 같다. 에머슨은 “위대한 것은 오해받게 마련”이라고 했지만, 인간 함석헌이 바로 그럴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

    함석헌 자신은 스스로의 인생을 ‘하나님의 발길에 차여’ 다녔다는 한마디 시적 표현으로 압축했다. 실제로 함석헌은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 그는 20세기가 막 시작하던 1901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관립평양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1919년 3·1운동에 뛰어들어 학교를 자퇴했다. 그때의 심경을 함석헌은 “먹은 대동강물이 도로 다 나오는 듯했다”고 표현했다.

    김교신·우치무라와의 만남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함석헌
    3·1운동은 함석헌의 인생을 180도로 바꿔놓았다. 평양고보에서 연락책임을 맡은 그는 시말서를 쓰고 복학하는 여느 학생들의 선택을 박차고 오산학교에 가게 됐다. 거기서 그는 평생의 스승 유영모(柳永模)와 남강 이승훈(南岡 李昇薰)을 만났다. ‘생각하는 사람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오산학교 시절 함석헌은 로맹 롤랑, 베르그송, 입센, 블레이크 등을 읽었고 타고르의 ‘기탄잘리’를 접하는 동시에 웰스의 ‘세계문화사대계’에 심취했다. 이들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함석헌은 역사에 눈떴고, 세계국가주의와 과학주의 사상을 접하게 됐다.



    1924년 함석헌은 동경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가 김교신(金敎臣)의 소개로 당대 일본 최고의 지성인이던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를 만나게 된다. 우치무라는 교회 를 지배하는 형식과 거짓에 저항, 무교회 신앙을 내세웠다. 이 신앙은 어떤 형식이나 의식에 얽매이지 않고 모여서 예배를 보았으며, 성경을 중심으로 삼고 십자가에 의한 속죄를 중시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함석헌

    함석헌이 오산학교 교원시절 스승으로 모신 3인. 왼쪽부터 이승훈, 조만식, 안창호.

    훗날 함석헌은 우치무라에게서 차츰 멀어져갔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게 대속(代贖)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 것이다. 사실과 상징을 혼동하는 것이 아닌가 해서였다. 대속이 이뤄지려면 예수와 내가 다른 인격이 아니라 하나라는 체험에 들어가야 한다고 함석헌은 생각했다. 대속을 감정적으로 강조하면 그 체험에 들지 않고 누군가 대신해줬다는 감정에 그치기 때문에 슬쩍슬쩍 넘어가기 쉽다고 함석헌은 봤다.

    요컨대 함석헌은 역사적 예수를 중시하지 않는다. 그가 믿는 것은 그리스도였다. 그의 그리스도는 영원한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런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내 속에도 있다, 그 그리스도를 통해 예수와 나는 서로 다른 인격이 아니라 하나라는 체험에 들어갈 수 있다, 그때 예수의 죽음은 곧 자신의 죽음이요 그의 부활은 곧 자신의 영혼의 부활이 된다, 속죄는 이렇게 해서만 성립된다, 그러므로 역사적 예수가 내 죄를 대신해 죽었다 해서 감사하게 여기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감정이며 도덕적으로 높은 지경이 되지 못한다, 그것으로는 곧 죄성(罪性)이 없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함석헌은 이렇게 판단한 것이다.

    1923년 9월 도쿄를 중심으로 한 관동지방 일대에 대지진(大震災)이 일어나 함석헌은 연옥과 같은 하룻밤을 보냈다. 그 하룻밤의 무서운 경험보다 더 무서운 충격은 조선인 학살사건이었다. 함석헌은 당시 조선인 대학살의 원흉은 국가주의라고 보았다. “국가란 이름 아래 나라를 도둑질해 가지고 있는 소수의 지배자, 그것이 제 권좌를 뺏길까봐 한 흉계가 조선인 학살이다…이 점에서…다 같이 반성할 것은…이 원흉(국가주의)을 잡아내는 일이다…”라고 하면서, 함석헌은 관동대지진의 제단에서 피를 한데 섞은 일본의 씨과 한국의 씨이 이 역사의 원흉·잔당을 잡아내 새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분이로구나’ 싶은 세 스승

    3·1운동, 오산학교에서의 학생시절, 관동대지진, 그리고 우치무라와의 만남을 잇따라 경험하는 가운데 함석헌은 한평생을 통해 놓지 않은 ‘세 가지 작대기 같은 생각’을 견지했다. 민족·신앙·과학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는 함석헌에게는 실제생활과 사상체계에서 아무런 충돌이나 모순 없이 하나로 융합될 수 있었다. 20세기의 우리 역사가 워낙 굴곡과 풍파가 심해 이 세 가지를 지닌 채 흔들림 없이 살다 간 인물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함석헌은 30대에 이미 세 가지를 융합해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살았다.

    한때 평안도에서는 어떤 일을 벌여 맹렬히 해나가는 것을 일컬어 “다북동을 일으킨다”고 했다. 홍경래가 민중을 동원해 썩어빠진 조선왕조를 허물어버리고 새 나라를 세우려 야망을 품은 곳이 다북동인 데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홍경래는 실패했다. 홍경래는 혁명의 껍데기를 세우고 지펴야 할 불의 장작을 준비했을 뿐, 민중의 가슴속에 정의와 자유의 정신을 일깨워주는 깊은 사상과 높은 도덕적 안목을 갖추지 못했다.

    1928년 동경고등사범을 졸업한 함석헌은 모교인 오산학교 교원으로 가게 됐다. 이 시기에 함석헌은 ‘저분이로구나’ 하는 스승을 셋이나 만났다.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이 바로 그들이다. 홍경래처럼 칼과 활을 들지 않고 민중의 붉은 가슴에 정신적 혁명의 불길을 일으키는 부싯돌 같은 이들이었다. 함석헌은 톨스토이와 간디를 존경했지만, 도산·남강·고당은 살아 있는 사람의 체취와 목소리를 접하는 가운데서 존경의 마음이 우러나는 것이었다.

    “겨울이 만일 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

    셸리의 ‘서풍에 부치는 노래’의 마지막 연(聯)이다. 이 시는 함석헌을 이해하는 관건의 하나다. 함석헌이 동경고등사범에 입학했을 때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일본의 한 젊은 경제학자가 함석헌에게 소개한 셸리의 시는 일생을 통해 그의 삶을 지배하는 좌우명이 됐다. 셸리는 함석헌이 몇 번이고 엎어질 때마다 그를 일으켜 세운 위로요 길동무며 ‘빈 들의 소리’였다. 함석헌의 ‘기다림의 철학’은 바로 셸리의 ‘서풍에 부치는 노래’에서 나왔다.

    ‘성서조선’에 ‘조선역사’ 연재

    함석헌은 1928년부터 1938년까지 10년 동안 오산학교에서 역사교사로 지냈다. 오산학교를 물러난 뒤 한두 해 동안 함석헌은 오산학교 주위를 맴돌았다. 그 후 함석헌은 창씨개명을 거부한 채 평양으로 떠나고 말았다. 그때부터 그의 생애는 가시밭길 그대로였다. 일제는 그를 ‘불온한 교사’ ‘불령선인’으로 지목해 내내 감시했다. 결국 그는 평양 대동경찰서에서 1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을 보냈으며, 광복된 지 꼭 100일 만에 신의주 사건으로 소련군 감옥에 갇히는 등 수차례 옥살이를 했다.

    “일제시대에 내가 감옥에 드나드는 것을 보고 민중은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었고, 해방이 되자 언제부터 친했던 것같이 가까이 오더니, 공산당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다시 멀찍이 섰고, 소련군 감옥에 가는 것을 보고는 ‘저 사람은 감옥 가는 것이 일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그들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민중을 믿지 않고는 전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마치 신을 믿지 않고는 신을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말은 곧 “병아리가 제 알을 깨고 나오듯이 씨이 저를 깨고 나오는 날이 올 것”을 굳게 믿었던 함석헌의 씨사상 핵을 보여준다. 씨이 깨면 곧 전체가 된다는 것이다.

    함석헌은 오산학교 교사 시절이던 1934년 2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22회에 걸쳐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이하 ‘조선역사’)를 연재했다. 당시 역사학계에는 일제 식민사관과 그에 맞서는 민족주의 사관, 그리고 유물사관이 있었다. 함석헌은 그 어느 쪽에도 서지 않은 채 시골의 민족 사립학교에서 고통스러운 사색의 우물을 파고들어가 한국 역사학계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한국사를 집필했다. 지도교수가 있는 대학도 아니고, 도서관도 참고서도 없는 시골에서, 자료라고는 중등학교 교과서와 몇 권의 참고서가 전부인 상태에서 함석헌은 머리와 가슴으로 씨름을 해야만 했다.

    “파리한 염소 모양으로 나는 씹는 것이 일이었다. 지푸라기 같은, 다 뜯어먹고 남은 생선 뼈다귀 같은, 일본 사람이 쓴 꼬부려댄 모욕적인, 또 우리나라 사람이 쓴 과장된 사실의 나열을 나는 씹고 또 씹어 거기서 새끼를 먹일 수 있는 젖을 내보자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65년에 간행된 ‘뜻으로 본 한국역사’(1950년 3월28일 간행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의 개정 증보판) ‘네 째판에 부치는 글’에서 함석헌이 술회한 대목이다. 그는 형산(荊山)의 박옥(璞玉)을 얻은 것처럼, 고난의 한국사 속에 옥이 들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 ‘수난의 여왕’(역사) 앞에 이 글을 헌사처럼 내놓았다. ‘성서조선’에 발표되어 광복될 때까지 10여 년 동안 함석헌의 ‘조선역사’는 역사가들로부터 묵살당했고, 잡지독자래야 기껏 300여 명을 넘지 못했다.

    사관에 의한 通史로는 유일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함석헌

    1950년경 평생의 스승이던 다석 유영모(왼쪽)와 함께 찍은 사진. 오른쪽 끝이 함석헌 선생.

    ‘조선역사’는 1950년 3월 단행본으로 간행되면서 비로소 일반인에게도 소개됐다. 단행본이 나온 후에도 우리 역사학계는 그 사관의 이질성(?)과 서술의 객관성을 문제 삼아 역사 연구서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역사’는 전문 역사가가 아니라고 외면하기에는 너무나 새로운 해석과 의미로 우리 역사학계에 육박했다.

    손꼽히는 언론인이며 역사학자이던 천관우(千寬宇)는 ‘조선역사’를 평가하되, 한국 근현대사에서 어떤 특정한 사관을 가지고 한국사를 일관되게 꿰뚫어 본 거의 유일한 역사책이며 자기는 그 책을 손에 잡은 후 시간을 잊고 탐독했다고 극찬했다.

    한국사를 전공한 이만열(李萬烈)은 “한국 근대사학의 입장에서 어떤 개성적인 역사관에 의해 한국의 통사(通史)를 서술한 역사책이 (따로) 없음을 알게 되었다…신채호가 조선의 상고사를, 박은식이 한국의 근대사를 썼으나 결국 통사를 쓰지 못했고…유물사관론자들도 단대사(斷代史)를 남긴 적이 있어도 전 역사를 일관되게 서술하지는 않았다. 소위 실증사학자들도 일제하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일제하의 통사치고 개성적인 사관에 의한 통사는 ‘조선역사’ 이외에는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이만열, ‘한 역사학자에게 비친 함석헌선생’, 김용준 엮음, ‘나의 스승 함석헌’, 해동문화사, 1991)고 평가했다.

    ‘조선역사’에 대한 평가는 보는 이의 처지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겠으나, 함석헌의 역사관이 얼마나 독특한지를 명쾌하게 보여주는 것은 1950년에 간행된 단행본의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성서적 입장에서 본’이라는 제목의 구절이 일반사람에게는 걸림돌이 될 듯하니 빼면 어떤가 하는 의견이 잠깐 나왔으나, 그것은 사슴에게서 뿔을 자르는 것 같아서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이 글이 이 글이 된 까닭은 성경에 있다. 쓴 사람의 생각으로는 성경적 입장에서도 역사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자리에서만 역사를 쓸 수 있다. 똑바른 말로는 역사철학은 성경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서양에도 없고 동양에도 없다.”(‘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머리말)

    ‘성서조선’에 처음 실린 ‘조선역사’는 일제하의 칠흑 같은 세월 동안 “바빌론 거친 들에 지나가는 바람결에 잠깐 들렀다가 들 끝에 사라져버리는 외로운 종의 앓는 소리같이 아주 없어져버린 듯”했다. 그 후 광복이 되어 일본이 짓밟고 찢다 남은 휴지더미 속에서 이리저리 애써 찾고 모아 1950년에 고난의 마디를 또 한번 더하고 난 뒤 단행본으로 세상의빛을 본 것이다.

    고난은 조선의 가시면류관

    함석헌은 ‘조선역사’를 통해 우리나라 역사에 깔려 있는 기조를 ‘고난의 역사’라고 봤다. 그는 1930년대에 중학교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면서 한때 교사가 된 것을 탄식했다. 우리 민족은 중국이나 로마나 페르시아나 터키가 건설한 것과 같은 대국가를 건설해본 적이 없다, 애급이나 로마나 희랍이나 중국 등과 같이 세계문화에서 뛰어난 자랑거리도 별로 없다, 피라미드나 만리장성 같은 엄청난 규모의 유물도 없고 대발명가도 없다, 세계사에 일대 변혁을 일으킬 만한 인물이나 사상도 없었다, 우리 역사에 있은 것은 치욕과 분열과 압박과 상실과 좌절의 역사였다고 봤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고난의 역사는 ‘고구려의 죽음’에서 정점을 이룬다고 보았다. 수(隨)·당(唐) 등의 흉악한 도둑을 용하게 물리치면서 피투성이가 된 고구려는 신라가 염치없이 당나라를 끌어들여 앞뒤로 들이침으로써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민족통일의 제일 첫째의 자격자인 고구려는 하다하다 못해 제 비통한 주검을 전선 위에 가로놓은 것으로써 겨레에 대한 마지막 공헌으로 삼고 갔다”며 고구려의 멸망을 애도했다. 그가 보기에 신라의 통일은 청천강 이북을 넘지 못한 것으로 통일이 아니라 요절이었다.

    조선조 500년은 함석헌이 보기에 ‘중축(中軸)이 부러진 역사’로 또 다른 수난의 연속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 다하지 못한 책임 때문이요 잃어버린 정신 때문이다.

    “중축 없는 바퀴를 밀면 밀수록 더 어지러이 이리 굴고 저리 굴듯이 역사도 정신이 빠지면 아무리 정치를 하고 모든 문화활동을 하여도 어지러울 뿐이다.”

    중축이 부러진 조선은 결국 망국의 한을 안은 채 일제 식민지로 종막을 고하게 됐다. ‘조선역사’를 다 쓰고 나서 곧이어 함석헌은 ‘성서조선’ 1936년 5월호부터 1938년 3월호까지 22회에 걸쳐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를 연재했다. 그러나 1940년 함석헌이 평양경찰서에 1년간 수감됨으로써 원고는 송두리째 행방불명이 됐다. 다만 일부분이 어쩌다가 찾아져서 ‘함석헌 전집’(한길사, 1983년 간행) 9권(‘역사와 민족’편)에 수록됐지만, ‘조선역사’의 역사철학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일제 강점기의 참담한 민족적 암흑 속에서 함석헌은 성서가 구원의 손길을 뻗쳐 주는 진리라고 생각했다. 기독교의 섭리사관은 그 표현에서 종교적이고 관념적이지만, 실상 아주 현실주의적인 목적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일제하라는 엄혹한 조건 속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인류 구원의 길이듯이, 방황과 모색에 지쳐버린 젊은이들 앞에 새로운 역사와 세계관의 월륜(月輪)을 보여주려 했다. 그가 지배(紙背)에 깔아놓은 역사관은 일제 앞에서는 섭리사관이지만, 다른 한편 씨, 곧 민중의 역사였다.

    함석헌은 우리 역사의 기조를 고난의 역사로 규정하면서, 고난이야말로 조선이 쓰는 가시면류관이라고 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의 역사도 요컨대 고난의 역사라고 깨달을 때 이제껏 학대받은 비녀(婢女)로만 알았던 그녀야말로 가시면류관의 여주인공임을 알았다고 뒷날 토로했다.

    ‘성서’의 뿔을 자르고 ‘뜻’으로

    함석헌의 역사철학에서 진정한 새로움은 1930년대에 이미 역사의 주체와 담지자는 씨, 곧 민중이라고 민중사관을 내세웠다는 점이 있다. 그는 계급사관·민중사관·영웅사관과 닫힌 민족사관을 뛰어넘으려 했다. 그의 역사철학이 일제 강점기에 형성됐기 때문에 민족주의적 색채를 띤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함석헌은 국가주의와 밀착되고 변질된 폐쇄적 민족주의를 거부한다. 생명의 역사는 살아 있는 역사요 끊임없이 껍질을 깨어가는 역사이기에 가장 단단한 껍질의 하나인 국가주의와 폭력주의를 그는 강력하게 배격했다.

    고난사관은 단순한 거대담론이 아니다. 그의 담론이 헤겔의 관념론에 머무르지 않는 것은 그의 사관이 한국의 지리와 민족성과 실제적 역사과정의 세 가지 측면에서 실증적으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그 실증에 할애된 지면이 188쪽이나 되는데, 이는 ‘조선역사’의 3분의 2에 해당된다. ‘조선역사’의 끝부분에서 함석헌은 광복을 맞은 한반도 상황을 탁월한 통찰력으로 이렇게 짚고 있다.

    “이제 우리는 본래 평화적인 민족인 것, 고난의 터전을 맡았던 것, 대국가를 못 이룬 것, 식민지 노릇을 해본 것, 전패국(戰敗國)에 속하면서 전승국이 된 것, 해방이 되면서 이중의 구속을 받게 되는 것, 세계의 2대 조류가 이 나라의 복판에서 대립하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어서 함석헌은 미래의 함축이 없는 역사는 없으며 예언 없이 역사는 없다고 단정한다. 과연 함석헌은 6·25전쟁 발발 1주일 전 YMCA의 한 성서모임에서 “나라 꼴이 이럴 수가 있는 것이냐? 지금 이 밑에서는 화산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데, 그 분출구 위에 살짝 덮여 있는 얇은 암반이 마치 만세반석이 되는 양, 이렇게 까불고 있는 이 나라는 장차 어찌 될 것인가” 하고 개탄했다. 그의 예언대로 이 나라는 화산의 분출 같은 또 한 차례의 민족적 재앙을 맞기에 이르렀다. 전쟁의 불길에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된 것이다.

    광복을 맞고 전쟁을 겪으면서 함석헌은 기독교적 사관 중심에서 큰 전환을 맞이한다.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라고 그는 자신의 세계관을 수정했다. 보다 많은 중생, 의인(義人)·죄인·문명인·야만인과 유신론자·무신론자들이 다 같이 믿으며 살고 있는 종교는 무엇일까를 궁구(窮究)하면서 ‘뜻’을 찾아냈다. 뜻이란 하나님이, 생명이, 역사가 그저 하나라고 해도 좋은 그런 것이다. 정통 신학자들이 크게 반발하는 가운데 일반인, 특히 젊은이들은 ‘성서적 입장’이란 사슴의 뿔을 자르고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밀물처럼 환영했다.

    1950년대 이후 함석헌은 예수회 신부이며 고생물학자인 테야르 드 샤르댕의 창조적 진화사상과 노장철학 및 퀘이커교 사상을 아울러 통섭해나갔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조선역사’의 문장을 손질하고 내용도 새로 고쳐 ‘뜻으로 본 한국역사’(이하 ‘한국역사’)를 간행했다. 현재 알려지고 있는 것은 그 증보판이다. ‘한국역사’ 제33장 ‘6·25’에서 함석헌은 6·25전쟁을 이렇게 평가했다.

    “38선은 민족 시험지”

    “6·25전쟁은 38선 때문인데 38선이란 무언가? 대체 그것을 만든 것은 누구인가? 루스벨트와 스탈린인가? 아니다. 그러면 우연이게. 38선이 생기는 데는 역사적 필연이 있다…38선은 세계 역사의 금이다. 미국 민주주의와 소련 공산주의의 금새를 매겨놓는 금이다. 현대문명의 낙제선이다.”

    38선의 뜻은 동시에 ‘하나님이 이 민족을 시험하려고 낸 시험문제’라고 함석헌은 보았다. 해방을 시켜주되 그냥 주지 않고 나라 한복판에 금을 긋고 그것을 돌파해보라고 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만큼 학대받고 천대받았으면 자유와 통일의 귀중함을 깨달았어야 할 것이고, 고난의 철학을 얻었어야 할 것이다. 스스로 함이 생명의 법칙일진대, 일제 36년이란 고난의 풀무 속에서 역사의 모든 찌꺼기와 때와 허물과 혼합물들을 모두 빼서 씻고 오직 하나만을 남겼어야 할 것이다. 오직 한 나라, 새 나라의 믿음이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함석헌

    자신이 1970년 창간한 ‘씨의 소리’를 읽고 있는 함석헌.

    함석헌은 “도리를 무시하는 민족의 부조리는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6·25다”라고 외쳤다. 50년도 훨씬 전에 38선에 대한 해석을 이만큼 한 탁견을 다른 이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6·25 후반에 함석헌은 “이제 이 금수강산은 세계의 공동묘지가 됐다”고 탄식했다.

    “중국이 먹었다 토하고, 만주가 먹었다 토하고, 영악한 일본이 먹었다가도 아니 토하고는 못 견딘 나라, 흉악한 러시아가 침을 흘리면서도 못 먹었던 나라, 이 나라에 중국이 도로 나오고, 만주가 또 오고, 러시아가 다시 오고, 처음으로 문을 열어 주었던 미국이 또 왔다…이 ‘한나라’는 ‘하나의 세계’의 제단이 되었다…이 늙은 갈보, 거렁뱅이 처녀, 수난의 여왕이 새날의 임금을 낳으려고 하는 산통의 부르짖음이 6·25다, 4·19, 5·16이다, 그런데 낳을 힘이 없다? 아기를 낳게 되어 가지고도 낳을 힘이 없다는 계집아, 너와 아기가 다 죽을 것이다.”

    알짜 우리 이론 ‘씨’의 역사철학

    함석헌은 이어서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사야 선지자의 말로써 8·15광복과 6·25전쟁, 4·19혁명, 그리고 5·16을 모두 새날의 임금을 낳으려는 산통의 부르짖음으로 해석하고, 새날의 영광을 우리 민족에게 임재(臨在)하게 하는 조물주의 섭리를 굳게 믿었다.

    광복 전 학생들 눈에 모르는 것이 없어 보였다고 해서 붙은 별명 ‘오산 도깨비’. 그로부터 20여 년 뒤 함석헌은 시인 고은의 말처럼 ‘겨레의 할아버지’가 되어갔다. 사학계나 철학계 및 기독교 신학계에서 볼 때 기껏 재야 사학자 또는 종교적 이단자 취급을 받던 함석헌에 대해서 훗날 서양사학자 노명식은 “20세기 세계 사학사에서 선구자적 위치”라고 상찬했고, 한국사학자 조광은 “1930년대 한국 사학사의 이해과정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인물”로 높이 평가했다.

    ‘교수신문’은 2001년 ‘우리 시대의 고전’ 철학 부분에서 ‘한국역사’를 독창적인 사상서로 꼽았다. 또 근대학문 100여 년 동안 창조해낸 우리 이론 스무 가지 중에 함석헌의 ‘씨의 역사철학’을 선정, 삶과 신앙 안에서 길어 올린 함석헌의 민중사관을 높이 평가했다.

    함석헌의 역사철학은 동양사상과 기독교 사상을 아우른 나선형의 발전사관을 보여줌으로써 동서사상의 지평이 융합하는 한 범례를 보여줬다. 힌두교·불교·유교·노장사상이 원형 반복적 역사관을 보여준다면, 기독교는 목적의 왕국을 향해 직선형으로 나아가는 역사관이다. 함석헌은 이 두 사상이 만나 반복과 성장과 창조적 새로움으로 통합·조정되는, 원추형의 기하학적 도형을 닮은 나선형 발전사관을 제시했다.

    지명관은 ‘조선역사’를 기독교 신앙과 조선의 전통과 과학을 함께 만족시키고자 한, 철저히 현재주의적인 역사관이라며 그 당대성을 강조했다. 신학자 김진은 역사를 단순히 경제적·정신적·계급적 법칙대로 굴러가는 레일 위의 행진이 아니라, 씨-역사-하나님(초월적 힘)이 맞물리는 자유의 광장 속에서 창조적 실재를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본 점에서 함석헌의 역사철학을 혁명적 역사관이라고 했다.

    또한 철학자 김상봉은 함석헌의 고난으로서의 역사에 주목하면서 “역사의 아픔과 슬픔을 주체의 슬픔으로 연결, 그리고 이 슬픔의 동일성, 슬픔의 관련을 통해 낯설음과 무관심 속에 단절되어 있었던 지금과 역사가 자기동일성의 지평 속으로 통일된다”고 하고, “회상하는 오늘의 나와 회상되는 역사적 내가 자기분열을 극복하고 참된 의미에서 하나의 주체로서 자기를 정립하게 하는 고난의 보편적 성격”을 읽어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함석헌

    1953년 발간된 ‘사상계’ 창간호 표지.

    1950년대 후반에 들어 함석헌은 홀연 이 땅의 메타 지식인으로 등장했다. 1956년 1월호 ‘사상계’에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발표, ‘사상계’는 하루 아침에 낙양의 지가(紙價)를 올렸다. 함석헌은 이제 분단시대의 들머리에서 보기 드문 언론인으로 나서 ‘사상계’와 함께 우리 현대사에 커다란 걸음을 내디뎠다.

    ‘한국 기독교…’를 통해서 함석헌은 한국교회를 “뚱뚱하고 혈색도 좋고 손발이 뜨끈한 듯하나, 그것이 정말 건강일까? 일찍이 노쇠하는 경향이 아닌가?” 하고 쓴소리를 내뱉었다. 함석헌이 보기에 “신사참배 문제 때에도 그랬고, 미군정 시대에도 그랬고, 공산주의 침입에 대해서도 그랬고, 6.25 때에도 그랬고, 교회는 결코 이겼노라고 면류관을 받으려 손을 내밀 용기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함석헌은 한국의 교회를 “먹을 것 다 먹고 고치에 든 누에”에 비유했다. “죽은 누에는 자기의 힘이 아닌 신비에 의하여 변화해 영광스러운 생명으로 나오는 날이 올 것이요, 그때에 이때껏 보호와 압박의 일을 기이하게 겸해 하던 집을 대번에 깨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자기반성과 전망을 내놓았다.

    “석조 교회당이 일어나는 것은 진정한 부흥이 아니”라고 하면서, 함석헌은 “그 종교는 일부 소수인의 종교지 민중의 종교는 아니며, 지배하자는 종교지 봉사하고 정진하는 종교가 아니다. 석조전이 높아가면 그 밑에, 그 눌림 밑에 산 생명의 씨가 있어 역사적 대세의 분위기를 맡아야 할 것”이라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이렇게 해서 후일 함석헌-윤형중 신부 사이에 논쟁이 벌어져 한국 기독교계뿐 아니라 지성계에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6·25는 우리 민족 전체가 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처절하고 참담한 집단 경험을 한 대사건이었다. 그런데 6·25가 터진 지 8년, 휴전이 성립된 지 5년이 지나도록 동족이 서로 총부리를 겨눈 그 무서운 경험이 우리 민족 전체에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단 한 사람도 입을 여는 일이 없었다.

    1958년 8월호 ‘사상계’에 함석헌은 ‘6·25 싸움이 주는 역사적 교훈’이란 부제를 붙여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발표했다. 이 글에서 함석헌은 6·25로 한반도는 고래싸움에 등이 터진 새우 꼴이 됐고, 남북한은 각각 미국과 소련·중국의 꼭두각시 놀음에 놀아났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함석헌은 “6·25 남북 싸움의 속원인은 스탈린·김일성·루스벨트에게 있지 않고 이성계에게 있다”고 성찰하면서, 북진통일·반공만을 내세운 이승만 정권을 ‘정육점의 칼’을 가지고 나라를 잡으려 한다고 비판, 또 한 차례 필화(筆禍)를 겪었다. 이때 함석헌은 20여 일간의 ‘참선’(감옥살이)을 했다.

    ‘사상의 유격전’

    한국인은 5·16이 일어나기 전까지 쿠데타란 걸 모르고 살았다. 기껏 1950년대 후반 낫세르의 이집트혁명, 카스트로의 쿠바혁명 따위를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아물거릴 정도였고, 나머지는 아프리카의 이름조차 생소한 나라에서 영관급 장교 몇 명이 몇 백명의 군인을 앞세워 땅 따먹기 하듯 나라를 뒤집어엎는 것을 봤을 뿐이다. 그런 쿠데타가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것이다. 나라 전체가 중무장한 계엄군의 탱크와 총칼 아래 무거운 침묵에 갇혀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정확히 말해 ‘사상계’ 1961년 7월호에 ‘5·16을 어떻게 볼까’란 글이 실렸다. 5·16 한 달여 만에 침묵을 깨고 맑은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다. 그야말로 원자폭탄이었다. 함석헌은 이 글에서 우리나라에서 혁명이 있었다면 그것은 4·19혁명인데 5·16은 4·19를 뒤집어엎고 일어났다고 했다. 5·16과 4·19를 비교하면서 함석헌은 4·19를 일으킨 학생을 잎에 비유하고 5·16을 일으킨 군인을 꽃에 비유했다. 함석헌은 나무가 주인이고 그 나무는 민중이라고 했다. 진짜 혁명은 나무, 곧 민중이 하는 것이지 학생이나 군인이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5·16은 또 아주 잘못된 불장난으로, 늦가을 잎사귀처럼 볼썽사나운 꼴 보이지 말고 어서 속히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준엄하게 꾸짖었다. 이때부터이던가, 그를 ‘한국의 간디’라고 일컫는 사람이 많아졌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함석헌

    1989년 2월8일에 있은 함석헌 선생 영결식.

    ‘씨’ 하면 함석헌을 연상하는 이가 많다. 함석헌은 ‘바보새’ 또는 ‘신천옹(信天翁)’이라고 자신을 불렀지만, 사람들은 함석헌의 아호로 ‘씨’을 연상할 정도다. 4·19혁명 10주년을 기리며 함석헌은 1970년 4월 ‘씨의 소리’ 창간호를 냈다. 이때 ‘사상계’는 이미 독재정권에 의해 고사됐다. 함석헌은 창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군사정권에서 제1차 공화당 집권으로, 거기서 제2차 집권으로, 또 거기서 삼선개헌으로 나아감에 따라 민주주의는 전락의 길로만 줄달음쳤습니다…그럴수록 기대되는 것이 지식인인데, 그 지식인들이 온통 뼈가 빠졌습니다…학원에 기관총·최루탄이 들어와도 모른 체하고, 친구가 바른말 하다가 정치교수로 몰려 쫓겨나도 못 본 척하고 있었습니다…내가 몇 해 전에 사상의 게릴라전을 해야 된다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정규군이 아무리 크고 강해도 유격대는 못 당합니다.…사상의 유격전은 더욱 필요합니다.…마비된 양심에 위로와 희망을 주어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씨의 소리’는 첫 호를 낸 다음 한 호를 더 내고 바로 발행정지 처분을 받았다. 5·16을 ‘오일륙(汚一戮)’으로 규정, ‘한 칼의 더러운 도륙’이라며 정권에 정면 도전했기 때문이다. ‘씨의 소리’는 1971년 7월 대법원 선고공판에서 승소해서 다시 발행할 수 있게 됐으나, 1980년 전두환 정권의 계엄령으로 다시 폐간됐다가 6·29 선언 이후 1988년에야 복간됐다.

    1972년 7·4공동성명이 발표되자 함석헌은 ‘씨의 소리’ 6, 7월 합병호에 ‘위선(僞善)하는 국민’을 실었다. 그 마지막 부분에서 함석헌은 “시대는 늘 민중이 먼저 아는 법입니다. 민심-천심 사이에 직통전화가 있습니다. 서울-평양 사이에 직통전화 놓는대봤자 민(民)의 입과 귀는 가닿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 이상 믿을 것 없습니다. 민중이 소위 당할 뿐일 것입니다”라고 박정희 정권의 속셈을 꿰뚫어 보았다.

    ‘나는 빈 들에서 외치는 소리’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벌이던 1970년대에 함석헌을 가장 슬프게 하고 분노케 한 것은 둘이다. 하나는 1970년 이름도 모르던 청년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이요, 또 하나는 함석헌의 후반 생애 20여 년 동안 모든 것을 같이한 ‘친구’ 장준하의 죽음이다.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미국에서 들은 함석헌은 “태일아! 내가 너를 죽였구나” 하면서 밤새 목놓아 울었고, 장준하가 1975년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에서 실족사하자 “장준하가 죽었다! 장준하가 죽었다? 이 한마디가 이 8월의 노염(老炎)보다 무더운 공기마냥 부쳐도 부쳐도 또 오고 또 와서 가슴을 누릅니다”고 통곡했다.

    1979년과 1985년 함석헌은 두 번에 걸쳐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됐다. ‘간디도 받지 못한 노벨평화상’에 대해 함석헌은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다. 1987년 박종철이 고문·치사하고 이어서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숨진 뒤 함석헌은 서울대 병원에 실려가 담도종양 제거수술을 받았다.

    “오후에 온실에서 넘어지다. 함석헌 부고 받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함석헌
    尹武漢

    ● 1943년 대구 출생

    ● 고려대 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수료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경향신문 정경문화부장·부국장, 민주일보 편집국장

    ● 1993~98년 대통령비서실 통치사료비서관, 강원대 사학과 초빙교수

    ● 저서 및 논문 : ‘인물대한민국사’ ‘한국사 정립을 위한 새로운 시론’


    함석헌이 그의 부음이 알려지기 딱 7개월 전 책상머리에 남긴 일기의 한 토막이다. 그의 직감이 맞아떨어져서인지 함석헌은 1989년 어느 새벽, 매일의 삶을 매일 완결짓는 함석헌식 종말론적 삶의 방식에 따르면, 그의 생애에서 통산 3만2105일째 되는 날, 광망한 우주 안으로 한 점 씨이 되어 떨어졌다. 2005년, 광복 60주년을 맞아 KBS가 분야별 학자 1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함석헌은 한국 현대 지성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 1위로 꼽혔다. 오늘날의 민중신학자 계열과 민주화·시민·노동·평화·생명운동의 제1세대치고 함석헌의 사상적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경기도 연천군 간파리 함석헌의 묘소에는 그 흔한 비석도, 묘역을 장식하는 어떤 기념물도 없다. 다만 묘 앞에 책을 펼친 형상으로 조각되어 있는 작은 단(壇)이 하나 있다. 거기에는 함석헌의 ‘나는 빈 들에서 외치는 소리’의 한 연(聯)이 새겨져 있다.

    나는 빈 들에 외치는 사나운 소리

    살갗 찢는 아픈 소리

    나와 어울려 부르는 너의 기도 품고 무한으로 내 다시 돌아오는 때면

    그때는 이 나 소리도 없이

    고요한 빛으로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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