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호

벌교 백만장자 서도현 참살 사건

돈 앞에 무너진 인륜, 도대체 돈이 뭐길래?

  • 입력2008-08-01 11: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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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교 백만장자 서도현 참살 사건

    순천 본전통. 집안에서 괴변이 잇따라 발생하자 김회산은 벌교를 떠나 순천으로 이주한다.

    1915년 7월11일, 장마가 끝물에 접어든 후텁지근한 일요일 저녁. 서도현은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면에 자리 잡은 고래등 같은 기와집 안방에서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전라도에서 손꼽히는 부호가 된 서도현은 쉰 살 되던 해인 1909년에 고향 인재 육성을 위해 사재를 털어 우신학교(지금의 벌교초등학교)를 설립해 명망을 얻었다. 시집간 둘째딸 서소아가 오랜만에 친정에 들러 저녁식사 분위기는 여느 때보다 화기애애했다.

    착하기만 한 아내

    환하게 웃으며 딸과 함께 이야기꽃을 피우는 아내 김회산을 보노라니, 서도현은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김회산은 40여 년간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도 남편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않은 고마운 아내였다. 아내는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한결같이 서도현을 믿고 따라주었다. 사재를 털어 우신학교를 세울 때도, 흉년이 들어 굶어 죽어가는 이웃들에게 무상으로 곡식을 나눠줄 때도 아내는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푼이라도 더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하지만 큰 부호가 되어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서도현에게도 딱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었다. 슬하에 딸만 셋을 두었을 뿐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아우 서도길의 큰아들 서장인을 양자로 들였지만, 허약한 서장인은 어려서 죽었다. 다시 서도길의 둘째아들 서용인을 양자로 데려왔지만, 서용인은 기질이 허랑방탕하고 철이 없어 부모 속을 무던히도 썩였다. 서도현은 양자 하나로는 안심이 안 돼 두 명의 첩을 들였다. 첫 번째 첩은 서병원을 낳았고, 두 번째 첩은 임신 중이었다.

    김회산은 속만 썩이는 양자 서용인은 물론 첩의 자식 서병원까지 친아들처럼 살뜰히 보살폈다. 서도현은 바보같이 착하기만 한 아내가 한없이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저녁 밥상 앞에서 딸과 함께 웃고 떠드는 김회산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며 서도현은 앞으로라도 아내에게 잘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가족들이 각자의 방으로 흩어지자 서도현은 오랜만에 아내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늙은 아내는 부끄러워 새색시처럼 얼굴을 붉혔다. 서도현 내외는 이부자리에 누워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지난 세월을 오순도순 이야기하다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들이닥친 강도단

    “서도현! 서도현, 나와!”

    서도현은 마당에서 들리는 고함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서도현이 언짢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오밤중에 대체 어떤 녀석이야!”

    뒤늦게 잠에서 깬 김회산도 화들짝 놀라 남편을 따라 일어났다. 서도현이 성냥불로 촛불을 켜자, 누군가가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누, 누구시오?”

    복면을 쓴 괴한의 손엔 권총이 쥐어 있었다.

    “잔말 말고 따라 나와!”

    괴한이 대뜸 서도현의 상투를 잡아끌었다. 뒤따라 들어온 괴한은 김회산의 머리채를 부여잡고 방문 밖으로 끌어냈다.

    “왜, 왜 그러시오?”

    “시끄러워!”

    괴한이 서도현의 복부를 주먹으로 강타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꺼꾸러진 서도현을 괴한이 마당으로 끌어냈다. 마당에 쓰러진 서도현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문마다 총칼로 무장한 복면 괴한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어림잡아 10명은 돼 보였다. 서도현은 비명을 질러봐야 구해줄 사람이 없음을 깨닫고 순순히 괴한의 지시에 따랐다. 하지만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던 김회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보쇼, 젊은 양반! 대체 이 늙은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리 험하게 다루쇼. 당신은 부모도 없소?”

    “아니, 이 할망구가!”

    사내가 김회산의 뺨을 후려갈겼다.

    “어이쿠, 어이쿠. 여보게들, 사람 죽어. 방 안에만 숨어 있지 말고 어서 나와 구해주구려. 어서!”

    김회산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집안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괴한들이 구둣발로 짓밟았지만, 김회산은 사력을 다해 저항했다. 노복들은 총칼 든 괴한들이 무서워 방 안에서 벌벌 떨기만 할 뿐, 차마 주인 내외를 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복면 괴한들이 서도현 내외를 마당에 꿇어앉히고 쇠몽둥이를 어루만지며 협박했다.

    “돈! 돈은 어디에 숨겨뒀나?”

    “흥, 가난한 사람들 도와줄 돈도 모자라는 판에, 총칼 든 강도 놈들에게 나눠줄 돈이 어디 있나?”

    “아니, 이 영감이!”

    격분한 괴한들이 서도현 내외를 쇠몽둥이로 미친 듯 내려쳤다. 내외가 동네가 떠나갈 듯 비명을 질렀다. 둘째딸 서소아가 참다못해 방문을 열어젖히고 뛰쳐나왔다.

    “아이고, 아버지! 아이고, 어머니!”

    괴한들이 총칼로 위협했지만 울부짖으며 부모에게 달려가는 여인을 막을 수 없었다.

    “동네 사람들! 우리 아버지 죽어요! 우리 어머니 죽어요! 동네 사람들!”

    괴한이 쇠몽둥이로 서소아의 머리를 내려쳤다. 서소아는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고함을 그치지 않았다. 쇠몽둥이로 아무리 내려쳐도 서도현은 돈을 숨긴 곳을 대지 않았고, 김회산과 서소아는 비명을 멈추지 않았다. 괴한들이 난처한 듯 눈빛을 주고받았다. 대장인 듯 보이는 괴한이 손을 들어 대문을 가리키자, 괴한들이 일제히 대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탕.

    대장인 듯 보이는 괴한이 뒷걸음질치면서 서도현을 향해 총을 쏘았다. 서도현은 붉은 선혈을 쏟으며 즉사했다.

    40여 년간 고락을 같이하고 남달리 사랑하던 내외인지라 설령 남편이 병으로 죽었다고 할지라도 미망인 김회산 여사의 가슴에는 천추에 없어지지 않을 한을 품었을 것인데 남편이 천만 뜻밖에 도적에게 붙잡혀 총알에 맞아 무참히 죽었는데 일시일각(一時一角)인들 어찌 그 당시의 환영이 눈에서 사라질 것이며 그 총소리가 귀에서 사라질 것인가. (‘미신과 황금에 얽힌 엽기 100% 괴사건’(2) ‘동아일보’ 1932년 1월 19일자)


    소식이 알려지자 전라도 일대 부호들은 간담이 서늘해졌고, 보성경찰서 경관들은 물론 헌병대까지 나서 범인을 추적했다. 김회산은 비명횡사한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현상금 1만원까지 내걸고 범인을 수배했다. 하지만 깊은 밤 복면을 쓰고 바람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괴한들은 좀처럼 꼬리가 잡히지 않았다.

    김회산은 남편의 뒤를 따라가려고 자결을 시도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모진 목숨을 이어갔다. 그러는 사이 서도현의 둘째 첩이 서병관을 낳았다. 김회산은 죽을 때 죽더라도 남편 원수도 갚고, 젖먹이 어린 자식들도 키워놓고 죽겠노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서도현이 괴한의 총에 맞아 비명횡사하자 그가 관리하던 막대한 재산은 양자 서용인에게 상속되었다. 하지만 서용인은 이제 겨우 스무 살이었고, 배운 게 변변치 않은 데다 모르핀 중독자여서 정상적인 사리 판단이 불가능했다. 양자를 대신해 막대한 유산을 떠맡게 된 김회산은 서도현의 조카 서인선과 당질(오촌조카) 서정인에게 재산 관리를 맡겼다.

    1917년 12월7일, 서도현이 참살당한 지 1년6개월이 지났지만, 괴한들의 자취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하지만 김회산은 기필코 범인을 잡아 남편의 원수를 갚겠다는 결심을 꺾지 않았다. 짧은 겨울 해가 저물자, 서도현 집안의 재산관리인 서인선은 일과를 끝내고 벌교면 고읍리 자택에서 첩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벌교 백만장자 서도현 참살 사건

    미신과 황금에 얽힌 엽기 사건을 다룬 1932년 1월 19일자 동아일보 기사.

    꼬리를 무는 괴변

    “서인선! 서인선, 나와!”

    마당에서 지르는 고함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서인선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태 전 큰아버지가 당한 상황과 너무나 흡사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도망갈 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벌벌 떠는데 누군가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서인선, 순순히 따라 나와! 네 큰아버지 일은 잊지 않았겠지?”

    서인선이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복면을 쓴 괴한 3명이 그를 향해 총구를 겨냥하고 서 있었다. 서인선은 살려달라고 빌면서 순순히 괴한들을 따라나섰다. 서인선은 산길로 사흘을 끌려 다니다 깊은 산중 외딴집에 감금되었다.

    서도현이 복면 괴한에게 총살당한 데 이어 그의 조카 서인선마저 납치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전라남도 전 경찰에 비상이 걸렸다. 경찰이 주요한 길목마다 경계선을 치고 검문했지만, 괴한들은 이번에도 교묘히 경계망을 빠져나갔다. 김회산은 두렵기도 했지만, 분하고 괘씸한 마음이 앞섰다. 흉악무도한 원수를 경찰이 못 잡으면 자기 손으로라도 반드시 잡아 복수하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경찰의 경계가 삼엄했기 때문인지 서인선을 납치한 괴한들은 두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다. 이듬해 2월, 경찰의 수사망이 느슨해지자 김회산 앞으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숙모님, 저는 독립단을 자처하는 괴한들에게 납치돼 온갖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부디 돈 10만원을 군산 남일여관으로 보내 저를 구원해주십시오.”

    서인선의 친필 편지였다. 아무리 전라도에서 내로라하는 재산가라 하더라도 김회산에게 10만원의 현금이 있을 리 없었다. 어떡할까 고민하는 사이 이번엔 서정인 앞으로 두 번째 친필 편지가 날아왔다.

    “정인 형님, 제발 아우를 구해주세요. 돈을 경성 남대문통으로 보내주시면 제가 풀려날 수 있습니다.”

    김회산이 머뭇거리는 사이 세 번째 친필 편지가 역시 서정인 앞으로 날아왔다.

    “정인 형님, 저를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실 겁니까. 숙모님께 잘 말씀드려 10만원을 보내주세요. 이번엔 평양 연광정입니다.”

    서정인은 강도단이 꼬리를 잡힐 것이 두려워 장소를 계속 옮겨 다니는 것으로 판단하고 김회산을 찾아가 설득했다.

    “당숙모님, 저들이 인선이를 군산에서 서울, 평양으로 끌고 다니나 봅니다. 이대로 방치했다간 인선이 목숨이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돈이 중요하기로 사람 목숨보다 중요합니까. 고집 그만 부리시고 저들에게 돈을 내주시죠.”

    “정인아, 남편 죽은 것도 모자라 조카까지 죽게 생겼는데 내 속이야 얼마나 타겠느냐. 허나, 한두 푼도 아니고, 10만원이라는 거금이 어디 있겠니?”

    “당숙모님, 일단 1만원만 마련해주십시오. 제가 저들을 만나 한번 단판을 벌여보겠습니다.”

    김회산은 하는 수 없이 일본인에게 토지문서를 저당 잡히고 1만원을 마련했다. 현금 다발을 앞에 두고 보니 너무 아깝고 억울했다. 김회산은 3000원은 남겨두고 7000원만 서정인에게 넘겨주었다.

    “정인아, 7000원이다. 싹싹 긁어모아도 그것밖에 안 되는구나. 아쉬운 대로 이 돈이라도 가지고 가서 인선이를 구해와라. 혼자 가면 위험할 테니 네 동생 정오도 데려가거라.”

    서정인의 수상한 행동

    7000원이라는 말을 듣고 서정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그렇게 하겠다’며 돈을 챙겨 돌아섰다.

    서정인은 돈 가방을 들고 전라북도 익산 황등역 부근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다.

    ‘정인이 형은 인선이 형이 감금된 곳을 어떻게 알고 찾아갈까? 이 첩첩산중에.’

    서정오는 서정인의 길눈에 감탄하면서 그가 가는 대로 무작정 따라갔다. 정상 부근에 다다르자 서인선이 괴한 세 명과 함께 불을 피우고 앉아 있었다.

    서정인과 서정오는 여러 달 만에 만난 서인선의 손을 움켜쥐고 울며 위로하고, 괴한들에겐 준비해온 돈을 내밀었다. 괴한들은 돈을 적게 가져왔다며 먼저 서정인의 뺨을 치고, 서정오를 결박해 소나무에 매달아 함부로 때리며 시위했다. 서씨 세 사람은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괴한들은 자기들끼리 뭐라고 소근거리더니 서정인을 대신 볼모로 잡아두고, 서인선과 서정오를 풀어주었다. 서인선과 서정오는 풀려난 즉시 전라북도 신태인역에서 열차를 타고 벌교로 돌아왔다. (‘서도현 살해사건’ ‘동아일보’ 1922년 1월 27일자)


    강도단에 납치되었다가 76일 만에 간신히 풀려난 서인선은 벌교에 들어서자마자 보성경찰서로 연행돼 1주일 동안 혹독한 문초를 받았다. 서인선이 보성경찰서에서 석방된 지 며칠 후 강도단에 붙잡혀 있던 서정인마저 돌아왔다. 가족들은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기뻐하며 서정인의 무사귀환을 반겼다. 하지만 서정인은 굳은 표정으로 대뜸 육촌아우 서인선을 책망했다.

    “내가 네 대신 사지에 남았거늘 너는 왜 돈을 보내지 않았느냐?”

    서정인의 말 한마디로 환희에 젖어 있던 집안 분위기는 싸늘히 식었다. 이어서 서정인은 김회산에게 풀려나게 된 사정을 설명했다.

    “당숙모님, 제가 집으로 돌아와 3000원을 마저 받아주기로 약속하고 풀려났습니다. 제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그만 돈을 보내시죠.”

    “정인아, 네가 풀려났으면 그만이지 돈은 왜 또 보내느냐. 그 흉악한 것들에게 7000원씩이나 갖다 바친 것도 억울하고 원통한데.”

    “당숙모님, 만약 3000원을 더 보내지 않으면 저들이 용인이를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고집 그만 부리시고 그까짓 돈 보내 버립시다.”

    서정인이 눈을 부라리며 김회산을 윽박질렀다. 김회산은 서정인에게 협박당하기라도 한 듯 가슴이 뜨끔해 3000원을 내밀었다. 서정인은 3000원을 챙겨 그길로 강도단에게 달려갔다.

    이와 같이 큰 재앙을 계속 당하고 있는 동안에 김회산은 모든 일이 당질 서정인이 꾸민 것이 아닌지 의심했지만, 아무런 증거가 없어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고 지냈다. 강도단에게 풀려난 후 서인선은 “큰댁 일을 보다가는 생명을 보전치 못하겠다”며 재산 관리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후로 재산 관리는 서정인이 도맡았다. (‘미신과 황금에 얽힌 엽기 100% 괴사건’(2) ‘동아일보’ 1932년 1월 19일자)


    서인선이 납치됐다 풀려난 이후로도 서씨 집안에는 우환이 끊이지 않았다. 김회산의 양자 서용인은 모르핀에 중독돼 폐인처럼 지내다 1920년 7월, 괴질에 걸려 죽었다. 서인선 역시 강도단에 납치·구금된 충격에 시달리다 모르핀에 손을 대 모르핀 중독자로 전락했다. 재산관리를 맡은 서정인은 집안에 부랑자들을 끌어들여 서도현이 허리띠 졸라매고 악착같이 모은 재산을 허투루 낭비했다.

    군자금을 요구하는 편지

    1921년 가을, 김회산에게 서정인이 편지 한 장을 가지고 왔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당숙모님께 보낸 편지입니다. 10만원을 보내라고 씌어 있습니다.”

    김회산은 억장이 무너졌다. 강도단이 뜯어간 것으로도 모자라 이번엔 임시정부까지 손을 내밀었다. 돈 있는 것이 무슨 죄라도 지은 것인 양 자괴감이 들었다.

    “안 된다. 다시는 어디서 돈 달란 편지 내게 가져오지 마라.”

    “당숙모님, 그래도 우리 민족 잘되자고 하는 일인데.”

    “그만하래도!”

    서정인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물러섰다. 그 후로도 서정인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군자금을 요구하는 편지 두 통을 더 가져와 군자금을 보내지 않으면 가족을 전부 몰살시키겠다거니, 집에다가 폭탄을 던져버리겠다거니 하는 거친 문구를 읽어주었다.

    임시정부의 편지를 접하고 김회산의 심사는 더욱 더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들어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임시정부에서 일개 여자인 나를 상대로 그처럼 거금을 요구하고 또 협박장까지 세 차례나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건 또한 서정인이 꾸민 일이라고 추측했지만 증거가 없어 마음만 태웠다. 그해(1921년) 11월, 보성경찰서에서 경관대가 밀려와서 가택을 수색하고 임시정부에서 왔다는 편지 3통을 압수하는 동시에 서정인을 검거했다. (‘미신과 황금에 얽힌 엽기 100% 괴사건’(2) ‘동아일보’ 1932년 1월 19일자)


    보성경찰서 고등계는 서도현 살해 사건, 서인선 납치 사건, 임시정부 협박장 사건 등 일련의 괴사건들이 모두 서정인이 꾸민 일이라 판단하고 2개월에 걸쳐 강도 높게 문초했다. 이듬해 1월,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 검사국 나카이(中井) 검사는 살인, 납치, 협박 등의 혐의로 서정인을 예심에 회부했다. 하지만 6개월에 걸친 예심에서 서정인은 범행 일체를 부인했고, 나카이 검사 역시 아무런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해 8월29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 오야(大宅) 예심판사는 예심을 종결하고 서정인을 무죄 방면했다. 10개월 동안의 억울한 옥살이에서 풀려난 서정인은 김회산을 무고죄로 고소했지만 나카이 검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기각했다.

    잇따른 집안의 우환을 겪으면서 김회산은 총칼로 협박하는 강도에게 빼앗길 재산이라면 친척들에게 나눠주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재산의 일부를 쪼개 2000여 석 추수하는 토지를 친척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자신을 무고죄로 고발한 서정인에게도 150석거리 토지를 넘겨주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집안의 우환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번엔 셋째딸 서본일이 모르핀 중독자 남편과 이혼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김회산은 잇따르는 불행과 재화에서 벗어나려면 벌교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순천읍 매곡리에 집을 마련했다. 김회산이 벌교를 떠나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벌교 주민들이 죄다 달려와 만류했다. 서도현과 김회산이 그동안 벌교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데 이대로 떠나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회산은 벌교 주민들을 위해 1000석 추수하는 토지를 기부하고 순천으로 이사했다.

    도인과 결의형제

    순천으로 이사한 후 셋째딸 서본일이 광주면 부면장 정근섭과 재혼했다. 김회산은 새로 얻은 사위 정근섭에게 재산 관리를 맡겼다. 하지만 정근섭은 장모의 재산 관리에는 관심이 없고 재산을 빼돌리는 데만 열을 올렸다. 정근섭은 사사건건 장모와 대립하다가 몇 해 후 300석거리 토지와 현금 1만2000원을 증여받고 분가했다. 가까운 친인척을 모두 잃은 김회산은 친정 쪽으로 먼 친척인 김종륜에게 재산 관리를 맡기고 자신은 명산 고찰을 찾아다니며 억울하게 죽은 남편의 원혼을 달래는 불공을 드렸다.

    1925년 12월, 김회산은 순천군 서면에 있는 정혜사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주지 김수현의 소개로 손병연을 만났다. 손병연은 통령술(通靈術, 신령과 통하는 기술)에 능했고, 신장(神將, 귀신 가운데 무력을 맡은 장수신)을 움직여 사람의 길흉화복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었다. 축지법에 통달해 천릿길도 순식간에 왕래했다. 손병연이 신묘한 능력 몇 가지를 눈앞에서 보여주자 김회산은 그를 믿고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손 도사, 그대 능력이 이다지도 신통하니 늙은이 소원 하나만 들어주오.”

    “어떤 소원인지?”

    김회산은 남편 서도현이 강도단에게 참살당한 이후 10여 년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집안의 우환을 털어놓고, 복수할 방법을 문의했다. 김회산의 피맺힌 사연을 듣고 손병연은 눈을 지그시 감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보살님 사정은 딱하오만, 들어드리기 곤란합니다.”

    “아니, 손 도사 능력으로 못할 일이 어디 있는가.”

    “그렇긴 하옵니다만, 그처럼 큰일은 피를 나눈 부모나 형제 사이가 아니면 도와드릴 수 없는 것이외다.”

    김회산이 실망한 표정으로 손병연을 쳐다보았다. 한참 동안의 침묵을 깨고 김회산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손 도사, 부모나 형제 사이가 아니면 복수를 대신해줄 수 없다면 지금이라도 우리가 남매의 연을 맺으면 될 게 아닌가.”

    손병연이 흔쾌히 승락했다. 며칠 후 두 사람은 김회산의 집에서 남매의 연을 맺고, ‘결의형제 계약서’ 2통을 작성해 한 통씩 나눠가졌다.

    벌교 백만장자 서도현 참살 사건

    손병연, 김회산, 김수현이 재판을 받은 광주지방법원.

    변사체로 발견된 서정인

    1927년 1월, 김회산의 며느리 김희운이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 양자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서용인이 죽기 직전 서정인의 아들 서정규를 양자로 삼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으니 서정규를 사후양자로 호적에 올려달라는 것이었다. 김회산은 서도현의 유산을 관리했을 뿐 법적 상속인은 어디까지나 양자인 서용인이었다. 서용인이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어서 서도현의 유산은 김회산의 명의로 넘어왔지만, 서정규가 서용인의 사후양자로 입적되면 유산은 서정규에게 상속될 것이었다. 또한 젖먹이 서정규의 재산은 친아버지 서정인이 관리할 것이 분명했다. 말이 서용인의 유언을 실행하겠다는 것이지 서정인과 김희운이 결탁해 김회산의 재산을 가로채기 위한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그해 3월, 김회산은 서정인에게 현금 4000원을 주고 소송을 취하시켰다.

    그로부터 20여 일 후인 1927년 4월 7일, 서정인은 광주군 지한면 홍림리 강변에서 머리가 깨진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전라남도 경찰부에서는 수수께끼 같은 괴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는 서씨 일가에 골머리를 앓던 차에 서정인마저 참살되고 보니 경찰력을 총동원해 범인 수색에 나섰다. 하지만 범인은 이번에도 꼬리를 잡히지 않았다. 경찰은 김회산의 재산관리인 김종륜을 검거해 6개월 동안이나 예심에서 심리했으나 결국 무죄 면소되었다. 서씨 집안에 벌어진 사건들이 모두 그랬던 것처럼 서정인 참살 사건 역시 미궁에 빠졌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서정인이 죽은 이후로는 서씨 집안에 더 이상 괴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

    서정인이 살해당한 지 만 4년이 지난 1931년 2월, 경찰은 김회산과 결의형제를 맺은 손병연을 체포했다. 손병연은 서정인을 살해한 혐의로 예심에 회부되었지만 증인으로 불려나온 김회산과 두 사람을 소개시켜준 정혜사 주지 김수현이 사실을 부인해 무죄 면소되었다. 하지만 경찰은 포기하지 않고 재수사에 나서 그해 8월, 손병연을 상해치사 및 사기죄로, 김회산과 김수현은 위증죄로 각각 기소했다. 경찰이 4년9개월에 걸친 집요한 수사를 통해 밝혀낸 서정인 살해 사건의 비밀은 다음과 같다.

    산신령 살인 사건

    서정인이 광주에서 시체로 발견되기 몇 달 전부터 서형순이란 정체불명의 복술가가 서정인의 집에 빈번히 드나들었다. 사람을 좀처럼 믿지 않는 서정인이었지만, 서형순의 비범한 술수를 여러 번 목도하곤 그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서정인은 서형순이 검은 것을 희다고 할지라도 의심치 않을 만큼 철석같이 믿었다.

    어느 날 밤, 서형순이 별자리를 관찰하다가 서정인에게 말했다.

    “천문을 보니 종씨 집안에 큰 횡액이 코앞에 닥쳤소.”

    서형순은 성씨가 같다고 서정인을 ‘종씨’라 불렀다. 서정인이 다급한 목소리로 예방책을 물었다.

    “하늘이 하는 일을 어찌 인간이 막을 수 있겠소. 하지만 명산대찰을 찾아가 정성을 다해 기도를 올리면 혹 하늘이 감동해 횡액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서정인은 이튿날 날이 밝기 무섭게 집에서 15리 밖에 있는 오리사로 달려갔다. 닷새 동안 정성을 다해 기도를 드렸지만 별다른 영험이 나타나지 않았다. 불안하고 초조해진 서정인이 서형순에게 물었다.

    “서 도사, 닷새 동안 정성을 다했건만 영험이 생기지 않으니 어쩐 일이오?”

    “종씨의 정성이 아직 부족하오. 그뿐만 아니라 오리사가 위치한 곳은 산이 얕고 민가가 가까워 신령님이 아니 오시는 모양이오.”

    “며칠 후 볼일이 있어 광주에 가야 하오. 볼일을 마친 후 무등산에 올라 기도를 드리고 싶은데, 혹 서 도사가 동행해주지 않겠소?”

    “무등산이라면 전라도 일대에서는 영험하기로 손꼽히는 명산이오. 종씨가 정성을 다해 기도를 드린다면 신령님을 만나 횡액을 막을 비법을 들을 수 있을 것이외다. 내 기꺼이 동행하리다.”

    1927년 4월 2일, 서정인은 서형순과 함께 광주로 떠났다. 무등산에 들어가 사흘 동안 기도를 드리고, 나흘 째 밤이 찾아왔다. 천문을 살피던 서형순이 기뻐하며 서정인에게 말했다.

    “종씨, 산신령이 나타날 듯한 상스러운 밤이오. 지금껏 잘해왔으니 오늘밤은 더욱 분발해 정성껏 기도를 드리시오. 주문을 천 번쯤 외면 영험이 나타날 것이외다.”

    서정인이 주문을 외기 시작하자 서형순은 절로 들어갔다. 서정인은 서형순의 말을 좇아 정성을 다해 주문을 외웠다. 자정이 지나자 오색영롱한 의복을 입은 신령이 기도 드리는 앞마루에 나타났다. 서정인은 황송해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하고 계속해서 주문을 외웠다.

    신령이 유리쟁반에 옥구슬 굴리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산신령인데 네가 서정인이냐?”

    “예, 소인이 서정인이올시다.”

    서정인이 황공무지한 태도와 어조로 대답했다.

    “네 정성이 가상하야 오기는 하였으나 무슨 일로 이와 같이 기도를 드리는고?

    “세상일이 뜻과 같이 아니 되옵기로 소원을 이루어주십사 기도 드렸사옵니다.”

    “흥! 네게는 네 당숙 서도현의 원귀가 따라다니면서 작해(作害)를 하니까 안 돼!”

    서정인이 아무 말도 못하고 머리만 더욱 숙였다.

    “너는 당숙을 죽였으니 그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자백서를 써내면 옥황상제 전에 고하여 사죄하고 복을 내리도록 하리라.”

    서정인이 감격에 겨워 준비하였던 필묵으로 ‘불행히 남의 꾐에 빠져 당숙 서도현을 살해한 죄를 용서하시고 소원을 이루어주십시오.’ 하는 의미의 자백서에 서명 날인하여 가지고 신령 전에 바쳤다.

    자백서를 받은 신령은 돌연히 오색의 의복을 벗으면서

    “나는 산신도 아니며 서형순도 아니다. 나는 김회산 여사와 결의형제인 손병연인 바 네 죄상을 알기 위해 수삭의 노고를 겪다가 오늘밤에는 광주 읍내로 내려가서 오색의 비단을 사가지고 최후 연극을 하였다.”고 말했다.

    (‘미신과 황금에 얽힌 엽기 100% 괴사건’(4) ‘동아일보’ 1932년 1월 23일자)


    서정인이 청천벽력을 맞은 듯 기진맥진해 가지고 자백서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손병연은 당연히 거부했다. 두 사람은 자백서를 두고 달라거니 못 주겠다거니 실랑이를 벌이면서 산을 내려왔다. 4월 7일, 두 사람은 광주에서 벌교로 이어진 신작로에서 벌교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후 살아 있는 서정인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벌교 백만장자 서도현 참살 사건
    전봉관

    1971년 부산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 석·박사(국문학)

    서울대, 아주대, 한신대, 한성대, 덕성여대에서 강의

    現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 과학부 교수

    저서 및 논문 : ‘1930년대 한국 도시적 서정시 연구’ ‘황금광시대’ ‘경성기담’ ‘럭키 경성’ 등


    4월 8일, 손병연은 순천 김회산에게 찾아가서 서정인이 죽은 것을 알리고 금전을 요구했다. 김회산은 복수하고 싶다고 했지 누가 서정인을 죽이라고 했느냐며 역정을 내고 돈을 내어주지 않았다.

    1932년 1월15일, 광주지방법원에서 개정한 공판에서 서도현은 서정인이 죽였고, 서정인은 손병연이 죽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손병연은 서정인이 자백서를 달라고 달려들어 밀쳤는데 그만 강둑 아래로 굴러떨어져 죽었다고 자백했다. 1월 22일, 광주지방법원 제1호 법정에서 개정한 선고공판에서 미야모토(宮元) 재판장은 손병연에게 상해치사 및 사기죄로 징역 5년, 김회산과 김수현에겐 위증죄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이로써 서도현 집안의 잇따른 우환은 서도현이 참살당한 지 16년5개월 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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