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호

‘먹을거리 자주권’은 21세기 새 테제 제주도엔 제주음식이 없다 박물관 쇼윈도에 있을 뿐

  •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부교수·민속학 duruju@aks.ac.kr

    입력2008-07-31 15: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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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도민들이 즐겨 먹던 음식을 맛보려면 쌀밥을 위주로 한 육지식에 비해 비용이 몇 배 이상 든다. 더욱이 몇몇 향토음식점을 제외하면 제주도는 온통 횟집과 삼겹살 식당으로 가득 차 있다.
    • 고유의 향토음식이 설 자리는 좁아졌고, 서양 손님들이 제주도 향토음식을 먹고 싶다고 해도 안내할 곳이 마땅치 않은 실정이 되고 말았다.
    ‘먹을거리 자주권’은 21세기 새 테제 제주도엔 제주음식이 없다 박물관 쇼윈도에 있을 뿐

    고급 음식이 된 전복죽.

    1991년 가을, 나는 제주도의 김치를 조사하기 위해 제주에 갔다. 전국의 김치를 조사하고 있던 터라 제주도의 김치, 특히 김장을 조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주도 출신으로 제주도 문화재 전문가인 김순이 선생의 소개로 제주시에 거주하는 한 할머니를 만났다. 제주사람들은 다른 지역 사람을 ‘육지사람’이라 부르며 상대화한다. 나도 육지사람이다. 제주도가 육지에 편입된 역사나 4·3사건에 대한 지식만 갖고 있던 나는 제주도에서도 당연히 김장을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익숙하게 김장 이야기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나의 질문에 그다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자, ‘제주도에서는 원래 김장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면 제주도에서는 김치를 먹지 않는다는 말인가? 아무리 육지에 비해 따뜻하다고 해도 겨울에는 한라산에 눈이 쌓이고, 폭설이 내린다는데 김장을 하지 않는다면 결국 김치도 먹지 않는다는 말이 아닌가!

    ‘먹을거리 자주권’은 21세기 새 테제 제주도엔 제주음식이 없다 박물관 쇼윈도에 있을 뿐

    1960년대 제주 일상식사 재현.

    제주도는 김장을 안 한다?

    할머니 말씀이 채소가 사시사철 나오니 굳이 김장을 할 필요가 없단다. 그래도 날채소와 김치는 맛이 다르지 않으냐는 질문에 한참을 생각한 할머니는 제주에는 예전에 소금도 귀했다고 했다. 사면이 바다에 접한 제주도에 소금이 귀하다니,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 아닐까?

    제주도에서 소금을 만들기 위해서는 바닷물을 솥에 넣고 끓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땔감이 많이 필요하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이후 행정당국에서 나무를 마음대로 연료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제재했기 때문에 그것도 쉽지 않았다. 나무를 구한다고 해도 끓인 바닷물에서 나오는 소금의 양이 그다지 많지 않다. 배추도 육지의 결구배추와 같은 것은 1960년 이전에는 거의 없었다. 늦겨울에 자라는 봄동이란 채소가 배추와 닮았다. 이것을 살짝 절여서 봄동김치를 해 먹는 일은 있지만, 배추김치나 깍두기와 같은 김치는 1960년 이전에는 많지 않았다. 요사이 제주도의 식당에서 나오는 김치는 대부분 육지의 김치다. 결국 제주도 김치에 대한 조사는 봄동김치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일로 마무리 짓고 말았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2004년 나는 제주대학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다시 제주도 음식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첫 번째 프로젝트는 제주도 음식과 육지음식을 비교해달라는 주문이었다. 2001년부터 매년 제주도에서 열리는 각종 학술회의에 참석하면서 육지에는 없는 제주도의 지역음식에 대한 정보를 간간이 들어왔지만, 그러한 작업은 나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1991년의 기억에 비추어볼 때 제주도는 육지와는 음식이 다른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주음식에 대해 정리해둔 많은 책에서는 이른바 육지음식의 연장선상에서 제주음식을 다루고 있을 뿐, 제주도의 독자적인 음식 소비 시스템을 별도로 다루지 않았다.

    다만 제주도의 ‘향토음식’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소개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육지에서 맛볼 수 없는 제주도의 특이한 음식에 대해서는 알 수 있지만, 왜 그런 음식들이 ‘향토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심지어 ‘향토음식’을 먹고 싶으니 식당을 소개해달라고 제주도 사람에게 부탁하면 대부분 난색을 표하기 일쑤였다. 대부분 오분자기 된장국이나 몸국을 판매하는 식당을 소개하는 데 그쳤다. 전주나 목포나 마산에 가면, 외지에도 많이 알려진 그 지역의 ‘향토음식’을 판매하는 식당이 제법 많다. 예컨대 전주에 가면 백반을 판매하는 식당에서 전주의 가장 일상적인 음식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제주도에 가는 육지 사람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횟집으로 직행을 한다. 아니면 갈치조림이나 고등어조림을 판매하는 식당만을 찾는다. 이름마저 생소한 제주도 음식에 대한 기대보다는 자신들에게 익숙한 육지 음식을 제주도에서 찾는 것이다. 그래서 제주도 곳곳에는 전국의 해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횟집이 똑같이 자리를 잡았다. 심지어 제주도의 호텔에서조차 제주도 음식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곳은 한 곳도 없다. 아침과 저녁을 제공하는 제주도의 고급 호텔 뷔페식당에는 수십 가지의 한식과 일식, 그리고 서양음식이 즐비하지만, 제주도 음식은 눈을 씻고도 찾을 수가 없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향토음식 없는 레스토랑

    1992년, 나는 김치를 연구하는 식품학 교수들을 도와 김치연구회라는 모임의 총무를 맡은 적이 있다. 그때 독일 유학에서 막 귀국해 고향 제주도의 한라전문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오영주 박사를 처음 만났다. 그는 김치를 먹는 한국인의 대장과 독일의 양배추 절임음식인 사우어크라우트(Sauerkraut)를 먹는 독일인의 대장, 그리고 이것을 먹지 않는 독일인의 대장에서 일어나는 영양학적 차이를 연구해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학자였다. 그는 각각의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똥을 분석해 그것을 증명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똥박사’라고 부른다.

    2004년 그를 다시 만나 ‘왜 제주도의 호텔에서 제주음식을 먹을 수 없느냐’는 질문을 했다. 대학에서 장차 외식산업의 조리장이 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누구보다도 고향 제주도의 음식에 대해 애착을 갖고 연구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질문을 받아줄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국가에서 주관하는 조리사 자격증 시험에는 조리학의 기본적인 기술을 점검하는 것이 기준이지, 결코 ‘향토음식’의 기술을 테스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더욱이 한국의 호텔에서는 한식보다는 양식을 해야 제대로 대접받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니 제주도의 고급 호텔에서 제주음식을 맛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제주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의 호텔이 모두 그렇다는 것 아닌가! 이후 내가 개인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실제로 전국의 호텔 뷔페식당에서 ‘향토음식’이 주된 메뉴로 제공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심지어 밥·김밥·육개장·해장국·홍어회·김치와 같은 한식이 호텔의 뷔페식당 메뉴로 나오지만, 한식당을 호텔 내부의 전문식당으로 운영하는 호텔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의 일부 고급 호텔에서 한식전문점을 운영했지만, 이후 손님이 줄어들자 아예 폐쇄한 곳도 많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제주도 호텔에 ‘향토음식’을 제공하라고 요구하기도 쉽지 않다.

    오영주 교수는 틈만 나면 제주도의 호텔에서 ‘향토음식’을 제공하자는 제안을 했단다. 하지만 호텔의 조리사들은 ‘향토음식’을 제공하려면 정해진 레시피(만드는 방법)가 있어야 하는데, 레시피가 없어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알지 못한다고 했단다. 더욱이 서구적이고 현대적인 ‘레스토랑’ 주방에 대해 과학적으로 음식을 조리하는 곳이란 인식이 강한데, ‘향토음식’은 과학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라고 한다.

    제주도 서귀포시의 정방폭포에서 서쪽으로 500m 정도를 가면, 바다로 향하는 경사진 언덕에 요사이 제주도의 향토음식으로 육지에서 이름이 난 갈치조림·고등어조림·오분자기 된장국을 판매하는 식당이 나온다. 이 식당의 남자주인은 서귀포가 고향이지만, 그의 부인 박씨는 경상남도 창원 출신이다. 두 사람은 강원도 묵호에서 만나 혼인을 하고 잠시 그곳에서 식당을 운영하다가, 15년 전에 서귀포로 돌아와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박씨 부인은 이 식당의 주방장이다. 그녀가 만든 생선조림은 매우면서도 칼칼한 맛이 일품이어서 육지에서 온 손님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끈다.

    하지만 박씨 부인은 대학에서 조리학을 배운 적이 없다. 비록 조리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서귀포의 향토음식을 전문적으로 연구해보지도 않았다. 단지 자신이 마산이나 부산, 그리고 묵호에서 익힌 음식솜씨를 발휘해 제주도의 신선한 갈치와 고등어로 조림을 해서 손님에게 제공할 뿐이다. 그래도 맛있다는 평가를 얻었다. 그래서 서귀포 사람에게 횟집이 아닌 ‘향토음식’을 맛있게 하는 식당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하면 대개 이 집을 으뜸으로 꼽는다.

    최근 육지에서 제주음식으로 알려진 갈치조림이나 고등어조림은 제주도만의 ‘향토음식’은 아니다. 갈치는 제주도 연안은 물론 남해안에서도 많이 잡히는 생선이다. 1970년대 초반만 해도 신선한 갈치는 주로 해안 도시에서 소비되었고, 육지에서는 살짝 말린 것을 먹었다. 유통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내륙지역에서는 말린 갈치에 간장과 고춧가루, 그리고 무를 넣고 조리는 방법을 채택했다. 지금도 충청남도 강경의 역전에 가면, 말린 갈치를 조린 갈치조림을 메뉴로 내놓는 식당이 있다. 당연히 해안 도시인 부산이나 마산에서는 살이 통통한 생갈치로 조림을 해서 먹는다. 심지어 갈치로 끓인 갈칫국은 그 지역 사람들에게는 ‘향토음식’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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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지식 고등어 갈치회

    지역 특색음식의 유래

    그런데 제주음식으로 갈치조림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때는 제주도 연안에서 매우 큰 갈치가 잡히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에 들어와서다. 원래 갈치의 한자 이름은 도어(刀魚)다. 칼처럼 생겼다고 붙인 이름이다. 보통 이름에 ‘치’가 붙은 생선은 그다지 쓸모 있는 생선이 아니라는 인식이 예전부터 있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의 연안어업을 장악한 일본인 선주의 어선들이 이 생선을 많이 잡았고, 그때부터 갈치는 한국인이 즐겨 먹는 생선이 되었다. 고등어도 그 사정은 마찬가지다.

    특히 고등어나 꽁치는 등이 푸르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에 식용과 함께 기름·비료·비누 등을 만드는 원료로 쓰였다. 최근 10년 사이에 포항의 ‘향토음식’으로 유명해진 ‘과메기’도 알고 보면 비슷한 사연을 갖고 있다. 일제 강점기 포항의 죽도시장에 등 푸른 생선을 재료로 이들 제품을 가공하는 공장이 들어섰고, 그로 인해 개발된 음식이다. 마산을 대표하는 ‘향토음식’인 아귀찜도 마찬가지다. 마산의 어시장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때는 역시 일제 강점기였다. 1960년대 초반까지 아귀는 어부들이 그 생김새가 이상해 잡혀도 버리는 생선이었다. 그런데 어시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던 아주머니들이 이 아귀를 집으로 챙겨 와서 며칠간 말린 후, 연탄불에 굽든지 아니면 각종 채소를 넣고 찜을 만들었다. 이로부터 마산의 ‘향토음식’으로 아귀찜이 자리 잡았다. 1970년대 마산이 공업도시로 성장하면서, 아귀찜 전문점이 번화가에 자리를 잡았고 1990년대 들어 서울의 강남 신사동에는 서울식 아귀찜 전문점도 생겼다.

    요사이 서울에서 각 지방의 이름을 붙인 유명한 ‘향토음식’을 판매하는 식당들 중에서 가장 빠른 시기에 가게를 연 경우는 냉면집이다. 냉면집은 이미 1920년대에 서울에서 인기를 누렸다. 심지어 냉면을 배달시켜 먹는 모던보이와 모던걸도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향토음식점은 대부분 1970년대 이후에 서울에 점포를 열었다. 그 이유는 그 무렵 서울로 이주한 지방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사실 ‘향토음식점’에서 판매하는 음식은 실제로 그 지역 사람들이 먹는 음식 모두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보다는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이 고향 사투리와 함께 자신의 고향과 어릴 때를 추억하는 음식의 이미지로 먹는다. 이러한 감성을 이용하여 고향 근처의 도시에서 판매되던 음식이 외식업체를 통해 전국으로 퍼지기도 한다. 안동찜닭이나 안동간고등어가 대표적이다.

    제주도 일상음식

    이에 비해 제주도를 내세운 향토음식점은 1990년대 후반 이후에야 서울에 등장한다. 하지만 제주도 사람들이 다른 지방 사람들처럼 서울로 이주했기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었다. 1990년대 이후 제주도 관광이 붐을 이루면서, 제주도에서 음식을 먹어본 서울 사람들이 다시 제주음식을 찾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여기에 1990년대 중반 이후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에서 향토음식을 소개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제주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비록 제주음식을 내세운 서울의 많은 음식점이 제주도 출신을 주인 혹은 주방장으로 두고 있지만, 손님들은 대부분 제주도 출신이 아니다. 제주도 출신이 아닌 사람들은 제주도를 표방한 식당에서 판매하는 음식이 제주음식인 줄 안다. 하지만 앞에서 든 몇 가지 음식과 함께 똥돼지나 조껍데기술 따위는 예전 제주도 사람들의 일상적인 음식은 아니었다.

    ‘먹을거리 자주권’은 21세기 새 테제 제주도엔 제주음식이 없다 박물관 쇼윈도에 있을 뿐
    제주도 출신이 아닌 독자 여러분은 다음에 나열하는 음식들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반지기밥·감태밥·지름밥·폿밥·곤밥·무개기밥·체밥·물꾸럭죽·구살죽·마농죽·깅이범벅·톨범벅·는쟁이범벅·감제범벅·놈삐범벅·누룩낭범벅·각재기국·멜배춧국·솜국·벤자리국·돼지몸국·물외된장냉국·반치냉국·몸냉국·자리젓·멜젓·게웃젓·각재기젓·알개미젓·양애지·몸지·반치지·양하지·톳지’

    제주도 사투리로 된 음식 이름도 있는데다 재료가 특이하여 무슨 음식인지 제대로 알아맞힐 육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난해 작고한 조선왕실 궁중음식 무형문화재 황혜성 선생은 1971년에 제주음식을 조사한 결과를 보고한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제주음식의 특징을 꼽았다. 그녀는 우선 제주도에서는 육지처럼 쌀농사를 거의 짓지 않고 주로 잡곡 농사를 짓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물론 1950년 이후에 육지 사람이 다수 이주하면서 쌀밥을 먹는 비율도 증가했다. 하지만 당시의 쌀은 대부분 육지에서 들여온 것들이었다. 1960년대에 제주도에서 소비된 쌀의 80% 이상이 육지의 것이었다. 적어도 1960년 이전의 제주도 사람들은 평소 집에서 보리·조·팥 등의 잡곡밥을 주로 먹었다.

    제주도 사람들은 쌀밥을 ‘곤밥’이라고 한다. ‘곤밥’은 보리밥에 비해 부드럽고 고운 밥이라는 뜻으로, 제사·명절 때나 혼인잔치 때 신랑과 신부의 상에만 올랐다. 그래서 요즘도 제주도 출신의 노인들은 1960년대를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자는 일년 내내 보리밥을 먹었고, 가난한 사람은 그나마 한 철만 보리밥을 먹었을 뿐, 나머지 날들은 다른 잡곡이나 고구마·감자·톳 등을 섞어서 그 양을 불린 밥을 먹었다. 가을철에 보리밥을 지을 때도 보통 조를 함께 섞었다. 보리의 양을 줄이면서도 맛을 좀 더 좋게 하기 위한 생존전략이었다. 특히 보리나 조에 고구마를 넣어서 지은 ‘감제밥’이라고 하는 고구마밥은 탄수화물의 양을 극대화해주었다.

    1960년대까지 보리와 조가 밥을 만드는 주된 곡물이었다면, 메밀도 당시 제주도 사람에게는 중요한 곡물이었다. 메밀을 주재료로 만드는 음식으로 메밀밥·메밀돌래·메밀칼국수·메밀수제비·꿩메밀칼국수·메밀범벅·메밀개역 등이 있었다. 육지에서는 메밀가루로 국수와 전병을 만드는 데 사용할 뿐이었다. 비록 강원도와 충청도의 산간 지방 음식에서 제주도와 비슷한 양상도 나타나지만, 제주도처럼 다양하지는 않았다. 사실 메밀농사는 다른 밭농사가 잘 되지 않더라도 늦게 파종해 쉽게 재배해 수확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메밀로 밥을 짓고 국에도 넣고 죽도 쑤고 수제비나 칼국수를 만들기도 하고, 범벅과 떡도 해 먹었다.

    된장은 중요한 소스

    잡곡밥을 주로 먹던 과거 제주도 사람들의 식사에서 국은 빠지지 않고 상에 오르던 음식이다. 주된 소스는 된장이었다. 된장을 푼 국에 주된 재료 한 가지를 넣고 끓이는 방법으로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제주도 노인들에게 옛날에 즐겨 먹던 국을 말해달라고 하면, 나물국·놈삐국·송키국을 꼽는다. 나물국은 배추로 끓인 국이고, 놈삐국은 무를 재료로, 송키는 푸성귀를 재료로 한 국이다. 이들 재료 외에도 된장을 풀어서 계절마다 나는 채소를 넣고 각종 국을 끓였다. 만약 곡물이 부족하면, 이 국에 메밀가루·보릿가루·밀가루 등을 넣어, 죽이나 범벅으로 걸쭉하게 만들어 먹었다. 호박잎국·양애국·뭇국·고사리국 등은 모두 이러한 방법으로 만든다.

    범벅과 죽은 이런 과정에서 만들어진 음식이다. 요사이 성산 일출봉 입구에 있는 해녀전복 식당에서 한 그릇에 1만5000원 하는 전복죽을 사먹는 관광객들은 제주도의 전복죽이 매우 맛있다고 감탄한다. 그러나 1960년대 이전에 제주도 사람들이 먹던 죽은 결코 지금과 같은 전복죽이 아니었다. 귀한 전복을 조금 넣고, 여기에 각종 잡곡의 가루를 넣어서 끓였다. 당연히 맛도 거칠었다. 앞에서 소개한 깅이범벅은 잡곡을 가루 내어 물을 붓고 죽처럼 만든 다음에 게를 통째로 갈아서 넣고 끓인 음식이다. 깅이는 게의 제주도 사투리다. 감제범벅은 고구마로 술을 만든 후에 나온 술지게미를 잡곡 가루에 넣고 끓인 음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제주도의 주식은 여러 가지 잡곡과 채소가 들어간 밥과 곡물가루를 국에 넣은 죽이나 범벅이었다고 해야 옳다. 이 점은 곡물을 익힌 밥과 그것을 효과적으로 먹기 위해 마련한 짜고 매운 반찬과 국으로 구성된 육지의 상차림과는 다른 제주도만의 특징이다.

    1960년대 이전에 제주에서 ‘고깃국’이라 하면 옥돔을 재료로 한 옥돔국을 가리켰다. 옥돔국에는 미역이나 무를 많이 넣었다. 이에 비해 갈치·멸치·고등어·전갱이 등을 재료로 한 ‘고깃국’에는 호박이나 배추를 넣었다.

    제주음식에서 된장은 매우 중요한 소스였다. 보통의 국은 물론이고 미역·청각·톳을 넣고 만드는 냉국에도 된장을 푼다. 심지어 자리돔으로 만드는 물회에도 기본 소스는 된장이었다. 이 점 역시 육지와는 다른 제주도만의 특징이다. 간장보다 된장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은 콩의 생산이 풍부한 반면 소금의 생산이 적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제주도에서는 육지에서 쓰는 물이 새지 않는 옹기가 생산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간장을 담기도 어려웠다.

    생선반찬도 자리돔젓·갈치자반·전갱이자반·고등어자반과 같이 젓갈이나 말린 생선을 주로 먹었다. 1920년대 이후 바다에서 잡은 신선한 생선은 주로 상품으로 판매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먹는 음식의 재료가 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다만 자리돔을 잡으면 즉석에서 물회로 만들어 먹는 경우는 있었다. 하지만 자리돔 물회는 매우 귀한 음식으로 여겼다.

    젓갈이 유난히 많은 이유는 잡곡밥이나 범벅을 먹는 데 효과적인 반찬이기 때문이다. 이 글의 처음에 밝혔듯이 김치로 대부분 해초나 채소를 절인 짠지 계통을 먹었다. 해초인 몸을 절인 몸지나, 양하라는 채소를 절인 양하지, 그리고 톳을 절인 톳지가 바로 그것이다.

    ‘먹을거리 자주권’은 21세기 새 테제 제주도엔 제주음식이 없다 박물관 쇼윈도에 있을 뿐

    재료의 특성만 강조되는 똥돼지.

    제주돼지와 고구마

    오영주 교수는 제주음식 중 ‘돗궤기’라고 하는 돼지고기가 가장 특징적이라고 강조한다. 적어도 1970년대 말까지 제주도의 농가에는 변소에다 돌담을 둘러 지은 ‘돗통’ 혹은 ‘돗통시’가 있었다. 이 돗통에서 자란 돼지는 재래종의 흑돼지로, 제주말로는 ‘꺼멍도새기’라고 한다. 얼굴의 잎과 코는 가늘고 길며 코끝은 좁고 귀는 짧다. 복부는 늘어져 있고, 등허리는 처져 있다. 체중은 보통 24∼38kg, 몸길이는 40cm 정도로 육지의 흑돼지에 비해 작다. 남한 지역에서 보통 고기라고 하면 쇠고기를 가리키지만, 제주도에서는 ‘돼지고기’를 가리킨다.

    제주도 무속에서 가장 특징적인 제물로 쓰이는 것 역시 돼지고기다. 가령 김녕리 궤눼깃당에서는 돗제(豚祭)라는 굿을 1년에 한 번씩 했다. 이때 마을의 모든 집에서 돼지 한 마리를 잡아 궤눼깃당에 바쳤다. 아울러 혼례잔치·상례·명절 때도 집에서 돼지를 잡으면, 먼저 궤눼깃당에 올려 신령에게 대접한 후에야 본인들이 먹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새마을운동 등 행정제재로 인해 당굿을 못하게 되자, 집집마다 2년에 한 번 정도 돼지를 잡아 집에서 몰래 돗제를 지내기도 했다. 그래서 김녕 사람들은 새끼돼지가 태어나면 장차 돗제에 쓸 것이라고 지정해두었다. 달빛에 털에서 윤이 번질번질 날 정도로 살찐 돼지만이 선정되었다.

    ‘먹을거리 자주권’은 21세기 새 테제 제주도엔 제주음식이 없다 박물관 쇼윈도에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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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에서 굿이나 유교식 제사인 포제를 지낼 때는 돼지의 모든 부위가 제물로 쓰인다. 심지어 해조류와 나물에도 돼지고기를 넣고 조리한다. 새끼를 밴 암퇘지를 잡아 그 배에서 새끼를 꺼내 잘 씻은 다음, 생으로 잘게 썰어서 양념을 해 먹기도 한다. 어린 새끼의 고기로 만든 애저탕(·#53138;猪湯)의 일종인 이 음식을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 아침에 통째로 마시면 해장이 된다고 제주 사람들은 믿는다. 하지만 요사이 육지에서 판매되는 일명 ‘제주똥돼지’는 결코 ‘똥돼지’가 아니다. 성읍의 민속마을에 가야 이런 똥돼지를 겨우 만날 수 있을 뿐, 이제 더 이상 제주 사람들은 자신의 똥을 집에서 키우는 돼지에게 먹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제주도 돼지와 고구마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주도에서 고구마가 많이 재배된 것은 19세기부터였다. 하지만 대량생산의 기반은 일제 강점기에 다져졌다. 1915년부터 1919년 사이에 오늘날의 도지사에 해당하는 제주도사(濟州道司)를 지낸 일본인 이마무라 도모에(今村革丙·1870~1943)는 순사와 면서기 등을 직접 이끌고 종래의 ‘원시적’인 고구마 재배법을 개량하는 데 열중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고구마를 쌀이 생산되지 않는 제주도에서 일종의 대용식으로 확산시키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주지하듯이 고구마는 1763년 조엄(趙湄·1719~1777)이 일본에 통신사로 가던 중 대마도(對馬島)에 들러 그 종자를 얻어왔다. 조엄은 동래와 제주도에서 시험 삼아 고구마를 심게 했고, 그로부터 고구마가 한반도에서 재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초창기에는 고구마의 효과적인 재배법을 잘 몰라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고구마는 저장을 잘하지 않으면 금세 상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기술이 필요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가고시마의 ‘사쓰마고구마’가 흉년의 대용식으로 알려지면서 19세기 중반부터 그 재배와 저장방법을 수없이 개량했다. 일본의 개량 기술을 이마무라 도모에가 널리 퍼뜨리면서 제주도는 일약 고구마의 주생산지로 자리 잡았다.

    1929년에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생활상태조사(生活狀態調査)·제주도(濟州道)’에는 1927~1929년에 제주도의 채소 밭 중 거의 85%에 고구마가 재배됐다고 나온다. 특히 1925년경 제주도에 고구마 소주를 생산하기 위한 공장이 들어서면서 고구마의 생산량은 날이 갈수록 증가했다. 이 과정에 돼지의 사육도 늘어났다. 요사이 육지에서 이름난 ‘제주똥돼지’는 원래 집에서 인분을 먹고 자랐다. 하지만 이 시기에 들어오면서 집에서 인분을 먹인 순수한 똥돼지와 함께 고구마 소주공장에서 부산물로 나온 술지게미를 먹고 자란 돼지가 제주도에 동시에 존재하게 됐다.

    ‘똥박사’ 오영주 교수는 한림 앞바다가 인분을 먹지 않는 똥돼지가 배설하는 똥으로 오염되는 사실에 걱정을 많이 한다. 그는 이미 도민의 인구수를 초과한 제주도의 돼지는 고향의 정취를 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몇몇 학자가 칭찬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제주도 똥돼지의 생태적 자율 시스템은 이제 제주도에는 없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거쳐 감귤 판매로 수익이 늘면서 대부분 주택에 현대적인 화장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단지 제주도에서 사육되었다는 사실만을 앞세우는 전문적인 돈육업 공장의 제주돼지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제주돼지가 만들어내는 똥으로 인해 환경오염의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제주음식을 사랑하는 오영주 교수의 또 다른 고민이다.

    정치적인 용어 ‘향토’

    나는 앞에서 ‘향토음식’을 언급하면서 항상 작은따옴표를 쳤다. 독자가 읽기에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이유는 ‘향토음식’이란 개념에 대한 오해를 지적하기 위해서다.

    조선시대 문헌에 ‘향토’란 말은 잘 등장하지 않는다. 간혹 나올 경우에도 왕의 영역에서 벗어난 주변부를 가리킬 때 사용했다. 그렇다면 ‘향토’란 말은 오래된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사실 ‘향토’란 말은 독일어 하이마트쿤스트(Heimatkunst)의 일본식 번역어다.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산업혁명과 근대적인 국민국가 형성이 늦었던 19세기 말의 독일에서는 갑자기 불어닥친 산업화와 도시화로 농촌이 해체되는 국면을 맞이했다.

    이때 도시에서 활동하던 일군의 지식인이 벌인 사회운동이 바로 ‘향토예술운동’이다. 문학이나 미술 작품은 그 작가의 향토를 반영해야 한다는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지리학자이면서 민족학자였던 프리드리히 라첼(Friedrich Ratzel·1844~1904)은 근대 도시인이 지닌 고향에 대한 향수는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와 고향에서 살아온 경험에서 유발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한 나라의 문화를 정립시키기 위해서는 이른바 ‘향토학(Heimatkunde)’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이 당시 독일에서 유학하던 일본의 농업행정 관련 전문가들에 의해 일본으로 곧장 수입됐다.

    대표적인 인물이 일본 근대농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니토베 이나조(新渡戶?造·1862~1933)다. 일본 역시 독일과 유사한 문제에 봉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농촌사회를 살릴 수 있는 방법으로 그가 내세운 주장이 ‘향토보호(鄕土保護)’였다. 니토베의 이러한 주장은 이후 일본 민속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國男·1875~1962)에게 이어져 그로 하여금 ‘향토연구’라는 분야를 개척하도록 만들었다. 야나기타 역시 원래 농업행정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그는 산업화에 의해 농촌사회가 전에 없던 변동기로 접어들자 농촌을 되살리기 위한 방안을 찾는 데 몰두했다. 그는 1910년대 일본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는 농촌의 변화를 통해 도시화 현상을 파악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이를 통해 농촌을 살릴 방안이 마련될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결국 야나기타의 연구에 의해 ‘향토’라는 말이 학문적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1930년대에 들어와서 야나기타가 내세운 ‘향토’는 결코 농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하나의 일본을 만들 필요성이 군국주의자들을 배경으로 쇼와(昭和) 천왕에 의해 제시됐고, 이에 부응해 야나기타는 다양한 일본의 향토문화에서 공통점을 도출해 하나의 향토, 즉 일본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와 같이 당시의 ‘향토’는 매우 정치적인 용어였다. 그래서 ‘향토’라는 말을 붙인 ‘향토식(鄕土食)’이란 용어가 대중적으로 쓰이지 않았다. 다만 도시에 있는 음식점에서 지방의 이름을 붙인 ‘명물요리(名物料理)’ 혹은 ‘명식물(名食物)’이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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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각냉국(좌) 깅이범벅(우)

    과학적으로 개량된 음식

    이러한 사정은 일제 강점기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29년 12월1일자 ‘별건곤’ 잡지에는 ‘진품(珍品)·명품(名品)·천하명식팔도명식물예찬(天下名食八道名食物禮讚)’이란 칼럼이 실렸다. 총 8가지 음식에 대해 각각의 글이 실렸다.

    제목을 원문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사시명물(四時名物) 평양냉면(平壤冷麵)’(김소저金昭姐), ‘사랑의 떡 운치의 떡 연백(延白)의 인절미’(장수산인長壽山人), ‘대구의 자랑 대구의 대구탕반(大邱湯飯)’(달성인達城人), ‘천하진미(天下珍味) 개성(開城)의 편수’(진학포秦學圃), ‘괄세 못할 경성(京城) 설넝탕’(우이생牛耳生), ‘충청도(忠淸道) 명물(名物) 진천(鎭川) 메물묵’(비봉산인飛鳳山人), ‘전주명물(全州名物) 탁백이국’(다가정인多佳亭人), ‘진품중(珍品中) 진품(珍品) 신선로(神仙爐)’(우보생牛步生), ‘경상도명물(慶尙道名物) 진주(晉州) 비빔밥’(옥봉산인玉峰山人)

    제시된 팔도의 유명 음식에 언급된 지명을 보면, 모두 당시에 제법 큰 규모의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필자들의 필명 역시 지역의 특성을 드러내는 지명이나 음식과 관련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음식의 이름 역시 당시에 이미 음식점에서 전문적으로 판매하고 있던 메뉴들이다. 당시 ‘별건곤’의 독자는 대부분 도시의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에게 도시를 상징하는 유명 음식들을 꼽아 소개한 이유는 그만큼 지역을 내세운 음식들이 많이 소비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이들 음식을 ‘향토음식’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일본의 민속학자 야노 게이치(矢野 敬一)의 연구에 의하면, 일본의 경우 음식이나 식량 전문가들이 ‘향토음식’에 주목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와서라고 한다. 1930년대 중반에 전쟁을 준비하면서 대용식으로 농촌의 음식에 주목한 적은 있지만 그것을 향토음식이란 개념으로 부르지는 않았다. 그런데 1960년대 고도경제성장 시기에 농촌의 식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운동을 중앙정부의 농림성(農林省)에서 주도하면서 현대의 영양학과 식품학 이론이 개입된 향토음식이란 것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당시 향토음식은 농촌에서 오랫동안 유지된 음식이 아니었다. 보다 과학적으로 개량된 음식이었다. 개량의 필요성은 농촌의 주부들을 건전한 가정학 지식을 보유한 현대적인 주부로 만들기 위한 정책에서 나왔다. 그래서 서구형으로 개량된 부엌에서 어머니가 만드는 음식을 향토음식이라 명명했다. 그러면서 이 향토음식에 어머니의 맛을 개입시켰다. 1970년대 이후 농촌 인구가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향토음식은 고향인 농촌을 살릴 수 있는 상품으로 이해되었다. 결국 1980년대 이후 농촌 마을을 다시 살리기 위한 지자체의 각종 캠페인에서 향토음식은 ‘고향’과 ‘어머니의 맛’이라는 이미지로 포장됐고, 자신들의 농수산물을 판매하는 상품이 되었다. 요사이 일본의 지자체가 생존의 방법으로 팔을 걷고 선전하는 ‘향토음식’은 1960년대에 발명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야노 교수의 연구 결과다.

    한국사회에서는 일본의 1960년대와 같은 고도 경제성장 시기를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맞이한다. 이 시기에 농촌 생활개선운동이 일본처럼 중앙정부에 의해 적극적으로 시행되지 않는다. 대신 이미 구축된 1960년대의 쌀 위주 농업정책이 가져온 문제점을 해결하는 대안으로 각종 수입 농산물이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에 대응해 농업의 특성화가 진행된다. 어느 정도 성공한 경우도 있지만, 유통과 시장의 논리에 휩쓸린 농촌은 예전에 비해 더욱 피폐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결국 한국사회의 먹을거리 자급자족 시스템은 1980년대에 와서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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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지화된 제주 채소 정식.

    먹을거리 자주권

    제주도 역시 한국사회의 이러한 경향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나는 제주도의 20세기 역사는 육지에 포섭되는 과정이었다고 단언한다. 이것은 국민국가가 해야 하는 당연한 조치일 수 있다. 적어도 19세기까지 자급자족의 시스템을 유지하던 제주도의 경우 육지와는 다른 음식생활의 구조를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제주개발 붐과 함께 육지로부터 이주하는 사람이 날이 갈수록 늘어났고, 쌀의 수입도 증가했다. 아울러 벼농사를 짓는 논밭도 그전에 비해 훨씬 많아졌다. 쌀을 주식으로 하면서 제주음식의 일상적인 소비 패턴은 붕괴되었다.

    더욱이 제주도의 농업에 개입된 중앙정부의 특성화 정책은 농촌의 기본적인 구조를 흔들었다. 1970년대 감귤 농장의 확대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제주도에서 감귤 농장 경영은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더 좋다는 판단이 지배적이다. 수입 감귤의 가격과 경쟁하려면 돈을 주는 인부를 들일 수가 없다. 결국 감귤을 따지 못하는 농장이 날이 갈수록 늘어난다. 유채밭을 조성해 식용유를 생산하겠다는 정책 역시 실패로 끝났다. 비록 유채꽃이 폈을 때의 경치를 관광객에게 제공하지만, 그 이상의 식량자원으로는 쓰이지 않는다. 아울러 1970년대 이후 쌀농사가 적극적으로 추진되면서 밭작물의 생산량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이제 제주사람들이 1960년대까지 즐겨 먹던 제주음식을 먹으려고 하면 쌀밥을 위주로 한 육지식의 음식을 먹을 때에 비해 그 경비가 몇 배 이상 든다. 여기에 몇몇 향토음식점을 제외하면 전체 섬이 횟집과 삼겹살 식당으로 가득 차 있다. 더욱이 오래된 제주음식은 촌스럽다는 인식이 지식인이나 젊은이들 사이에 퍼져 있다.

    2004년 제주대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관광학을 전공하는 교수는 서양 손님들이 제주의 향토음식을 먹고 싶다고 해도 안내할 곳이 없다고 했다. 대부분 위생과 시설에 문제가 있어 자신은 가능하면 중문단지 안에서 그들을 대접한다고 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관광학을 전공한다는 학자가 자신의 고장에서 동향사람들이 먹어온 음식을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고 홍보할 생각은 하지 않고 스스로 폄하하다니! 향토음식이 국가나 도시의 외식산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지역의 농수산업과 연결돼 있다. 당연히 지역 소재의 대학과 지자체와 농민들, 소비자 단체가 머리를 싸매고 지역을 살리기 위한 향토음식 개발에 나서야 한다. 국가의 농수산업 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부처의 인식 전환도 중요하다.

    ‘먹을거리 자주권’은 21세기 새 테제 제주도엔 제주음식이 없다 박물관 쇼윈도에 있을 뿐
    주영하

    1962년 경남 마산 출생

    서강대 사학과 졸업, 한양대 석사 (문화인류학), 중국 중앙민족대학 박사(민족학)

    現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민속학 전공 부교수

    일본 가고시마대에서 규슈 지역 음식문화 현지조사 진행 중

    저서 : ‘음식전쟁 문화전쟁’ ‘중국 중국인 중국음식’ ‘음식 속의 그림, 그림 속의 역사’ 등


    식품의 생산과 유통의 세계화로 인해 온 나라가 먹을거리의 자주권을 두고 열병을 앓고 있는 요즘, 농정 당국은 지역의 농수산물로 만든 향토음식을 외식업체뿐만 아니라 지역민의 밥상에서도 살려낼 고민을 해야 한다. 지역의 먹을거리 자주권은 이제 국가의 먹을거리 자주권이며, 21세기를 슬기롭게 살아갈 테제다. 제주음식이 육지에 포섭되어 박물관의 쇼윈도로 들어간 지금, 자칫 한국음식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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