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교시절부터 ‘칼 패스’로 유명
- 일본 기자, 팬, 선수, 감독과 구단까지 절대적 신뢰
- “J1리그, 일본 국가대표보다 수준 높아”
- “일본과 한국은 외국일 뿐, 귀화 한 번도 생각 안 해”
- “김정일은 조국의 지도자, 잘 모르지만 믿고 싶다”
일본 기자들이 한 재일동포 선수에게 그렇게 깊은 관심을 가져준다는 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더 놀라운 건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은 그렇다고 해도, 일본 기자들까지 굳이 그의 성을 ‘양’이 아닌 ‘량’으로 발음하는 것이었다.
축구전문기자들이 량 선수 인터뷰를 적극 권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가 J2리그(일본 프로축구 2부리그)팀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재일동포 출신, 그것도 일본 사회에서 가장 편견이 심한 ‘조선 국적’ 선수가 프로팀 주장이 됐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얼마나 뛰어난 선수이기에, 얼마나 신뢰를 주는 선수이기에 그럴 수 있었을까.
량용기(梁勇基·27) 선수는 고등학교까지 오사카에서 민족학교를 다녔다. 대학은 축구명문 한난(阪南)대학을 나왔다. 그가 한난대학을 선택한 것은 J리그에 진출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오사카 조선고급학교(고등학교) 시절, 일본 전국에 있는 ‘민족학교’ 축구부 부원들의 우상이었다. 그가 예정대로 무사히 J리그에 안착하면 그 길은 곧 후배들의 길이기도 했다. 그는 주저 없이 축구명문인 한난대학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예비 프로선수로서의 기량을 닦았다.
민족학교 축구부 우상
그의 특기는 경기의 흐름을 재빨리 읽고, 빈 자리로 정확하게 치고 들어가는 것. 당시 일본 언론은 그에 대해 “고교생답지 않게 공을 능숙하게 다뤄, 프로 진출이 확실시되는 선수”라고 극찬했다.
그의 실력은 대학에 들어가서 맹위를 떨쳤다. 그의 맹활약으로 대학 2학년 때는 총리배 대회에서 우승했고, 3학년 때는 관서대학리그 MVP, 춘계득점왕(2002년), 추계 어시스트왕을 거머쥐었다. 4학년 때도 관서대학리그 MVP (2003년)가 됐고, 총리배 준우승을 했다. 2년 연속 MVP는 그가 유일했다. 자연히 일본 축구인들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고, 졸업 즈음에는 여러 프로구단으로부터 입단제의가 밀려왔다.
하지만 그가 최종적으로 계약한 팀은 ‘베가르타 센다이(仙台).’ 당시 센다이는 최하위 성적으로 J1리그에서 J2리그로 추락하던 시기였다. 량 선수가 센다이를 선택한 것은 바로 이 타이밍이었다.
그는 자신이 중심이 되어 조선고급학교와 한난대학을 축구명문으로 끌어올렸듯이 센다이에서도 그렇게 활약하고 싶었다. 일류선수들의 집합소인 J1리그 벤치에서 기약 없는 기회를 기다리느니 2부에서라도 그라운드를 누비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진가를 제대로 발휘해보고 싶었다. 그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저 없이 센다이에 입단했다.
하지만 역시 프로축구는 차이가 있었다. 혼자 열심히 뛴다고 이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005년, 북한대표로 동아시아선수권대회에 출전해 4골을 기록하며 북한이 준우승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점. 일본 언론에서도 이를 크게 보도했다. 일본 언론에 노출되는 빈도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센다이뿐 아니라 일본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했다. 센다이 팬들도 센다이 팀에 국제적인 선수가 탄생했다며 뜨거운 성원을 보냈다. 구단 홈페이지는 그를 응원하는 메시지로 넘쳐났다.
센다이의 철인
비록 팀은 성적부진으로 연거푸 J2리그에 머물렀지만, 량 선수 자신은 조금씩 착실하게 성장을 거듭했다. 2007년에는 총 48게임 풀타임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에 일본 언론과 팬들이 붙여준 별명이 ‘철인.’ 초인적인 힘이 아니고서야 해낼 수 없는 기록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올해엔 일본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듯이 재일교포 최초로 주장이 됐다. 주장은 팀의 모범이 돼야 하고, 선수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야 한다. 또한 구단과 감독의 절대적인 신뢰도 필요하다. 일본인 선수도 인정받기 어려운 조건이다. 재미있는 건 그의 주장 발탁을 일본 팬들이 더 반겼다는 것.
“량 선수는 팀에 막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 존재다. 정확한 패스로 경기의 흐름을 이어준다. 헌신적으로 움직이면서 슈팅을 날린다. 금년에도 베가르타를 즐겁게, 생생하게 해주고 있다. 간바레(힘내라) 량용기!”
“Mr. 베가르타는 당신이다. 센다이에 량이 없으면 대지주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처럼 센다이 홈페이지에는 그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는 메시지가 가득하다.
올해 초, 다시 한번 그를 부각시킨 일이 있었다. 2005년에 이어 또다시 북한대표 선수로 발탁된 것이다. 안영학, 정대세, 량용기 선수가 함께 북한대표가 됐는데, 재일동포 출신 3명이 북한대표로 뽑힌 것은 조총련 축구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일본 축구선수들의 처지는 묘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동료이던 선수가 오늘은 적이 되어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되자 북한대표가 된 세 선수에게 마냥 축하한다고 인사할 수 있는 상황이 못 됐다. 하지만 일본 팬들의 생각은 달랐다. 어차피 스포츠에선 페어플레이를 해야 하는 것. 어느 나라 대표로 뛰든 최선을 다해 플레이만 잘 하면 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래서 북한대표로 출전하는 량 선수에게 팬들은 열심히 뛰고 돌아오라는 응원을 보냈다.
“센다이에서 량 선수의 인기는 대단하다. 센다이 사람들은 그를 철인이라 부른다. 게다가 올해부터는 주장이 되어 팬들의 신뢰는 절대적이다. 그의 인기를 확인하려면 직접 센다이에 와봐야 한다.”
‘스포츠닛폰’ 센다이 지국장 도카시 기자의 말이다. 그래서 인터뷰 신청서를 작성해 베가르타 센다이 홍보실로 보냈지만 시즌 중이어서 인터뷰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던 중 시합이 없는 날을 이용해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장소는 센다이 전용연습구장. 선수들은 전국을 돌며 경기를 하는데, 시합이 없는 날엔 홈 전용구장에서 훈련한다.
도쿄 우에노역에서 두 시간 동안 신칸센을 타고 센다이 연습구장으로 찾아가니 량 선수는 운동장에서 선수들과 훈련을 하고 있었다. 운동장 주변에선 센다이 팬 300여 명이 훈련을 지켜보고 있었고, 스포츠신문 기자들과 방송사 기자들은 프레스 지정 위치에서 취재하고 있었다. 2부리그 팀 훈련치고는 꽤 많은 기자가 모였다 싶어 이유를 물으니 센다이가 내년에 1부 리그로 올라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란다. 현재 팀 성적이 상승무드를 타고 있고, 선수들의 기량도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어 1부 리그 진출이 어렵지 않다는 게 기자들의 총평.
굴곡 심한 북한 축구
훈련이 끝나고 구단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량용기 선수는 얼음이 가득한 물에 발부터 담갔다. 발목이 시큰거려 훈련이 끝나면 늘 얼음물에 10분씩 담근단다. 인터뷰는 ‘철인’ 소리를 듣는 체력관리 얘기부터 시작됐다.
“부모님이 1년에 한 번씩 이곳에 오시기 때문에 가족들이 특별히 건강을 챙겨 주지는 못해요. 대신 주변 분들이 어떤 음식이 좋다고 알려주시면 제가 직접 만들어 먹거나 사 먹어요. 시합 전에는 주로 스파게티 등 국수 종류를 먹고, 시합이 끝나면 고기를 먹어요. 가끔은 제가 좋아하는 삼계탕도 먹고요. 평소 연습을 많이 합니다. 여기 2층 트레이너센터에서 바벨 등을 이용해 몸을 만들고, 운동장에서 2시간 정도 강도 높은 훈련을 합니다. 연습을 좀 더 해야겠다고 생각되면 하루에 두 번 할 때도 있고요.”
얼마 전 량 선수 부모가 센다이를 다녀갔다. 부모 모두 오사카에 있는 일본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 자주 오가지는 못한다고 했다.
두 번째로 북한대표로 발탁돼 출전한 감상을 들어보았다.
“정말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일본 대표들과 싸우면서 기술, 기량 등 수준차를 절실하게 느꼈어요. 많은 자극이 됐습니다. 또 일본 팬들이 잘 다녀오라고 적극적으로 응원해줘 맘 편히 다녀왔고요.”
프로선수로서 자신의 실력에 대해 몇 점을 주겠느냐고 물었더니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50점”이라고 말했다. 이유는 현재 센다이 팀이 2부 리그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는 것. 1부 리그로 올라가면 더 후한 점수를 주겠다고 했다.
자신의 장점에 대해서는 패스를 잘한다고 했다. 비교적 정확한 패스를 하기 때문에 선수들이 자신으로부터 받는 공을 좋아한다는 것. 그가 학창시절부터 일본 언론으로부터 자주 듣던 찬사다. 그렇지만 자신의 뛰어난 기량에도 불구하고 팀이 계속 2부 리그에 머물자 자괴감이 무척 큰 것 같았다. 축구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가혹하다 싶을 만큼 자신과 팀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일본 프로축구는 수준이 매우 높습니다. 일본 대표팀과는 다르죠. 워낙 기량이 좋은 외국선수들이 몰려들다 보니 기술이나 체력에서 우리와 큰 차이가 납니다. 배울 것이 많습니다. 물론 체력 면에서는 일본 선수들보다 한국 선수들이 더 좋죠. 가끔 인터넷에 들어가서 한국 축구를 살펴봅니다. 박주영 선수나 김남일 선수는 워낙 잘하잖아요. 몸도 크고 발도 빠르고요. 반면 북조선 선수들은 몸집은 작지만 많이 뛰고 기술향상이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수준이 꽤 있습니다. 다만 북쪽 선수들은 굴곡이 심해 경기의 흐름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2005년 열린 동아시아축구대회 남·북한전에서 골을 터뜨린 후 환호하는 량용기 선수(왼쪽 3번째).
-량 선수에게 북한은 어떤 존재이며, 2005년 받은 ‘체육명수’는 어떤 훈장인가요.
“북조선은 제 조국입니다. 조국이 없으면 나의 존재 자체가 없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체육명수는 전문체육인으로서 북에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럼 량 선수에게 일본은 무엇입니까.
“일본은 그냥 외국입니다. 조부가 식민지 시절 일본에 건너오셨는데, 그때도 우리 조국은 조선이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일본과는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납치 문제 같은 불미스러운 일도 빨리 해결하고요. 귀화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고, 또 자기 정체성을 버리면서까지 축구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도 저에게는 역시 외국입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일본 매스컴은 한 번도 그분에 대해서 좋은 기사를 쓴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그 기사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조국의 지도자이므로 우리는 믿어야 하고, 믿고 싶습니다.”
조선 국적을 가진 재일동포들의 특징은 민족의식이 무척 강하다는 것이다. 조국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량 선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홈페이지에 안영학 선수의 이름이 올라 있어 친한 사이냐고 묻자 대뜸 “안 형님 말입니까?”라고 억센 억양으로 되물었다. 안 선수와는 가끔 전화통화를 한다고 했다. ‘안 형님’을 보면 자신도 한국에서 뛰고 싶지만, 지금은 센다이가 1부 리그로 올라가는 것이 최우선이기에 마음으로만 부러워한다고 했다.
‘조금 전에 한국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함께 대표팀에서 싸우던 안영학 상이었다. 나의 일이 신경에 쓰였는지 전화를 준 것 같다. 와아 너무 좋은 사람! 소파에서 깜빡깜빡 졸고 있었는데, 한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센다이의 시합을 인터넷에서 본 모양이다. “개막전 왜 진 거야!”라는 핀잔을 들었다. 영학 상도 한국에서 열심히 하는 것 같고, 뭔가 힘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하자!’
량 선수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쓴 글이다. 그는 안영학, 정대세 선수와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때로는 자극도 받고 때로는 위로도 받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 정대세의 인기가 높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솔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같은 동포로서 기쁩니다. 그런 한편으론 자극도 되고 또 솔직히 부담도 됩니다. 저도 열심히 뛰어서 대세처럼 제 이름을 금방 알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에게 부족한 체력과 기술을 더 높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특히 다리에 신경이 많이 쓰여 집중관리를 하고 있지요.”
48게임 풀타임 출전
지난해 48게임 풀타임 출전이 다리에 부담을 꽤 준 것 같았다. 인터뷰를 하면서도 그 차디찬 얼음물에 두 다리를 담그고는 얼굴 한번 안 찡그리고 끝까지 참아냈다. 아마도 그런 인내심과 끈기가 그를 주장 자리에 앉힌 게 아니었을까.
“처음엔 저도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감독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고 주위 분들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왜 나를 주장으로 추천했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결국은 저에 대한 신뢰더군요. 저는 감독과 축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제가 주장을 받아들인 것은 이것도 하나의 찬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선 국적으로 일본 팀에서 주장을 한다는 게 우리 동포들에게 큰 용기가 될 거고요.
물론 제가 조선인이라 걱정해주시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 팬들은 오히려 전보다 더 많은 응원을 해주고 있습니다. 제 역할은 열심히 운동을 하면서 선수들의 생각과 고충을 감독에게, 감독의 생각과 구상을 선수들에게 잘 전달해 원만한 커뮤니케이션을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잘 해내고 있습니다.”
구단과 팬들의 절대적인 신뢰는 량 선수에게 양면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감과 부담감이 그를 완벽주의자로 몰아붙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무조건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온몸에 배어 있었다.
그는 9년 동안 교제해온 동포 출신 여자친구와 올해부터 부모의 허락 아래 동거하고 있다. 결혼은 1부리그에 올라가면 하기로 약속했다는 것. 그 일환으로 체력보강을 위해 요즘 여자친구가 한창 한국요리를 배우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 가보고 싶어요. 불고기와 제가 좋아하는 지지미를 먹고 싶고, 또 좋아하는 김건모 CD도 사고 싶습니다. 5년 전 김건모의 ‘바보야’라는 CD를 산 적이 있는데 지금도 즐겨 듣고 있어요. 덕분에 가라오케는 적어도 한 달에 두세 번씩 가죠. 물론 한국 노래도 즐겨 부르지요. 술도 좋아합니다. 연봉요? 그건 1부로 올라가면 밝힐게요.”
놀라운 것은 그가 인터뷰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끝날 때까지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는 점. 그가 조선인이라는 전제만 없었다면 영락없는 전형적 일본인 상이었다. 그만큼 흐트러짐이 없었다. 발랄한 신세대 정대세처럼 인터뷰 중간에 여자친구 이야기를 꺼내며 크게 웃는 장면도 없었다. 시종일관 진지함 그 자체였다. 역시 주장은 괜히 되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민족관과 정체성
현재 일본 프로축구(J1, J2)에서 뛰는 선수 중 공식적으로 밝혀진 재일동포 선수는 20여 명이다. 또한 외국선수 중 19명이 일본으로 귀화했다. 국적별로는 브라질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한국이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은 일본으로 귀화한 재일동포가 모두 한국 국적을 가진 민단계라는 사실이다. 현재 수원삼성에서 뛰고 있는 안영학도 국적을 바꾸지 않았다. 재일동포 출신으로 J리그에 최초로 진출한 선수도 조선 국적의 신재범이다.
재일동포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 때문에 ‘귀화’를 했다는 논리는, 조선 국적을 가진 선수들 앞에서는 합리성을 잃는다. 차라리 본국에서의 터부가 심해 국가대표가 될 수 없었기에 일본으로 귀화했다는 추성훈의 주장이 훨씬 더 설득력을 얻는다.
재일동포들의 국적은 언어 하나로 쉽게 판별할 수 있다. 재일동포 특유의 억센 톤으로 우리말을 할 줄 알면 십중팔구 조총련계고, 반대로 우리말은 더듬더듬 알아듣지만 말할 줄 모르면 민단계라면 얼추 들어맞는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조총련의 김일성·김정일 부자에 대한 일방적인 충성심과 그 사상은 결코 찬성할 순 없지만, 민족교육만큼은 중국인 못지않게 잘 지켜냈다고. 그 때문에 조선 국적 선수들의 정체성은 언제 어디서나 확고하다는 것. 지금 한국에서 그렇게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정대세도 바로 이 같은 민족교육 때문에 민족관이 확실한 젊은이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정대세, 량용기 선수를 통해서 본 재일동포들의 활동과 그 정체성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