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호

6·25전쟁 ‘유령부대’ 재일 학도의용군을 아시나요

조국 위해 목숨 바쳤으나 두 번이나 버림받다

  • 문관현 / 연합뉴스 국제부 기자 miguel2317@naver.com

    입력2008-08-02 13: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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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역사상 최초의 해외국민 참전.’
    • 6·25전쟁 발발 직후 재일교포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의용군을 조직해 조국 전선에 뛰어들어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 또 일본에 잠입해 재일교포 북송 저지 공작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재입국 거부와 조국의 ‘나 몰라라’로 가족과 생이별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기구한 삶.
    6·25전쟁 ‘유령부대’ 재일 학도의용군을 아시나요

    재일 학도의용군동지회 회원들이 ‘신동아’ 독자를 위해 오랜만에 함께 모였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병익 회장(위). 1954년 9월 서울 인사동에 동지회 사무실을 마련하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아래 오른쪽). 아래 왼쪽 작은 사진은 김병익 회장이 정부에서 받은 무공훈장(아래 왼쪽).

    “해외에 유학 중이던 이스라엘 청년들이 1967년 6월 발발한 제3차 중동전쟁 때 조국을 지키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전쟁터로 달려갔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지요. 그러나 그보다 17년이나 앞선 6·25전쟁 때 642명의 재일교포 학생이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의용군을 조직해 전선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어요.”

    재일 학도의용군의 6·25전쟁 참전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7월 초 서울 여의도동 중앙보훈회관 4층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외롭게 사무실을 지키던 김병익(金炳翼·78) 재일 학도의용군동지회 회장은 긴 한숨부터 내쉬었다. 한참 만에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김 회장은 “전쟁이 끝난 뒤에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국에 남았던 242명 가운데 이제 생존자는 46명에 불과하다”면서 “운 좋게 전쟁터에서 살아남았지만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마음은 시커멓게 타버린 지 이미 오래”라고 장탄식을 늘어놓았다.

    미국 언론은 3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 청년들의 구국 행렬을 두고 “세계 최초의 해외국민 참전”이라고 극찬했다. 하지만 1950년 여름 재일교포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재일교포 학생들의 6·25전쟁 참전이야말로 세계 역사상 최초의 해외국민 참전이다. 병역 의무도 없는 해외교포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총을 들고 전쟁터로 달려 나간 숭고한 뜻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6·25전쟁 발발과 지원 물결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 발발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점령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재일교포들은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불과 5년 만에 조국이 동족상잔의 비극에 휘말렸다는 사실은 인정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에 대해 재일본 대한민국거류민단을 중심으로 한 우익 단체들은 발 빠르게 대응했다. 민단 중앙본부는 전쟁 발발 다음날 담화문을 발표한 데 이어 29, 30일 이틀 동안 확대간부회의를 개최하고 ▲민단은 전국 청년학도의 자원병을 조국 전선에 파견한다. ▲전선 장병과 피난민에게 구호물자와 위문품 보내기 운동을 전개한다. ▲매일같이 준동하는 공산 진영의 파괴공작에 대비해 조직을 한층 더 견고히 하고 수호한다는 결의를 채택했다.

    민단 중앙본부는 이 결의에 따라 8월 5일 ‘자원병 지도본부’를 설치하고 재일교포 학생들의 지원서를 접수하기 시작했다. 곧 1000명이 넘는 재일교포 청년 학생이 참전 의사를 표시했다. 신체검사와 심사과정을 거쳐 최종 선발된 인원은 642명. 나이도 18세 고등학생 김교인(金敎仁)과 조승배(趙承培)부터 중년 고개를 넘긴 45세 김순룡(金順龍)까지 다양했다. 특히 당시 지원자 가운데는 연약한 처녀들도 있었지만 여성 지원자들의 한국행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심지어 후쿠시마(福島)현 일본인 청년 대표가 민단 중앙본부를 찾아와 혈서로 작성된 100여 명의 일본인 지원자 명단을 제출하는 놀라운 사건도 벌어졌다. 여기엔 간호사로 일하던 일본인 여성도 포함돼 있었다. 관동군 출신인 그는 패전과 동시에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겪은 온갖 수모를 잊지 못하며 공산주의자들에게 복수할 생각으로 참전한다고 밝혔다. 오사카(大阪)에서도 일본군 특공대 출신 2명이 지원 의사를 밝혔다.

    민단은 이들의 참전 의사를 전해 듣고 고민에 싸였다. 회의를 거듭한 결과 이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직 한국에 반일(反日) 감정이 남아 있는 상황에 일본인이 참전할 경우 어떤 돌발 상황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6·25전쟁 ‘유령부대’ 재일 학도의용군을 아시나요

    김병익 회장이 6·25전쟁 당시 찍은 사진을 보여 주면서 그때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재일교포 학생들 각자의 참전 사연은 그 자체가 한편의 드라마였다. 독자인 규슈(九州)의 신효근(辛孝根)은 지원서를 덜컥 제출해놓고 이 사실을 차마 아버지에게 털어놓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출발 전날 술을 마신 아버지가 배가 아프다고 호소하자 의사를 불렀다. 신효근은 이 의사에게 자신의 사정을 설명한 다음 주사약에 수면제를 조금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엔 딱 잘라 거절하던 의사도 결국 신효근의 조국애에 못 이겨 손을 들고 말았다. 부친이 잠든 사실을 확인한 그는 친지들에게 아버지가 깨어나면 사실대로 알리라는 말을 남기고 친구 2명과 함께 집을 떠났다.

    재일대한청년단 오사카 본부에서 일하다 지원한 조용갑(趙鏞甲)과 조만철(趙滿鐵)은 삼촌과 조카 사이. 조카인 조만철은 집안의 종손이라 참전해선 안 된다는 가족 전체의 반대에 부닥치자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는 단식투쟁을 벌인 끝에 한국행을 관철시켰다.

    양옥룡(梁玉龍)은 당시 게이오대 기계공학과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일제 말기 중학 2학년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해군 특별지원병으로 끌려갔다 살아 돌아온 특이한 전력의 소유자였다. 지도교수를 찾아가 휴학 의사를 밝히자 일본인 교수들은 “일본 제국주의도 공학도들은 전쟁터로 내몰지 않았다”며 펄쩍 뛰었다고 한다. 그들은 “공부를 열심히 해 학문과 지식으로 조국 재건에 봉사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설득했지만 양옥룡의 결심을 돌이키지는 못했다.

    와카야마(和歌山)시 자동차회사에 근무하던 조종규(曺宗奎)는 부산에 아내와 부모님을 남겨놓고 일본으로 건너온 상태였다. 재일 학도의용군 제2진에 포함돼 6·25전쟁에 참전한 후 1952년 10월 제대를 하고 나서야 가족을 찾아갔다. 당시 가족들은 외아들인 조종규가 일본에서 돈을 벌다 돌아온 줄 알았는데 전선을 누비고 왔다는 말에 모두 기겁을 했다고 한다.

    오사카에서 발행되는 동포신문 ‘신세계(新世界)’ 기자였던 김성욱(金聖郁)은 1950년 9월8일 도쿄 스루가다이 호텔에서 거행된 재일 학도의용군 제1진 출정식을 취재하던 중이었다. 그는 이때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둘러 기사를 송고한 후 한국행을 자원했다. 하숙집은커녕 도쿄 근교에 살고 있는 부모에게도 연락하지 못한 상태였다.

    주일 한국대표부는 이들의 참전 열기에 처음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무래도 일본과 국교를 맺기 전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드디어 전선에 서다

    그러나 들불처럼 일어나는 재일교포 학생들의 참전 열기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결국 주일 한국대표부는 당시 일본을 점령 중이던 미 극동군총사령부와 접촉했다. 이 접촉에서 어떤 내용이 합의됐는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이후 정황으로 미뤄 참전한 재일 학도의용군의 일본 재입국을 허용한다는 데는 원칙적으로 합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6·25전쟁 중 일부 재일 학도의용군이 미군의 주선으로 일본에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지면서 비극의 씨앗이 잉태됐다. 미국과 일본이 1952년 4월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그것이다. 일본 정부는 조약 체결 이후 재일 학도의용군의 재입국을 거부했다. 혈서까지 써가면서 반공전선에 뛰어든 재일 학도의용군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미 극동군총사령부는 재일교포 청년 학생들을 지역별로 시차를 두고 적게는 40~50명에서 많게는 270명까지 나누어 한국 전선으로 보냈다. 가장 먼저 소집 명령이 떨어진 곳은 도쿄였다. 민단 주최로 1950년 9월7일 도쿄 스루가다이 호텔에서 개최된 환송식에는 주일 대표부 김용주(金龍周) 공사와 민단 간부들이 참석해 재일 학도의용군을 격려했다.

    이 호텔에서 입영 전야를 보낸 이들 78명은 다음날 출정식 후 가족과 민단 간부들의 환송을 받으며 미군 트럭을 타고 이동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도쿄 인근 사이타마(埼玉)현 아사카(朝霞) 소재 미 제1기병사단 사령부의 캠프 드레이크 내 미8군 보충훈련소였다.

    이곳에서 신체검사를 받는 등 입대 수속을 밟았다. 이튿날 미군은 재일 학도의용군을 2개 소대로 편성하고 곧바로 군사훈련에 돌입했다. 이때 받은 군사훈련은 주로 미군식 호령과 상관에게 경례하는 법, 제식훈련이 전부였다. 입소 4일 만인 9월12일 이들은 2대의 군용버스에 나눠 타고 요코하마(橫濱)항에 도착해 군용 수송선 피닉스 호에 승선했다. 목적지도 모른 상태였다.

    피닉스 호는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는 미군 제7사단 병력 1500명을 수송하는 중이었다. 미군들은 계급장도 달지 않은 군복을 입은 동양인들이 합류하자 궁금증을 표시했다. 일부 재일 학도의용군이 대학에서 배운 영어 실력을 발휘해 미군 병사들과 얘기를 나눈 끝에 자신들이 인천으로 향하고 있으며 미 제7사단에 배속됐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군번과 계급이 부여되지 않았다. 군인 신분을 나타내는 표시로는 견장에 씌인 ‘FROM JAPAN’이라는 문구가 유일했다. 군사훈련이라고는 제식훈련밖에 받지 못한 이들은 선실에서 미군들에게 M1 소총과 칼빈 소총의 분해 결합 요령을 겨우 배울 수 있었다.

    재일 학도의용군 1진을 실은 수송선이 인천 먼 바다에 도착한 것은 1950년 9월16일 오후 무렵. 이들은 다음날인 17일에야 상륙용 주정을 타고 인천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재일 학도의용군 2진 266명이 비슷한 과정을 거쳐 현재의 인천 올림푸스 호텔 주변 해변가에 상륙한 것은 9월24일. 곧바로 바닷가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한 이들은 이튿날 송림초등학교로 이동해 몇십 명씩 흩어져 미군 각 부대에 배속됐다.

    학도의용군 3진 101명은 10월5일 인천항에 도착한 뒤 곧바로 경기 이천으로 이동해 미 제7사단에 배속됐다. 이들은 동해안의 이원과 원산 상륙작전에 참가해 유엔군 북진에 가세했으나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 83명이 실종되는 비극이 발생했다.

    한편 규슈 지방에서 자원한 145명은 오이타(大分)현 벳푸(別府) 소재 캠프 모리 미 8068보충대대에서 입소절차를 밟고 나서 10월15일 나가사키(長崎)현 사세보(佐世保)항을 출발했다. 부산에 도착한 이들은 미군이 아닌 국군 제2훈련소에 입소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50일 동안 훈련을 받은 뒤 국군 제9사단에 배속돼 백마고지 전투와 금화전투 등에 참여했다. 이들이 재일 학도의용군 제4진이다.

    규슈 지방 출신으로 구성된 재일학도의용군 52명은 9월18일 입소해 캠프 모리에서 45일 동안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육군본부가 부여한 카투사 고유군번인 ‘K-1138301’에서 ’K-1138352’까지 부여받았다. 훗날 공군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하다 산화한 박두원(朴斗元)도 여기에 포함됐다.

    이들은 훈련을 마친 후 미 제3사단에 배속돼 11월10일 고쿠라(小倉)항을 출발해 인천상륙작전 직후 있었던 원산상륙작전에 투입됐다. 이후 재일 학도의용군들은 북·중 경계지역인 풍산과 갑산, 혜산진 일대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투에 참가했다.

    3·1독립보병대대 창설과 해체

    6·25전쟁 ‘유령부대’ 재일 학도의용군을 아시나요

    국방부 장관이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재일 학도의용군에게 발급한 신분증.

    재일 학도의용군의 후속 부대가 속속 한반도에 투입됐지만 이들이 마지막에 도착한 곳은 당시 경기 부평의 구 일본군 주둔지였다. 이곳에는 미 제3병참기지 사령부가 주둔해 있었고 재일 학도의용군은 부대 남서쪽 언덕에 있는 막사에 배치됐다. 이들의 임무는 부대 외곽 경비와 순찰, 차량수리 등과 같은 후방지원 업무였다.

    일명 ‘창고지기’로 전락한 학도의용군 사이에 불만이 싹트기 시작했다. 계급과 군번마저 주어지지 않은 ‘군인 아닌 군인’으로서 상실감과 좌절감은 커져갔고 급기야는 통제불능 상태에 이르렀다.

    미 제422 보병연대의 일본인 2세 지미 고자와 중위는 사태의 심각성을 간파했다. 고자와 중위는 제3병참기지 사령관 조지 스튜어트 장군에게 면담을 요청해 학도의용군 활용 방안을 설명했다. 고자와 중위의 거듭된 설득에 스튜어트 장군은 결국 단일부대 창설안을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임시 편성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재일 학도의용군 소속부대와 주요전투
    한국군 부대 미군 부대
    제 1.2.3.6.8.9.11.15.22.27.29.30.37.50사단

    제1·2훈련소, 육군보병학교, 육군 제1103 야전공병단, 제603경장비중대, 거제도포로수용소 경비대, 육군 제65사단 비행대, 육군본부 항공대, 제77비행대 정비중대, 제6비행기 정비대대, 제1군사령부 항공과, 공군 제10전투비행대대
    미 제8군 예하 제3병참기지사령부, 제60본부중대, 제45부대, 제19병참부대, 제92화기중대, 제65탄약중대, 제330부대, 제10군단, 제2사단, 제3사단, 제7사단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1950년 10월 원산·이원 상륙작전, 1950년 11월 풍산·갑산· 혜산진 탈환작전, 1950년 12월 임진강·고랑포작전,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 1951년 10월 중동부 지구작전(일명 김일성고지 탈환작전), 1952년 10월 백마고지 전투, 1953년 3월 저격능선전투·금화지구 전투


    마침내 1950년 10월30일 제3병참기지 연병장에서 재일 학도의용군으로 이뤄진 ‘3·1독립보병대대(獨立步兵大隊)’가 탄생했다. 부대 명칭에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계승한다’는 취지를 담았다.

    하지만 1950년 11월27일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180도 바뀌었다. 후퇴를 거듭하던 미군은 3·1독립보병대대의 해산을 명령했다. 독립부대를 창설해 공산군과 일전을 벌이고 싶었던 재일 학도의용군의 꿈은 물거품이 될 상황이었다. 이들은 해산명령에 동의할 수 없다며 저항했다. 제3병참기지 사령부 건물 앞에서 열중쉬어 자세로 오전 8시부터 밤 11시까지 침묵시위도 벌였다.

    그러나 미군의 입장은 단호했고, 3·1독립보병대대는 해체 절차를 밟았다. 이로써 이후 수없이 발간된 전쟁사 한 귀퉁이에서도 이들의 존재는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부대 창설의 역사와 감동은 재일 학도의용군 동지회 회원들의 가슴속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육군 중령으로 예편한 고자와 중위는 이를 안타까워해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샘 하야카와 상원의원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3·1독립보병대대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하야카와 의원은 의회를 설득해 1977년 5월 3·1독립보병대대와 지미 고자와 예비역 중령의 행동을 격찬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남산 보충대 시절

    3·1독립보병대대 해산과 함께 재일 학도의용군에게는 미군부대에 남든지 아니면 한국군으로 편입하든지 양자택일하라는 선택권이 주어졌다. 한국군 편입을 원했던 재일 학도의용군은 육군본부와 교섭을 가진 끝에 한국군 입대를 정식으로 허락받았다.

    이 가운데 일부는 1950년 11월28일 서울 남산초등학교에 자리잡은 육군 제1보충대대에 입소했다. 생소한 한국군 부대에서 고생하고 있던 이들에게 뜻밖의 제안이 들어왔다. 바로 육군본부가 이들에게 간부후보생 선발시험 응시 기회를 준 것이다. 육군본부에서 감독관이 남산 보충대에 나와 시험을 실시한 결과 26명이 장교로 선발됐다. 다른 사람들은 부사관이나 병사로 육군에 입대했다.

    8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1951년 3월10일 육군종합학교 제22기 졸업식 및 임관식이 거행됐다. 이 자리에서 숙질 관계인 조용갑과 조만철이 서로 어깨 위에 소위 계급장을 달아주는 광경이 연출됐다.

    미군부대에 남아 있던 이들은 1950년 12월17일 미군을 따라 인천항에서 미 해군 함정에 승선했다. 군산이나 목포항에 도착할 걸로 예상하고 있던 이들은 이튿날 이 함정이 일본 모지(門司) 항에 닻을 내린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이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고쿠라에 주둔 중인 제24사단 보충대로 이동한 후 받은 명령이었다. 미군 측이 재일 학도의용군을 해산한다며 귀가를 명령한 것이다. 미군에게 격렬하게 항의하고 애원도 해봤으나 사태를 돌이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들은 도쿄로 몰려가 민단 중앙본부와 주일 한국대표부를 차례로 방문했다.

    우여곡절 끝에 58명의 재일 학도의용군은 두 달 만인 1951년 2월13일 요코하마 항에서 한국해운공사 화물선을 타고 현해탄을 다시 건넜다. 부산에 도착한 이들은 2월23일 부산 범일동의 제2훈련소에 입소했다. 이후 제2훈련소가 육군하사관학교로 바뀌면서 이들 58명도 모두 하사관 교육을 받았다. 이들 중 이규달(李圭達)과 박청남(朴晴男), 박연규(朴年圭) 등은 일제 강점기 일본 항공대에서 복무한 경력을 살려 육군항공대 창설에 기여했다.

    이들 때문에 휴전협정이 곡절을 겪기도 했다. 휴전협정이 한창 진행 중이던 판문점에서 북한군 대표들이 폭탄선언을 했다. 일본군이 6·25전쟁에 참여했다며 거세게 항의한 것. 하지만 이들이 증거로 내세운 것을 살펴보니 전투 중 인민군에게 생포된 재일 학도의용군이었다. 한국말이 서툰 데다 일본 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니 일본군이 틀림없다는 게 북한 측 주장의 요지였다.

    일본군 참전 여부를 둘러싼 지루한 공방이 계속되던 상황에서 미국 CBS 도쿄지국장이 1952년 9월29일 도쿄발 기사로 ‘일본군의 정체는 바로 조선인 부대’라고 보도했다. 그는 이 기사에서 정체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이 조선인 부대를 가리켜 ‘유령부대(幽靈部隊)’라고 불렀다. 이들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한국전에 투입됐으며, 일본 정부의 입국 거부로 한국에 남아 있다고 보도했다.

    보도를 접한 유엔군 측은 이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판단, 각 미군 부대에 현황 파악을 지시했다. 미 제3사단에 배속된 재일 학도의용군은 18명만 모습을 드러냈다. 52명 가운데 나머지는 전사하거나 실종됐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들은 “공산군의 생트집 때문에 사실이 아닌 것이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다”면서 일본 송환을 거부했다.

    군 복무를 마친 재일 학도의용군은 한동안 한국 땅을 헤매고 다녔다. 군 당국이 이들의 귀국 문제에 대해 이렇다 할 대책을 마련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에는 가족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고 학업과 생업을 이어가야 할 생활 터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밤이슬이라도 피할 장소를 찾던 이들은 부산 초량동 소림사(小林寺)를 임시 집결지로 활용했다. 소림사는 광복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일본인들이 임시로 거처하던 곳. 배경은 달라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한 지붕 아래 동거하는 공간이 된 셈이다. 처음 10여 명의 재일 학도의용군이 둥지를 틀었으나 갈수록 규모가 커졌다.

    마침내 정부 당국과 끈질긴 협상 끝에 1951년 10월2일 40명의 의용군이 사세보행 선박에 올라탈 수 있었다. 5일 만에 도쿄역 앞에 도착한 이들은 민단 중앙본부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들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나머지 의용군의 운명을 바꾼 것은 1951년 9월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과 일본 정부가 서명한 평화조약이었다. 일본 정부는 이듬해 4월28일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내세워 의용군을 ‘일본에서 허가받지 않고 임의 출국한 자들’로 규정하고 입국 자체를 불허했다. 이에 따라 졸지에 ‘국제 미아’로 전락한 의용군이 무려 242명에 달했다. 이들은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부모 형제와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재일 학도의용군 41명은 1959년 북송저지공작대로 활동함으로써 다시 한번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당시 경찰관 시험에 응시했던 민간인 25명과 함께 총 66명으로 구성된 북송저지 공작대는 2개월 동안 특수훈련을 받고 1959년 12월 초부터 비밀리에 일본에 잠입해 재일교포 북송저지 공작 활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 공작선 명성호가 시모노세키 앞바다에서 침몰하는 바람에 김형권씨를 포함한 7명이 사망했다. 김씨는 가족도 모르는 사이에 사망처리됐고 겨우 귀환한 공작원들도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이 바뀐 탓에 당국이 ‘나 몰라라’ 했다고 한다. 이들의 활동은 아직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으며 당국도 책임 있는 해명을 내놓지 않고 있다고 재일 학도의용군동지회 측은 주장했다

    당시 한국 정부가 이들의 귀환에 신경 쓰지 못한 것은 이해할 수도 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정식 외교관계가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이루고 세계 12위의 무역대국으로 성장했음에도 이들은 여전히 외면받고 있다. 재일 학도의용군과 북송 저지 공작대 모두 한일회담 과정 등에서 논의조차 되지 않았고, 현재까지 정부는 이렇다 할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을 참전용사에도 미치지 못하는 ‘기타’ 보훈 대상자로 분류해 형식상 예우를 해주고 있을 뿐이다. 아직 생존해 있는 46명의 귀환 문제는 여전히 ‘미완의 과제’다.

    김 회장은 “이제는 대한민국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우리를 이런 식으로 방치한다면 만에 하나 전쟁이 날 경우 누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는가”라고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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