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치하고 촌스러운 일상 생활용품은 최정화를 통해 작품 소재이자 주제로, 때론 작품 그 자체로 재탄생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예술에 대한 사람들의 기성관념을 무너뜨릴 뿐 아니라 물신숭배와 정신의 간극 사이에서 방황하는 관객의 허위의식을 날카롭게 찌른다.
◇1961년 서울 출생 ◇ 홍익대 미대 회화과 졸 ◇계원조형예술대 건축디자인과 겸임교수, 가슴시각개발연구소 소장 <br>
번쩍거리는 우승 트로피, 울긋불긋한 플라스틱 바구니, 흔히 ‘이발소 그림’으로 불리는 유치찬란한 그림, 마네킹과 풍선, 변두리 극장 간판, 울긋불긋한 비닐 차양막, 이태리타월, 시골 장터의 양복점 쇼윈도에 내걸린 촌스러운 양복 또는 유니폼, 조잡하지만 성심껏 쓴 간판…. 유치하고 촌스럽고 때로는 폭력적인 이런 일상의 생활용품들은 그의 작품 소재이자 주제이며 때론 작품 그 자체로 재탄생한다.
최정화의 작품은 대개가 그의 손으로 만들어지기보다는 그의 머릿속에서 조합되고, 그를 도와서 작업하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구현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고유성을 간직한 채 존재한다. 최정화는 소재에 뭔가를 덧붙이거나 다듬어 고유한 속성을 제거하기보다는 그 존재를 인정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있는 그대로의 날것, 마치 상추에 된장을 넣어 싸 먹는 ‘막회’ 같다.
감추고 다듬고 치장해서 세련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생긴 그대로가 최정화의 매력이다. 때론 그도 치장을 한다. 하지만 그건 ‘생얼’을 더욱 ‘생얼’답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여타의 치장과는 거리가 있다.
날것들의 조합
그의 작품을 대하는 관객은 불편하다. 그렇지만 그 불편함 속에서 아련한 추억과 씁쓸한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페이소스를 느낀다. ‘페이소스’는 일시적인 격정 또는 예술에서 작가의 주관적 감정 요소를 의미하는데, 한편으로는 ‘비애’와도 통한다. 전통 미학적 입장에서 예술품에 담긴 도덕적, 이성적인 특성을 의미하는 에토스(ethos)와는 상반된 의미를 갖는다.
최정화의 예술은 그리스어 파토스(pathos)를 식자층인 척하는 사람들이 영어식 발음인 ‘페이소스’로 발음하는 것처럼, 문화적 차이를 드러낸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의 예술은 문화예술계에서는 외면당하면서도 일상에서는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아이러니다. 유치하다고 외면당하던 사물들이 ‘최정화’라는 이름표를 달면 세련된 청담동의 부티크나 고급 카페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는 1986년 중앙일보사가 주최하는 중앙미술대전에서 ‘드로잉-Ⅱ’라는 작품으로 장려상을 수상한 데 이어 이듬해인 1987년 같은 공모전에서 ‘체(體)’라는 작품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그것도 대학 재학 중에. 이는 그의 순수회화, 그림 실력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방증하지만, 오늘날 그의 행보로 봐서는 이런 행동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1990 Sunday Seoul, Seoul. Korea
아무튼 그는 꿈에 그리던 유럽 땅을 밟고 세상에 대해 눈을 떴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오자 그동안 제작했던 평면작품들을 모두 불사르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그에게 여행이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줍는 일이었다. 그는 해외여행이 어렵던 1985년, 일본과 홍콩을 다녀왔다. 일본 신주쿠의 화려한 거리는 그에게 충격이었다. 홍콩은 전통과 현대가 잘 버무려진 한 그릇의 비빔밥과도 같았다.
반면 중앙미술대전 수상으로 가게 된 유럽여행은 답답함뿐이었다. 거대한 미술관과 잘 짜인 진열장에 들어 있는 미술은 오늘과 미래는 보이지 않고 온통 과거뿐이었다. 그는 중앙미술대전 대상 수상으로 제도권 미술에 안착할 수 있는 입장권을 거머쥐었지만 ‘공식이 있는 그림’ ‘미술동네에서 통용되는 그림’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여행 후유증이 컸던 셈이다.
그는 인테리어 회사에 입사했다. 그에게 공사 현장은 꽤나 익숙한 곳이었다. 그가 대학에 다니는 동안 대한민국은 도처가 크고 작은 공사판이었다. 부수고 짓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던 시기였다. 그에게 공사 현장의 싱싱함, 생동감이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날것들이 서로 비비고 조합해 하나의 골조를 이뤄가는 과정의 ‘진함’을 즐기며 3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삐까번쩍함
그 와중에 그는 1987년부터 고낙범, 이불 등과 함께 ‘뮤지움’이란 그룹을 결성해 자유분방하면서도 실험적인 도발을 일삼았다. 그들은 모더니즘의 형식주의에 안주하고 있던 당시 한국 현대미술에 반역자이자 이단자였다. 그들은 죽음과 섹스, 쾌락, 환상, 헐벗음, 실존 같은 현실적이고 생생한 삶의 현장에 바탕을 두었다. 또한 가볍고 재기발랄한 키치적 감수성을 무기 삼아 기성세대의 허위의식을 비꼬았다.
그 중심엔 언제나 최정화가 있었다. 그는 고상하고 가치 있는 ‘뮤지움’이 아닌, 잡것들이 거센 숨을 내뱉고 들이쉬는 생생한 삶 속의 ‘뮤지움’을 지향했다. 이후 ‘선데이 서울’ ‘쇼쇼쇼’ ‘바이오 인스톨레이션’ 등의 전시를 기획하고 참여하면서 그간 화단의 중심을 이루던 ‘꼰대’들에게 ‘감자를 먹이기’ 시작했다.
그는 잰 척하는 기성세대와 속물근성으로 가득한 프티 부르주아에게 가면을 벗고 날것 그대로 나설 것을 요구했다. 기성 작가들의 눈에 그가 ‘막돼먹은 놈’처럼 보였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또 다른 생생함이 넘쳐나는 오늘의 ‘뮤지움’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주목한 것은 시장이다. 그것도 살 냄새가 묻어나는 동네장터, 시골장에 빠져들었다. 그곳엔 욕망은 있지만 위선은 없었다.
잘살아보기 위해 새벽 종소리를 들으며 일터로 나가던 시절, 우리들에게 재래시장의 싸구려 물건들은 욕망의 종착지이자 삶의 보람이었다. 울긋불긋한 플라스틱 소쿠리, 절대 깨지지 않는 고무대야, 플라스틱 바가지, 금빛 나는 알루미늄 주전자와 냄비들은 삶을 편하고 윤기 나게 해주는 도구였다. 그것들을 소유하고 사용한다는 것은 신식을 의미했다. 여기에 언제라도 뽕짝 가락을 공급해주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라도 하나 있으면 최고의 문화적 혜택을 누린다고 믿은 시절이 있었다. 최정화는 우리 국민의 건강했던 의식과 심층의 저변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조금 먹고살 만해지면서 우리는 격조 있는 모습으로 보이길 원하고, 그렇게 보이기 위해 꾸미고 치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외모를 바꾼다 하더라도 유전인자에 남아 있는, 1970년대의 ‘삐까번쩍함’에 환호하고 작약하던 미적 감각은 여전하다. 아무리 고급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와 와인으로 ‘디너’를 즐겨도 집에 돌아가기 위해 오른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송대관이나 설운도의 유치한(?) 가사와 창법이 아련하게 다가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2002 Landscape, Korea
지우고 싶은 과거, 그러나 잊지 못하는 시간에 대한 미련은 언제나 시도 때도 없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우리를 괴롭힌다. 이렇게 그의 작품은 축제의 현장처럼 정신없이 울긋불긋하고 번쩍거리지만, 한편으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코흘리개 시절의 실수 또는 철없음을 되살려주는 짓궂은 면 때문에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든다.
게다가 유치찬란한 싸구려 오브제들로 구성된 그의 작품을 대하면 혼돈스럽다는 자기고백이 절로 나온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진열장 속의 미술, 서사와 형식이 있는 정통미술(?)에 대한 인식이 부정당해버린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시절을 겪어보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 그의 작업은 신기하고 새롭다. 박물관이나 민속박물관에서 만나는 조선백자나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에 탄복하면서도 선조들이 실생활에 사용했던 식기나 제기 같은 생활용품에서 더 진한 삶의 냄새를 맡을 수 있듯이 최정화의 작품은 신세대에게 민속박물관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따라서 그의 작품 앞에 선 관객은 나이와 세대에 따라 감정과 느낌이 다르다.
중년 이상의 관객은 어렵던 시절, 기억하기 싫은 일들을 상기하면서 ‘회상’과 ‘외면’이라는 상반된 느낌을 동시에 갖게 된다. 반면 젊은층은 작품 소재가 자신의 할아버지 할머니 또는 아버지 어머니의 불과 얼마 전 삶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신기하고 재미있는 하나의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이 때문에 단순하게 최정화를 키치(Kitsch)의 전위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는 현상만 본 오독(誤讀)의 결과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보이는 그의 작품이 중요한 게 아니라 보는 이들의 느낌이 중요하다는 데 있다. 그의 작품을 형성하는 인자들은 친근한 우리 일상의 물건들이다. 그 속에서 관객은 이내 알몸으로 서 있거나 화장 안 한 여성의 얼굴로 만나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애써 못 본 척하고 싶은, 그러나 본인의 취향에 꼭 맞아떨어지는 이율배반의 정점에 자리하게 된다.
최정화 자신도 보는 이의 단순한 감정을 복잡하게 뒤엉키게 할 목적으로 이런 소재와 장치들을 서슴없이 선택한다. 외면하면서도 눈길이 가는, 재미있지만 추억하고 싶지 않은, 연민과 번민이 교차하는 복잡미묘한 감정이 그가 노리는 요체다. 바로 ‘생활의 발견’인 셈이다. 1970년대 신가라(새로운 유행 또는 새로운 눈속임이라는 속어)의 상징이던 플라스틱의 화려한 유치함처럼 그의 이런 태도는 오늘의 신가라가 되고 있다.
멀티 아티스트
최정화는 스스로를 ‘소장’이라고 칭한다. 그의 명함에는 ‘가슴시각개발연구소 소장’이라는 직함이 박혀 있다. 실제로 그는 건축가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영화제작에 참여하는 미술감독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을 소개할 때 이렇게 말한다.
“미술가이기 전에 연구소장입니다. 명함, 잡지, 도록, 리플릿에서 영화, 미술, 인테리어, 건축, 무대, 공공미술까지 ‘보이는 모든 것’을 디자인합니다. 제게 중요한 원칙은 ‘가슴’, 즉 마인드입니다. 단지 기술이 아닌, 가슴을 깨우는 통찰력이 보이는 시각물을 만들어내자는 겁니다.”
그는 처음에는 붓으로 칠하는 미술을 떠나고자 인테리어 회사에 들어갔다. 이후 ‘설치는 미술’을 시작했지만 이것으로는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워 다시 시작한 것이 인테리어와 디자인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투잡(Two Job)을 선택한 그가 영역을 확장하게 된 데는 불편하고 어색하고 이상한 것을 보면 그냥 넘기지 못하는 그의 성격도 한몫했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궁리해내는 그의 속절없는 부지런함이 더 크게 작용했다.
이렇게 시작한 인테리어는 한동안 청담동의 주류가 됐다. 영원한 언더, 비주류, 삼류를 자처하는 그의 인테리어가 청담동을 수놓았다는 아이러니가 바로 그의 매력이다. 싸구려, 비속함, 촌스러움, 유치함이라고 흉보면서도 꼼짝없이 좋아하게 만드는 힘이 그의 이해 못할 매혹이다.
그의 활동영역과 무대는 무한대다. 그는 영화 ‘나쁜 영화’ ‘복수는 나의 것’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미술감독을 맡기도 했다. 그가 설계한 건축물도 적지 않다. 청계천 7가에 있는 서울문화재단 건물도 그중 하나다. 전통적인(?) 관공서 건물을 뒤집어 까서 알몸을 드러냄으로써 그는 공공이라는 접두사가 주는 권위를 무너뜨리고 시민들이 겁 없이 다가갈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놓았다. 최고급 호텔 나이트클럽인 ‘제스티’의 인테리어도 그의 작품이다.
2002 Think globally act locally, Korea
그는 직접 작품을 만들지 않는다. 오직 선택하고 지정할 뿐이고 그 선택된 것들을 가지고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조수 또는 협업자들이다. 그는 감독 또는 감리만 한다. 그렇다고 대량생산 시스템을 갖춘 것은 아니다. 그는 소량 다품종을 선호한다. 이런 생산방식은 앤디 워홀의 팩토리(공장)를 연상시킨다. 이를 가장 잘 계승했다고 하는 이는 루이비통의 ‘아이러브 모노그램’ 라인으로 유명한 일본의 팝아티스트 무라카미 다카시다. 다카시가 1980년대 중반 최정화의 지도를 받으며 이런 팩토리 공법을 익히고 최정화식 미학을 공부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최정화는 행사를 기획하기도 하고 공공미술에도 많은 관심을 가진다. 그는 어댑테이션(adaptation)이 매우 좋은 작가다. 자신의 의지와 미학을 고집하기보다는 주변과 환경, 그리고 주문자의 의견을 존중한다. 하지만 결국은 무엇을 주문하고 요구하더라도 ‘최정화표’로 만들어내는 특별한 재주가 있다. 이런 그의 공공조각은 일본의 후쿠오카, 도쿄의 록본기, 요코하마를 위시해서 프랑스의 릴르, 리용 등 세계 도처에 깔려 있다. 내년 호주 페르츠 시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의 총감독도 따냈다. 그것도 국제적인 공모에 응모해서.
그는 많은 일을 하고 있고 준비 중이다.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디어만 내고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킨다. 그는 자신의 삶과 예술의 키워드를 ‘싱싱, 빠글빠글, 짬뽕, 날조, 빨리빨리, 엉터리, 색색, 부실, 와글와글’이라고 정리한다. 그는 그렇게 와글와글 살아간다.
그는 군인으로 평생을 조국에 바친 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 여덟 번이나 전학하는 노마드적 삶을 어려서부터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자상하고 불심(佛心)이 깊은 사람이었지만 자식과 아내에게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억압적이었다. 아버지의 이런 양면적인 태도는 그의 겉과 속이 다른, 즉 표리유동 미학의 근원이 되었다. 그리고 군인 가족들이 겪어야 하는 낯선 곳에서의 생존, 적응 방식은 그에게 어느 곳, 어느 상황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었다.
사실 우리에게 최정화라는 이름은 그가 벌여놓은 일들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한국의 주류 미술계가 외면한 탓도 있지만, 작가로서의 욕심으로 굳이 국내에서 부대끼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허위의식과 몰개성을 비웃다
그의 일정표엔 해외 주요 미술제와 미술관 전시가 줄을 잇고 있다. 올 하반기만 봐도 그가 얼마나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방콕에 새로 문을 여는 현대미술관 개관 개인전을 비롯해 아방가르드 미술의 메카라 할 파리 팔레드 도쿄 전시, 베이징 개인전 등등 수첩이 빼곡할 정도다. 그래서 그를 국내에서 잡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일본에서 그는 욘사마를 능가하는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는 일본에서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으며, 일본 중학교 미술교과서(2006∼2009년)에도 이름이 올라 있다.
그의 작품은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온 물질적 정신적 부산물이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이런 현상은 사람 사는 사회에서는 일반적인 일이기 때문에 외국에서도 공감의 폭이 넓다. 위선적이라는 부정적인 의미에도 불구하고 욕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물신숭배와 정신의 간극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심적 상태를 간파한다. 애써 외면하고 싶은 이 상황을 집요하게 쫓아다니고 환기시키며 우리의 허위의식을 쑤셔댄다. 아니 넘어져 까진 상처에 소금을 뿌려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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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런 권위와 전통 인습에 하나의 폭력적 기제가 추가됐다. 바로 유행이란 이름의 몰개성이다. 편하고 시대의 흐름을 같이한다는 마력 때문에 자신의 기호와 취미는 버려둔 채 대세를 좇는, 그런 자신 없음을 그는 통렬히 비판한다. 아니, 비아냥거린다.
그의 작업에서 보이는 낯설지만 익숙한 사물들은 우리의 욕망 한가운데 자리 잡은 친숙한 사물들의 좀 색다른 모습일 뿐이다. 따라서 오늘날 광고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위조 수법과 동일하다. 그의 의도는 위조를 통해 위조의 진행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들의 위조보다 더욱 위조적인 방법을 차용해 위조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 위조라는 단어는 허위라는 말로 대체되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