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대한 ‘쓰나미’가 몰려온다.
- 천정부지로 치솟는 유가, 가공할 지구온난화, 그리고 미국발 금융위기가 마치 하나로 힘을 합친 듯 세계의 경제와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불길한 삼총사(Unholy Trinity)’로 불리는 이 쓰나미는 특히 ‘작은 정부’와 ‘큰 시장’을 지향하는 국가의 서민을 겨냥한다.
-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한국이 참고할 만한, 세계적 미래학자의 현실 진단과 그 대안을 들어본다.
우리는 좋은 시절엔 좋은 일만 오고, 어려운 시절엔 어려운 일만 올 것으로 ‘막연하게’ 믿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미래를 예상하는 일반적인 태도인데, 이는 인류의 오래된 습관 같은 것이다. 생물학이나 심리학은 이런 인간의 습성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지금처럼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세상에서 ‘미래는 현재의 연장’이라는 태도는 위험하다.
미래를 ‘대충’ 낙관하는 인류의 오랜 습성은 지독할 정도로 내재돼 있다. 하와이만 봐도 그렇다. 관광산업은 계속 번창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하와이 경제를 지탱하는 또 다른 축인 미군에 계속 자금이 들어올 것으로 보고 있다. 하와이 주민은 계속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며, 해수면이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조금’ 높아지겠지만 과거에 그랬듯 다시 정상화될 것으로 낙관한다. 식수는 변함없이 풍부할 것으로 전망하고, 석유도 싸고 넘쳐날 것으로 예측한다. 하와이 주민 대부분은 (어떤 근거도 없이)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치경제 시스템이 앞으로도 성공적으로 작동할 것으로 믿고 있다.
물론 이들의 예상이 들어맞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야 하와이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그러나 하와이의 미래를 걱정하는 다른 주민들의 우려가 묵살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신자유주의 정치경제 시스템으로 피해를 보는 주민들의 목소리는 대책 없는 낙관주의 탓에 잦아들고 있다.
필자는 미래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경제가 계속 번창할 것이라는 믿음에 힘을 보태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필자의 시각이 틀리다면 우리 사회는 계속 번창할 것이므로 피해는 없다. 하지만 만일 내가 맞고 그들이 틀리다면 피해는 심각할 것이다.
‘쓰나미’를 피하지 말고 타라!
필자는 미래라는 물결이 얼마나 강력한지 설명하기 위해 ‘쓰나미’라는 은유적 표현을 사용했다. 쓰나미라는 표현엔 인류의 문명을 휩쓸어버릴 만한 가공할 힘이 내포돼 있지만, 반대로 그 힘을 인류의 발전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뜻도 들어 있다. 파도타기 선수들은 집채만한 파도가 몰려올 때 그걸 피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들은 파도의 힘과 방향을 주의 깊게 분석한다. 거대한 파도의 위세에 눌려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위축될 것을 경계하면서 조심스럽게 파도를 향해 나아간다. 그리하여 성공적으로 파도를 탈 때 느끼는 희열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쓰나미에 맞서 파도타기 선수가 되지 못하고 희생자가 되는 이유는 쓰나미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간 미래학자들이 누차 쓰나미가 오고 있음을 경고했지만 사람들은 주목하지 않았다. 이렇듯 미래학자들이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는 동안 쓰나미는 보다 강력한 힘으로 다가왔다. 쓰나미의 파괴력이 커지는 건 단순히 우리의 무지 때문만은 아니다. 쓰나미의 힘을 오히려 키우는 우리의 잘못된 정책 탓이다.
이 글에서 거론할 세 가지 쓰나미도 길게는 수십년 전부터 경고된 것들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이들 세 가지 쓰나미가 한데 뭉쳐 거대한 덩치로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 가지 쓰나미가 한몸이면서도 세 개로 분리될 수 있다는 면에서 필자는 이를 ‘불길한 삼총사(Unholy Trinity)’라고 이름 붙였다.
이 쓰나미를 성공적으로 탈 수 있도록 이 글을 읽는 독자가 경제, 정치, 문화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의 눈을 뜨게 하고 설득해야 한다. 어떤 형태라도 이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미래를 낙관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 역할을 맡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건 재앙이다. 해법은 어렵지 않다. 재앙을 막기 위해 당초 계획했던 것을 하면 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제부터라도 그만두면 된다.
불길한 삼총사의 한 부분은 값싸고 풍부한 오일 시대가 끝났다는 점이다. 석유 매장량은 정점을 지났고 이젠 석유 없이 사는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
전적으로 석유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하와이를 보자. 미국의 어떤 주보다 석유의존도가 높다. 하와이는 석유 값이 올라가거나 석유가 고갈되면 사회가 붕괴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하와이 주민은 석유를 음식처럼 먹고 있는지도 모른다. 값싼 석유가 풍부해야 관광객들이 비행기와 배를 타고 오지 않겠는가. 그뿐인가. 하와이 주민을 먹여 살리는 음식, 옷, 자동차, 그리고 쓰레기까지 모든 것이 값싼 석유를 근간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값싼 석유의 시대는 끝났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혹은 글로벌 경제의 부침에 따라 한동안 석유값이 오르락내리락 하겠지만, 근본적인 사실은 변함이 없다. 석유는 점차 고갈된다.
그렇다면 석유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 에너지는 없을까. 40년 전 필자가 ‘하와이 2000’ 프로젝트에 참여할 때만 해도 비록 석유 고갈에 대비하자고 주장은 했지만, 내심 조만간 새로운 기술이 석유시대를 대체할 것으로 믿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기술낙관론자였다. 인간은 이성적이기에 눈앞에 뻔히 보이는 위기를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하와이뿐 아니라 미국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석유시대를 대체할 수 있는 손쉬운 대안조차 거론하지 않았다. 석유를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시간과 새로운 대안 에너지를 개발하는 시간이 맞아떨어져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지 않을 것으로 봤지만, 결국 내가 틀렸다.
석유시대를 대체할 몇 가지 기술적 해법으로 식물성 연료(biofuels)나 핵에너지(nuclear)가 거론된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인 해법이 아니다. 식물성 연료나 핵에너지는 환경을 오염시킬 뿐 아니라 식량을 생산하는 땅이 연료를 생산하는 땅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땅은 곡식이 최대한 자라날 수 있도록 보호해야 한다.
대체 에너지를 고려할 때 꼭 짚어야 하는 것이 ‘에너지 방정식(net-energy)’이다. 새로운 에너지를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가 얼마나 되는지를 따지는 게 에너지 방정식이다. 투입한 에너지보다 생산한 에너지가 많다면 실용적인 에너지(positive net-energy)이고, 그 반대라면 쓸모없는 에너지(negative net-energy)다. 지금 거론되는 거의 모든 에너지는 실용적이지 않다. 투입하는 에너지가 생산하는 에너지보다 많다.
혹자는 핵에너지가 실용적인 에너지라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핵에너지를 얻으려면 핵분열이 필요한데, 그 비용을 고려하면 석유만큼 비싸다. 특히 핵폐기물은 독성이 매우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이 땅에서 살아갈 후손에게 막대한 피해를 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지속가능한 에너지도 아니다. 어떤 곳에선 석탄을 다시 쓰자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환경오염의 주범이 될 수 있다.
쿠바 국민이 건강한 까닭
석유 없이도 건강하게 지내는 쿠바인들.
믿을 만한 통계에 따르면 쿠바는 지구상에서 가장 건강한 국민들이 사는 나라다. 주요 이유 중 하나가 미국의 대(對)쿠바 경제봉쇄 정책 때문이다. 쿠바로 들어가는 석유량을 미국이 통제하자 쿠바 국민은 이를 견디기 위해 걷거나 자전거를 탔고, 기계를 사용하기보다 수작업으로 일을 했다. 석유 에너지를 마구 사용한 하와이 주민들이 비만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반면 쿠바 주민들은 석유 없이도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
최근 우리는 지구 온난화, 해수면 상승, 식수와 토양 오염, 그리고 새로운 질병(또는 과거의 질병이 새로운 형태로 등장하는 것) 등에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하와이에선 바뀐 지구환경이 섬 주민들의 생존을 위협하자 이 섬과 저 섬을 옮겨 다니는 ‘환경 피난민’마저 등장했다. 이러는 사이 자동차나 전자제품의 생산과 소비, 혹은 여가활동이나 여행에 돈과 시간을 아끼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 본토 주민이나 하와이 주민은 과거처럼 값싼 상품을 구매하기가 힘들어졌다. 생산과 소비 천국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있다.
사실 저가의 상품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시대는 인류 역사에서 극히 예외적이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소비 풍조는 20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오랜 인류 역사에서 탐욕과 낭비는 나쁜 것이었고 지족(知足·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앎)과 절약은 좋은 것이었다. 끝없는 소비는 나쁜 것이었고, 옛것을 복원하고 재생해서 다시 사용하는 것은 좋은 것이었다.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더욱 중요한 사실은 우리 선조들이 일은 조금만 하고 나머지 시간을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놀거나 대화하거나 혹은 기도하면서 보냈다는 것이다. 지금이라고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다. 오늘날의 환경 재앙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때보다 옛 시대의 가치를 복원하는 노력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먼 옛날, 자연엔 스스로 복원하는 능력이 있었다. 또한 자연은 대부분의 경우 예측 가능한 존재이기도 했다. 인류는 자연의 리듬에 맞춰 미래의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지금의 자연은 복원력도, 리듬도 잃어버렸다. 인류가 자연의 리듬을 파괴한 뒤부터 알 수 없는 재앙에 시달렸고, 미래에 대한 예측력도 현저하게 떨어졌다. 앞으로 어떤 가공할 미래가 올지 예상하기가 힘들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앨 고어의 ‘불편한 진실’만큼 불편한 것도 없다. 그가 부통령 시절이나 대통령 경선후보로 나설 때에도 그는 환경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조치도 행동으로 옮긴 적이 없다. 힘을 쓸 수 있을 때 쓰지 않은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지금은 너무 늦었다. 재앙을 막을 수 있을 때 막지 못한 결과, 이젠 재앙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다.
첫 번째 쓰나미로 지목한 석유 고갈과 두 번째 쓰나미로 지목한 환경재앙은 서로 얽혀 있다. 환경재앙을 막기 위해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 에너지가 고갈될 처지에 놓인 것이다. 고갈될 에너지를 대체하는 새로운 에너지는 환경재앙을 막는 것이어야 한다.
당면한 환경 문제를 풀기 위해 제방을 쌓고, 해변을 재정비하고, 토양을 회복시키고, 오염된 물과 공기를 정화하고, 새로운 에너지를 사용하는 습관을 들이는 데 많은 돈을 써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충분한 돈이 있는가. 돈이 있기도 하고, 또 없기도 하다. 이게 무슨 말인가. 단기간에 가용할 수 있는 돈은 많다. 세금을 걷을 수도 있고, 부자들의 돈궤를 그들 몰래 떼어놓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우린 돈이 없다. 세계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부(富)는 사기(詐欺) 방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뿌리는 미국의 1960, 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공급이 수요를 초과해 미국 경제가 처음으로 위기를 맞은 때였다. 우리는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하면서 초조하게 해답을 기다렸다. 해답은 새로운 빚쟁이 시스템을 고안하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크레디트 카드다. 우리는 빚으로 물건을 샀고, 1970년대 말까지 미국 경제는 썩 괜찮았다. 그러다 1970년대 말,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 때의 인플레이션)으로 다시 한 번 경제위기가 닥쳤고, 레이건 행정부는 긴장 완화와 화해의 시대를 끝내고 신(新)냉전시대를 열었다. 미국은 군수물자 생산을 급격하게 늘리면서 이를 통해 실업자들에게 일거리를 줬다.
금융 시스템의 환상
그 결과 미국은 오랫동안(현재까지도) 군사-사회주의(military socialism·군의 목적을 위해 사회의 역량을 동원하는 것)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정부는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지만, 다른 문제들에 대해선 무능력했다. 미국인은 점점 빚의 수렁으로 빠져들었고, 미래로 또 미래로 빚 갚는 것을 미뤘다.
그 때문에 미국은 1980년대 주택대부조합 위기를 겪었고, 1990년대엔 닷컴 버블을 만들었다. 버블엔 늘 새로운 금융기법이 따라다녔다. 퀀트펀드(quant-funds·수학 모델을 이용, 시장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고 이에 근거해 투자 결정을 내리는 펀드), 헤지펀드, 파생상품, 경매채권(ARS·경매로 금리를 조정하는 채권), 그리고 부채담보부증권(자산유동화증권 등을 기반으로 만든 증권, 최근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의 원인) 등은 최근까지 새로운 버블을 만들어내고, 또 붕괴됐다. 언론은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를 두고 늘 그랬듯 서민과 빈자들의 탓이라고 떠들어댔지만 실은 금융 시스템이 원인이다.
다음 버블은 무엇을 기반으로, 또 언제 시작될 것인가. ‘미국의 버블 경제’를 쓴 에릭 잰슨에 따르면 다음 버블은 대체 에너지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생길 것이라 한다. 그는 이미 버블은 시작됐고 몇 년 안에 터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과거에도 그랬듯 금융 시스템은 주기적으로 환상과 폭락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워낙 뛰어난 ‘금융 마법사’들이 있어서 또 다른 빚 상환 유예 시스템을 만들어낼 것이고, 시스템에 대한 평가는 미래로 미룰 것이다.
필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 끝이 가까워왔다는 점이다. 석유 고갈과 환경재앙 때문이다. 세계 경제 시스템의 붕괴와 석유 고갈, 그리고 환경재앙은 한데 묶여 함께 다뤄진 적이 없다. 에릭 잰슨은 인류가 새로운 에너지원을 발견해 ‘실용적인 에너지’를 생산할 것으로 예측하지만, 아직 그걸 입증할 만한 증거는 없다. 도대체 우리의 의무를 언제까지 미래로 미룰 수 있을까.
필자는 쓰나미 삼총사에 ‘플러스 원’을 덧붙여 설명한다. ‘플러스 원’은 일반적으로 정부의 부재(不在)를 말하는데, 쓰나미 삼총사로부터 시민을 보호할 수 있는 공적인 시스템이 부족하다는 것을 뜻한다. 역사적으로 미국인은 정부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정부를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했다.
미국의 건국자들, 그리고 지금 대부분의 미국인은 홉스 학설의 지지자들이다. 강력한 정부가 없다면 인간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잔인하고 더러운 환경에서 살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정부 없는 자연은 홉스가 말한 것처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다. 사람들이 모두 천사라면 정부는 필요 없다. 그러나 인간은 악하고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강력한 정부가 나서서 인간의 본성을 통제하고 서로 협력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미국인은 건국 초기부터 작은 정부일수록 시민에게 좋다는 믿음도 갖고 있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채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를 갈망했다. 서로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누릴 수 있는 자유는 무궁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 정부의 기능은 작아질 수밖에 없다.
중동 석유개발 올해로 100년. 석유 고갈로 지구촌은 떨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정확하게 레이건 정부 때부터 지금의 부시 정부까지, 정부기구는 절대악(a positive evil)이라는 정서가 확산됐다.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사고방식이다. 이때부터 미국인은 자유주의자가 되어야 했고, 시장의 자유를 통해 공공의 선보다는 개인적인 이익을 실현하는 것이 좋다고 여겼다. 그건 공화당이건 민주당이건 마찬가지였다. 양당이 모두 민간부문을 확장하고 개인의 자유를 확대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공공부문은 줄이고 정부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가난해졌거나, 아프거나, 교육을 받지 못했다면 그건 개인의 문제지 정부의 문제가 아니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구, 혹은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했다. 공공부문을 줄이고 세금을 줄였기에 정부는 무능했다.
공공부문이 약화되면서 눈에 띄게 드러난 사실은 경제사범들의 형량이 낮아졌다는 점이다. 경제 버블을 일으킨 이들은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민영화된 공공부문은 사회적 손실에 대해선 책임지지 않은 채 이익만 향유했다. 그 와중에 경찰력은 강화됐고, 군의 사회적 간섭은 정당화됐으며, 이들에게 막대한 자금이 들어갔다.
세금을 적게 거뒀기 때문에 미래 세대가 짊어져야 할 부담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고, 정부는 외부로부터 돈을 빌릴 수밖에 없다.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는 날로 커지고 있으며, 국가채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이따금 가공(架空)의 예산흑자를 내세우며 미국이 문제없이 잘 가고 있다고 강변한다. 이 또한 공화당이나 민주당이나 예외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클린턴 행정부 시절엔 예산흑자라도 달성했지만 부시 행정부는 계속 적자상태라는 정도랄까.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클린턴 행정부가 만들었다는 예산흑자는 6조달러의 빚더미 위에서 만든 고작 10억달러라는 점이다. 그건 바닷물에 떨어진 한 방울의 물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긴요하게 써야 할 사회 인프라 구축과 과학연구 개발비 등을 줄여서 얻은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더하다. 국회에 요구한 1조달러(사상 최대)의 자금은 대부분 군비로 사용됐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에 돈을 쏟아 부은 탓에 국내에서 긴급하게 써야 할 예산은 아예 책정하지도 않았다. 정부가 약화되면서 공공을 위한 기능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언제까지 국가에 충성할까
정부가 얼마나 무능력한지 보여주는 적절한 예가 2005년 뉴올리언스를 휩쓴 허리케인 카트리나 재해다. 카트리나 때문에 고통당한 사람들은 중상류층이 아니다. 오로지 서민들이다. 사례가 이뿐인가. 미국은 도로 곳곳이 파였고, 다리가 무너지며, 유독성 쓰레기가 하천과 땅을 오염시키고 있다. 댐이 붕괴되며, 배수구가 파열되고, 강이나 호수가 범람하며, 부두에선 살상용 무기가 유입된다. 공교육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며, 아이들은 학교 교육을 무시한다. 이런 문제에 대해 정부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며, 공무원들은 박봉에 개인의 능력을 고갈시키며 빚의 족쇄에 묶여 있다. 견고한 중산층이 사라지면서 자발적인 사회봉사의 전통도 사라지는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 시민들이 여전히 국기, 국가, 연방헌법 등 국가 상징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최근 필자의 연구 주제 중 하나는, ‘미국인이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국가에 언제까지 충성을 약속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언제부터 미국인은 “이제 그만! 우린 더 이상 우리가 원하는 삶을 허용하지 않는 국가를 위해 신의 있는 시민이 되기를 거부하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그런 조짐을 발견하기 힘들지만, 또 다른 카트리나가 닥쳐오고, 또다시 다리가 붕괴되고, 댐이 무너지고, 식수가 심각하게 오염되면 분명히 “이건 아니다!”는 불만이 터져나올 것이다.
|
강력한 쓰나미 삼총사가 우리를 향해 오고 있는 때, 이 파도를 타고 나가야 할 정부라는 ‘서핑보드’는 창고에서 썩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쓰나미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쓰나미 때문에 우리가 잃어버릴 것이 무엇이고, 쓰나미를 피하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의견을 나눠야 한다. 정부에 기대지 말고, 지역별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의논해야 한다. 여러분이 하와이 주민이라면 관광산업에 의존하는 정도를 줄이고, 소규모 상점들이 지역에서 생산하는 음식과 물건들을 판매하도록 기회를 줘야 한다.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닫아놓은 문을 그들을 위해 열어놔야 한다.
어쩌면 석유의 고갈과 세계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의 위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뿐 아니라 우리의 삶을 위해 희망적인 소식일지도 모른다. 물론 지구온난화, 기후변화, 해수면 상승 등 환경 문제는 피해를 볼 것으로 예상되는 주민들이 스스로 나서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아직 우리에겐 기회가 있다. 우리의 현재가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버린다면, 지금부터라도 우리의 아이들에게 마을과 사회를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도록 가르친다면 우리의 미래는 희망이 있다.
한 가지 미래만을 상정할 경우 그 미래가 오지 않는다면 계획은 쓰레기가 되고 만다. 다양한 계획을 짜야 한다. 특정한 사람들만 참여해서도 안 된다. 기업인, 노동자, 종교인, 시민단체, 지방자치단체 등 관련 있는 사람들이 모두 참여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나눠야 한다. 이걸 할 수만 있다면, 불길한 삼총사 악당을 피하는 것뿐 아니라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글(‘The Unholy Trinity Plus One’)은 짐 데이터 교수가 하와이 ‘퀸 릴리오칼라니’ 재단에서 발표한 것으로, 하와이 주립대 미래학대학원의 박성원 연구조교가 번역, 정리했습니다. 역자는 “오역으로 발생한 책임은 모두 번역자의 몫”이라고 밝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