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해 전부터일까. 꾸바 혁명과 예술을 다룬 TV 다큐멘터리,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체 게바라 전기와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등이 뒤죽박죽 나를 흔들었다. ‘설렘’이었다. 불안만이 영혼을 잠식하는 건 아니다. 감동 없는 일상에 끼어든 그 ‘설렘’은 맹렬히 자가분열을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집어삼켰다. 책상 뺄 각오로 휴가를 얻어 무작정 꾸바 여행길에 올랐다.
“돈데 에스따모스(여기가 어디죠)?” “꼬모 푸에도 볼베르 아 센뜨로 아바나?(센뜨로 아바나에 어떻게 돌아가죠)?”
머릿속으로 스페인어 작문을 하며 한 남자에게 다가갔다. 헉, 한국인 버스기사. 여긴 서울 모래내 버스종점, 꾸바가 아니었다. 몸은 이미 한국에 돌아온 지 오래이나, 마음은 아직 꾸바의 거리를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4월, 한 달 일정으로 꾸바를 여행했다. 경유지(캐나다 토론토·밴쿠버)에서 보낸 이틀을 빼면 꼭 4주일. 지난해 크리스마스 무렵 꾸바 아바나행 에어캐나다 ‘얼리버드 항공권’을 샀다. 빼도 박도 못하게 저질렀다. 6개월간 ‘서바이벌’ 스페인어도 익힌 터였다. 15년 근속휴가 3주에 정기휴가 열흘을 붙여 대장정에 나서기로 했지만 걱정부터 앞섰다. ‘책상을 확 빼버리면 어쩌지?’ 그래도 직장상사, 동료들이 응원해주니 난 복 받은 자란 생각이 들었다.
뜨로바의 전통음악 연주에 맞춰 춤을 추는 관광객들.
오후 5시20분 에어 캐나다 64편이 이륙했다. 10시간의 비행. 밴쿠버는 29일 오후 2시. 시간을 거슬러 날아왔다. 토론토 행 국내선에 다시 짐을 부쳐야 한다. 4시간 후 토론토 피어슨 공항. 29일 오후 9시가 넘어 깜깜하다. 아직도 남은 겨울의 냉기. 공항에서 12시간을 버텨본다던 호기는 단박에 무너졌다.
‘동에서 서로’ ‘산띠아고에서 아바나로’
30일. 오전 9시 넘어 꾸바행 비행기는 토론토 공항을 이륙했다. 출국장은 라틴계 직원이 많아 아연 활기차다. 몸동작, 목소리가 앵글로색슨계보다 크다. 여행자들에게 농담도 건네며 여유 있는 모습. 4시간30분 정도 날았을까. 들판에 쥐불을 놓았는지 여기저기 연기가 피어오른다. 꾸바 섬 상공에 접어든 것. 호세 마르띠 공항은 비수기 제주공항마냥 한가롭다. 섭씨 30도 안팎, 한국의 7,8월 날씨다. 하지만 그늘에 들어가면 금세 시원해진다. 공항 환전창구에서 캐나다 달러를 cuc(쎄우쎄·꾸바의 태환화폐)로 바꿨다. 1cuc는 1.1489C$. 환전금액의 10%는 꾸바 정부가 수수료로 뗀다(미국 달러는 20%).
첫 여행지인 산띠아고 데 꾸바행 비행기를 타러 국내선 공항으로 갔다. 버스 터미널 같은 청사에서 6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대합실의 꾸바인들이 ‘치노(중국남자)’라 부르며 수군댄다. 동양인이 낯설어서인지, 흘깃거릴 뿐 말을 거는 사람도 없다. 배낭을 맡기고 화장실에 가려고 옆자리 아주머니에게 말을 붙이려는데, 그녀가 황급히 자리를 옮긴다. 서로 안 보는 척, 조면을 하며 흘낏흘낏 구경하는 ‘대략 난감’한 상황. 그런 와중에도 포옹을 하며 오른뺨을 맞대고 입으로 ‘쪽쪽’ 소리를 내는 쿠바식 인사가 정겨워 보인다. 이는 남자와 여자 또는 여자끼리의 인사법인데, 남자들끼리는 보통 악수를 한다.
돈 가방이 든 작은 배낭의 멜빵을 꼭 쥔 채 하염없이 밤 비행기를 기다렸다. 비행기 연발 소식을 듣고도 태평하던 승객들이 마침내 탑승 안내방송이 나오자 박수를 치며 휘파람을 분다. 붉게 녹슨 구 소련제 비행기가 떴다.
산띠아고 데 꾸바의 마세오 공항. 인천공항서 여기까지 비행시간만 약 20시간. 시차는 13시간(이곳 정오가 한국에선 다음날 새벽 1시). 짐을 찾아 청사 밖으로 나왔을 땐 밤 11시가 넘었다. 정해진 숙소는 없다. 구체적인 여행 경로도 없다. ‘꾸바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산띠아고 데 꾸바에서 아바나로’가 계획의 전부. 낯선 도시의 어둠이 깊고도 막막하다.
“바모스 아 우나 까사 빠띠꿀라르 데 쎈뜨로(시내 중심지의 민박으로 갑시다).”
택시비 흥정 후 칠이 벗겨진 올드 카를 타고 털털대며 시내 쪽으로 달렸다. 택시 운전사가 안내한 민박은 이미 만원(11~4월은 꾸바의 건기로 관광 성수기)이었다. 민박집 아주머니가 어딘가로 전화를 하더니 한 블록 떨어진 이웃 민박집에 데려다준다.
“한국인 손님은 처음이에요.”
50대로 보이는 노르베르또와 미그달리아 부부가 구석방을 보여줬다.
5m 정도의 높은 천장, 온통 흰색 벽과 체크무늬 바닥. 초록색 커튼 뒤에 정작 창문은 없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인가. 숙식비 확인 후 나흘 밤을 묵기로 했다. 뚜껑 없는 양변기, 수압 낮은 수도와 샤워기, 낡은 차들이 비명처럼 내지르는 폭발음…. 꾸바의 첫날밤, 더블베드는 폐교의 운동장처럼 넓고 썰렁하다.
▼ 정열과 전통의 산띠아고 데 꾸바
요란한 모터사이클 소음에 잠을 깼다. 베란다에 나가 굽어보니, 일방통행 골목길 여기저기서 모터사이클이 툭툭 튀어나온다. 자동차와 모터사이클, 꼬꼬택시(모터사이클 택시), 비씨택시(자전거 택시), 마차, 자전거가 서로 뒤섞여 거대한 소음과 매연을 피워 올린다. 횡단보도나 신호등 따위는 없다. 눈치껏 길을 건너야 한다. 느긋하고 너그럽던 이들이 운전대를 잡는 순간 돌연 성마른 난폭자가 된다.
이 도시의 대표적 ‘랜드 마크’인 세스뻬데스 공원은 생각보다 아담했다. 공원이라기보다는 정원 규모. 성당, 호텔, 문화회관, 에떽사(전화국), 박물관이 병풍처럼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 생수를 사러 갔다. 퉁퉁한 흑인 아주머니가 식료품 봉지와 상자를 양팔에 끼고 겨우 가게를 나선다. 짐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사나운 자동차와 뜨거운 햇살을 피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20여 분 걸었을까. 여기저기 더러운 물이 고인 웅덩이, 바싹 마른 노인과 개들이 우두커니 지키고 있는 가난한 골목이 눈앞에 펼쳐졌다.
산띠아고 데 꾸바에서 만난 꼬마 리즈벳.
“여자는 필요 없어?”
아주머니가 난데없이 묻는다.
“내게 예쁜 딸들이 있어. 그 중 맘에 드는 아이를 소개해줄게.”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오려는데, 그녀가 1층 현관 안으로 날 잡아끈다.
“리, 나를 도와줘. 넌 여자를 사귀고 난 돈이 생기는 거잖아.”
“원하지 않아.”
“그럼 옷을 사게 5페소(5cuc)만 줘.”
이런 생떼가. 얼른 1cuc를 주고 그 집을 빠져나왔다. 돌아가는 길이 어디더라. 뛰면 개들이 달려들까 봐 천천히, 진땀을 흘리며 중심가로 돌아왔다.
중국계 꾸바 음악인 레오나르도를 만난 곳은 ‘까페 이사벨리까’였다. 정오부터 오후 2시 사이, 꼭 소나기가 퍼부었다. 스콜일까. 비도 피하고 점심도 먹으러 들어선 그곳에서 쌍드윗(샌드위치)과 끄리스딸(도수 낮은 꾸바맥주)을 주문했다. 도시 어딜 가나 난 유일한 동양인이자 ‘치노’다. 그가 활짝 웃으며 악수를 청한다. 무용수 애인과 한 무대에서 공연하는 37살의 기타리스트. 레게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보풀 심한 뜨개실 같다. 허름한 옷차림이지만 눈동자가 맑고 당당하다.
그곳엔 외국인 관광객의 돈을 노리고 접근하는 히네떼로(여자는 히네떼라)도 있었지만 레오나르도처럼 사흘을 함께 있어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격의 없는 친구도 많았다.
모로 성(Castillo del Morro)의 꼬마 리즈벳
꾸바 전통음악과 춤을 즐기기엔 ‘까사 델 라 뜨로바(casa de la trova)’가 ‘까사 델 라 무시까(casa de la musica)’보다 훨씬 좋았다. 저녁 10시 공연에 맞춰 도착했다. 발코니와 뒤쪽 테이블말곤 모든 자리가 꽉 찼다. 단체관광 온 독일 아줌마들이 꾸바 댄스강사들과 짝을 지어 무대 앞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다. 낮에 관광객 댄스교실에서 살사, 바차타를 배우고 밤에 ‘실전’에 나선 것. 뜨로바 그룹이 연주를 시작하면 공연장은 금세 춤판이 된다. 왜소한 체격의 댄스강사가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독일 여자를 감았다 풀었다 하며 정신을 쏙 빼놓는다. 종업원들도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아가며 서빙을 한다. 주문이 뜸할 땐 남녀가 좁은 공간에서 요령껏 턴을 해가며 춤을 춘다. 알레그레(alegre), 즐거운 인생. 그들에게 노동과 놀이의 구분은 무의미해 보인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적 모로 성을 보러 가는 길. 오마 샤리프를 닮은 덩치 큰 흑인 택시운전사와 흥정을 했다. 경찰이 없는 뒷골목에 세운 걸로 보아 불법택시임이 분명하다. 열여섯 살인 그의 아들이 조수석에 앉아 있다. 오전 10시도 안 됐는데, 차 안은 벌써 찜통. 물론 에어컨은 없고, 앞 유리는 여러 곳에 길게 금이 갔다. 음악테이프를 들어보려니까, 카세트 커버가 뚝 떨어진다.
모로 성은 시내에서 12km 거리에 있다. 짙푸른 코발트색 카리브 해를 굽어보며 서 있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의 요새다. 깊은 해자 위에 걸쳐놓은 나무다리를 건너, 성 안으로 들어갔다. 고래 뱃속 같은 모로 성 구경에 1시간이 훌쩍 지난다. 무기고와 감방 등 실내구경을 하고 성루에 올랐다. 시원한 해풍이 부는데도 쨍쨍한 햇볕 탓에 목덜미가 금세 뜨거워지며 어찔하다.
돌아오는 길에 마세오 광장 맞은편의 버스터미널에 들러 다음날 오전 9시 바야모행 표를 샀다. 겨자색 교복을 입고 줄지어 등교하던 아이들이 비를 만나자 소나기처럼 후두둑 뛴다. 민박집에 매일 놀러오는 아홉 살짜리 앞집 꼬마 리즈벳을 위해 아이스크림을 샀다. 의대생인 주인집 딸 리아나는 고맙다고 하는데, 리즈벳은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커졌다가, 배시시 웃는다.
내가 내일 떠난다는 걸 알고 리즈벳은 늦게까지 제집에 돌아가질 않는다. 색색 볼펜과 색종이 등 학용품을 주기도 하고, 민박집에 돌아올 땐 음료수나 아이스크림 따위를 사갔다. 색종이에 한글과 스페인어로 리즈벳의 이름을 써줬다. 종이를 위아래로 돌려보며 신기해한다. 집 주인과 계산을 마쳤다. 바야모에 도착하면 자기친구가 터미널에서 기다릴 거라고 한다. 옆방 투숙객인 미국인 헬스코치가 새까만 쿠바여자와 제 방에서 나오다 멋쩍게 웃는다.
꾸바에는 한국의 중고버스가 안내판도 떼지 않은 채 다니는 경우가 많다.
그란마 주의 바야모로 가는 날. 아침 먹으러 나갔더니 거실 흔들의자에 동양인 남녀가 앉아 있다. 40세 안팎의 한국인 커플. 멕시코, 아바나를 거쳐, 산따끌라라에서 버스로 방금 도착했단다. 주인아저씨는 좋은 여행하라며 축복을, 아주머니는 키스를 해달라며 뺨을 내민다. 택시를 타러 내려가자 앞집 꼬마 리즈벳이 나와 있다. 손등에 뽀뽀하며 작별인사를 했다. 댄서가 되고 싶다는 리즈벳, 안녕.
택시기사는 부업으로 운전을 하는 의사. 터미널 근처엔 경찰이 있으니 그전에 요금을 줬으면 좋겠단다. 벌써 해가 쨍쨍하다. 대합실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동양인과 눈이 맞았다. 한국인이냐고 물으니 웃기만 한다. 영어, 스페인어, 일어로 물어도 반응이 없다. “니 쉴 셤머?” 했더니 화들짝 놀라며 제 이름을 대고 중국어로 뭐라 길게 얘기를 한다. 필담으로 넘어갔다. 그는 중국 쓰촨성 충칭시 출신의 정촨위(鄭川瑜). 3월29일 꾸바에 왔다. 친구 세 명을 기다리고 있는데 정확한 시간은 정하지 않고, 아침나절 터미널서 만나기로 했다는 것. 친구들 만나서 여행은 잘 하고 있는지.
체 게바라와 브룩 리
그란마 주(州)로 들어서자 사탕수수 농장이 펼쳐지고, 씨에라 마에스뜨라 산군(山群)이 꿈틀댄다. 1953년 피델 까스뜨로는 체 게바라 등 일행 82명과 함께 멕시코를 출발, 요트 그란마 호(Yate Granma)를 타고 상륙하지만 일행 대부분이 사살되고 그는 붙잡혀 법정에 넘겨진다. 바야마가 꾸바 독립전쟁의 기념비적 도시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2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바야모는 그란마 주의 주도(州都)로 주위가 깨끗하고 정갈하다. 자전거를 타고 마중 나온 민박주인을 비씨택시로 따라갔다. 비씨택시 운전사는 청년 에르네스또. 체 게바라의 이름과 같았다. 체는 친구라는 뜻이고 게바라는 그의 성이다.
운전사에게 썰렁한 조크를 했다.
“성이 게바라냐?”
“그럼, 당신은 브룩 리(이소룡)?”
바로 맞받아친다. 이소룡 영화가 최근에야 이곳을 휩쓸고 지나간 모양이다. 민박주인은 호세 부부. 딸 하나, 아들 하나. 이 집 딸도 의대생이다. 호세 마르띠 소 공원 옆에 붙은 아담한 이층집. 작고 낡았지만 깨끗하고 아름다운 집이다. 점심을 먹으러 ‘페소 식당’(현지인이 이용하는 값싼 식당)에 갔다. 햄버거를 주문하고 1cuc를 주니 잔돈을 거슬러준다.
헤네랄 가르시아(General Garcia) 거리는 보행자와 젊은이의 천국이다. 갤러리, 식당, 전화국, 문화회관이 7,8 블럭이나 뻗어 있다. 전신주도 물감을 짜낸 듯, 나무에서 솟아난 듯 예술적으로 장식했다.
앞방에 캐나다인 투숙객이 들었다. 위니팩에서 건설업을 한다는 중년 남자. 스페인어가 유창하다. 꾸바를 매년 방문해 ‘길 위에서’ 스페인어를 배웠단다. 꾸바는 예쁜 여자들이 값싸서 좋다고 떠벌인다. 대꾸를 안 하자 “또 보자”며 서둘러 외출을 한다.
이튿날 씨에라 마에스뜨라 국립공원(Gran Parque Nacional Sierra Maestra)에 가기로 했다. 1950년대 후반 까스뜨로의 혁명사령부 꼬만단시아(Comandancia de la Plata)가 꾸바의 최고봉 뚜르끼노(Pico Turquino. 1972m)를 등지고 1000m 고지 일대에 건설했던 기지다. 알또 델 나랑호(Alto del Naranjo)에서 3km 떨어진 이곳은 천혜의 ‘산채’이자 꾸바 혁명의 ‘성지’이기도 하다.
까스뜨로의 ‘산채’, 씨에라 마에스뜨라
호세가 빵과 오렌지주스로 도시락을 쌌다. 벌써 차가 대기 중이다. 운전사는 30대 초반의 후안. 대학의 컴퓨터 강사다. 그의 어머니와 형제 둘도 모두 의사다. 그녀는 아프리카 가봉에서 2년간 의료 활동을 하다 최근에 돌아왔다고 한다. 바야모 시내에서 남동쪽으로 두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국립공원 매표소(Villa Santo Domingo). 관리소장은 영어가 유창하며 느긋하고 유머가 있다. 입장료 12cuc, 카메라 휴대에 5cuc. 가이드 비용(10cuc)과 트레킹이 시작되는 고갯마루(Alto del Naranjo)행 지프 비용(5cuc)은 별도.
“좀 비싸죠. 하지만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겁니다. 꾸바혁명의 역사현장과 아름다운 풍광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곳이니까요.”
가이드인 유리와 함께 4륜 구동 스즈키를 타고 경사 40도의 가파른 콘크리트 도로를 4, 5km 올라갔다. 고갯마루에 오르자 산띠아고 데 꾸바와 산또 도밍고 쪽이 훤히 보이고 멀리 캐리비안해가 눈에 들어온다. 유리의 제복셔츠에는 ‘Eco Tur(에코 투어)’로고가 붙어 있다. 혁명지휘소는 그곳에서 약 3km, 왕복 3시간 거리에 있었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증발해버릴 것 같은 옅은 코발트로 물들었고, 열대우림은 미묘한 초록의 변주를 들려줬으며, 흙길은 푸근했다. 1000m 고지 특유의 알싸한 공기. 20분 걸으면 게릴라전 당시 야전병원이던 대피소가 나온다.
까메구에이는 미로와 항아리의 도시. 물이 부족해 항아리에 빗물을 받아 썼다 한다.
꾸바는 위도 22~24。에 걸쳐 있는 아열대 기후지역으로 사실상 겨울이 없다. 망고 바나나 빠빠야, 늘 과일천지다. 여기 게릴라들은 적어도 굶주림과 추위 때문에 목숨이 위태롭진 않았을 터. 해방공간, 6·25전쟁 당시의 빨치산이 떠올랐다. 당시 겨울 지리산 북사면 백무동 계곡에서만 수백명이 동사했다.
나무 그늘에서 유리와 도시락을 나눠 먹었다. 유리는 스물다섯 살로, 벌써 아이 둘의 아빠. 그는 여행자인 나를 부러워했고, 나는 산악가이드인 그가 부러웠다. 고갯마루에 예정보다 한 시간이나 빨리 돌아왔다.
“후에르떼(빠르네요)!”
유리가 놀라는 눈치. 노인이나 부인 관광객이 많았던 모양이다. 꾸바 최고봉 뚜르끼노 트레킹을 하러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 1박2일, 2박3일 종주 코스가 있으며 주로 캐리비안 연안도시 라스 꾸에바스(Las Cuevas) 쪽으로 내려간다. 꾸바 최고봉을 넘어 캐리비안을 굽어보며 하산하는 느낌은 어떨까.
숙소에 돌아와 잠을 자고 일어나니 밤 10시. 점심 도시락을 유리와 나눠 먹은 게 전부. 식당은 모두 문을 닫아 호텔 스낵바에서 샌드위치를 겨우 먹었다. 창밖의 어린아이 몇이 식당에 들어와 돈을 달란다. 아침 산책길엔 골목에서 야구를 하던 아이들이 “치까, 치까(여자 필요해)?”라며 보챈다. 입맛이 쓰다.
현란한 축제, 꾸바 여인들을 만나다
민박집의 아침은 빵에 버터와 치즈, 오믈렛, 과일주스와 과일, 우유와 커피. 아침으로 먹기에 내겐 너무 많은 양이다. 먹다 남은 음식으로 점심 도시락을 쌌다. 메뉴를 고르는 것도 일인데 이러면 쉽게 또 한 끼가 해결된다.
바야모 강둑에 앉아 있는 10대 소녀 두 명의 사진을 찍었다. 인물 사진을 많이 찍고 싶었는데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무턱대고 셔터를 누르자니 무례한 짓이고, 일일이 양해를 구하자니 번거롭다.
오늘은 매주 토요일 사꼬 거리(Calle Saco)일대에서 펼쳐지는 꾸바축제(Fiest de la Cubania)가 있는 날이다. 주변 산책을 하고 세스뻬데스 공원에서 책을 읽는 것 외에 다른 일정은 잡지 않았다. 골목길 여기저기를 걷다가 마당이 아름다운 건물을 만났다. 정원 화단에 앉아 쉬고 있는데 여직원 3명이 ‘동양인 구경’을 나왔다. 다일린, 다마리스, 이셀. 사진을 보내달라며 주소를 적어준다.
이 도시의 세스뻬데스 공원은 산띠아고 데 꾸바의 세스뻬데스 공원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규모가 크다. 옆에 앉은 노인에게 오늘 저녁의 축제에 대해 물으니,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그는 남북한의 현안은 무엇인지, 서울은 어떤 곳인지, 꾸바 어느 곳을 여행하는지, 바야모의 인상이 어떤지에 대해 물어왔다. 그와 헤어져 헤네랄 가르시아 거리로 갔다. 노점에서 튀긴 생선으로 속을 채운 햄버거를 팔고 있다.
거리 축제는 밤 10시부터. 사꼬 거리에 식당별로 구역을 나눠 테이블과 의자가 깔렸다. 한쪽에서 기타 둘, 콘트라베이스, 타악기로 구성된 쿼텟(4중주단)이 구성진 뜨로바(꾸바의 전통 가악)를 연주한다. 축제 음식은 돼지고기 바비큐가 주 메뉴. 화덕에 숯이 벌겋게 달아오르자 돼지는 머리만 남은 채 몸통만 요란한 연기를 내며 기름을 뚝뚝 흘리고 있다. 가족 단위로 몰려나와 거리의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며 즐기는 소박한 축제다. 이때 헤네랄 가르시아 거리에는 일제히 체스판이 깔린다. 남북 축으로는 먹자판, 동서 축으로는 놀자판 축제가 벌어진다. 노동과 교통의 공간에 식탁과 체스판이 깔리는 순간, 비일상적일뿐더러 초현실적인 광경이 펼쳐진다. 그들은 그 속에서 일제히 해방감을 만끽한다.
찬물은 없고 찬비만 주룩주룩
쿼텟 연주에 넋을 빼고 있는데, 한 남자가 수인사를 하더니 제가 마시던 맥주를 한 모금 권한다. 부인이 한국계라며 사양하지 말란다. 사촌 누이동생과 두 살배기 조카딸, 누이동생의 친구가 함께 있다. 같이 이리저리 거리축제 구경을 했다. 사촌은 노엘리아, 그녀의 친구는 미스로아이스. 노엘리아는 이제 갓 스물, 아이가 아이를 낳은 셈이다. 그 친구도 아이가 있었는데 둘 다 미혼모였다. 맥주를 얻어 마신 보답으로 함께 ‘라 바야메사(La Bayamesa)’에 뜨로바 공연을 보러 들어갔다. 아기는 입장불가. 노엘리아가 제 딸을 집에 맡기고 돌아왔다. 미스로아이스가 자신의 애인이 돼달란다.
바로 건너편이 내 숙소였다. 일행을 잠시 기다리게 하고, 문방구류 몇 개씩을 챙겨 노엘리아와 미스로아이스에게 아이들 선물로 주라고 나눠줬다. 애들처럼 좋아한다. 사진을 부쳐달라며 주소를 적어주고 돌아갔다. 그들의 정체가 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들과 함께 축제를 즐긴 셈이다. 안녕, 굿바이, 아디오스!
바야모의 까스뜨로 산채
돌아오는 길에 허름한 집 문턱에 앉아있는 소년에게 세스뻬데스 공원 가는 길을 물었다. 손가락으로 귀를 가리키며 못 듣는다는 표시를 한다. 새까만 맨발로 땅바닥에 손 낙서를 하던 귀머거리 소년, 깊은 침묵의 세계에서 무얼 듣고 있는지….
꾸바에선 찬물을 맘껏 마실 수 없는 게 불편하다. 바야모의 슈퍼마켓에선 작은병의 생수를 팔지 않았고, 생수가 있어도 탄산이 든 ‘아구아 미네랄 꼰 가스(Agua Mineral con Gas)’뿐이었다. 마셔도 시원하지 않고 속만 부글부글. “미 까사 에스 뚜 까사(네 집처럼 편히 지내라)”라고는 하지만 가게에서 사온 물을 주인집 냉장고에 넣어두고 마시기도 난처하다.
낮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비가 온다. 오후 내내 비가 쏟아지니 스콜은 아니다. 헤네랄 가르시아의 식당들은 일요일이라 일찌감치 문을 닫았다. 로얄톤 호텔 스낵바에서 샌드위치와 달걀프라이로 저녁을 때웠다. 혼자서는 대충 먹게 된다. 숙소에 돌아오는 길, 낮부터 끈질기게 내리는 찬비가 샌들을 적시고 온몸에 한기가 돈다. 안주인이 외출해야 한다며 숙박 계산서를 들고 일찌감치 내 방문을 두드린다. 명세를 보니 씨에라 마에스뜨라 가는 날 호세가 싸준 도시락 값도 포함돼 있다. 공짜는 없다.
▼ 미로의 도시 까메구에이(Camaguey)
까메구에이 주로 들어서자 사탕수수 농장과 목장이 끝없이 펼쳐진다. 꾸바 카우보이의 고장으로도 불리는 까마구에이. 버스는 라스 뚜나스를 거쳐 직진하지 않고, 올긴으로 우회하는 탓에 5시간30분이나 걸렸다. 까마구에이는 미로와 물 항아리의 도시이기도 하다. 16세기 스페인 식민통치 시절, 해적들의 약탈에 대응해 도시의 간선도로와 골목길을 복잡하게 설계했다. 사거리는 보통이고 오거리, 육거리도 흔하다. 옛 해적들처럼 관광객도 길을 헤매기 일쑤. 적은 강우량 탓일까. 물 부족에 시달리던 이곳 사람들은 빗물을 받기 위해 거대한 항아리를 도시 곳곳에 설치했다. 이제 항아리는 이 도시의 상징물이자 명물이 되어 있다.
터미널에서 나를 맞은 사람은 비씨택시 운전사였다. 깡마른 20대 청년이었는데 벌써 술을 한잔 했는지 얼굴이 불콰하다. 도로 한가운데로 음주운전을 하기에, 길 오른쪽으로 붙여 운전하라니까, 이 도로는 제 것이라며 영어로 “노 프로블럼”을 반복한다.
숙소는 시내 중심가인 마세오 광장 북서쪽 모퉁이에 있었다. 이날 따라 근처 상점에 큰불이 나서 경찰이 통행을 막고 있다. 짐을 메고 500m를 걸어 숙소에 도착했다. 주인은 30대 남자 마놀로로, 예의가 바르고 기품이 있어 뵌다. 2층짜리 스페인식 저택. 마놀로는 가족이 모두 쓰는 집이어서 도난 염려가 없고 그래서 손님용 열쇠가 없단다. 그래도 늦게 숙소에 돌아올 때 일일이 깨우는 것이 불편하다니까, 늦게까지 안 자니까 괜찮단다. 내가 안 괜찮은데…. 쩝.
마술 같은 춤곡의 세례
미로탐험에 나섰다. 뜨라바하도레스 광장과 성당을 이정표 삼아 한바퀴 돌았다. 성당 앞에 나란히 앉아 있던 10대 소년들이 나를 보더니 “아뵤” 하며 이소룡 흉내를 낸다. 길을 묻다가 까르멘 광장과 교회 경비대 소속의 그라비엘을 만났다. 내일 비번이므로 도시 안내를 해주겠다고 한다.
늦은 밤 숙소 옆 야외식당에 저녁을 먹으러 들어갔다. 바에 있던 20대 흑인여자가 다가온다. 담배를 달라는 줄 알고, 한 개비 줬더니 독한 담배 한 갑을 사달란다. 피곤한데다 배고프니 짜증이 난다. 거절했다. 숙소에서 모기가 밤새 괴롭힌다. 여기저기에서 부스럭대는 소리. 쥐일까, 이구아나일까?
다음날 아침 그라비엘과 만났다. 이그나시오 아그리멘떼 공원을 거쳐 아그로뻬꾸리아리오 엘 리오 시장에 갔다. 꾸바의 재래시장 한 곳을 보려면 이 곳에 가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남대문시장보다 규모는 작지만 1960,70년대 시골장터 같은 분위기가 푸근하다.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훈제한 것을 즉석에서 칼로 베어 속을 채운 햄버거와 즉석에서 짠 오렌지주스로 그라비엘과 점심을 해결했다. 낮잠(씨에스따)은 필수다. 너무 더워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
해가 진 후 숙소 근처에서 모히또를 마시는데 어제 그 여자, 아이떼가 또 나타났다. 그녀는 28세로 세 살짜리 딸이 있고, 할머니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아버지는 구두닦이, 어머니는 세탁부. 오늘밤 뭘 할 건지 묻는다. ‘라 까사 델 라 뜨로바’에 갈 거라고 하니까, 그런 따분한 곳 대신 디스꼬떼까에 가자고 한다. 꾸바의 밤 문화 체험 삼아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디스꼬떼까 입장료는 1인 3cuc. 외국인은 여권을 보여줘야 하고 쿠바인은 주민증과 소지품을 맡겨야 한다. 말썽 피우지 못하게 일종의 담보를 잡는 셈. 건물 밖에는 경찰차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조용히 서있다.
밤 10시가 넘어서자 섹시하게 차려입은 젊은 남녀들이 들어와 비트가 강한 꾸바음악에 맞춰 들썩들썩한다. 의자에 앉은 채 몸을 흔들거나, 아직 조명도 안 들어온 스테이지에 나가 현란한 춤을 춘다. 살사, 차차차, 메렝게, 바차타, 이뽑(hip-hop) 등 몸이 울릴 정도로 큰 음악소리. 어느 새 무대는 터져나가고, 결국 ‘부비부비 춤’이 대세가 된다. 별세계 같은 꾸바의 춤판. 훌쩍 새벽 두 시. 폭포처럼 쏟아진 마술 같은 춤곡의 세례를 받고 다시 태어난 느낌이다. ‘미안하다, 마놀로’ 휘청거리며 초인종을 눌렀다.
꾸바에서 필자(위).
까마구에이 대합실에서 뜨리니닷행 야간버스를 기다렸다. 정차한 산띠아고 데 꾸바행 버스에서 30대 동양여인이 내린다. 홍콩서 온 여행자. 아바나에서 출발해 하루 종일 비아술(외국인 전용 고속버스)을 탔단다. 잠시 후 그녀는 동쪽으로 떠났다. 밤에는 버스가 터미널에 들어와도 안내방송이 없다. 버스의 착발도 들쑥날쑥. 차가 들어올 때마다 행선지를 확인해야 한다.
야간 비아술은 냉장고 속처럼 춥다. 긴팔 옷 속에서 소름이 돋는다. 깊게 잠들었다가 저체온증에 걸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 간이담요까지 뒤집어쓴 채 오전 7시 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꾸바의 주요 관광명소인 뜨리니닷에 도착했다.
혼자 보긴 억울한 해변의 풍광
뜨리니닷의 중심은 마요르 광장(Plaza Mayor). 시내 중심지(Centro) 모든 골목길이 자갈로 포장돼 있다. 토산품 노천시장에는 장신구와 민속악기 옷감 식탁보 침대보 의류 인형 식기 등이 손님을 기다린다. 넬레이라는 작은 백인아가씨가 팔찌와 목걸이를 권한다. 시장을 빠져나가니 쎈뜨로(마을) 밖. 간이 페소식당 앞에 앉아 있던 노인이 “요리사 이스팔도”라며 자신을 소개한다. 동업자 끌라라와 이 식당을 꾸려나가고 있다. 그가 구아바 주스를 대접하겠단다. 시장에서 선물을 사느라 빈털터리라며 바지주머니를 뒤집어 보이자, “노 쁘로블레마(괜찮아)”란다. 보답으로 내일 점심을 먹으러 오겠다고 했다.
라 보까(La boca)를 거쳐 반도 끝에 안꼰 해변(La playa Ancon)이 있다. 까리브 해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해변. 매점 앞 야자수 그늘에서 맥주를 마시며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다 돌아왔다. 꿈꾸던 해변이었으나 혼자 감상하기엔 벅차다. 아름다운 풍광과 정취를 공유할 수 없다는 건 형벌이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