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12년(1481) 5월 25일, 왕은 병조참지(兵曹參知) 김세적(金世勣)을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했다. 그리고 다음 날 승정원에 전교를 내렸다.
내가 김세적을 승지에 임명한 것은 그의 무예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등용할 만한 재능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문신의 직책을 거치지 않아서 경험해본 일이 많지 않을 것이니, 다른 승지들이 각자 그에게 업무를 가르쳐주도록 하라. <성종실록 12년 5월 26일>
이어서 김세적에게는 따로 전교를 내렸다.
그대는 잘 모르는 것이 있거든 반드시 다른 승지들에게 물어본 뒤에 처리하라. <성종실록 12년 5월 26일>
성종이 왜 이런 전교를 내려야 했는지 사관의 논평에 단서가 보인다.
[일러스트·이부록]
승지는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비서실의 고위직이다. 높은 학식과 뛰어난 문장력을 갖춘 당대 최고의 인재들이 등용되는 자리이고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직책이다. 그만큼 적합한 사람을 잘 선택해서 등용해야 한다. 김세적은 성종 5년(1474)에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북방의 건주야인(建州野人·중국 명나라 때 남만주 건주 지역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을 정벌하는 등, 충분히 높은 지위에 오를 만한 능력과 실적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인이었고, 수많은 공문서와 행정 업무를 감당해야 하는 승지의 자리에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 까닭에 성종 앞에서 대놓고 반대하지 못했을 뿐 조정의 여론은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성종도 이를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선택을 되돌리려 하지 않았다. 관건은 김세적이 직책에 걸맞은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성종 12년(1481) 6월 8일, 중국 사신을 따라온 광대들의 공연을 세자가 보고 싶어 하자 왕이 승정원 승지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승지들이 반대하자 왕은 그 의견을 받아들여 공연을 보지 못하게 했다. 이 일을 기록하면서 사관의 붓은 뜬금없이 김세적을 겨냥한다.
승지들이 회의할 때 김세적은 머리를 푹 숙이고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김세적은 무사이니 세자를 지키고 키우는 올바른 길을 어떻게 알겠는가? 무릇 승지의 자리는 적합한 사람을 잘 선택하여 제수해야 한다. 그런데 변수, 양찬(梁瓚), 오순(吳純), 이공(李珙), 변처령(邊處寧) 같은 자들이 번갈아 승지가 되니, 어찌 왕명의 출납을 제대로 해낼 수 있겠는가? <성종실록 12년 6월 8일>
사실 김세적은 좀 억울할 수도 있다. 세자 교육이 중요한 나랏일이기는 하지만 승지가 본래 담당한 업무는 아니다. 세자시강원이라는 세자 교육 전담 부서가 엄연히 따로 있었다. 김세적이 뭘 하든 마음에 들지 않을 정도로 사관에게 제대로 밉보인 모양이다. 여기서 이름이 언급된 사람들은 모두 무신으로, 김세적과 같은 이유로 승지 자리에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성종은 어째서 반발을 무릅쓰고 계속해서 무신들을 승지의 자리에 등용한 것일까? 사실 여기에는 ‘문무일체(文武一體)’ 인식에 기반을 둔 성종 나름의 인사 원칙이 작용하고 있었다.
왕명의 출납, 행정 사무 등을 매일 기록한 승정원 일기.[동아DB]
성종은 이러한 원칙에 따라 육조의 주요 직책과 승지 자리에 무신들을 꾸준히 등용했다. 김세적을 승지로 임명한 것 또한 이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취지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직책에 임명된 무신들이 업무 수행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이에 사헌부와 사간원을 필두로 한 문신들의 반대가 잇따랐다. 하지만 성종은 자신의 원칙을 고수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김세적은 꽤 오랫동안 승지 자리를 지켰다. 사관의 쓴소리도 지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성종 14년(1483) 10월 12일, 성종은 송나라 왕우칭(王禹偁)의 글 ‘대루원기(待漏院記)’를 승정원 벽에 걸어두고 보면서 반성의 계기로 삼으라는 전교를 내렸다. 이어서 좌승지로 있던 김세적에게 따로 당부한다.
그대는 분명 이 글을 모를 것이다. 이 글을 공부하도록 하라. 내가 나중에 글에 있는 말을 뽑아서 물어보겠다. <성종실록 14년 10월 12일>
대루원은 아침에 조정으로 출근하는 관원이 궐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머물던 장소다. 왕우칭이 대루원에 앉아 관원들이 나라와 임금과 백성을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어떠한 마음으로 어떻게 일해야 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 글로 정리한 것이 ‘대루원기’다. 왕이 김세적에게 이 글을 공부하라고 당부한 것을 보면, 김세적은 승지가 된 지 2년이 넘었는데도 조정의 여론을 돌릴 만큼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것 같고, 그런데도 성종은 김세적을 포기할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성종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관은 또다시 독설을 날렸다.
김세적은 늘 활이나 쏘고 말이나 탔지 글공부를 하지 않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승지로 발탁되더니 하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영리를 추구하고 청탁하는 일뿐이고, 친하게 지내며 어울리는 자들은 모두 저속한 공인(工人)이나 장사치들뿐이었다. 왕명을 출납하는 직무에는 장님이나 귀머거리와 마찬가지이니, 〈대루원기〉를 백번 읽어본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성종실록 14년 10월 12일>
인신공격에 가까울 만큼 혹독한 비판이다. 표면적으로는 김세적을 비판하고 있지만, 이면에는 김세적을 승지로 임명한 성종을 비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무신들을 조정의 주요 관직에 등용하는 정책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김세적이나 성종이 이 논평을 보았다면 상당히 언짢았겠지만 사관들의 비판에도 그 나름의 근거는 있었다. 성종은 무신도 요직에 등용해야 한다는 원칙만 내세울 뿐 적임자를 발탁하지 못했고, 김세적은 직책에 부합하는 능력과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성종실록’에 보이는 성종과 김세적과 사관의 삼각관계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성종의 원칙과 현실적인 여건이 조화를 이루게 할 방안은 없었을까? 김세적은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옳았을까? 사관의 비판은 전적으로 타당한 것이었을까? 지금도 여전히 답을 내리기 쉽지 않은 문제다.
대통령이 지명한 주요 공직자들이 여론의 압박에 밀려 줄줄이 낙마하는 모습은 이제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쓰는 일은 참 어려운 문제다.
1 왕명(王命)의 출납을 맡아보던 관아. 국왕 직속 기관.
2 同副承旨. 승정원에 속한 정삼품 벼슬.
3 사간원에 속한 종삼품 벼슬.
4 司憲府. 정사(政事)를 논의하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관리의 비행을 조사해 그 책임
을 규탄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5 司諫院. 왕에게 간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