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호

[환상극장] 양반에 관한 우아하지 못한 농담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입력2022-12-15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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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Gettyimage]

    [Gettyimage]

    사촌형 박명원이 서안에 기댄 채 졸고 있던 박지원의 어깨를 살며시 흔들어 깨웠다.

    “지원아, 눈 좀 떠봐라. 나 명원이 형이다.”

    눈을 비비며 뚱뚱한 몸을 천천히 일으킨 지원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명원을 멀뚱히 바라봤다. 빙그레 미소 띤 명원이 다시 말했다.

    “임금님 뵙고 돌아가는 길에 잠시 집에 들렀다. 과거 공부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거냐?”

    그제야 정신이 온전히 돌아온 지원이 형을 얼싸안으며 소리쳤다.



    “이게 얼마만이오? 잘생긴 우리 형님! 옹주마마는 별고 없으시고?”

    영조 임금의 셋째 딸에게 장가든 명원은 어느덧 왕가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장안의 명사이자 한양 서촌에 대궐 같은 집을 소유한 세도가가 돼 있었다. 지원의 비만한 몸을 살짝 떼어낸 명원이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네 나이도 이제 스물이고 장가까지 들었으니 급제를 서둘러야 해. 독서엔 진척이 있니?”

    서안 위에 놓인 서책들을 슬쩍 들어 방구석으로 밀며 지원이 딴소리를 했다.

    “옹주마마께선 함께 오셨소?”

    언뜻 봐도 값비싼 비단 도포 자락 매무새를 다듬으며 명원이 낮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안채에서 아버님 어머님을 뵙고 인사드리는 중이다. 너도 가보련?”

    찌뿌둥한 표정을 짓던 지원이 익살맞은 어조로 대답했다.

    “아무리 가난을 핑계 댈지언정 다 큰 사촌동생이 성혼하고도 큰아버님 댁에 얹혀산다는 게 뭐 자랑은 아니잖소? 저와 제 내자는 숨어 있으려오.”

    다시 특유의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명원이 방구석으로 밀려난 서책 쪽으로 손을 가져가려 했다. 깜짝 놀란 지원이 만류하며 소리쳤다.

    “그만두시오! 이 동생의 비밀 서책들이란 말이오!”

    두 눈을 게슴츠레 든 명원이 손을 도로 거두며 속삭였다.

    “소설 나부랭이 같은 잡서들을 여전히 읽고 있구나.”

    “그렇소!”

    “뭐가 그리 당당하니? 내 마침 네가 썼다는 양반전인지 뭔지 하는 글을 요즘 들어 우연히 읽어봤다. 옹주도 같이 읽고 꽤나 깔깔 웃어댔지.”

    갑자기 희색이 만면해진 지원이 급히 물었다.

    “재밌었소? 뭐라 하셨소?”

    한숨을 푹 내쉰 명원이 팔짱을 끼며 반문했다.

    “뭐라 했을 것 같니? 독자들의 일회성 웃음을 사는 건 선비가 할 도리가 아니다. 해학으로만 명성을 얻는다면 저자의 재주꾼과 뭐가 다를까?”

    양반을 팔려는 자

    입술을 뾰쪽 내민 지원이 서책 사이에 끼워둔 원고 뭉치 하나를 빼 내놓으며 말했다.

    “이게 그 후속편이오. 어디 읽어보실 테요?”

    양반 신분이라도 팔아 관가에 밀린 빚을 갚으려 했던 강원도의 가난뱅이 선비는 동네에 파다하게 퍼진 치욕스러운 소문에 몹시 괴로워했다. 한데 결과적으로 관가에 진 빚은 빚대로 갚고 양반 신분도 유지한 셈이니 그리 크게 밑진 장사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얻은 이문만 생각하며 잠시 부닥뜨릴 불명예를 꾹 참고 견디기로 했다.

    소문이 그럭저럭 가라앉고 자신을 조롱하며 마주 앉기도 꺼리던 마을 양반들이 하나둘 조금씩 말을 붙여올 즈음, 그의 아내가 불쑥 이상한 말을 꺼냈다.

    “여보, 이 양반아! 뭐가 그리 좋아 웃음이 나오누? 관곡 얻어먹은 빚은 건너 마을 그 바보 같은 상놈 덕에 다 갚았다지만, 그래서 뭐가 해결은 됐남? 앞으로 남은 생은 어찌 살 것이며, 자식새끼들 시집 장가는 또 어찌 보낼 테요? 머리라고 목 위에 제대로 달렸다면 생각이란 걸 좀 해보란 말이에요!”

    멍청한 낯빛으로 아내를 바라보던 그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럼 내가 뭘 또 해야 하나? 당신 시키시는 대로 양반 신분이라도 팔려 분투하지 않았었소? 비록 내 공력 때문만은 아니지만 큰 행운이 따라 빚을 죄다 갚았고, 마을 사람들도 우릴 다시 어엿한 양반 취급을 해주기 시작했소. 이만하면 참으로 잘된 일이 아닌가 하오만?”

    서슬 퍼렇게 노기 띤 표정을 한 아내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그놈의 양반 신분이 엽전 한 닢이라도 만들어주긴 했었남?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양반 신분마저 팔려 했던 초심, 그 붉디붉은 사내의 열정은 온데간데없고, 후줄근히 썩은 내 나는 선비 하나가 떡하니 내 앞에 앉아 있구려!”

    점점 울상이 된 그가 처량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아내에게 물었다.

    “이런 말 염치없지만, 난 최선을 다했소. 뭘 더 할 수 있다면 부디 알려 주시길 바라오!”

    싸늘한 눈빛으로 남편을 쏘아보던 아내가 급격히 상냥한 어투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당신 양반 신분을 사려던 그 상놈의 재산이 얼마인지나 아시오? 족히 2만 냥은 넘는다고 합디다! 그중 반은 우리 것 아닌감? 아직 잘 못 알아듣누? 고을 사또가 분명히 양반매매계약서를 써서 그놈 앞에 들이밀었고, 그놈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줄행랑을 놓았지요? 한마디로 양반 노릇 못 해먹겠다 그 말인데, 양반이란 게 되기도 어렵지만, 한번 되면 어디 그리 쉽게 관둘 수 있는 것이에요?”

    “끝내 지장을 찍지 않고 포기한 걸로 아오만. 게다가 사또도 다른 말씀이 없으셨고.”

    “비록 그놈이 지장은 찍지 않았지만 우리가 관에 진 빚을 대신 갚았지 않남? 그럼 계약은 성립이 된 것이고, 당연히 우린 양반 신분을 그놈에게 반드시 줘야 할 의무가 생긴 게 아니냐고요? 내 말이 틀렸으면 말해 봐요.”

    “그건 그런 것 같소만.”

    “그것 보란 말이에요! 양반 노릇이 얼마나 고된 것인지도 모르고 덜컥 사려다가 계약서를 읽고 겁을 먹고는 간이 콩알만 해진 것 아니겠어요?”

    “그치! 그런 것 같소만. 근데 그게 뭐가 문제요?”

    “그러니까 사또께 찾아가 당신 양반 신분을 그 상놈에게 기필코 돌려주고 싶다 탄원을 넣으라는 그 얘긴데, 못 알아들으실 테요?”

    “안 받는다는데 어찌 강제로 줄 수 있겠소?”

    “양반을 안 받겠다면 그놈이 대신 갚은 빚도 마땅히 우리에게 되돌려 받아야 할 것 아닌감?”

    “두려운 말이긴 하지만, 그 역시 말이 되는구려!”

    “근데 우리에겐 돌려줄 돈이 한 푼도 없고! 그럼 결국 그놈은 양반이 되는 길밖에 없어요. 돈 주고 사놓은 양반 신분을 길바닥에 팽개친다면, 그건 양반 신분에 대한 모독이자 반상 구별을 국시로 삼는 조선 왕국에 대한 도전 아니겠어요?”

    문인으로 살기

    “결국 그리 되긴 하겠는데, 그럼 그놈이 끝내 양반을 받겠소?”

    “흥! 받긴 뭘 받남? 이미 감당이 안 돼 도망친 주제에! 틀림없이 계약을 물리자고 몸서리치며 달려들 게 분명해요!”

    “그러면?”

    “재산 반절을 달라 하세요! 만 냥!”

    글을 읽어 내려가다 문득 멈춘 명원이 동생 쪽을 힐끗 보며 물었다.

    “이건 양반전보다 더 신랄하면 신랄했지 못하지가 않구나! 용장하고 오만한 기운이 가득한데 그 호기만은 대단하다. 이 필력을 과거 공부에 모아보면 어떨까?”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갸웃한 지원이 천천히 대답했다.

    “관직에 오르면 이런 글을 감히 쓸 수나 있겠소? 난 지금 이 세상 얘길 쓰는 데에 흥미가 있지 고리타분한 옛 글들 주워섬기는 건 딱 질색이오.”

    그러자 명원이 들릴 듯 말 듯 낮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럼 뭘 먹고살 거니? 숙부님 건강도 그리 좋지 않으신데, 머리 좋은 너라도 집안을 일으켜야지?”

    뒷머리를 긁적이던 지원이 명쾌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큰아버님께서 도와주시고, 뭐 정 안되면 부자인 형님도 계시지 않소?”

    “내가?”

    “그렇소! 글재주 있는 아우를 위해 적선을 좀 하시오. 청나라 갈 때 좀 데리고도 가보시고. 왕실 외척 신세 크게 한번 져봅시다!”

    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대며 명원이 야무지게 속삭였다.

    “쉿! 옹주 듣겠다. 내 널 돕기 싫은 게 아니야. 이런 글들도 물론 쓸모야 있겠지만 세상을 크게 구제할 순 없으니 아무쪼록 조정에 나가라는 말
    이다.”

    크게 하품을 한 지원이 서안 앞으로 고개를 쭉 내밀며 말했다.

    “이 아우는 당분간 문인으로 살고 싶소. 자유를 잃은 자가 어찌 문인이라 할 수 있겠소? 어서 그 글이나 마저 읽고 평이나 해주시오.”

    꺾쇠의 고민

    정선 고을 사또가 눈을 감은 채 한참을 수염을 쓸고만 있자 가난뱅이 선비가 목청을 더욱 돋워 소리쳤다.

    “쇤네 이미 양반 신분을 잃고 상놈처럼 살아가고 있으니 어찌 감히 관에 허튼 소릴 지껄일 수 있겠나이까? 이 충정을 제발 헤아려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소서!”

    관모를 벗고 머리 여기저기를 뒤적이며 이를 잡던 사또가 섬돌 위에 가래침을 탁 뱉더니 음흉한 미소를 띠고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말이 맞는 것도 같고, 또 말이 안 되는 듯도 하고. 아무튼 저 꺾쇠 놈에게, 아니 양반이 될 수도 있으니 저 꺾쇠 양반에게 갚을 돈이 한 푼도 없다, 뭐 그 말 아닌가?”

    가난뱅이 선비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영 뜨락에 머리를 조아렸다. 이번엔 건너 마을 부자 상놈 꺾쇠를 돌아본 사또가 물었다.

    “이보시게, 꺾쇠 씨! 저 선비 놈에게 돈을 돌려받을 뜻이 전혀 없고, 또 여전히 양반도 되기 싫으시다?”

    얼굴을 찌푸린 꺾쇠가 잔뜩 우는 상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매매계약을 파기할 때 이미 말씀드린 걸로 압니다. 양반 노릇 다 필요 없고, 저 선비님 대신 갚은 빚도 돌려받을 맘이 일절 없습지요. 다 없었던 일로 해주시면 정말이지 감복할 따름이겠습니다!”

    코를 후비던 손으로 이번엔 귓속을 파며 사또가 웅얼대듯 말했다.

    “그래, 뭐 다 좋은데, 문제는 저 양반 놈이 더는 양반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가 만든 계약서에 따라 그 신분이 이미 박탈됐음은 분명해 보이니까 말이지. 말하자면 양반 신분이 이 관아에 잠시 계류 중이랄까? 뭐 그런 것 같구나. 한데 난 법률에 따라 이걸 반드시 너 꺾쇠에게 줄 의무가 있는 듯하구나? 아니 그러냐? 그게 아니면 이걸 내가 가지란 소린데, 세상천지 어디에 양반 두 개를 가지고 사는 미친놈이 있더냐? 그도 아니면 양반 신분을 관아 창고에 보관했다 필요한 놈이 생기면 거저 주라는 그 말이냐? 과연 네 놈 꺾쇠가 이 조선의 신성한 반상제에 도전하겠다는 심보인 게냐?”

    사색이 된 꺾쇠가 두 손으로 허공을 휘저으며 다급히 소리쳤다.

    “그렇담 저 양반 대신 갚았던 빚을 돌려받겠습니다! 그럼 되겠습죠?”

    볼을 씰룩이며 웃음을 참던 사또가 성난 음성으로 되물었다.

    “누구에게? 누구에게 돌려받지? 한 푼도 없는 저 가난뱅이한테?”

    “매일 조금씩 갚아도 되겠고, 정 안된다면 저희 집에서 노역을 해 차츰 갚으면 되지 않을깝쇼?”

    “노역을 해? 너희 집에서?”

    “네! 그럼 되겠습니다요!”

    수염을 꼬아 손가락에 돌돌 말며 사또가 능청맞게 속삭였다.

    “너희 두 놈이 다 같은 상놈들인데, 어찌 노역을 시키지? 그건 죄인한테 나라만이 시킬 수 있는 것임을 모르느냐? 저 가난뱅이는 스스로 자기 신분을 바치면서까지 관아에 자수한 게 아니더냐? 어떻게 죄를 물을 수 있겠느냐? 이미 죄인도 아닌데다, 가뜩이나 상놈 주제에 사사로이 다른 상놈을 노역을 시킨다? 그 또한 국법을 어기는 대역죄니라!”

    막 울음을 터뜨릴 표정이 된 꺾쇠가 두 손을 마주 비비며 하소연을 시작했다.

    “그럼 쇤네가 끝내 양반이 돼야 한단 말씀이십니까? 그건 정말이지 못해먹겠, 아니 감당치 못하겠습니다요! 차라리 매매계약서 대신 그럴듯한 공명첩이라도 하나 써주시든지, 그도 아니면 다른 조건 일절 달지 말고 그냥 넌 이제부터 양반이다, 뭐 딱 그렇게만 적어 새로 계약서를 써주신다든지 하는 그런 해법은 없습니까요?”

    팔짱을 낀 채 꺾쇠를 노려보던 사또가 장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이놈! 양반의 뜻조차 아직 모르더냐? 문반과 무반을 합쳐 이르는 말이 양반이렷다! 벼슬을 해야만 될 수 있는 고귀한 신분이 양반인 것이다. 벼슬에는 권리와 더불어 의무가 반드시 따르는 법! 네 녀석은 벼슬의 달콤함만 탐하며 거기에 따를 의무는 죄 저버리겠단 심사였던 게냐? 정녕코 그런 사특한 마음 보따리로 감히 양반을 사려들었느냐? 게다가 이미 성립된 계약을 파기하고 양반 신분을 내팽개치겠다? 죽고 싶어 환장한 게 아니라면 어찌 그런 발칙한 생각을 하느냔 말이다!”

    품위 없는 삶

    원고를 방바닥에 툭 내려놓은 명원이 미묘한 눈빛으로 동생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지원아. 네 생각을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양반들 가운데 못난이들이 꽤 많고, 심지어 나라에 해악이 되는 줄도 잘 알고는 있다. 하지만 이처럼 품위 없는 글로 그들을 비웃는다 한들 세상이 바뀔까?”

    한 손으로 턱을 괴고 형이 자기 원고를 다 읽기를 기다리던 지원이 무거운 몸을 천천히 펴서 곧게 세우며 대답했다.

    “그 글 속에 등장하는 이들이 품위 없는 것이지, 내 글이 어찌 품위 없다 하시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사람의 품격을 좌우하는 것 아니오? 다루는 소재야 우주 전체 그 무엇인들 뭔 상관이란 말이오? 우리 형님은 너무나 부귀해져서 이 아우와 어린 시절 나누던 포부는 다 산산이 사라졌나 보오?”

    조금 놀란 표정을 짓다 다시 다정한 미소를 만면에 띤 명원이 입을 뗐다.

    “포부가 어찌 다 사라졌겠니? 넓디넓은 세상을 바라보고 거기다 임금님 속마음까지 들여다보다 보니 이 형이야말로 관점이 훨씬 깊어진 것이지. 무조건 나랏일 욕만 하면 세상이 올바르게 돌아가겠니? 청나라 연경을 막상 가보니 조선이 많이 변해야겠단 생각이 들더구나. 제대로 된 젊은 선비라면 자질구레한 세속 일에 얽매이기보다 국사에 눈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나라를 이끌어야 할 양반들이 나라를 좀먹는 해충이 됐다면, 이보다 더 큰 국사가 어디 있겠소? 아까 품위라 하셨소? 자기를 지킬 힘이 없는데 어찌 품위를 운위한단 말이오? 지금 조선의 꼴이 딱 이 강원도 가난뱅이 선비 꼴이 아님 뭐겠소?”

    안채 쪽을 힐끔 본 명원이 소리를 낮추라는 손짓을 하며 속삭였다.

    “소리를 좀 죽여라. 옹주께서 들으시면 어쩌려고 그러니? 네 기상과 풍간의 뜻은 내 잘 알겠다. 너의 혈기를 살짝 누그러뜨리고 조정에서 큰일을 해보자는 것인데 못 알아듣는 거냐?”

    심드렁한 표정으로 안채 방향으로 얼굴을 쭉 뺐다 거둔 지원이 말했다.

    “청나라는 언젠가 꼭 데려가 주오. 그나저나 원고는 다 안 읽으시려고?”

    이상한 거래

    “만 냥? 만 냥이라 하셨습니까?”

    경악한 꺾쇠가 사또를 바라보며 부르짖었다.

    “상놈이 된 저 양반 놈이 그렇다고 하는구나. 맞느냐?”

    사또가 가난뱅이 선비를 돌아보며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자 가난뱅이가 굽실대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조금 과한 듯도 들리시겠지만, 소인이 볼 때는 그만한 무게가 있는 것 아닐까 합니다만. 양반의 무게가 만 냥 정도는 돼야 하겠다고 믿고 싶습니다만. 에고.”
    볼을 씰룩거리고 헛기침을 연발하던 사또가 꺾쇠를 내려다보며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얘기인즉슨 이러하다. 너 꺾쇠는 저 가난뱅이한테 오백 냥을 주고 양반을 샀었다. 맞지? 원하든 원치 않든 넌 이미 양반이 맞다! 관을 우롱한 게 아니라면 이 사실은 받아들여야 할 것이야. 그렇지? 한데 넌 막상 양반이 되려다 보니 그 무게가 너무 버거운 것이지? 그래서 그걸 훌훌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게 아니더냐? 맞지? 그럼 꺾쇠 넌 그 무게를 벗어던져 저 불쌍한 가난뱅이에게 다시 짐 지우겠단 못된 심보인 셈인데, 그렇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마땅하지 않으냐? 아니 그러냐? 지금 저 상놈이 된 양반 녀석이 그 값을 만 냥이라 부르는구나? 양반 가격이 만 냥도 안 된다 여기는 거냐? 꺾쇠는 대답해 보아라!”

    우물쭈물 좌우를 둘러보며 억울한 표정을 짓던 꺾쇠가 울부짖었다.

    “쇤네 처음에 오백 냥에 양반을 샀습니다요! 근데 그게 어찌 만 냥짜리로 돌변한단 말입니까? 이치가 그렇지 않습니까? 사또께선 백성들의 어버이신데 부디 자애롭게 굽어 살펴봐 주시옵소서!”

    팔짱을 끼고 사나운 표정을 지은 사또가 준엄하게 외쳤다.

    “물건에는 다 가격이란 게 있고, 그 가격은 시장 상황에 따라 수시로 오르고 내린다는 걸 네놈만 모르는 게냐? 저 가난뱅이 녀석의 양반 가격은 한때 오백 냥으로 떨어졌었던 거다. 왜냐고? 그 정도 값어치밖에 할 수 없는 거였으니까! 한데 그게 부자인 꺾쇠 네놈 수중에 들어가며 값이 확 불어난 거다. 또 왜냐고? 가난뱅이인 선비 녀석 수중에 있을 때와 달리 그 가치가 폭등했기 때문이다. 잘 들어봐라. 여기 정승이 있고 한미한 향반이 있다 치자. 둘이 모두 양반 신분을 도박으로 잃었다고 생각해 봐라. 양반을 파는 상인이 있다면 과연 어떻게 할 거라 보느냐? 한미한 향반에게 열 냥에 팔겠느냐, 아니면 정승에게 만 냥에 팔겠느냐? 같은 양반이라도 상황에 따라 만 냥이 됐다가 또 뒤집혀 열 냥도 되는 것이 시장의 이치란 말이다.”

    곧 죽을 듯한 파리한 몰골로 땅을 바라보는 꺾쇠를 향해 사또가 덧붙였다.

    “뭐 다 싫으면 본관이 제시한 의무를 다 지키며 여생을 양반으로 사는 방법도 있다. 그것마저 싫다면 너도 꾀를 내면 되지 않겠느냐?”

    꾀란 말에 얼굴을 쳐든 꺾쇠가 희미한 희망을 붙잡는 표정으로 사또의 입을 쳐다봤다.

    “너도 그 쓸모없는 양반을 팔면 되지 않겠느냐?”

    “판다굽쇼? 이 화근 덩어리를 누가 삽니까요?”

    “한양에 가면 별별 사연을 지닌 부자가 많지 않겠느냐? 만 냥까진 몰라도 필시 돈 주고 살 자도 있을 게다. 흥정만 잘하면 몇천 냥은 건질 수도 있다.”

    한참을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꺾쇠가 마침내 배시시 웃었다. 그가 사또와 가난뱅이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좋은 수가 났습니다요! 양반을 가지고 한양으로 가서 큰 도박판에 슬쩍 걸어보겠습니다. 어쩌면 도박으로 양반을 잃은 자가 꽤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 필시 제게 양반을 사려 하겠고, 소인은 또 이걸 경쟁에 부쳐 자꾸 가격을 올리면 되지 않을깝쇼? 한 이만 냥에 팔면 그걸로 다시 양반 두 개를 사서 다시 또 되팔고, 그러다 보면 조선 땅 전체가 이놈 꺾쇠 것이 아닙니까요?”

    헛웃음을 삼키는 사또를 뒤로하고 꺾쇠는 덩실덩실 춤을 추며 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 이르자마자 가산을 처분해 가난뱅이 선비에게 재산의 절반을 쾌척한 그는 아무 미련 없이 강원도를 떠나 한양으로 이사했다. 한양 숭례문 밖 투전판에 뛰어든 그가 끝내 어찌 됐는지는 상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숭례문을 중심으로 양반을 사고파는 흥정이 생겼다는 이상한 소문이 퍼졌고, 그 가격이 점차 낮아지다 결국엔 돼지고기 한 근 값이 됐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회자되기에 이르렀다.

    * 이 작품은 박지원의 ‘양반전’을 모티프로 창작됐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환상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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