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레리나에서 방송국 리포터, 벤처기업 마케팅 담당자에서 다시 국내 대표 게임업체의 창업자까지.
- 왕성한 열정과 호기심, 강렬한 카리스마로 수백억원대 부를 일군 38세 여성 CEO의 놀라운 성공기.
그에 대한 기사를 요약하면 ‘발레리나에서 게임업체 창업주로 변신해 단숨에 수백억대 벤처 거부(巨富)가 된 서른여덟 살의 미혼 여성’ 정도일 것이다. 세간의 부러움과 더불어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만한 요소를 빠짐없이 갖춘 셈이다. 그러나 마이클럽닷컴 사장실에서 만난 그는, 그러한 정보를 토대로 상상한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빛 바랜 청바지에 받쳐입은 헐렁한 흰색 니트셔츠, 화장기 없는 얼굴에 빗질조차 하지 않은 듯한 퍼머넌트 머리. 며칠을 뜬눈으로 샌 사람처럼 피곤에 지쳐 보였다. 초롱초롱한 눈빛이 없었다면 장시간의 인터뷰가 고문이 되지 않을까 염려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런 필자의 마음을 눈치챈 듯 뒤따라 들어온 마케팅팀 대리가 재빠르게 덧붙였다.
“아침 7시 반부터 한 시간 간격으로 단 10분도 쉬지 않고 연달아 인터뷰에 응하셨어요. 외부 회의까지 다녀오시느라 좀 피곤하실 겁니다.”
그는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인터뷰 스케줄을 어떤 기분으로 소화하고 있을까.
대박 맞은 신데렐라?
코스닥 거래 첫날 7만1600원으로 마감한 웹젠 주식은 인터뷰 당일 8만원을 넘어선 상태였다(6월12일 현재 11만3500원). 이사장이 보유한 주식(전체 15.29%) 총액도 300억원(6월12일 현재 약 425억원)을 훌쩍 넘겼다. “300억원을 1만원권 지폐로 쌓는다면 부피가 어느 정도 될 것 같으냐”고 묻자 “글쎄요, 상상해보지 않아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10만원이든 100만원이든 내 손으로 직접 돈을 써봐야 감이 올텐데, 당장 현금화할 수 있는 돈도 아니고 또 금액이 너무 커져버리니까 현실감이 들지 않네요. 지금으로선 그냥 숫자에 불과하다는 느낌이에요.”
세간에선 ‘대박이 터졌다’고 호들갑이지만 정작 본인은 무덤덤했다.
언론이 이사장을 ‘대박 맞은 신데렐라’라 표현하는 것은, 한순간 엄청난 부를 거머쥔 데에 발레를 전공한 무용가라는 이력이 덧붙여져 빚어진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대박’이라는 수식어는 어쩌면 그를 모욕하는 말일 수 있다. ‘대박=로또’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확산된 까닭이다. 2년5개월 동안 열정과 노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결과를, 어느 날 우연히 산 복권으로 하루아침에 돈벼락을 맞은 것과 비교할 수는 없는 일 아닐까.
“2000년 4월 웹젠을 설립하면서, 최단기간에 코스닥에 상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후 가시적 성과가 나타나고 매출이 호조를 보일 때도 저 스스로 회사 경비 지출을 최대한 억제하여 직원들을 긴장시켰죠.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사업 포지션과 기획을 정확히 수립해야 했습니다. 그저 무조건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어요. 당시 무늬만 벤처인 기업이 워낙 많아, 벤처가 뭔지 확실히 보여주겠다는 각오로 열심히 뛰었습니다.”
때문에 이사장은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상황에 대해 ‘황당하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마치 ‘공짜로 생긴 돈’처럼 취급하는 것에 약간의 반발심도 있다. 웹젠 초기 꽤 큰 엔젤투자자로 나섰다 사정이 급해 주식을 몽땅 팔아치운 어떤 사람은 뒤늦게 나타나 “과실을 나눠 갖자”며 은근한 압력까지 행사하고 있단다.
손수 창업한 회사 주식을 황제주로 만들고도 무덤덤할 뿐인 그에게, 벤처거부가 된 현실을 전혀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사람이 확실(?)하게 확인시켜주고 있는 셈이다.
이수영 사장에게는 세 개의 이름이 있다. “삶을 자각하는 순간마다 이름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 중 호적에 올라 있는 이름은 이은숙이다. 이후 미리내소프트웨어 시절에는 사라 리(SARA LEE)로, 지금은 이수영으로 불린다. 무용가로서 그의 삶은 대부분 ‘이은숙 시절’에 국한되어 있었다.
1966년 경남 마산에서 1남5녀 중 장녀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생 시절 어머니 손에 이끌려 한국무용학원 수강생이 됐다. 음악만 나오면 주위 시선에 아랑곳 않고 몸을 흔들어대는 딸에게서 예사롭지 않은 끼를 발견한 것이다. 평탄하게 성장하던 그는 그러나 사춘기가 되면서 ‘삐딱선’을 타기 시작했다. “차라리 입양되어 어디론가 가고 싶었다”는 엄청난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아버지는 돈은 잘 버셨고 그것으로 제 뒷바라지를 엄청나게 해주셨지만 무용하는 환경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마산은 지방이라 문화 불모지였고 그때는 발레를 가르치는 학원조차 없었거든요. 어쩔 수 없이 한국무용만 배워야 했습니다. 부모님께서 제 소질을 발견하긴 했지만 그걸 크게 키워줄 생각은 못 하신 거죠.”
좁은 지방도시가 몹시 답답했던 그에게는 뭔가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때 차례로 빠져든 것이 그림, 사진, 연극이었다.
“뭔가 하나를 시작하면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성격이거든요. 사진에 빠졌을 땐 카메라 장비 일체를 갖추고 촬영지를 물색하러 다닐 정도로 열성이었어요. 그림 그릴 때는 또 그대로 학교도 가지 않을 정도였고요. 연극을 보기 위해 부모님 몰래 서울까지 올라간 적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유별났죠.”
사춘기 시절 방황을 잠재운 건 발레, 아니 정확히 말해 발레 만화였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이었다.
“30권쯤 되는 일본 만화 ‘백조’를 보면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무용수들의 인생에 빨려들었어요. 현실과 허구를 분간 못할 지경이었으니까요. 내용 중에 차이코프스키나 바하 음악 얘기가 나오면 원판 레코드를 구해 들으면서 만화 분위기와 맞나 안 맞나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곤 했습니다.”
대입 수석 합격의 뒤안길
마침 그때 마산에서 발레 공연이 있었다. 무대 바로 앞에 자리잡은 그는 눈앞에 펼쳐지는 공연을 보며 마음껏 상상의 날개를 폈다. ‘발레를 하기 위해 대학에 가야겠다’는 결심도 굳혔다. 이때부터 일년간 그는 오로지 발레리나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무섭게 공부했다. 덕분일까, 대학입시 성적은 가족과 학교를 놀라게 할 만큼 뛰어났다.
“점수가 잘 나오자 담임선생님, 부모님, 친척들까지 합세해 서울대나 연세대에 원서를 내라고 종용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처음부터 세종대 무용과를 목표로 공부했기 때문에 다른 학교에 갈 마음이 전혀 없었어요.”
부모님 성화에 직접 원서를 내러 가지도 못하고, 서울 가는 친구 편에 부탁해 겨우 세종대에 지원했다. 결과는 수석 합격이었다.
그는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야 학벌과 파벌을 내세우는 현실의 벽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한다. 스스로 선택한 일은 끝까지 파고들어 성취감을 느껴야 직성이 풀리는 그에게, 졸업과 동시에 찾아온 무용계 주류의 벽은 너무도 완강했다. 실력과 상관없이 변방에 남아야 한다는 현실은 뼈아픈 좌절감을 안겨줬다.
“부모님이 명문대에 가라고 하셨을 땐 세상물정을 짐작하신 바가 있었던 거죠. 그런데 그때 전 그걸 몰랐던 거예요. 아마 저 때문에 부모님 가슴에 비수가 꽂혔을 겁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죄송해요.”
좌절로 주저앉는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유학이었다. 1990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세계적 명성의 마사 그레이엄 무용학교에서 2년간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다. 그 후 뉴욕대에서 예술학 석사(MFA) 과정을 마치고 1995년 귀국했다.
“귀국 전 몇 가지 구상을 했습니다. 한국에서 예술가로만 산다면 경제적인 어려움이 클 것 같았어요. 대학교수가 되자니 학교측에 ‘비벼야’ 하는 사회 분위기도 싫었고 기간이 너무 오래 걸리리라는 걱정도 됐고요. 그렇다고 ‘뒷문’으로 들어갔다가는 내 삶이 평생 일그러질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눈을 돌린 것이 방송이었어요. 미국은 예술성과 맞물린 방송 관련 프로덕션이 꽤 많습니다. 그런 쪽을 생각한 거죠.”
아는 사람 소개로 문화방송에 이력서를 냈다. 당시 신동호 아나운서와 연극배우 손숙씨가 사회를 보던 문화예술 프로그램에 리포터로 발탁됐다. 문화예술 전문 리포터로 어느 정도 얼굴이 알려지자 두 개 대학에서 강의 요청이 들어왔다. 그 중 한성대 대학원에서 강의도 시작했다.
그렇게 방송국 생활에 잘 적응해 인기인이 됐다면 오늘의 ‘벤처갑부 이수영’은 없었을 텐데 어느 날, 그의 표현대로라면 “엄청난 방송사고로 잘리”기에 이른다.
“1990년대 중반 제가 리포터로 활동할 당시 방송국은 노조파업으로 어수선했고, 미술계는 민중판화 전시회 등으로 한창 시끄러웠습니다. 어느 날 생방송이 끝나고 스태프들과 아침식사를 겸해 해장술을 하는 자리에서 민중운동과 관련한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담당 PD가 무시하는 투로 ‘너 데모라도 한번 해봤어?’ 하더군요. 평소 제가 미국 유학 갔다온 것을 못마땅해하던 PD였어요. 저도 386세대인 데다 스스로 반골 기질이 강하다고 생각한지라 그 말에 자존심이 많이 상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데 공교롭게도 바로 다음날 방송사고가 터졌다. MC 두 사람이 잡담을 하는 사이 방송이 다 끝난 줄 알고 그 뒤를 살금살금 빠져나왔는데 그만 그 모습이 방송에 그대로 노출되고 만 것이다. 제법 큰 사고라 방송국이 발칵 뒤집혔다.
“결국 그렇게 일을 그만두고 말았지만, 담당 국장으로부터 ‘MC로 키워야겠다’는 말을 듣기도 했으니, 아주 못하진 않았나보다 위안을 삼곤 하죠.”
“궁금한 건 못 참는다”
그의 집무실 책상에는 자그마한 여자 인형이 놓여 있다. 핑크빛 리본에 핑크빛 레이스로 장식된 드레스를 입은 인형은 얼핏 보면 발레리나 같기도 하다. 인형 컬렉션이 취미인가보다 싶어 물으니 예상외의 답이 돌아왔다.
“우리 회사에서 수입품인 ‘마담 알렉산더’ 인형을 광고하고 판매한 적이 있습니다. 광고주 제품인 데다 가격이 꽤 비싼 편이라 도대체 어떤 인형인지 호기심이 생겼어요.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하나 샀지요.”
바로 그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 그를 게임의 세계로 눈 돌리게 했다. 방송 일을 그만둘 즈음 그는 당시 유행하던 PC게임 테트리스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주변에 게임을 하는 남자들은 많았지만 여자는 아주 드물었다. 왜 그럴까 궁금해 PC게임을 뒤져보니 싸움이나 전쟁물이 대부분이었다. 이때 “왜 발레 게임은 없는 거지” 하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쳤다.
“1990년대 중반 한창 PC게임이 활성화하던 시기라, 앞으로 게임 쪽이 뜰 거라는 감이 왔습니다. 여자라면 자신이 직접 발레를 하지는 않더라도 토슈즈며 발레의상 같은 데에는 관심이 많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싸움에 발레 동작을 결부시키면 뭔가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인터뷰 자리를 강남의 한 호텔 야외 뷔페식당으로 옮겼다. 세 병째 와인을 비울 무렵, 그의 “필이 팍 꽂혔다”는 발레게임 얘기를 실감나게 들을 수 있었다. 섬광 같은 아이디어가 스칠 당시의 흥분이 되살아나는 듯 와인 잔을 내려놓은 그가 마치 게임 속 전사라도 된 양 팔을 발레 포즈로 움직이며 직접 구상한 게임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어떻게 하면 아이디어를 현실화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는 게임 개발업체를 찾아갔다.
“알아보니 미리내소프트웨어가 국내에서 제일 규모도 크고 잘나가는 업체였습니다. 무작정 찾아가 제가 생각한 아이디어를 꺼내놓으며 게임으로 한번 만들어보지 않겠냐고 했죠. 직원이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그냥 돌려보내기 미안하던지 기획서나 한번 써와 보라고 하더군요.”
게임이라곤 테트리스를 해본 게 전부였던 그에게 기획서는 처음부터 무리였다. ‘핑 돌면서 휙 발차기로 공격하고…’, 머리 속은 별별 상상으로 가득했지만 막상 글로 쓰려니 한 줄도 옮길 수 없었다. 일주일 동안 끙끙대다 별 수 없이 포기했는데 어느 날 업체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게임 기획서 대신 취직 의사를 타진해온 것이다. “마침 해외시장을 개척하려고 하는데 마케팅 분야를 맡아줄 수 없냐”는 제의였다.
“미국 뉴욕대에서 MFA 과정을 공부할 때 무용가로서 자신을 어필하고 입지를 구축하는 전략, 네트워크 형성방법 등을 배웠습니다. 외국 사람들 가치관과 문화도 경험으로 아니까 마케팅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어요. 대신 취직하면 무용하고 영영 멀어지지 않을까 그게 걱정이 됐죠.”
그때까지 발레게임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있던 그는 취직하면 자신의 게임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에 덜컥 입사를 결정했다. 그런데 입사 조건이 ‘충격적으로’ 까다로웠다.
“난 대학원을 졸업했으니까 평직원으로 입사는 못 한다, 내가 들어가면 해외마케팅 부서가 따로 생기는 거니까 사장과 직통 라인으로 연결되게 해달라, 지금까지 해오던 대학 무용강의도 계속할 수 있게 해주고, 필요하면 언제든 무용공연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는 것이 제 조건이었습니다.”
1996년 미리내소프트웨어 해외마케팅부 과장으로 입사했다. 그는 그 시절, 남들은 돈 주고도 못 배울 지식과 경험을 월급까지 받아가며 익혔다고 한다.
“해외 게임시장 개척에 있어 선도업체이다 보니 온갖 게임쇼에 다 나갔습니다. 심지어 게임 개발자 컨퍼런스까지 제 차지였어요. 담당자가 영어가 잘 안 되니 제게 기회가 온 거죠. 이를 통해 소프트웨어 전반에 대한 지식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다방면으로 게임시장을 폭넓게 배울 수 있었죠.”
그는 당시 ‘한국의 빌 게이츠’라 불리던 미리내소프트웨어 정재성 사장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유학 시절 교수가 부를 때마다 ‘으~은슉’ 하고 힘겨워하는데도 꿋꿋이 지켰던 이름을 ‘사라 리’로 바꾼 것도 미리내소프트웨어에 입사한 직후였다.
“첫 출근하니까 컴퓨터 한 대를 배당해주며 이메일을 만들래요. 해외마케팅부에 있으면 외국과도 이메일을 주고받을 일이 많으니 주소를 뭘로 할까 고민했죠. 그때 번쩍 떠오른 생각이 ‘나는 게임을 많이 팔 테니까 너희는 많이 사라’였고, 그래서 ‘sara’로 정했습니다.”
그 전까지 컴퓨터라고는 워드밖에 쓸 줄 몰랐던 터라 이메일 주소로 주로 이름을 사용한다는 것조차 그는 모르고 있었다.
“외국에 메일을 보낼 때마다 항상 편지 첫머리에 ‘은숙’이라는 제 이름을 썼는데, 상대가 답장을 보낼 땐 늘 ‘Dear sara’라고 돼 있는 거예요. 이메일 주소를 내 이름으로 생각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하필 캐나다에서 유명한 케익 브랜드가 ‘sarah(사라)’여서 출장 길에 만난 사람들이 “너 케익처럼 달콤하니?” 하며 농담을 건네곤 했다. 나중에야 ‘사라’라는 이름의 의미를 알게 된 외국인들은 박장대소했다. 그러나 해외마케팅이라는 생소한 분야에 겁없이 뛰어든 이사장 입장에서는 “매우 절박한 심정이 담긴 이름”이었다고 한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다시 이름을 ‘이수영’으로 바꿨다. ‘은숙’이라는 이름이 너무 흔해 학창시절부터 걸핏하면 ‘은숙1’ ‘은숙2’로 불리곤 했던 것이 기분 나빴던 까닭이다. ‘발레 하던 이은숙’이 ‘이수영’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에 성공하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는 또 그런 호기심에 가득 차 새 세상에 발을 디뎠다. 온라인 게임 개발업체 ‘웹젠’을 설립한 것이다.
잠은 찜질방, 밥은 차 안에서
회사 사정으로 미리내가 문을 닫자 그는 외국계 컨설팅 업체에서 다시 금융분야 마케팅 업무를 맡았다. 이 일을 하면서 다양한 사업 계획서들을 접했다. 될성부른 사업 모델을 판단하는 안목도 키웠다. 이 무렵 미리내 시절 함께 일했던 개발자들이 사업 계획서를 들고 그를 찾아왔다. 온라인 게임 사업을 함께해보자는 것이었다. 이때다 싶었다. 회사 이름은 ‘인터넷 도사’라는 뜻의 ‘웹젠’으로 정했다. 그리고 2001년 2월, ‘웹젠’은 3D 온라인게임 ‘뮤(MU)’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대부분의 온라인게임 회사는 PC방 영업을 포기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온라인과 달리 오프라인은 영업망을 새로 구축해야 했기 때문에 엄두가 안 났던 거죠. 하지만 시너지 효과를 위해 온라인과 오프라인 두 개 영업망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국 지역총판을 구성하는 일에 직접 뛰어들었습니다.”
지역총판을 구축하려 혼자 차를 몰고 전국을 돌았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밥은 차 안에서 먹고, 출장비를 절약하느라 잠은 찜질방에서 해결했다. 직접 발로 뛰며 선정한 총판사업자들은 뮤의 시장점유율을 초기에 끌어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웹젠은 강력한 영업사원들을 전국에 두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열정과 노력, 아이디어를 쏟아부은 웹젠은 지난해 9월 그의 손을 떠났지만 대신 수백억원대 주식이라는 결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웹젠의 창업자이자 최대주주 이수영”으로 전국에 이름을 알리게 됐다.
물론 그가 직접 설립한 웹젠에서 손을 떼자 시중에 갖가지 루머가 돌았던 것도 사실이다. 경영권 분쟁에서 밀렸다, 튀는 언행으로 회사 관계자들과 의견충돌이 잦았다는 등의 구설에 대해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무용수로 활동할 당시의 이수영 사장(왼쪽).
토론 과정에서 그는 지난해 9월 대표이사 자리를 현(現) 김남주 사장에 넘겨주고, 두 달 뒤인 11월 적자 상태인 마이클럽닷컴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난 회사가 ‘황제주 신화’의 주인공이 된 반면 마이클럽닷컴은 아직 체력을 완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6개월 정도 전력을 기울였는데 앞으로 일년은 더 에너지를 쏟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선영아 사랑해’라는 광고로 심어진 기업 이미지가 아직 살아 있어 수익성에 주력하면 조만간 가시적인 성과가 있을 거라고 봅니다.”
마이클럽닷컴 대표이사를 맡은 초창기, 그는 비용이 많이 드는 웹메일 서비스를 과감히 폐지했다. 150만 회원을 대상으로 무료 제공하던 서비스를 하루아침에 없앤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토요 격주 휴무제를 폐지했을 때도 직원들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다시 벤처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설득했고 중간급 직원들을 교체하면서 회사 분위기 또한 새롭게 바뀌고 있는 중이다.
“구체적으로 밝힐 순 없지만 현재 수익성 있는 온라인 사업모델을 구상중이고,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통해 서비스를 안정화시킬 예정입니다. 회사 브랜드를 이용한 오프라인 사업은 이미 진행중입니다.”
극단적 결론을 피해가는 능력
기업을 이끄는 CEO는 수익창출을 목표로 전장을 진두지휘하는 지휘관이다. 항상 현장에 있어야 하고 그만큼 책임도 따른다는 게 이사장의 ‘CEO론’이다.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고 일단 방향이 정해지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몰아붙이는 그에게 직원들이 붙여준 별명은 ‘추진력’이다. 웹젠 시절의 별명은 ‘카리스마’. 그러나 그렇듯 강렬한 이미지는 겉으로 쉽게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여성 CEO에 대한 세간의 인식에 대해 그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능력을 검증할 수 있는 좋은 결과가 나와도 여자이기 때문에 막연히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해 남성은 ‘사우나 비즈니스’ 등을 하며 서로의 동질성에 호소하는 경향이 있고, 정확한 상황판단 대신 봐주기식 판단에 이끌리기도 하죠. 여성은 분명 남성과 다르지만 동시다발적인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은 이미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입니다. 총체적 상황판단 능력과 극단적 결론을 피해 가는 능력은 여성이 더 뛰어나다고 봅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 CEO의 활동이 이벤트나 광고, 리쿠르트 등 특정 영역에 한정된 측면이 있죠. 여성도 남성 못지않은 성공을 이룰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독신의 외로움을 느낀 적은 없었을까.
“저녁 약속도 없고 회사에서 늦게까지 혼자 일하다 어두컴컴한 창 밖을 내다보면 문득 외롭다는 느낌이 들어요.”
나이 서른을 넘기도록 결혼하지 않은(혹은 못한) 여자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왜 결혼을 안 했냐”는 것이다. 직접화법을 피해갈 방법을 궁리하다 던진 질문이 영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아 다시 화제를 돌렸다. 다행히도 그의 사무실에 들렀을 때 오프댄스 2000년 상반기 정기공연 팜플렛에서 ‘구세주’ 같은 문구를 찾아내 미리 메모해둔 터였다.
“이사장이 안무와 연출을 맡았던 작품의 해설 중에 ‘유일하게 타인을 내 존재의 일부로 인정하는 것은 사랑하는 상대’라는 말이 있던데, 아직까지 결혼을 안 한 걸 보면 남자를 보는 눈이 몹시 까다로운가 봅니다.”
“그렇지는 않아요. 다만 세상을 보는 시각이 편협하지 않고 다양성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죠. 완전한 안정감과 행복을 위해 가족이 중요하다는 건 잘 알고 있고 그래서 결혼에 대해 고민도 해봤어요.”
이미 와인은 네 병째 바닥을 보였고,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기 위해 잔을 들던 그가 불쑥 얘기를 꺼냈다.
“결혼하고 싶은 상대는 있었지만…, 결혼은 혼자 하나요, 둘이 하지?”
때때로 우리 몸은 머리보다 더 많은 기억을 담고 있다. 몸으로 새긴 기억은 어느 순간 뜻하지 않게 불쑥 튀어나와 사람을 당황케 한다. 미리내소프트웨어에 취직한 6개월 뒤 한성대 강의를 그만두었고, 의욕적으로 매달렸던 오프댄스무용단 정기공연도 웹젠을 설립하면서 막을 내렸다. “무대가 그립지 않으냐”는 물음에 그의 표정이 잠시 복잡해졌다.
“새로운 일에 빠져들면 더 이상 지난 일에 집착하거나 하는 성격이 아니에요. 다만 창업을 고민하던 중에 모 대학 교수채용 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낸 적이 있습니다. 오프댄스무용단 활동과 함께 전공을 살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공교롭게도 교수채용 결과보다 게임개발자가 먼저 나타나 웹젠을 설립하게 되었던 겁니다. 아마 교수채용 결과가 먼저 나왔다면 웹젠은 없었을지도 모르죠. 그땐 하늘이 내린 계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요즘도 어쩌다 공연장을 찾았을 때 무용수의 동작이 어설퍼 보이면 자신도 모르게 무대로 뛰어오르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고 고백했다.
지금 당장 수중에 수백억의 돈이 있다면 가장 하고 싶은 게 뭘까. 그에게 돈은 어떤 의미일까 궁금했다.
“돈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뭔가 가치 있는 곳에 돈을 투자하겠죠? 일은 할 수 있는 나이까지 할 거고. 단지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일에 매이지 않고 지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다른 사람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현실에 구애받지 않고 살고 싶어요. 예를 들면 제주도 같은 데 가서 풀 한 포기라도 내 마음에 드는 걸 키우고, 액자도 내 마음에 드는 걸로 걸고 그 안에서 온전한 행복을 느끼고 싶어요.”
그는 “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게 내 팔자인가 보다”며 싫지 않은 투의 푸념을 했다. 경험하지 못한 미래에 두려움을 갖기보다, 그 신비와 매혹의 가치를 아는 사람. 이수영 사장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