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폐된 공간에서 고폭약은 확실하게 터졌고, ‘피시식…’이긴 하지만 플루토늄도 반응을 일으켰으니 그때의 충격으로 주변부가 녹아 무너지면서 일부 기체가 지상으로 빠져나갔다. 이 기체에 제논이 섞여 있으니 한국과 미국이 이를 검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것이 부족한 상태에서 치러진 실험이기에 이 폭발은 중국에 통보한 대로 4킬로t이 되지 못하고 1킬로t 이하에서 멈춰버렸다. 그리고 실체파 규모 3.9의 약한 지진이 발생했다.
북한에서는 대규모 폭발이 자주 발생한다. 북한 정권 수립 57주년인 2005년 9월9일 양강도 김형직군에서 대규모 폭발이 있었다. 그때 우연히 버섯구름이 형성돼 한때 북한이 핵실험을 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는데, 북한의 백남순 외교부장은 이 폭발을 수력발전소를 짓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명했다.
다량의 고폭약 터뜨려도 지진 발생
수력발전소를 짓기 위해 산을 허물어야 할 경우 한국은 환경과 생태계, 그리고 안전을 고려해 대규모 폭발을 강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북한은 지하갱도를 뚫은 경험이 많아서인지 다반사로 대규모 폭발을 실시한다. 이러한 북한이라면 인공 지진의 정도를 강하게 하기 위해 길주 지역의 지하갱도에 플루토늄탄 외에 별도의 폭약을 넣어 함께 터뜨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일반 폭약도 양이 많으면 핵폭탄 못지 않은 위력을 발휘한다. 1944년 11월27일 영국에서는 지하 27m에 있던 폭약고에서 항공기용 폭탄 4킬로t이 폭발한 적이 있다. 그로 인해 직경 274m, 깊이 244m의 구덩이가 생겼다. 다량으로 고폭약을 터뜨려도 원폭을 터뜨렸을 때와 유사한 충격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북핵 문제를 살펴보는 데 있어 많은 사람이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북한 핵무기는 그 누구도 본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국정원과 미 CIA는 물론이고 1만명에 이르는 탈북자 가운데에서도 핵무기의 실체를 봤다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도 북한이 40~50㎏의 플루토늄을 갖고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사석에서 만난 김승규 전 국정원장은 “북한이 갖고 있는 플루토늄 양은 44kg에서 52㎏으로 추정되기에 ‘사사오입’으로 기억하면 된다”고 말했다. 40~50㎏과 44~52㎏은 큰 차이가 없지만 국정원은 정보기관이라서인지 좀더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는 것이다.
북한 핵무기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데 누가 이러한 수치를 추산해냈을까. 이 수치를 계산해낸 사람은 무엇을 근거로 했을까.
모 대학 원자력공학 교수인 A씨는 1980년대 후반부터 정부의 요청으로 북한이 생산한 플루토늄의 양을 추정해온 학자인데, 그는 40~50㎏ 추정에는 무리가 있다며 다음과 같은 설명을 했다.
북한이 보유했던 원자로는 두 개다. 첫 번째가 1965년 6월 가동에 들어간 소련제 IRT-2000 실험용 원자로다. 이 원자로는 소련이 지원한 것이기에 소련은 핵연료를 제공했고, 원자로에서 나온 사용후핵연료도 모두 가져갔다. 소련은 북한이 이 원자로에서 나온 사용후핵연료를 유용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1977년 북한으로 하여금 이 원자로에 대한 안전조치협정을 IAEA(국제원자력기구)와 맺게 했다.
IRT-2000 원자로는 더는 가동되지 않고 있는데, 전문가들은 북한이 이 원자로에서 나온 사용후핵연료로 플루토늄을 추출하지 못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 원자로 가동 경험을 통해 북한은 실험용 원자로 제작 기술을 습득했다. 그리하여 1979년 자체 설계한 실험용 원자로 제작에 착수해 1986년 이 원자로 가동에 성공했다. 이 원자로가 바로 문제가 되고 있는 5MW급 실험용 원자로다.
이 원자로에 대해 일부에서는 북한이 자력으로 원자로를 만들 수 없다고 의문을 제기한다. 북한의 5MW 실험용 원자로는 아파트 한 동에 필요한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원자로다. 인류 최초의 원자로는 1942년 미국 시카고 대학의 엔리코 페르미 교수팀이 만든 CP-1이라는 실험용 원자로다. 과학기술이 발전하지 못한 1940년대의 대학에서 이런 원자로를 만들었다면 1970년대엔 웬만한 나라라면 자력으로 실험용 원자로를 만들 수 있었다고 봐야 한다.
북한이 5MW 원자로 가동에 들어가기 전 북한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국제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북한이 5MW 원자로 건설에 한창이던 1983년은 한국이 북한과 소련으로부터 ‘크게 한 방 먹은 해’였다. 1983년 9월1일 사할린 상공을 날고 있던 대한항공 007편이 항로를 이탈하자 소련 공군기가 미사일을 쏴 격추시켰다. 그리고 한 달여 후인 10월9일엔 미얀마의 아웅산 묘소에서 북한 공작원이 설치한 폭탄이 터져 전두환 대통령을 수행한 정부 요인들이 폭사했다. 그로인해 국제사회에서는 소련과 북한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G-1 원자로로 추정한 수치
그 무렵 소련은 훗날 KEDO(한반도에너지기구)가 경수로를 지어주다 만 함남 신포지구에 소련제 상업용 원자로인 VVER을 지어주려고 했다. 민항기를 격추한 소련이 테러국가인 북한에 원자로를 제공하는 것은 오해를 살 만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소련은 북한에 압력을 넣어 1985년 12월 북한을 NPT(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케 했다. 그리고 1년이 못 돼 북한은 5MW 원자로 가동에 들어간 것이다.
NPT는 선언적인 조약이라 핵확산을 막는 구체적인 행동을 규정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NPT에 가입한 나라는 18개월 이내에 IAEA가 만든 안전조치협정을 맺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핵확산을 막으려면 사찰을 해야 하는데, 사찰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바로 IAEA의 안전조치 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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