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두 12부작인 이 다큐멘터리는 15세기부터 지금까지 9개 강대국이 흥망을 거듭한 역사를 다룬다. 아홉 나라는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소련), 미국이다. 그런데 각 나라의 성쇠를 다룬 1편에서 11편까지를 보면서 사실 필자는 특별한 감흥을 받지 못했다. 세계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개 알 만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중국의 다큐멘터리 제작수준이 꽤 높아졌다는 점, 그리고 중국도 이제 이런 내용을 공중파로 방송한다는 데 내심 놀랐을 뿐이다(이유는 뒤에서 설명하겠다).
마지막인 12편은 ‘대도행사(大道行思)’, 우리말로 하자면 ‘큰 길을 가는 생각’(EBS는 ‘21세기 대국의 길’로 번역했다)이라는 제목으로, 이전의 내용을 총괄하면서 대국이 되는 조건을 따져보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귀가 번쩍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각국 학자들이 내놓은 답이 서로 엇갈리지만, 모두 중요하다고 동의하는 것은 사상과 문화의 영향력과 정치체제·제도의 개혁이다.”
이것이 ‘대국굴기’가 찾은 대국의 제1조건이었다. ‘소프트 파워’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미국 하버드대 조지프 나이 교수 인터뷰 화면이 자막과 함께 스쳐갔다. 경제의 중요성은 그 다음이라는 것이다. 사회발전이 사상과 문화의 혁신에 의해 인도돼야 하고, 그럴 때만 경제발전이 대국으로 가는 사회발전의 강력한 엔진이 된다는 것이 방송의 골자였다. 그 뒤에야 정치체제와 제도의 개혁, 국가의 리더십, 과학기술의 중요성 등이 차례로 강조된다.
이처럼 국가 지도부가 사상과 문화의 중요성을 통감하고 이를 국민에게 ‘학습’시키는 나라가 중국이다. 오래된 문화대국의 자신감이 이를 가능케 한다. 그들은 묻는다.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상과 문화를 꽃피웠으며, 앞으로도 꽃피울 수 있는 나라는 어디인가. 문화의 저력에 뿌리를 두고 인류의 미래를 이끌 수 있는 21세기 최강대국은 어느 나라인가. 직접 답하지 않지만 ‘대국굴기’는 이미 ‘중국’이라고 말하고 있다.
21세기 대국의 조건
어느 시대나 경제력은 중요했지만, 단지 돈만으로 시대의 흐름을 선도하는 대국이 탄생한 경우는 없었다.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적 가치에 민감하고 새로운 창조적 흐름을 만들어내는 민족과 나라가 세계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경제적 성공은 그 뒤에 따라붙었다. 한번이라도 세계의 중심무대에 서본 나라들은 경험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이를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사상과 문화를 존중한다.
중국은 지금 천하의 중심이던 옛 영화의 부활을 꿈꾸며 21세기 세계 초강대국을 향한 행보에 나섰다. 그들은 전통문화와 전통사상의 중요성을 재발견하고 있다. 중국은 자신들의 문화를 동양문화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전통문화의 발굴이나 현대화 작업에 국가적 관심과 인력을 집중하고 있다.
이는 비단 중국만의 일이 아니다. 일본 역시 전통문화에서 국가발전의 새로운 목표와 동력을 찾고 있다. 국가와 주요 기업들이 연합해 일본 전통문화와 첨단기술을 결합하는 ‘네오 재패니스크(Neo Japanesque·신일본양식)’ 구축에 열을 올리는 중이다. 유럽에서도 문화가 대세다. 유럽연합(EU)은 각국의 고유한 문화 다양성을 미국에 대항하는 유럽의 최대장점으로 육성하고 있다. 이는 모두 미국 중심의 일극(一極) 세계체제 이후를 대비하는 정신적·제도적·학문적 준비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