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호

“6·25 스타일은 잊어라, 이제 한반도 전쟁은 ‘이라크戰’이다”

전쟁예비물자(WRSA-K) 철수와 미국의 ‘전쟁 개념’ 변화

  • 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5-05-23 17: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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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RSA-K 규모조정의 진짜 의미는 전시증원병력 축소”
    • ‘3단계 걸쳐 69만 증원’은 과거 이야기, 이제는 최대 20만
    • 증원부대·병력·장비 리스트, 2004년 작전계획에서 사라졌다
    • ‘전선전’ 대신 ‘우회 및 돌파’…유명무실해지는 ‘멸공선’ ‘통일선’
    • 1990년대 후반부터 전쟁 개념 변화, 2004년 작계로 공식 완성
    • 개전 초기 정밀무기로 북한군 주요시설 파괴하는 작계5026
    • 한국군은 남하 저지, 美 증원군은 공중강습으로 거점 공격
    • 평양 향해 동시다발로 진격하는 ‘공세적 방어전략’
    “6·25 스타일은 잊어라, 이제 한반도 전쟁은 ‘이라크戰’이다”
    한국언론재단의 기사검색 시스템 ‘KINDS’에 ‘WRSA’라는 네 글자를 쳐넣었다. 1990년부터 이 단어가 언급된 중앙일간지 기사는 모두 104건. 그 가운데 63건이 지난 4월1일 이후의 기사다. 이날은 찰스 캠벨 미8군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부 참모장이 주한미군사령부로 기자들을 불러 긴급 회견을 한 날이다. 캠벨 참모장은 이날 “방위비 분담금이 줄어듦에 따라 한국인 근로자 1000명을 감축하고 건설과 용역 등 각종 계약물량 또한 20% 이상 줄여 나갈 것”이라고 밝히면서 “사전배치 물자와 장비의 규모와 구성을 조정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사전배치 물자와 장비’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 대비해 전국 곳곳의 한국군 탄약고에 배치해둔 ‘와사탄(彈)’(공식용어는 ‘사전배치 전쟁예비물자’로, 와사탄은 ‘WRSA·War Reserve Stocks for Allies’라는 미군측 용어에서 나온 말이다)과 경북 왜관기지에 배치한 수백대의 M-1 전차, M-2 브래들리 보병전투차량, 자주포 등의 수개 여단 규모 장비, 화생방 장비를 말한다. 이는 전쟁 발발, 군사적 충돌 등 유사시 한반도에 투입되는 대규모 미 증원전력(增援戰力)이 보다 효과적으로 배치돼 더욱 신속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검색결과 나온 63건의 기사를 찬찬히 훑어보자. ‘한미 안보동맹 정녕 이상 없나’ ‘한미 군사동맹 갈등조짐’ ‘한미동맹 잇단 불협화음’…. 방위비 분담금 협상과 WRSA 문제, 한미연합사의 작계 5029-05 추진을 둘러싼 의견대립 등 우연찮게도 한꺼번에 수면에 떠오른 쟁점들을 거론하면서, 한미동맹이 흔들리는 까닭에 미군이 한국에서 WRSA를 줄여나가려는 게 아니냐고 우려하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정부 관계자들은 이러한 관점에 대해 “모든 사안을 동맹의 위기와 연결하는 것은 본질과 거리가 있다”고 말한다. 단순히 ‘한미동맹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식의 의례적인 공식 반응이 아니라, ‘한미간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일정 부분 인정하는 당국자들조차 “다른 사안은 몰라도 WRSA만큼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것이다. 한 청와대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미군의 정치적 플레이”



    “2003년 처음 WRSA 문제가 테이블에 올라왔을 때 정부는 이미 이러한 흐름이 한국에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전세계적으로 추진되는 미군의 군사변환(Military Transformation), 이에 따른 해외주둔 미군 재배치검토(GPR) 등과 연동되어 미군이 보유하던 세계 곳곳의 WRSA가 모두 폐기될 방침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히려 청와대가 주목한 부분은 WRSA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어차피 미국으로 가져가 폐기 처분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들 것이므로 미국은 이를 한국에 판매하려 할 가능성이 큰데, 거꾸로 생각하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탄약을 한국이 인수해 단지 몇 년 후에 폐기해야 한다면 오히려 우리가 폐기비용을 받아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접근도 가능했다. 그런 구체적인 부분이 문제일 뿐, 동맹의 위기라는 식으로 생각할 여지는 별로 없었다.”

    또 다른 주무부처 관계자의 말은 조금 더 허심탄회하다.

    “지난해부터 주한미군 감축 공론화 시점 문제, 전략적 유연성 합의 같은 쟁점이 곪아터지면서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와 미 군사당국 사이의 분위기가 안 좋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캠벨 참모장의 발언은 미군이 오히려 그런 분위기를 자기들에 유리하게 이용한 ‘정치적 플레이’에 가깝다. 한마디로 미군의 장기적인 재편 계획상 추진할 수밖에 없지만 여러 가지 반발이 예상되어 골치가 아픈 문제를 한꺼번에 꺼내 ‘동맹을 흔드는 한국 정부 탓’으로 돌려버리는 제스처다.

    한국인 군무원을 1000명 줄이는 문제를 살펴보자. 과도한 노무인력을 걷어내고 이를 미국 군사전문기업의 아웃소싱으로 돌리는 것은 사실 펜타곤과 주한미군사령부의 숙원이다. 더욱이 주한미군 감축과 기지 재편 일정이 확정됨에 따라 인력은 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캠벨 참모장이 이를 한꺼번에 ‘터뜨림으로써’ 감축되는 군무원의 분노가 주한미군사령부가 아니라 청와대를 향하게 됐고, 언론도 펜타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정부를 성토하게 됐다.”

    정리하자면 WRSA 폐기나 군무원 감축, 용역사업 규모 축소 등은 ‘이미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얘기다. 주한미군의 2인자가 공개 기자회견을 자청해 민감한 주제를 언급했다는 ‘형식’은 이전보다 껄끄러워진 한미관계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이날 나온 ‘내용’이 동맹의 위기를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정부 관계자들은 “모든 쟁점을 ‘동맹의 위기’라는 틀에 맞춰 해석하면 정작 본질적인 의미를 놓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WRSA의 폐기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는 경우 미국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이때 한반도에서 벌어질 전쟁의 양상이나 개념을 미국이 어떻게 변경하고 있는지와 관련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사라진 ‘전시증원 69만’

    ‘더 본질적인 변화.’ 그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우선 WRSA가 무엇인지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대략 60만t 규모로 알려진 한국 내 WRSA는 각종 총탄과 포탄, 공중투하미사일 등 230여 종으로 구성돼 있지만 99% 이상이 육군 탄약이다. 미군은 1970년대 이래 전쟁 발발 등 유사시에 대비해 태국과 필리핀, 대만 등 우방국에 WRSA를 배치했다(이 가운데 한국에 배치된 것은 WRSA-K라고 표기한다). 그러나 미 의회는 이러한 방식이 비경제적이라고 판단해 2000년 WRSA 프로그램 폐지법안을 만들어 2002년부터 각국에 남은 WRSA를 폐기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경우 ‘유사시’란 당연히 북한의 남침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는 상황이다. 이 경우 한국군과 주한미군 주둔병력만으로는 부족한 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주변과 미 본토에 있는 미군부대가 추가로 투입된다. 이른바 ‘전시증원병력’이다. 이들이 모두 직접 무기와 장비를 싣고 오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평소에 주한미군 기지에 장비를 배치해 증원병력은 몸만 날아와 참전하는 방안을 준비했다. 캠벨 참모장이 줄이겠다고 언급한 M-1 전차 등 수개 여단 규모의 사전배치 장비는 대부분 이들 증원부대가 사용할 것들이다.

    이렇게 보면 이들 사전배치 장비와 WRSA의 규모를 조정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명확하게 드러난다. 즉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증원되는 미군병력의 규모가 이전보다 줄어들 것이라는 결론이다. 유사시에 증파되는 병력의 규모는 이제까지 상시 주둔 미군보다 더 큰 대북억제력으로 작용해왔다는 점에서 이러한 변화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한미 양국이 전쟁 발발 상황에 대비해 작성해둔 이전의 작전계획에 따르면 북한의 군사적 움직임이 가시화될 때 미군은 데프콘 3 상태부터 크게 3단계로 나뉘는 증원작전을 펼친다고 한다. 해공군의 감시전력이 한반도로 이동하는 신속억제방안(FDO·Flexible Deterrence Option), 7함대와 3함대의 5개 항모전투단과 공군전투사령부 산하 10여 개 비행단이 배치되는 전투력 증강(FMP·Force Module Package) 조치, 끝으로 모든 증원전력을 실어 보내는 시차별 부대전개 제원(TPFDD·Time Phased Forces Deployment Data)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한반도로 전개해오는 미군의 총 증원병력은 69만명에 이른다는 것이 그동안 한미 양국의 설명이었다. 사전배치 장비와 WRSA의 규모 조정은 이러한 증원병력 예정규모를 줄이겠다는 공식적인 통보나 다름없다. 2003년부터 주한미군의 상시 주둔 규모 감축이 거론되면서 전시증원병력의 규모 감소 또한 피할 수 없는 대세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지적이었지만, 한미 양국 사이에 이와 관련해 구체적인 협의가 이루어진 적은 아직까지 없다.

    뒤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지만, 여기에 미군의 군사변환 및 주한미군의 재편과 관련해 새로 등장한 ‘순환배치’라는 개념을 적용하면 병력의 숫자는 급속히 줄어들게 된다. 물론 증원병력의 감소가 그대로 증원 ‘군사력’의 감소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군사변환 방안, 즉 기존의 보병사단을 스트라이커 전투여단(SBCT)으로 재편하는 방안에 따르면, 1개 스트라이커 여단의 전투력은 기존 1개 사단병력에 맞먹는다는 평가다.

    전선전에서 종심작전으로

    그러나 병력 수가 감소하면 지상전의 양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양보다 질’을 우선하는 새로운 성격의 증원병력으로는 이제껏 생각해온 한반도 전쟁 개념, 즉 ‘손에 손 잡고 쭈욱 북으로 반격해 올라가는’ 식의 전쟁은 수행할 수 없다. 필연적으로 한반도 유사시에 벌어지는 전쟁의 양상 자체, 정확히 말하면 미국이 상정하는 한반도 전쟁의 개념이 바뀌는 것이다.

    그동안에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는 경우 한미연합군 부대가 휴전선 수십km 이내에서 전선을 틀어막고 여기에 본토에서 시차별로 꾸준히 증원돼오는 병력을 투입해 장기간에 걸쳐 전선을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는 식의 전쟁 개념이 상식이었다. 6·25전쟁 당시의 상황을 연상하면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변화한 부대, 줄어든 증원병력은 형성된 전선을 우회하거나 돌파해 적진 깊숙이 치고 들어가는 ‘종심작전’으로 주요 거점을 점령하고 지도부 무력화 등 북한군의 전쟁 수행능력을 파괴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이라크전 당시 빠른 속도로 바그다드를 향해 진격한 미 3사단의 전술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쉽게 말해 미국은 한반도 전쟁의 개념을 지구전인 6·25전쟁에서 고속기동전인 이라크전으로 바꿔가고 있다. 이렇게 되면 전쟁의 최종 목표 역시 수정될 수밖에 없다. 평양-원산 이북의 ‘멸공선’, 압록강-두만강 인근의 ‘통일선’까지 밀고 올라간다는 기존의 목표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다.

    사실 이러한 전쟁 개념의 변화는 대외적으로 공식화되지 않았을 뿐 이미 암묵적으로 여러 곳에 반영되어 있다고 군 관계자들은 설명한다. 그 구체적인 사례가 유사시 한미연합군이 어떻게 전쟁을 수행할지를 규정한 작전계획의 변화다. 6·25전쟁 식의 전선전을 상정한 기존의 연합작계 5027이 1990년대 후반 이후 이라크전 식의 종심작전 및 거점장악을 상정하는 것으로 점차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 말기인 2002년 가을 열린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의 결정에 따라 기존의 작계를 수정한 작계5027-04가 바로 이 같은 변화를 대폭 반영한 결과물이다. 기존의 6단계 작전시행을 4단계로 간편화하고, 이전에 비해 공세작전으로 전환하는 시한을 축소하는가 하면, ‘공세적 방어전략’이라는 개념을 대폭 강화해 삽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함께 전쟁 초반부터 압도적인 공중타격력과 정밀유도무기를 사용해 북한군의 전쟁수행능력을 무력화하고 조기 반격을 시도한다는 개념을 골자로 하는 작계5026도 구체화됐다.

    이렇듯 변화한 양대 작전계획에 따라 변화된 한반도 전면전의 시나리오를 구성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신동아’ 2004년 7월호 210쪽 ‘자주국방 예산, 왜 제각각인가’ 참조).

    북한군이 전면 남침하는 경우 먼저 휴전선 일대에 포진한 기간포대 및 620포병군단, 강동포병군단의 장사정포와 방사포로 집중포격을 감행할 것이다. 이러한 선제공격에는 서울과 군사령부 및 군사시설을 향한 포병군단의 장거리 포격과 남한 전역의 공항, 항만, C4I(전술지휘통제) 시설에 대한 미사일 공격이 포함된다. 남쪽의 전쟁 의지를 약화하기 위해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의 민간인 밀집지역에 집중포화를 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작계5026의 1차 목적은 바로 이러한 북한군의 수도권 선제공격에 대비하는 것이라고 한다. 유사시 전방지역의 장사정포를 정밀 공격해 수도권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평양 수뇌부를 정밀 타격해 전쟁지휘능력을 조기에 무력화하며, 첨단 공군력 및 미사일 전력을 이용해 핵 및 생화학무기, 미사일기지, 공군기지, 지휘소 및 통신시설을 순식간에 파괴해 북한의 전쟁능력을 조기에 마비시킨다는 내용이다.

    미 2사단이 수행하는 대화력전, 즉 북한군 장사정포에 대한 대응작전에 199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공세적 대화력전’ 개념이 포함된 것 또한 이러한 추세를 반영한 것이다. 공세적 대화력전이란, 북한군 장사정포가 실제로 공격을 개시하지 않아도 인공위성과 레이더를 통해 분명한 공격징후가 포착되면 장사정포를 미리 공격해 무력화하는 개념이다. 1990년대 이전에는 북한군이 실제로 첫 발을 쏴야 대응할 수 있는 ‘방어적 대화력전’이 중심이었다.

    새로운 한반도 전면전 시나리오

    작계5026이 충분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면, 북한군은 대규모 포격이 끝나자마자 주요 축선(corridor)을 통해 1·2·4·5군단과 820전차군단, 806·815 기계화군단의 남하작전을 개시할 것이다. 남하가 시작되면 전쟁 발발 7시간 이내에 한국군 예비사단의 첫 증원부대가 전선에 도착한다. 그리고 72시간 내에 서부전선의 제3군 예하 3개 군단, 즉 1군단, 5군단, 6군단이 각각 3개 사단 편성에서 6개 사단 편성으로 두 배로 강화된다. 이렇게 되면 서부전선에서 총 18개 사단이 북한군의 전면 남침에 대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다.

    한국군이 전면 남침하는 북한군을 휴전선 남쪽 20~30km선에서 저지하면, 그 사이 전시증원계획에 따라 미 3기갑군단이 투입되어 본격적인 반격전을 개시한다. 2004년 이후의 새로운 작전계획에서는 반격전의 핵심을 상륙작전과 공중강습작전을 통한 이라크전 식 우회 및 돌파에 두고 있다. 한반도의 종심이 짧은 데 비해 북한군 병력이 많기 때문에, 이전에 비해 줄어든 증원병력으로는 방어선 일대에 집중하기보다 돌파를 통해 여러 곳에서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효과적인 까닭이다.

    이러한 개념에 따라 작계5027-04는, 한미 연합해병대가 동서해안에 상륙해 제2전선을 구축하고 특전부대는 내륙지역에 침투하여 동시다발로 평양을 포위함으로써 북한정권을 붕괴시키는 작전진행을 상정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이른바 ‘공세적 방어전략’의 개념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최근의 작전계획이 상정한 전쟁은 1990년대 이전의 ‘전선 밀고 올라가기’와는 사뭇 다르다. 이는 전시증원병력의 규모와 관련해 2004년 이전의 작계에 포함돼 있던 ‘시차별 부대전개 제원(TPFDD)’이 5027-04판에서 생략됐다는 점만 봐도 분명해진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TPFDD는 최종적으로 한반도에 투입될 부대의 규모와 숫자, 병력과 장비를 투입 시점에 따라 열거한 내역이다. 이 내역이 삭제됐다는 것은 예전의 ‘총 69만 증원’이라는 개념이 사라졌음을 뜻하고, 대규모 병력 대신 거점 정밀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첨단 전력이 주로 증원되는 형태로 재편됐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같은 ‘공세적 방어전략’과 새로운 전쟁 개념은 다분히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2004년 10월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 박진 의원은 “북한이 대량살상무기를 테러집단에 인도하는 경우, 미국이 작계5026을 이용해 북한 핵 시설에 대한 선제공격을 감행한다면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작계5026에 합동직격탄(JDAM)을 이용해 파괴할 북한 내 주요 목표물이 열거되어 있으며, 이를 위해 F-15E, F-117, B-1B, B-2, B-52H 같은 폭격기들이 700여 개의 목표지점을 공격하도록 사전 설정돼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계획은 단순히 ‘북한이 공격하면 이에 맞서 격퇴한다’는 기존의 한반도 ‘방어전쟁’ 개념에 비해 지나치게 공세적인 것이 아니냐는 게 박 의원의 주장이다.

    전쟁 개념의 변화는 그동안 추진되어온 주한미군의 감축과 재편, 기지 재배치에도 밀접하게 반영되어 있다. 우선 감축 부분부터 살펴보자. 2004년 10월 한미 양국이 합의한 주한미군 감축안에 따르면, 2004년 8월 이라크로 차출된 미 2사단 병력 3600명을 포함해 2004년 연내에 5000명이 1단계로 철수하고, 2단계로 2005년과 2006년에 각각 3000명과 2000명, 마지막 3단계인 2007~2008년에 2500명이 잇따라 빠져나간다. 이에 따라 2009년부터 주한미군은 2만4000여 명으로 줄어든다.

    사라지는 ‘한반도의 특수성’

    기계화여단과 보병여단으로 구성된 기존의 주한미군 2사단(1만2000명)을 3500~4000명의 스트라이커 부대로 재편하는 작업은 이러한 병력규모 감축의 키워드다. C-130 수송기로 운반이 가능한 최신형 전투차량 LAV-3를 타고 작전을 수행하는 스트라이커 부대는 기존의 부대에 비해 ‘빠르게 작전지역에 보낼 수 있는 더 작고 강한 군대’다. 전선전에 적합한 무겁고 둔중한 경중(輕重)혼합사단 대신 돌파와 종심작전이 용이한 경(輕)기계화부대로 바꾸는 것이다.

    미 국방부의 계획에 따르면 2006년부터 스트라이커 여단은 1개 여단씩 한반도에 순환배치된다. 이들을 ‘안내’할 1개 대대 병력(1000명)과 이들을 지원할 병력(1000명)은 붙박이로 남지만 주력부대는 미 본토에 있는 부대와 계속 순환한다. 이렇듯 부대의 형태가 바뀜에 따라 미국은 한국에 남는 지상군의 숫자를 줄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주력 지상군 부대의 위치를 휴전선과 가까운 의정부에서 미7공군 기지와 항구가 인접해 있는 오산 평택 지역으로 옮기는 것 또한 전쟁 개념의 변화와 관련이 깊다. 휴전선 인근에서 밀고당기는 것보다 수송기나 선박을 이용해 재빨리 주요 거점에 투입할 수 있는 능력이 더욱 중요해진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1개 전투여단의 순환배치’라는 개념은 유사시의 증원병력 규모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2004년 이후 작계에서 구체적인 증원숫자는 생략됐지만, 이러한 추산을 통해 69만이라던 증원병력이 얼마나 줄어들지 추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미 육군 가용병력 100만 가운데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대비전력은 60만~70만. 이들을 모두 스트라이커 여단으로 재편해 3교대로 순환배치한다고 가정하면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 전시증원군은 최대 20만 정도라는 결론이 나온다.

    큰 틀에서 보자면 이와 같은 전쟁 개념의 변화와 부대 재편은 단순히 한반도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지상군을 스트라이커 부대로 재편하는 작업은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이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군사변환’의 핵심이다. 전력을 경량화·기동화해 기존의 전선전 개념을 폐기하고 신속한 돌파와 거점 공략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다.

    미군이 한국을 포함해 세계 곳곳의 WRSA를 폐기하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 우선 전쟁에 투입되는 병력수가 달라진다. 스트라이커 부대는 같은 전투력을 가진 기존 지상군 사단에 비해 병력수가 3분의 1에 불과하다. 더욱이 이들은 7일치 탄약을 갖고 4일 만에 분쟁지역에 투입할 수 있도록 한다는 목표를 갖고 구성됐다. 더는 우방국에 WRSA를 둘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냉전 종식 이후 전세계 5개 지역사령부 관할 지역에 흩어져 있는 25만의 미군 병력을 상당수 감축해 경제성을 높여야 하는 미국의 현실이 낳은 고육책이다. 숫자를 줄여야 하므로 한 부대가 되도록 넓은 지역을 담당할 수 있어야 하고, 따라서 유사시 전세계 어디로든 빠른 시일 안에 투입될 수 있도록 기동성을 높이는 것이다.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개념 또한 여기서 나왔다. 이제까지 주한미군은 오로지 북한만을 노려보며 휴전선 인근에 붙박이로 지키고 서 있었지만, 앞으로는 전략적 필요에 따라 한반도에서 자리를 비울 수 있다는 복안이다.

    이에 따르면 주한미군이 갖고 있던 특수성은 상당부분 사라진다. 엄밀히 말해 이전처럼 북한의 남침을 억제하기 위해 한국에 주둔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내 분쟁에 빠르게 투입하기 위해 아시아에 주둔하는 것이고, 이왕이면 북한이라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대가 근처에 있는 한국에 있는 것이 마땅하다는 컨셉트다.

    이러한 주한미군의 변화는 한국 정부나 군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주한미군의 성격이 바뀌면 한국군의 전시 작전통제권을 한미연합사령관(현재는 주한미군사령관이 한미연합사령관과 유엔군사령관을 겸임한다)이 행사하는 현재의 한미연합지휘체계 또한 변화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의 주전력이 한반도에 붙어 있는 구조가 아니므로 한미연합사가 유사시 대비임무를 주도적으로 담당하는 시스템에 공백이 생기는 것이다.

    연합사 해체하고 유엔사로?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이 지난 3월8일 리언 라포트 주한미군사령관이 미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밝힌 ‘유엔사 기능 강화’ 아이디어다. 라포트 사령관은 이 자리에서 “유엔사를 구성하는 한국전 참전국의 역할을 확대하고 유엔사 본부에 더 많은 인원이 참여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유사시 작전기획 및 수행을 위해 15개 동맹국의 진정한 다국적 참모진을 구성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6·25전쟁 당시 유엔안보리의 결의에 따라 설립된 유엔사는, 형식상 정전협정의 당사자이지만 현재는 실제 전투병력을 보유하지 않은 채 400여 명의 행정병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1978년 연합사가 창설되면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이 연합사로 이양된 이후에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유사시 대비임무를 모두 연합사에서 수행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동안 유엔사는 사실상 ‘껍데기’에 불과했다.

    체계만 남아 있는 유엔사의 작전기획임무를 강화하고 실질적인 다국적 참모진을 구성하겠다는 라포트 사령관의 발언은, 연합사가 수행하고 있는 한반도 유사시 대비임무를 다시 유엔사가 수행하도록 하는 방안이 추진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낳는다. 이렇게 되면 현재의 연합사는 유명무실해지거나 아예 사라지고, 대신 유엔사가 작전계획 수립 을 수행하게 된다. 물론 유엔사를 이끄는 것은 전적으로 미국의 몫이므로 단순히 ‘형식’이 바뀌는 것일 뿐, 여전히 한반도 유사시에 주도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미군이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4星과 3星

    그러나 이 ‘형식상 변화’에 관한 언급을 간단히 넘길 수 없는 것은 일각에서 아예 유엔사를 일본으로 이전하는 방안을 거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월3일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에서 열린 ‘한반도평화체제 구축 : 과제와 전략’ 세미나에서 국제문제조사연구소 조성렬 박사는 “주로 일본쪽에서 나오는 이러한 논의는, 주한미군의 재편을 계기로 유엔사를 아예 일본 가나가와에 있는 자마(座間) 주일미군 기지로 옮기면 미일관계와 한일관계를 동시에 강화할 수 있으며 북한의 무모한 행동을 억제할 수 있는 더욱 강력한 체계가 된다는 논리를 배경으로 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유엔사에 실질적인 한반도 유사시 대비임무를 맡기고 이를 일본으로 이전한다.’

    한국 입장에서는 뜬금 없을 수밖에 없는 아이디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미국의 군사전략 변화나 전쟁 개념 변화와 충분히 연결될 수 있는 그림이다. 사실 미국 시각에서 볼 때 한국과 일본은 별개의 지역이 아니다. 한반도 인근에서 전쟁이 발발하는 경우 미군에게 일본과 한국은 단일한 전구(戰區)가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중국과 충돌하거나 지역 내 다른 분쟁에 주한·주일 미군이 개입하는 경우를 가정하면 일본은 후방기지, 한국은 전진기지의 역할에 걸맞은 지리적 위치에 있다.

    이렇게 보면 주한미군의 성격 변화를 계기로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의 연계를 강화해, 장기적으로 주일미군 기지에는 동아시아 미군 전체의 병참기지 역할을 맡기고, 주한미군 기지는 기동군 병력이 훈련을 받는 주둔지로 활용해 ‘일체화’하는 방안은 미국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매력적이다. 지역에서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을 구분하지 않고 병력과 군사 자산을 효율적으로 집중해 쏟아부을 수 있는 체계가 되기 때문이다. 훈련이나 사령부 운영도 주한·주일 미군이 별개로 운영되는 현재의 체계보다 훨씬 경제적이다.

    쉽게 말해 한국에는 실질적인 전투병력을 전진 배치하고 이를 지휘 통제하는 사령부는 일본에 두는 방식이다. 이 경우 ‘근거지’에 있는 주일미군사령관은 4성(星)장군으로, ‘전방’에 있는 주한미군사령관은 3성(星)장군으로 바뀔 수도 있다. 미 국방부 편제는 동북아 지역에 한 사람의 4성장군을 두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의 연관성이 강화될 경우 ‘근거지’에 4성장군을 두는 것이 자연스럽다. 주한미군을 주일미군의 통제 아래 두는 식이다. 여기에 유사시 다국적군을 지휘하는 임무 특성상 유엔사령관은 4성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유엔사를 일본으로 이전하는 아이디어가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한국의 대응이 늦어진 까닭

    논의가 여기까지 진행되면 현재 한미연합사가 갖고 있는 한국군의 전시 작전통제권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이 떠오른다. 주한미군사령관이 사령관을 겸임하고 있다고는 해도 한미연합사는 형식상 대한민국 대통령의 지휘를 받는 부대다. 한미연합사령관 또한 국군의 날 행사장에서 한국 대통령에게 경례를 하는 ‘부하’인 것이다. 그러나 유엔사령관은 이야기가 다르다. 연합사가 해체되어 유엔사가 유사시 대비 임무를 맡는다면 한미연합사령관과는 달리 한국 대통령과 병렬관계일 수밖에 없다.

    과연 공식적으로 한국 대통령의 ‘지휘’를 받지 않는 유엔사령관에게 한국군의 전시 작전통제권을 맡길 수 있을까? 더욱이 유엔사령관이 한국이 아닌 일본에 머물고 있다면? 아니면 그전까지 전시 작전통제권을 환수해야 할까? 혹은 한미간에 연합사를 대체하는 소규모 연합지휘체계를 새로 만들어 작전통제권을 맡겨야 할까? 탁상공론에 머물고 있는 한미연합지휘체계 재편이나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문제가 전혀 다른 양상으로 변해 매우 실질적인 이슈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급변하는 상황에 대해 한국정부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당장 북한 장사정포에 대한 대응작전을 비롯해 그동안 미군이 수행하던 임무의 상당 부분을 넘겨받아야 하고, 전쟁 개념의 변화에 따라 한국군 또한 경량화·기동화를 바탕으로 재편해야 한다. 이른바 ‘국방개혁’의 당위성이다. 연합지휘체계나 작전통제권에 대한 검토도 필수적이다.

    당초 노무현 정부는 이러한 변화를 남북관계의 변화와 연계하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2003년 1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검토한 것으로 알려진 ‘3단계 평화정착 방안’은, 1단계인 2003년 남북한의 군사적 신뢰구축이 이뤄지면 2단계인 2004년부터 유엔사 및 주한미군의 역할 변경을 검토하고, 3단계인 2006년 이후 남북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유엔사와 주한미군의 역할 변경을 실행한다는 개념이었다(‘한국일보’ 2003년 1월22일자 참조). 한국군의 구조개편 및 국방개혁 또한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남북간의 군비통제나 상호군축을 계기로 삼아 추진한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진정한 ‘동맹의 위기’는

    그러나 이 같은 일정은 북핵 문제가 장기화하고 남북관계가 경색국면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반면 미국이 추진하는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의 성격을 바꾸는 작업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다급해진 참여정부는 올해 들어서야 수면 아래 있던 군구조 개편 플랜을 꺼내드는 한편 대통령이 직접 “10년 이내에 스스로 작전권을 가진 자주군대가 될 것”이라고 밝히고 나섰지만, 이미 타이밍을 놓친 측면이 있다.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서도 알 수 있듯 본질적으로 이러한 변화는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의 성격 자체를 바꾸는 원론적인 문제다. 정부 내에서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의 개정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을 만큼 중대한 사안이었지만, 지난 2년간 참여정부의 외교안보 라인은 관련 논의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고 최고결정권자인 대통령이 주요 쟁점에 대해 충분히 보고받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이 때문에 미국이 상당부분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간 지금까지도 구체적인 방침이나 대응방향은 충분히 공론화되거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 사이 전쟁개념의 변화에 따른 주한미군 기지 재편과 작전계획의 수정 등은 많은 부분이 미국측 계획대로 추진되었다. 전략적 유연성 문제만 해도, 3월8일의 공군사관학교 발언 등 뒤늦게 대통령이 직접 선을 긋고 나서는 일까지 발생했지만 오히려 미국측은 “이제 와서 왜 말이 바뀌냐”며 더욱 강경해지는 분위기다. 한마디로 ‘신뢰의 위기’인 것이다.

    ‘선(先) 북핵 문제 해결’이라는 낙관론에 매달려 핵심적인 논의를 미루다가 한반도의 운명을 가를 수도 있는 쟁점들이 이미 반쯤 엎질러진 물처럼 돼버린 형상. 지난 2년간 노무현 정부 외교안보 라인이 보여준 이 같은 시행착오는 두고두고 후유증을 남길 것으로 보인다. 한미동맹이 ‘위기’라면, 이는 WRSA의 폐기나 한국인 노무인력 감축 같은 사안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외교안보 라인의 미숙한 대처와 의사소통 왜곡이 낳은 ‘한미간 신뢰의 붕괴’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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