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월호

링컨의 신화를 찾아서… 워싱턴·게티즈버그·스프링필드

위대한 순교자인가, 교활한 정객인가

  • 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mshin@snu.ac.kr

    입력2007-02-07 13: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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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당대의 지도자, 나아가 인류의 영원한 사표로 추앙받는 에이브러햄 링컨(1809∼65). 그는 위대한 해방자요, 평등의 수호자였지만 한편으로 양심의 호소보다는 정치적 판단에 따라 노예제 폐지에 나섰다는 시선을 받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날 저격당한 그는 이후 ‘연방을 구하고 죽음을 당한 순교자’의 이미지를 덤으로 얻게 된다.
    링컨의 신화를 찾아서… 워싱턴·게티즈버그·스프링필드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에 있는 링컨 생가.

    보스턴에서 발행되는 미국 유수의 월간지 ‘애틀랜틱 먼슬리’ 최근호는 미국사에 영향을 끼친 100인의 위인을 선정하면서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을 1위로 꼽았다.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연방을 구하고 노예를 해방함으로써 미국사회가 새롭게 발전하는 초석을 마련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1865년 4월14일 한 광신적인 남부연합 지지자가 쏜 총탄에 쓰러진 이후 그는 이런 유의 조사에서 거의 언제나 앞자리를 차지해왔다. 링컨 탄생 100주년에 즈음하여 톨스토이는 그를 작은 예수로 칭하면서 인류의 성자로서 그에 대한 평가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빛을 발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톨스토이의 예측이 빗나가지 않았음을 ‘애틀랜틱 먼슬리’는 거듭 확인해준다.

    링컨이 오랜 세월 사람들의 변함없는 존경을 받아온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단테의 ‘신곡’에 따르면, 장군, 황제, 주교, 교황 같은 세속의 정치지도자 대다수가 사후에 가는 곳은 지옥이다. 가령 알렉산더 대왕과 훈족의 아틸라왕은 제7옥(獄)의 제1원에서 뜨겁게 끓고 있는 피의 강물에 잠겨서 가라앉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으로 그려졌다.

    단테는 정치의 요체는 마키아벨리적 권모술수요, 권력은 필연적으로 폭력과 살상을 동반하는 것임을 간파한 것이다. 정치가로서 링컨 또한 권력을 탐했고 그것을 얻기 위해 정치적 책략에 의탁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스프링필드에서 링컨과 동업했던 변호사이자 그의 전기를 쓴 윌리엄 헌돈(William Herndon)은 링컨이 일리노이 의회에서 “가장 똑똑하고 가장 교활한 로그롤러(logroller)”였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가령 시저, 알렉산더, 나폴레옹과 같은 정치가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어떤 종교적 후광, 곧 톨스토이가 말한 성자의 이미지가 어른거린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리자면, 링컨은 ‘세속 도시’에 몸담았으면서도 ‘신의 도시’에 속한 인물이었다는 인상을 주는 드문 정치가다.



    링컨의 이러한 이미지가 미국의 대중적 상상력을 사로잡아 왔음은 워싱턴의 링컨 기념관(Lincoln Memorial)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링컨 사후 50여 년 만인 1914년에 착공되어 1922년 워런 하딩 대통령에 의해 봉헌된 링컨 기념관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기념관 전체가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는 점과 그리스 신전 양식이라는 점이다.

    장엄한 순백의 건물 앞에서 관람객들은 흠 없이 순수한 삶을 살다 간 성자의 신전을 참배하고 있다는 느낌에 젖는다. 여기에 멀리 정면에 우뚝 서 있는 국부(國父) 워싱턴 기념탑(Washington Monument)의 위용과 그것을 응시하는 링컨 좌상의 위용에 자극된 숭엄한 감정이 보태지면서 성자 대통령에 대한 관람객의 외경심은 한층 고조된다.

    이런 숭경심은 켄터키 변방에서 태어나 초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으나 독학으로 변호사가 되고, 이어 동부의 쟁쟁한 브라만 정객들을 제치고 마침내 권좌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로서 그의 또 다른 이미지와 합치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복합적이고 상반된 이 인상이 이른바 ‘링컨 불가사의(Lincoln enigma)’ 현상의 본질이다. 그러나 이 또한 필경 그를 신비스러운 베일로 감싸서 결과적으로 그의 성자적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성자(聖者) 정치가

    링컨 기념관 내의 링컨 좌상 뒤 벽면에는 연방을 구한 그를 추모하기 위해 성전을 세웠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남북전쟁이 발발했을 때 링컨은 연방의 와해를 막는 것이 대통령의 으뜸가는 책무라고 천명했다. 만일 미국이 남북전쟁 수습에 실패해 남북으로 나뉘었다면 미국의 운명은 물론 세계사의 흐름도 달라졌을 것이다.

    링컨의 신화를 찾아서… 워싱턴·게티즈버그·스프링필드

    워싱턴의 링컨 기념관.

    이런 점에서 연방을 구한 링컨의 공(功)은 세계사적인 의미와 무게를 갖는다. 그렇지만 남부연합의 부통령 알렉산더 스티븐스(Alexander Stephens)가 지적했듯이 종교적 신비주의를 방불케 하는 링컨의 연방 수호 신념이 반드시 정당한 것이었을까. 주지하듯 남부는 헌법에 입각해 연방 탈퇴를 정당화했고, 링컨이 대변하는 북부는 연방이 주(州)의 자율권보다 우선한다고 봤다.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결과 북부의 주장이 지배적인 통념이 되었고, 대법원 또한 추후 이를 공식적으로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법적 정당성은 물론 그가 제시한 정치적 논거, 곧 연방 탈퇴가 무정부 상태를 초래할 수 있고 다수의 지배에 위배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링컨은 전쟁기간 중 인신보호영장을 정지시켰고, 전신과 언론을 검열했으며, 전쟁 노선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체포 구금했다. 링컨은 국가 변란을 효과적으로 진압하기 위한 비상조치로 이를 정당화하고, 추후 이를 형사소추하지 못하도록 면책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이런 반(反)입헌주의적 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링컨은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상찬되어왔다.

    링컨은 노예제의 고리를 끊은 ‘위대한 해방자’요 평등의 수호자로 일컬어져왔다. 1939년 흑인 여가수 매리언 앤더슨이 인종차별에 항의해 그의 기념관 앞에서 성악 공연을 한 것도, 1963년 마틴 루터 킹이 그 계단에서 ‘나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을 한 것도 링컨의 이런 대중적 이미지 때문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1863년 노예해방령을 발표할 때까지 링컨은 노예제 폐지론자가 아니었다. 아니, 그때에도 무조건적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노예해방령은 반란 상태에 있던 남부 주 노예들만의 해방을 명시했을 뿐, 이미 탈환된 루이지애나나 연방에 남아 있던 노예주의 노예들은 제외했기 때문이다. 노예해방은 도의적 양심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전쟁 승리를 위한 전략적·정치적 고려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인종평등, 흑백통혼 반대한 링컨

    물론 링컨은 노예제가 폐지되어야 할 사회악(惡)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가로서 그의 주장은 새로 연방에 편입되는 주에 노예제가 확산되어서는 안 된다는 차원 이상은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링컨은 인종평등과 흑백간의 통혼(通婚)에도 반대했다. 그는 흑백이 완벽한 평등관계 속에 살아가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 믿었고, 흑인의 해외 식민을 통해 인종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이런 양면성에도 불구하고 링컨은 왜 국민적 영웅으로서, 더 나아가 인류의 사표로서 추앙받아온 것일까. 한 연구자에 따르면 이제까지 링컨을 주제로 씌어진 책이 무려 1만6000권에 이른다고 한다. 역사상 그 어떤 인물보다도 많다. 이렇게 많은 책이 출판된 것도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링컨의 대중적 이미지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무엇보다 그의 비극적 죽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링컨이 포드 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다가 연극배우 출신 존 윌키스 부스(John Wilkes Booth)의 총격을 받고 사망한 것은 남부연합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가 애퍼매톡스 법원에서 항복한 지 불과 6일 만의 일이다. 게다가 그가 총탄에 쓰러진 4월14일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수난일이었다. 전쟁의 고통을 종교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던 사람들에게 이는 우연의 일치 이상으로 비쳤다. 예수가 죄 많은 인류의 대속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듯이, 링컨 또한 노예제라는 죄악에 대한 징벌이라고 할 수 있는 남북전쟁으로부터 연방을 구하고 죽음을 당한 순교자로 인식됐다.

    ‘링컨 신화’의 감춰진 이야기들

    입지전적인 삶의 이력 또한 그에 관한 신화를 양산해온 한 요인이다. 그는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에서 태어난 첫 대통령이다. 켄터키의 시골 통나무집에서 백악관에 입성하기까지 그의 삶은 미국인이 문화적 이상으로 동일시할 만한 여러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는 프랭클린적 자수성가형 인물인 동시에 온화하면서도 강직한 소명의식으로 무장한 존 윈슬롭과 같은 청교주의자이고, 또한 제퍼슨을 연상시키는 공화주의자다. 요컨대 그는 19세기 미국사회가 지향하는 모든 이념을 한몸에 구현하고 있는 문화적 이상형이다.

    링컨의 신화를 찾아서… 워싱턴·게티즈버그·스프링필드

    스프링필드에 있는 링컨 박물관(위)과 링컨 박물관 안에 있는 링컨 가족들의 밀랍상.

    마흔이 넘으면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 사람이 링컨이다. 56년에 걸친 그의 삶은 어쩌면 자신의 개성을 당대의 사회적 이념에 합치하려는 노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의 비운의 삶을 하나의 상징으로 만들기에 앞서서 그 스스로 이미 자신을 이념의 권화(權化)로 만들어간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실체, 그의 진짜 얼굴을 파악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링컨이야말로 한 인간 혹은 그 삶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내가 링컨 신화의 현장을 찾아 스프링필드에 처음 들른 것은 2002년 10월이었다. 미주리에 있는 마크 트웨인의 고향 하니발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스프링필드로 발길을 돌려 링컨의 유적을 살필 기회가 있었다. 그 후 2006년 여름 시카고를 방문하는 기회에 차를 빌려 다시 스프링필드를 찾았다. 하퍼스 페리가 존 브라운의 고장이고 하니발이 마크 트웨인의 본향이듯이, 스프링필드는 전적으로 링컨의 도시였다.

    인구 12만의 일리노이 주 수도이지만, 시내는 온통 링컨의 유적으로 가득 차 있는 느낌이었다. 그가 변호사로 입신출세해 이름을 얻고,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정치적 기반을 닦아 마침내 대통령이 되고, 죽은 뒤 묻힌 곳이 이곳이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워싱턴으로 떠나며 한 고별 연설에서 링컨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스프링필드는 링컨이 이룬 모든 것을 제공한 터전이었다. 링컨이 인근의 뉴세일럼에서 스프링필드로 이주한 것은 1837년이다. 당시 인구 2500명의 이 번창하던 변방 도시는 그 해에 일리노이의 주도(州都)로 지정됐는데, 이 또한 주 하원의원이던 링컨의 각별한 노력 덕분이었다.

    정치적 고향, 스프링필드

    링컨은 1809년 켄터키의 하딘에서 태어났다. 변방의 개척민이던 링컨의 아버지 토머스 링컨은 링컨이 일곱 살 때인 1816년 일가를 이끌고 인디애나의 스펜서로 이주했다가 1830년 다시 일리노이의 뉴세일럼으로 돌아왔다. 20대 초반을 뉴세일럼에서 보내면서 링컨은 정치에 입문하고, 독학으로 법률 공부를 하여 변호사 자격증을 얻고, 28세가 되던 1837년 집을 떠나 스프링필드로 거처를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변호사로 일하면서 정치에 뛰어들어 1842년 결혼할 때까지 8년을 주 하원의원으로 봉직했고, 실패하긴 했으나 주 하원의장 경선에 나서기도 했다. 링컨은 1842년 11월, 특유의 신중함으로 약혼했다가 파혼하고 다시 생각을 바꿔 켄터키 출신의 부유한 은행가이자 주 상원의원의 딸 메리 토드와 결혼해 스프링필드의 허름한 셋집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결혼은 정치적 행보의 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이제 일리노이 주의회의 범위를 넘어서서 연방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한다. 그와 더불어 그의 정치적 야심도 커갔다. 두 차례의 도전 끝에 링컨은 1846년 마침내 스프링필드 지역을 대표하는 연방 하원의원에 선출되어 중앙 정치무대로 진출한다. 37세 때였다.

    처처에 있는 링컨 유적지 가운데 링컨이 살던 집, 최근에 문을 연 링컨 박물관, 링컨의 묘소를 찾아보기로 하고 먼저 잭슨가와 8번가의 교차점에 있는 링컨의 생가로 발길을 옮겼다. 링컨의 생가는 짙은 갈색의 아담한 이층집이었다. 링컨이 살던 1860년대 당시의 모양으로 복원된 인근 네 블록의 집들을 포함한 생가 일대가 1971년에 국립사적지로 지정됐다.

    링컨이 이 집에서 산 것은 1844년부터 대통령에 당선되어 백악관으로 옮긴 1861년까지 17년간이다. 그의 네 아들이 태어난 곳도 이곳이고, 둘째아들 윌리를 잃은 곳도 이곳이다. 원래 미니 2층이던 집을 식구가 늘고 링컨의 정치적 명성과 더불어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지자 현재와 같은 희랍 복고 양식의 건물로 증축했다고 한다.

    링컨은 생가에서 몇 블록 떨어지지 않은 곳에 변호사 사무실을 내고 집과 사무실을 오가며 일을 보았다. 그는 송사를 맡으면 판례를 열심히 연구하고 소장에서부터 변론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법문서를 자신이 직접 작성했다. 이처럼 성실하고 주도면밀했기 때문에 링컨은 의뢰인이 많이 찾는 미국 중서부의 일급 변호사가 되었다. 그의 의뢰인 중에는 나중에 중서부의 가장 큰 철도회사로 성장한 일리노이 센트럴 철도회사도 있었다. 그는 순회재판도 열심히 따라다녔다. 이런 열성 덕분에 수임료 수입이 적지 않았다. 1850년대에 그의 연 소득은 5000달러에 육박했는데, 이는 일리노이 주지사 봉급의 3배에 해당했다.

    링컨의 신화를 찾아서… 워싱턴·게티즈버그·스프링필드

    링컨 묘소.

    링컨의 의뢰인들과 동료 변호사들은 일단 송사를 맡으면 온 정성을 기울여 노력하는 그의 태도에 감복했다. 그가 태만하거나 부주의해 송사에서 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정직한 링컨’이란 별명을 얻은 것도 변호사 생활을 통해서다. 변호사로 이름이 난 뒤에도 그는 변호비를 과다하게 청구한다든지 의뢰인을 속이는 법이 없었다.

    연방 하원의원 시절에도 특유의 성실함으로 동료 의원들의 신망을 얻었다. 임기 2년 동안 456번의 호명 투표 중 그가 불참한 것은 13번뿐이었다. 국회출석률에서 단연 선두였다. 링컨의 2년여 의정 활동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멕시코와 전쟁을 일으킨 포크(James K. Polk) 대통령의 정책에 대한 소신 있는 비판이다.

    포크는 멕시코가 먼저 도발해서 미국은 응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전쟁의 발발 책임을 멕시코에 떠넘겼으나, 링컨은 이 거짓을 문제삼았을 뿐만 아니라 분쟁 지역으로 군대를 진주시킨 것 자체가 위헌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비판은 애국심의 발로로 전쟁에 참여한 많은 사람의 분노를 샀는데, 상당수가 참전한 그의 출신주 일리노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노예제 폐지보다 확산방지에 주력

    그가 소속된 휘그당 내에서조차 링컨의 태도에 우려를 나타냈으나, 그는 이에 개의치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외국과의 전쟁을 결정하는 권한은 대통령이 아니라 입법부에 있다는 것과, 국경 너머 분쟁지역의 영토 귀속 문제는 전적으로 그 지역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지 외부에서 간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논거로 포크 행정부를 비판했다. 그러나 이런 비판들은 그가 대통령으로 남북전쟁을 수행하면서 취한 일련의 조처에 대한 비난의 부메랑이 됐다.

    링컨은 연방 하원의원을 한 번만 하고 그만두겠다는 약속에 따라 임기가 끝나자 1849년 스프링필드로 돌아왔다. 그는 한동안 변호사 업무에만 열중했다. 정치 일선에서 다소 멀어졌던 링컨이 다시금 정치에 관심을 돌리게 된 계기는 1854년 일리노이 상원의원으로 당시 연방 변방분과위원회 위원장이던 스티븐 더글러스가 제안한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안이다.

    그 골자는 네브래스카 지역이 연방의 주로 편입될 때 주민 투표에 따라 자유주와 노예주로 결정짓자는 것이다. 이 제안은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얻은 영토가 연방에 편입될 때 북위 36。30、이북의 지역은 자유주로 한다는 1820년의 미주리 타협안과 배치되는 것이다. 더글러스는 당시 건설 예정이던 대륙횡단 철도 노선이 자신의 선거구민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설정되도록 하기 위해서 남부를 무마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자 ‘주민 자주권(popular sovereignty)’이란 명분으로 이런 절충안을 낸 것이다. 북부의 전반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안은 더글러스의 노련한 정치적 수완 덕분에 통과됐다.

    링컨은 즉각적으로 노예제가 폐지돼야 한다는 북부의 과격한 노예제 폐지론자들에게 동조하진 않았으나 노예제가 변방 너머로 확산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더글러스의 제안이 경제적인 이해만을 앞세운 무책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비판하는 대열의 선봉에 섰다. 링컨은 이를 계기로 정치활동을 재개해 1855년 연방 상원의원에 도전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이런 와중에서도 링컨은 반(反)네브래스카 진영을 결속해 일리노이 공화당 창당의 주역이 된다.

    1857년 연방 대법원의 드레드-스콧 판결은 노예제를 둘러싼 분열과 갈등을 더욱 심화하는 계기가 됐다. 대법원은 흑인은 미국의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미 연방법정에서 재판받을 권리가 없고, 미 연방의회는 새로 영입되는 변방 주에 노예제도를 금할 권리가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드레드-스콧 판결을 주도한 대법원장 로저 태니(Roger B. Taney)는 특히 건국의 아버지들은 흑인을 독립선언서나 헌법에 천명된 인권의 대상자에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해석했다.

    ‘토론’ 통해 전국 정치인으로 부상

    링컨은 이 점을 우려했다. 그는 대법원의 판결은 많은 주가 흑인을 시민으로 인정해온 역사적 증거를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평등을 강조한 독립선언서의 이념을 훼손하여 노예제를 영구화하려든다고 생각했다. 링컨은 이런 시각에서 북부의 노예제 폐지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대법원의 판결을 비판하는 의견을 표명했는데, 스티븐 더글러스는 드레드-스콧 판결을 내린 대법원을 공격하는 것은 정부의 존폐를 위협하는 망거라고 비판했다.

    링컨의 신화를 찾아서… 워싱턴·게티즈버그·스프링필드

    펜실베이니아 주 게티즈버그에 있는 게티즈버그 연설 기념비.

    1858년 더글러스가 민주당 일리노이 상원의원 후보로 재지명되자 링컨은 상원의원 자리를 놓고 다시금 더글러스와 맞서게 됐다. 두 사람은 선거운동 기간에 일리노이 주를 돌면서 일곱 차례의 토론을 하기로 합의했다. 이것이 미국 정치사에 가장 유명한 정치토론으로 남은 ‘링컨-더글러스’ 논쟁이다. 이 토론은 더글러스가 워싱턴 정가의 거물이었기 때문에 전국적인 관심의 대상이 됐다.

    전국의 유력 일간지들이 기자를 보내 이 토론을 취재 보도했다. 링컨은 처음에는 더글러스의 기세에 눌려 수세에 몰렸으나 토론이 거듭될수록 자신감을 회복해 더글러스를 압도해갔다. 논쟁의 초점은 역시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이었다. 더글러스는 예의 주민주권론을 내세워 자신 논리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링컨은 노예제도가 국가의 근본이념에 반하는 잘못된 제도이기 때문에 비록 주민 다수가 원하더라도 그것을 확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링컨은 자유가 도의적으로 정당한 것을 행하는 권리임을 강조하면서 개인의 욕망에 우선하는 공공선이 존재한다는 제퍼슨의 공화주의적 이념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선거 결과는 링컨의 패배였다. 양자가 토론을 벌인 7개 카운티에서는 링컨의 공화당이 다소 우세했으나, 주 의회에서는 민주당이 다수를 차지해서 주 의회에서 선출하는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링컨은 더글러스에게 패했다. 패배에도 불구하고 링컨은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하면서 공화당 내에 당을 이끌 지도자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더글러스와의 논전을 계기로 노예제에 대한 링컨의 정치적 견해도 구체화됐다. 링컨은 젊은 시절 너벅선(너비가 넓은 배)의 인부로 미시시피 강을 따라 뉴올리언스까지 내려가면서 쇠사슬에 묶여 끌려가는 노예들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는 노예제는 잘못된 제도이니 폐지돼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남부인들에게 노예가 중요한 재산인 이상, 폐지하는 방식에서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그는 노예제에 대해 도덕적으로는 비타협적이었으나 정치적으로는 타협적이었다. 노예제와 건국이념의 괴리에 대해서도 그는 이런 시각을 견지했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음을 천명하면서도 노예제를 당시로는 어쩔 수 없어서 없애지 못한 채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암이나 종양을 지닌 환자가 그것을 당장 잘라내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기 때문에 때를 기다려 나중에 잘라내려고 하는 경우에 비유했다. 따라서 그는 건국의 아버지들이 말한 자치권을 변방의 노예제에 적용하는 것은 망발이라고 비판했던 것이다.

    책을 끼고 살던 소년

    링컨 박물관은 링컨의 생가에서 몇 블록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연전에 이곳을 들렀을 때는 개관 전이라서 겉만 보고 안을 구경하지 못했다. 두 건물은 2001년에 착공됐다. 링컨 도서관이 2004년에 먼저 완공됐고, 링컨 박물관은 1년 뒤인 2005년에 완공되어 개관했다. 짧은 거리였지만 8월의 뜨거운 햇살이 거리를 달구는 기분이었다.

    링컨 박물관은 방학이라서 그런지 관람객들로 가득했다. 표를 사서 안으로 들어가니 널따란 광장이 펼쳐져 있고 광장의 한가운데에 링컨 일가의 밀랍상이 서 있다. 대통령에 당선되어 워싱턴에 갓 도착한 1861년경의 광경을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대통령의 가족과 더불어 사진 찍기를 선호해서 그 자리는 늘 붐볐다.

    박물관은 광장의 왼편으로는 링컨이 대통령이 되기 이전의 생애에 대하여, 그리고 오른편으로는 백악관 시절의 소묘로 구성되어 있다. 왼편 초입에 링컨이 소년 시절을 보낸 켄터키 통나무집이 실물 크기로 재현되어 있다. 집안 일을 하는 틈틈이 책을 읽고 있는 링컨의 모습도 보인다. 링컨의 독서열은 유명했다. 그는 글자를 깨친 후에는 인근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을 닥치는 대로 빌려 읽었다.

    그는 성경을 비롯해 버니언의 ‘천로역정’ ‘이솝 우화’를 암기할 정도로 여러 번 읽었고 셰익스피어의 대사와 로버트 번스의 시를 즐겨 암송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윌리엄 녹스의 ‘죽음’이란 시는 하도 자주 외워서 원작자가 링컨인 줄 아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문장을 잘 쓰기 위해서 그는 당시 널리 쓰던 문법 교습서인 새뮤얼 커크햄의 ‘영문법’을 빌려서 줄줄 암기할 정도로 여러 번 보았다고도 한다.

    그의 남다른 언어 감각은 언어의 구조에 대한 깊은 관심과 좋은 문장과 시를 열심히 암송한 덕분일 것이다. 그는 연방 하원의원으로 워싱턴에서 봉직하면서도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자신의 소양이 부족함을 절실히 느껴 늘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는데, 이때 그가 읽은 책 중에는 유클리드 기하학도 포함되어 있었다.

    백악관 남쪽 주랑을 그대로 재현한 건물의 입구에 한편으로는 매클렌런 장군과 그랜트 장군의 인물상이, 오른편으로는 프레더릭 더글러스와 서저너 트루스의 상이 서 있다. 모두 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다. 특히 앞의 두 인물은 각각 전쟁 초기와 말기에 북부군 총사령관직을 지냈다. 매클렌런은 남부군을 적극적으로 공략하기를 바라는 링컨의 지시를 거부하다 결국 해임됐는데, 링컨의 재선 때 그에 맞선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나오기도 했다. 반면 그랜트는 적극적인 자세로 전쟁에 임해 링컨의 신임을 얻고 북군 총사령관이 되어 종전을 이끌어냈다.

    “그는 영원에 속한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험담 회랑(Whispering Gallery)’이다. 이곳에는 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은 서부 출신의 촌뜨기 대통령에 대한 험담과 조소, 그리고 냉소적인 삽화와 풍자만화가 전시되어 있다. 링컨은 특히 첫 임기 동안 내내 그를 무지하고 미숙한 지도자로 여긴 동부 정치가들의 의구심에 시달려야 했다.

    링컨 박물관을 구경한 후 시내의 북동쪽에 자리잡은 링컨 무덤을 찾아 나섰다. 링컨이 연하의 젊은 변호사 윌리엄 헌던과 동업한 변호사 사무실은 시내 중심가에 있는 옛 의사당 건너편에 있었다. 이 역시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1865년 4월19일 백악관에서 링컨의 장례식이 치러진 다음 영구차가 고향인 스프링필드에 도착한 것은 5월3일이었다.

    링컨의 죽음을 전해 듣고 충격과 비탄 속에서도 고향의 유지들은 그의 장지는 스프링필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즉각 위원회를 구성해 땅을 매입하고 부인 메리 링컨을 설득해 그녀의 동의를 얻어냈다. 주 의사당에서 마지막 장례 의식이 치러진 다음 링컨의 유해는 오크리지 묘지에 안장됐다.

    링컨 묘소는 오크리지 묘지의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묘소의 중앙에 117피트의 거대한 화강암 첨탑이 솟아 있고, 그 전면에 링컨의 동상, 그리고 사면에 보병 기병 포병 해병을 표상하는 상징물이 탑을 장식하고 있다. 묘소 입구 쪽에 사우스다코타 주 러슈모어 산의 대통령 두상을 조각한 보글럼(Gutzon Borglum)이 제작한 링컨의 청동 두상은 참배객들의 손길로 코 부분이 반들반들해졌다.

    묘소의 기단은 그의 죽음을 애도해 멀리 로마의 시민들이 기증한 자유의 돌로 만들어졌다. 유해를 안치한 묘실로 들어서니 링컨의 이름과 생몰 연도가 새겨진 붉은 대리석 묘가 성조기와 여러 주의 깃발에 둘러싸였고, 그 뒤쪽 벽면에는 “그는 영원에 속한다(He belongs to the ages)”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링컨의 임종을 지킨 국방장관 스탠턴(Edwin Stanton)이 그가 숨을 거두자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혹자는 마지막 단어가 ‘천사(angels)’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구절은 내겐 벤 존슨이 셰익스피어를 두고 한 말 “그는 한 시대에 속하지 않고 모든 시대에 속한다(He was not of an age, but for all time!)”를 연상시켰다. 스탠턴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링컨은 한 시대의 지도자로 그치지 않고 인류의 영원한 사표로서 숭앙되고 있으니, 그의 역사적 소명을 이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미국 정신의 압축, 게티즈버그 연설

    링컨의 신화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게티즈버그 연설이다. 이 세기의 명연설은 그 신화가 단순히 비극적 죽음에 의해 촉발된 동정의 미학으로 윤색된 것만은 아님을 분명히 말해준다. 게티즈버그 연설은 민주주의 체제를 간결명료하게 정의한 것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로 인구에 회자되어왔다. 그러나 이 연설은 이보다 훨씬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역사가 개리 윌스(Garry Wills)는 그의 명저, ‘게티즈버그의 링컨’(Lincoln at Gettysburg, 1992)에 이렇게 썼다.

    게티즈버그 연설은 이제 미국 정신의 권위 있는 표현이 되었다. 그것은 독립선언문 자체만큼이나 권위를 갖게 되었으며 우리들로 하여금 독립선언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이냐를 결정해주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영향력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링컨의 연설은 펜실베이니아와 메릴랜드 경계 부근의 게티즈버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사망한 전몰장병을 위한 묘지 봉헌식에서 행해졌다. 주지하듯 게티즈버그 전투는 남북전쟁의 판도를 바꾼 중요한 전투이다. 미드(George Gordon Meade)가 거느린 북부연방군 9만3000명과 로버트 리가 지휘하는 남부연합군 7만의 병사가 대치해 7월1일부터 3일까지 싸운 이 전투에서 2만3000명의 연방군과 2만8000명의 남부연합군 등 도합 5만1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특히 7월3일의 ‘피켓 돌격전’에서만 1시간 동안 5000명이 사망했다. 이제까지 북미대륙에서 벌어진 단일 전투에서 이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낸 경우는 없다. 남부군은 결국 버지니아로 퇴각했는데, 이후로 북부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지 못했다. 전쟁은 그 뒤 2년여 동안 계속됐으나 남부는 게티즈버그 전투의 패배로 입은 손실을 결코 만회하지 못했다.

    4월의 게티즈버그는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로 나른한 분위기였다. 2003년 4월 4일, 나는 존 브라운의 성지 하퍼스 페리를 둘러보고 피츠버그로 가는 도중에 게티즈버그에 들를 기회가 있었다. 뉴욕의 저명한 조경건축가 윌리엄 손더스의 설계로 1869년에 완공된 게티즈버그 묘지(Gettysburg National Cemetery)는 미국 최초의 국립묘지다. 게티즈버그 시 남쪽 언덕에 자리잡은 묘지의 중앙에는 전몰장병추모탑 (Soldiers National Monument)이 높이 서 있다.

    제노아의 콜럼버스 기념비를 모델로 하여 세운 추모탑의 상부를,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평화의 화환을 두른 자유를 상징하는 인물상이 장식하고 있고, 기둥 아래쪽에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 결말 부분이 새겨져 있다. 오늘날 게티즈버그 묘지는 게티즈버그 시와 그 일대 전쟁터 전역을 포괄하는 5733에이커에 이르는 방대한 게티즈버그 국립군사공원의 일부이다.

    이 공원 내에 35개의 박물관과 1000여 개의 각종 추모탑과 기념비가 산재해 있고, 전쟁터를 돌아보는 도로의 길이만도 총 35마일에 이르니,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방대한 규모다. 게티즈버그 묘지로 들어가는 입구 쪽에는 1912년에 건립된 링컨 연설 기념비(Lincoln Speech Memorial)가 서 있다. 중앙에는 부시-브라운이 조각한 링컨의 흉상이 자리잡고 있고 그 양편에 연설문 전문이 새겨 있었다.

    링컨은 연설 벽두에 미국이 “자유 속에서 잉태되고 만인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명제에 봉헌된” 나라임을 상기시켰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탄생한 미합중국은 단순한 정치적 연합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임을 환기시키는 표현을 다섯 번이나 반복했다. 링컨은 어떤 주도 독자적 동기만으로 연방에서 합법적으로 이탈할 수 없다고 이미 1기 취임사에서 밝힌 바 있지만, 그는 전쟁기간 시종일관 이 주장을 견지했다.

    라일락꽃처럼 부활하라

    남부는 연방정부의 권한을 제한하고 주 자주권을 보장한 1789년의 헌법을 근거로 연방 탈퇴를 정당화해왔다. 그러나 링컨은 국가라는 개념은 1776년 독립선언과 더불어 정립된 것이기 때문에 헌법에 제시된 주의 자율권보다 선행한다고 믿었다. 대니얼 웹스터와 같은 북부의 정치가들이 자유와 합중국은 영원히 분리할 수 없다고 말한 것도 같은 논거에서다. 링컨이 연설 벽두에 독립선언의 기점을 특별히 언급하고 독립선언서를 인용한 것은 그 때문이다.

    또한 링컨은 미국이 헌법에서 보장된 자유뿐 아니라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이상에 기초를 둔 국가란 점을 재확인함으로써, 전장에서 죽은 장병들의 죽음의 대의가 결국 평등의 수호에 있음을 천명한 셈이다. 이는 1863년 1월 1일을 기해 반포된 노예해방령의 정신과 합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링컨은 전쟁의 목적이 이제 연방을 구하면서 동시에 노예제의 폐지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링컨이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죽은 장병들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어느 쪽 군대였는지 밝히지 않은 점도 특기할 만하다. 그는 남부연합군에 대한 원망의 감정도 연방군에 대한 승리의 찬사도 내비치지 않았다. 전사자는 어느 쪽이든 그가 일찍이 ‘지상 최상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규정했던 민주주의, 곧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치체제의 정착을 위한 대의의 희생자인 것이다. 그는 아직 시체가 뒹굴고 있던 전쟁터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참상을 소소한 이해관계의 차원을 넘어서서 인류가 지향하는 보다 원대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으로 승화시켰다.

    게티즈버그 연설은 실로 미국의 미래를 바꿔놓은 조용한 혁명이었다. 이를 계기로 법리적 논쟁의 대상이던 국가가 개별적인 주보다 앞선다는 명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항구적인 정치 원리로서 미국적 전통의 일부가 되었다. 그 짧은 시간에 몇 마디의 문장으로 이런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은 정확한 어휘, 명석한 논리, 그리고 절제된 문체가 만들어낸 언어의 기적이었다.

    연설 기념비 앞에 서니 유난히 카랑카랑했다는 링컨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마침 어디선가 알 수 없는 새소리가 들려왔다. 당대의 시인 월트 휘트먼은 링컨의 죽음을 애도한 유명한 시, ‘라일락 꽃이 마지막으로 뜰에 필 때’에서 그의 죽음을 서쪽 하늘에서 반짝이는 샛별이 떨어진 것에 비유하고, 그는 죽었으되 4월이면 늘 피어나는 라일락 꽃처럼 죽음을 딛고 부활할 것이라고 노래했다.

    휘트먼은 또한 어디엔가 숨어 있다가 라일락 향기에 취한 듯 지저귀기 시작하는 지빠귀의 노래 소리를 들으면서 링컨의 불멸을 확신했다. 그 새소리 또한, 그의 연설문에 자극되어 먼 동방에서 찾아온 나에게, 하늘이 전하는 메시지처럼 들렸다. 그의 진실이야 무엇이든, 그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불멸의 존재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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