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호기 1949년에 태어나셨습니다. 광복 70년과 삶의 궤를 같이해왔다고 볼 수 있는데요.
유홍준 광복 70년이 뚜렷한 실체로 다가오는 것은 별로 없어요. 예를 들어 4·19가 60년이 됐다고 하면 다가오는 게 있겠지요. 그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광복은 내게 역사적인 것이기 때문에 생활 체험으로서의 감회는 없고 3·1운동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거리로 들어와요. 역사적인 거리가 있다고 해서 물론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요. 일제강점기 식민 잔재 청산을 해결하지 못해 지금까지 문제가 되는 것들을 이제는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대학 시절과 글쓰기 체험
김호기 연보를 보니 서울에서 태어나 청운초등, 경복중, 중동고, 서울대 미학과를 다니셨는데요. 대학 시절을 돌아보면 무엇이 먼저 생각나시는지요.
유홍준 우리가 낭만적인 아카데미 분위기에서 대학을 다닌 마지막 세대가 아닌가 싶어요. 서울대 문리대가 있던 ‘동숭동의 미라보 다리’라고 하는 개천가, 학림다방이 떠오르고, 마로니에 그늘 아래 벤치에서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등 책도 함께 보고 토론하던 게 기억나요. 1969년 3선 개헌 때는 데모하다 끌려가고 무기정학을 받았어요. 낭만적인 세대였지요.
대학 4년 동안 교수들한테 영향 받은 건 별로 없었고, 선배와 친구들로부터 배웠어요. 김윤수 교수가 유일하게 학생들과 소통하던 선생님이었는데, 시간강사로 출강하면서 정릉에 있는 선생님 댁에 자주 찾아갔어요. 당시 문리대에서 발간한 ‘형성’이라는 잡지에 안병욱, 최재현, 하영선 등 훗날 대학에서 활동하게 된 좋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어요. 지성이 살아 있는 분위기였죠.
김호기 우리 사회에서 글을 가장 잘 쓰는 문필가 중 한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글쓰기는 언제 처음 하셨는지요.
유홍준 훈련을 따로 한 적은 없고, 두 가지가 중요했어요. 하나는 대학 다닐 적에 선언문을 많이 쓴 경험이고, 다른 하나는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지 잡지 ‘공간’과 ‘계간미술’에서 일한 체험이에요. 잡지의 장점은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이 만나는 지역이라는 점이에요. 아카데미즘이 가진 체계성과 저널리즘이 가진 현실성을 결합하는 방법을 배웠지요.
개인적으로는 ‘문장’에 실린 정지용, 김기림, 이태준 글을 좋아했어요. 지금도 복간된 19권을 다 갖고 있어요. 특히 이태준의 글은 참 명쾌했어요. 이 사람들의 글에 모더니즘, 민족주의, 진보주의가 절묘하게 깔렸다는 것을 느꼈어요. 김용준, 백낙청, 염무웅, 리영희의 글도 좋아했어요. 훈련을 따로 한 것은 아니고 우리 시대에 적합한 어법이랄까, 그런 것을 찾았던 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와 같은 책을 쓰게 한 것 같아요.
“문화사의 꽃은 미술사”
김호기 그동안 선생의 학문적, 대중적 활동을 돌아보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듯합니다. 한국 미술사 연구가 한 축이라면, 문화유산을 포함한 전통의 재발견이 다른 한 축을 이뤘습니다. 미술사 연구를 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유홍준 미술평론가로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한 게 1984년이었어요. 당시 미술대학에 현대미술, 서양미술사, 동양미술사는 정규 과목으로 있는데, 한국미술사는 과목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1984년 서울대, 홍익대, 이화여대 미술대학에 포스터를 한 장씩 붙여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라는 공개강좌를 한다’고 광고했어요. 신촌의 한 대안문화 공간에서 시작했지요. 그 강좌를 해마다 거르지 않고 1990년대까지 했어요.
문화사를 쓰려면 미술사가 70~80%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부르크하르트, 하우저, 곰브리치 등 최고의 문화사가들은 미술사가들이기도 하지요. 인문학의 꽃이 문화사라면 문화사의 꽃은 미술사라고 생각했고, 한국미술사를 올바로 쓰는 게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우리 역사상을 보여주는 것이자 우리 정체성을 확립하는 길이라고 일찍이 생각했던 셈이에요.
김호기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도 거의 절반은 문학이고 나머지 절반은 주로 미술입니다. 문학보다는 르네상스에서 인상주의에 이르는 미술에 관한 내용이 제겐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서양 친구들에게 예술은 곧 미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유홍준 그렇게 중요한 장르를 그동안 우리는 잃어버리고 있었던 거죠. 나는 미술사를 통해서 우리 문화사를 이야기할 적에 온 국민이 올바른 미술관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미술사를 연구하고 발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게 학문적인 목표예요. ‘100만인을 위한 수학’이라는 책이 있듯이 ‘100만인을 위한 한국 미술사’라는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지금까지도 갖고 있어요.
한국인이 그 책만 읽으면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책 말이에요. 역사는 유물을 낳고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역사를 기억할 때는 유물과 함께 기억해라, 그러면 시대상이 보이는 법이지요. 미술사가 문화사와 생활사에서 가장 중심이 된다고 생각하고 공부해온 게 문화유산 답사기로 나온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