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호

김준·장우·박상규·차도균 ‘포다이나믹스’

따로 또 같이…절대화음에 실어온 40년 우정

  • 윤필립 在호주 시인 phillipsyd@naver.com

    입력2007-06-04 17: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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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80년대 중장년층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던 ‘포 다이나믹스’는 40년을 이어온 우리나라 최장수 보컬그룹이다. 때론 함께 모여, 때론 솔로로 ‘따로 또 같이’ 활동하며 남다른 우정을 이어온 가인(歌人) 김준, 장우, 박상규, 차도균 네 사람이 호주 시드니에서 뜻 깊은 공연을 했다.
    “사람은 태어나고 성장한 곳에서 한 생을 살다가 죽는 게 가장 행복하다. 그곳에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다.”

    -1942년, 브라질에서 자살한 오스트리아 출신 전기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김준·장우·박상규·차도균 ‘포다이나믹스’

    왼쪽부터 김준, 박상규, 장우, 차도균.

    육지가 그리워서 해종일 출렁거리는 바다, 그 바다를 기꺼이 가슴에다 끌어안은 물항(港) 시드니. 바다가 그리워서 한달음에 달려온 내륙의 바람 한 줄기가 깔깔대며 파도타기를 하는 호주대륙의 동쪽 끝.

    시드니 하버의 물결이 해거름의 비낀 햇살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물결에 실려 함께 출렁거리던 마음 하나. 바다 건너 산하를 그리워하는 어느 한국 남자가 ‘해변의 길손’이 되어 천천히 걸어가는 동안 시드니의 가을이 속절없이 깊어가고 있었다.

    정신을 삼켜버린 물질의 시대에 부대끼면서 21세기 들머리의 ‘우울’을 앓고 있는 것일까? 절대고독에 시달리면서도 길모퉁이 선술집에 마주 앉아 술잔 기울일 친구 하나 없는 그 남자가 발길을 시내 쪽으로 돌려 허청허청 걸어갔다.



    서울 중심부에 서울시청이 있듯이 시드니 중심부에 시드니 타운홀(시청)이 있다. 시드니의 대소사를 치르는 장소이기도 하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과 2004년 독일월드컵이 열리는 동안 시드니 타운홀은 축제의 중심이었다.

    터벅터벅 흐릿한 도회의 빌딩 그림자를 등에 지고 타운홀을 향해 걸어가는 길, 사시사철 녹음이 짙은 시드니지만 조지 스트리트의 숱한 가로수가 갈빛 잎사귀를 떠나보내고 있었다. 문득 아득해졌다. 그러나 한 시절 푸르렀다 가뭇없이 사라지는 것이 어디 나뭇잎뿐이랴.

    ‘내가 차마 나를 버리지 못할 때면

    나무는 저의 잎을 버려

    버림의 의미를 알게 해주었다’

    가을나무의 정취가 물씬 묻어나는 시구 하나를 읊조리며 당도한 시드니 타운홀, 그곳에서 귀에 익은 노래들이 들려왔다. 혼자 부르는 노래가 아니었다. 시드니의 가을을 닮은 60대 중반의 한국 남자 네 명이 부르는 노래, 그 정겨운 하모니가 시나브로 타운홀 석조계단에 내려앉았다. “그래, 이런 게 바로 우정이야”라고 속삭이듯.

    단 한 명의 관객을 위한 공연

    김준, 장우, 박상규, 차도균. 네 명이 함께 부르는 게 분명한데 마치 혼자 부르는 것처럼 절대화음이었다. 그들은 가끔씩 허공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 소중한 것을 붙잡아서 다정한 포즈로 친구에게 전해주는 것 같은 동작을 취하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남자는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네 사람이 몹시 부러웠다. 남자는 텅 빈 타운홀 객석에 혼자 앉아 그들이 불러주는 노래에 오롯이 젖어들었다. 자기들의 변함없는 우정을 담아낸 듯한 ‘오랜 세월 하나같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들으면서, 남자는 속울음을 울기 시작했다.

    네 사람은 이어서 영화 ‘모정(慕情)’의 주제가 ‘사랑은 정말 눈부신 것(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을 불렀다. 그러나 그 모정의 대상은 사랑하는 연인이 아니었다. 함께 노래 부르는 친구들이었다.

    김준·장우·박상규·차도균 ‘포다이나믹스’

    2000여 한인이 모인 가운데 열린 포다이나믹스 공연은 호주 한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추억과 젊은 시절을 회상하게 해준 뜻깊은 시간이었다.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

    사랑이란 정말 근사한 것이지요,

    It’s the April rose

    사랑은 4월의 장미

    That only grows in the early Spring

    오직 이른 봄에 피어나는 꽃이랍니다

    Love is natures way of giving,

    사랑이란 소중한 걸 건네주는 자연스러운 방식이지요,

    A reason to be living,

    사랑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랍니다,

    The golden crown that makes a man, a king

    사랑은 평범한 사람을 왕으로 만드는 금관이지요

    그들은 불 꺼진 타운홀의 구석진 객석에 앉아 입술을 꼭 깨물고 있는 남자의 무량한 부끄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번엔 ‘친구야, 친구’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여보게 친구, 웃어나 보게~”

    그렇게 단 한 명의 관객을 위해서 3시간 동안 이어진 ‘공연’이 끝나고, 객석에 불이 들어왔다. 한 명의 관객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반주하느라 수고한 밴드멤버들에게 고맙다며 악수를 나누는 네 사람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두 시간의 공연을 준비하면서 늘 이렇게 리허설을 하느냐?”고.

    그러자 그날의 공연순서를 짜고 연습을 리드한 장우씨가 “이곳이 처음 서보는 무대라 꼼꼼하게 리허설을 했다”고 대답했다. 정확하게 공연 1시간30분 전이었다.

    어둠이 내린 시드니 타운홀의 석조계단 앞쪽으로 이어진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마침 한국의 어버이날을 이틀 앞두고 부모를 모시고 온 가족 단위 청중이 주를 이뤘다. 호주는 5월 둘째 일요일이 어머니의 날(mother’s day)이고, 11월 첫째 일요일이 아버지의 날(father’s day)이다.

    “김 선생님, 안색이 좀 안 좋아 보이네요. 노래 좋아하시니까 오늘 밤에 노래기운 좀 받으세요.”

    “○○엄마, 김준 팬이라면서? 나는 장우의 묵직한 저음이 참 좋은데.”

    “구 회장, 왜 오늘은 혼자야? 부인께서 서울 가셨나?”

    구 회장의 부인은 올 초에 타계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시드니 동포들의 들뜬 음성들 사이로 그렇게 쓸쓸한 얘기도 함께 들려왔다. 어르신들과 중년 엄마 아빠의 가슴에는 붉은 카네이션이 한 송이씩 꽂혀 있었다. 공연을 주관한 시드니 소재 문화이벤트 업체 (주)소피아 스포렌 직원들과 문화를 사랑하는 한인동포단체인 ‘문사모’ 회원들이 마련한 카네이션이었다. 이날의 공연 타이틀도 ‘어버이를 위한 孝 · 팝재즈’였다.

    포다이나믹스를 기억하나요?

    고풍스러운 석조건물인 타운홀은 겉모습뿐만 아니라 홀 안쪽의 장식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특히 시드니 타운홀의 파이프오르간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어 독일 출신의 카를 하스 같은 세계 정상급 연주자가 이곳에서 녹음을 해 음반을 내기도 했다. 지난해 같은 장소에서 공연한 가수 윤형주씨는 “미국의 카네기홀보다 더 좋다”며 극찬했다. 오페라하우스가 현대적 감각의 공연장이라면 타운홀은 18세기 식민지시대의 화려함과 정교함을 자랑하는, 호주에서도 손꼽는 공연장이다.

    ‘포다이나믹스(Four dynamics)’를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포다이나믹스는 1969년 펄씨스터즈 공연에 함께 출연한 것이 계기가 돼 노래동아리를 결성, 오늘에 이른 한국 최장수 보컬 팀이다. 포다이나믹스라는 이름은 경음악평론가 이백천씨가 붙여줬다.

    김준·장우·박상규·차도균 ‘포다이나믹스’

    공연이 열린 시드니 타운홀. 고풍스러운 석조건물로 특히 이곳의 파이프오르간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전기기타가 주축이 된 한국 최초의 그룹사운드 ‘키보이스’의 리드싱어 출신 차도균, 쟈니브라더스 출신의 김준, ‘코코브라더스’의 멤버였던 장우와 박상규가 의기투합해 만든 문자 그대로 다이내믹한 팀이다. 이들은 이미 솔로로서 입지를 굳힌 멤버들이 각자 활동하다가 필요할 때 만나서 공연하는 스타일의 ‘따로 또 같이’ 그룹이다.

    차도균씨는 “38년 동안 포다이나믹스를 유지해온 비결이 거기에 있다”면서 “사람은 묶어놓으면 일탈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게 마련인데, 마음껏 솔로로 활동하다가 그리울 만하면 모이는 식이라 늘 새로운 느낌으로 만날 수 있다”고 했다.

    무대에 오른 네 사람은 ‘오랜 세월 하나같이’ 등을 부르기 시작했다. 타운홀을 가득 메운 청중의 반응은 뜨거웠고 넷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맨 먼저 박상규가 단독무대에 섰다. 네 사람과 이번 공연에 동행한 임희숙, 채은옥을 포함한 일행 중에서 유일하게 시드니와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이 박씨다. 그의 두 자녀가 시드니에서 유학한 것. 자식사랑이 유난한 박씨가 한 달에 한 번꼴로 시드니를 찾은 게 그를 ‘반(半) 한인동포’로 만들었다. 그는 노래뿐 아니라 재치있는 말솜씨로도 관객을 휘어잡았다.

    ‘따로 또 같이’ 어우러진 무대

    게스트 싱어로 동행한 ‘빗물’의 가수 채은옥의 정감 어린 순서가 이어졌고, 차도균이 마이크를 넘겨받아 자신의 히트곡들을 불렀다. 그가 ‘정든 배’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철없는 아내’ 등을 부르자 객석을 가득 메운 청중이 일제히 따라 불렀다. 그 다음엔 예상치 못한 무대가 펼쳐졌다.

    장우, 박상규, 김준이 무대에 나타나서 “레이 찰스가 시드니에 왔다”는 멘트를 날렸고, 검은 안경을 낀 차도균이 그랜드 피아노 뒤쪽에서 나타나 ‘I can’t stop loving you’를 열창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세 사람은 백 코러스가 돼서 진짜 레이 찰스의 무대를 방불케 했다. 바로 그 대목에서 공연 전날 장우씨가 호텔방 인터뷰에서 한 말이 떠올랐다.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지 않으면 40년은커녕 10년도 이어가기 힘든 게 개성 강한 연예인들의 우정이다. 우린 그룹 활동 못지않게 솔로 활동을 많이 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필요한 사람에게 아낌없이 도움을 준다.”

    ‘영원히 마르지 않는 재즈의 샘’ 김준의 순서는 아주 특별했다. 그가 부르는 1960~70년대의 재즈 히트넘버들을 듣다보니 마치 그 시대의 뉴올리언스나 뉴욕 브로드웨이의 재즈카페에 앉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곧 한국에는 여름이 올 것”이라는 멘트와 함께 부른 ‘서머타임’은 재즈의 진수를 맛보게 했다. 그동안 필자가 들은 수십 개의 ‘서머타임’ 중에서 단연 최고였다.

    이어지는 임희숙의 무대. 특유의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 매너와 가슴을 파고드는 허스키 보이스에 청중은 흠뻑 빠져들었다. 한국 여자가수들 중에 저만한 가창력을 지닌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을 정도였다.

    깊은 바다만큼이나 그윽한 음성의 주인공, 그러면서도 감미롭고 정감 어린 노래를 들려주는 장우의 순서는 감동 그 자체였다. 특히 자신의 피아노 반주로 들려준 가스펠은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정서적 울림이 컸다. 아일랜드 민요 ‘대니 보이’의 가사를 개사한 가스펠이었는데, 그 노래를 듣다보니 그가 왜 목사가 됐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연의 대단원은 장우, 김준, 박상규, 차도균, 임희숙, 채은옥과 한인동포 청중이 어우러진 한바탕 축제마당이었다. 무대 앞쪽에 만들어놓은 임시 플로어에서 즉석 댄스파티가 열린 것. 이민생활의 고단함을 한방에 날려 보내는 ‘막춤’의 경연장이었다.

    ‘비움의 철학’으로 지켜온 우정

    그러나 세상만사가 다 좋을 수는 없는 것일까. 아니면 타운홀의 뮤즈 여신이 시기한 것일까. 그날 공연에서 ‘옥의 티’처럼 오디오가 말썽을 피웠다. 요즘 세상에 그게 무슨 얘기냐고 할지 모르지만, 타운홀엔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18세기 콜로니얼 풍으로 대형 홀을 짓다보니 천장이 엄청 높다. 거기에다 음을 흡수하는 목조건물이 아니고, 오히려 음을 반사하는 석조건물이다보니 앰프의 볼륨을 높이면 윙윙거리는 소리가 난다. 그날따라 정도가 좀 심했다. 해외공연의 특성상 공연자와 청중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걸 원만하게 진행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창작이나 퍼포먼스를 할 때면 극도로 예민해진다. 더욱이 2000명 가까운 청중 앞에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면 아주 작은 결함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리듬을 잃게 마련이다.

    그러나 포다이나믹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청중이 눈치채지 않게 음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애쓰면서도 환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런 일은 리허설 때도 있었다. 가수들은 도착했는데, 반주자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각자 발성연습을 시작했다. 시드니 타운홀의 천장이 들썩거릴 정도로 크게 내지르기도 하고 속삭이듯 허밍을 하기도 했다. 최선을 다하되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모든 상황을 수용하는 모습이었다.

    포다이나믹스는 마치 사막을 건너온 낙타처럼 세상을 단순하고 명료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 같았다. 호텔방과 로비, 시드니 길거리와 타운홀 객석에서 이어진 인터뷰를 통해서 필자가 받은 인상은 비움의 철학으로 이룩한 40년 우정이 참 그윽하다는 것이었다. 마음을 비우다보면 마음이 없어지고, 그렇게 계속 비우다보면 몸과 마음이 모두 없어진다는 무아의 경지. 결국 내가 없다는 의미인데, 장우씨가 얘기한 “나보다는 상대를 먼저 배려하는 마음”이 그런 경지가 아닐까 싶다.

    김준은 자신의 CD에다 ‘대통령도 부럽지 않은 딴따라 김준!’이라고 써놓았다. 그는 “대통령만 안 부러운 게 아니다. 그 어떤 재벌도 부럽지 않다. 재즈 선율에다 내 인생의 빛과 그림자를 담아내다 보면 나의 존재가 아주 선명하게 드러난다. 더욱이 나를 위해서 기꺼이 그림자 노릇을 해주는 친구들이 있고, 나 또한 그렇게 해줄 친구가 있으니 그 누가 부럽겠나”고 했다.

    김준과 재즈는 한몸이다. 그는 세상의 모든 음악을 재즈화하는 사람이다. 트로트(전통가요)와 민요까지 재즈 스타일로 부른다. 음악뿐이 아니다.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 또한 재즈이며 걸어가는 모습까지 재즈의 리듬을 닮았다. 수원여대 대중음악과 교수인 그는 가르치는 스타일까지 재즈적일 것 같다.

    “왜 그렇게 재즈에 목숨을 거느냐”고 우문을 던졌더니 “재즈가 그냥 좋다. 심장의 박동을 느끼게 해주는 재즈의 리듬과 그윽한 선율이 좋다. 피아노, 기타, 색소폰, 드럼 혹은 더블베이스의 단출한 구성으로 이 세상의 모든 정서를 담아낼 수 있어서 좋다”는 현답이 돌아왔다.

    “둘이 아닌 넷이라서 행복”

    본명이 김산현(金山鉉)인 김준은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서인지 그의 표정에서는 ‘소년시절의 원초적 슬픔’이 묻어난다.

    시드니 공연 날, 나이 든 청중이 가슴에 카네이션을 단 모습을 보면서 김씨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옆에 있던 장우씨가 “박상규 모친께서 돌아가셨을 때 김준이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모른다. 상주보다 더 슬퍼해서 우리마저 숙연해졌는데, 그게 다 사연이 있는 슬픔이었다”고 했다.

    김준은 우여곡절 끝에 가수로 성공했다. 1962년에 결성된 쟈니브라더스의 멤버가 돼 1967년까지 6년 동안 ‘빨간 마후라’ 등 당시 연속극과 영화주제가 대부분을 도맡아 불러 히트시키는 등 남성 4중창단의 황금기를 누렸다. 1968년에는 당시 최고의 쇼 프로그램인 ‘쇼쇼쇼’의 레귤러 그룹으로 매주 출연하는 인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그는 인기만을 위한 소비적인 음악활동보다는 어릴 적부터 가슴속에 품어오던 재즈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결국 1968년 7월 쟈니브라더스는 해체됐고, 김준은 미8군 무대에서 본격적인 솔로 재즈가수로 거듭났다. 이후 싱어 송 라이터로 활동하기 시작한 그는 지금도 서울 평창동에서 재즈카페를 운영하면서 끊임없이 재즈를 연주한다. 매년 음반을 낼 정도로 열정이 넘친다.

    박상규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조약돌’ 음반을 100만장 넘게 팔고 TV 프로그램 사회자를 10년 이상 맡는 등 최고의 인기를 누린 연예인이다. 게다가 타고난 입담을 무기로 한국 스탠딩 개그의 선구자가 됐다.

    스탠딩 개그든 TV 프로그램 사회든 순발력이 생명이다. 김준씨의 표현대로라면 박씨는 머리가 좋다. 그는 “박상규가 청중을 상대로 엇나가는 대화를 나누는 걸 듣다보면 처음엔 엉망진창인데 나중에 보면 완전하게 아귀가 맞는다. 나만 바보가 된 기분이 들 때가 여러 번 있었다”고 했다.

    ‘박상규를 웃기는 남자’

    박상규는 포크음악계의 전설적인 음악다방 ‘세시봉’에서 조영남, 윤형주, 이장희 등과 어울리며 젊은 나이에 포크뮤직 등의 세례를 받았다. 게다가 미8군에서 스탠더드 팝과 재즈 등을 훈련받았으니 탄탄한 기초를 닦은 셈이다. 오디션을 받고 들어간 미8군 무대는 그의 일터이기도 했지만 혹독한 훈련소 같았다고 회고한다.

    박씨가 가요계의 마당발로 통하는 것도 세시봉과 미8군 무대 출신이라는 데서 연유한다. 거기에다 10대 가수 출신답게 많은 히트곡을 갖고 있어서 교제의 폭이 넓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TV 사회자에다 친화력 넘치는 성품까지 지녀 대한민국 대중문화계를 망라하는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도 박씨는 “누구, 누구 해도 포 다이나믹스 멤버 이상은 없다. 그들은 잘 나갈 때나 그렇지 못할 때나 변함없이 등 기댈 수 있는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기운이 빠졌지만 우리 넷이 힘을 합하면 젊은 시절 못지않게 노래 부를 수 있다. 둘이서가 아닌 넷이어서 너무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장우는 타고난 멋쟁이다. 프랭크 시내트라를 연상케 하는 세련된 매너와 구강(口腔)의 공명을 최대한 활용하는 솜사탕 같이 달콤한 목소리로 청중을 황홀하게 만드는 마력을 지녔다. 그런데 그것만 보면 장우의 절반만 보는 것이다. 그는 개성이 강한 포다이나믹스를 조화롭게 아우르면서 실질적으로 그룹을 리드하는 강한 카리스마의 소유자.

    시드니 공연 때도 장우는 출연진의 공연순서와 청중과의 교류 순서를 종합적으로 구성했다. 커다란 종이에다 매직펜으로 순서지를 만드는 그는 마치 학예회를 앞둔 초등학생처럼 들뜬 모습이었지만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음악감독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가수생활을 포기할 뻔한 적이 있다. 1990년대 중반 목사안수를 받으면서 일부 교계인사들로부터 “목사가 됐으니 더 이상 세상음악을 하면 안 된다”는 압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동안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기도를 통해서 응답을 구했다. 기도의 응답은 ‘세상 속으로의 신앙전파’였다. 다시 말해 전도를 교회 안에서 하는 게 아니라 세상에 나가서 해야 하는데, 지나치게 경직된 신앙은 오히려 비효율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 나름대로 명료한 응답을 얻은 그는 ‘열린 신앙인’ 또는 ‘열린 목회자’로서 활동하고 있다.

    미8군 무대에서 주로 스탠더드 팝을 익힌 장우는 박상규와 함께 코코브라더스로 활동했는데, 한동안 ‘김준 · 장우’로 듀오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따로 또 같이’의 전형이다.

    늘 대중 앞에 서야 하는 연예인이면서도 개인적으로 만나면 몹시 수줍어하는 차도균은 뜻밖에도 네 사람 사이에서 ‘코미디언’으로 통했다. 장우씨는 “스탠딩 개그의 원조인 박상규를 웃기는 남자니까 천부적인 유머 감각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게 좀 문제가 있다”고 슬쩍 포문을 열었다.

    박상규가 기다렸다는 듯 “그건 ‘문제’가 아니라 슬픔이다. 그의 천부적인 재능이 마이크와 카메라 앞에만 서면 오간 데 없이 사라진다. 백만불짜리 코미디가 무용지물이 되는 건데, 그보다 원통한 일이 또 어디 있겠나”라며 혀를 찼다.

    “우린 행복합니다”

    차도균의 재능은 박상규를 웃기는 것뿐만 아니라 모창에서도 탁월함을 보인다. 알고보니 그의 모창경력은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키보이스’의 리드싱어로 미8군에서 노래 부를 때 비틀스의 노래와 미국의 서핑뮤직을 모창해 인기를 끌었던 것. 키보이스는 미8군에서 ‘한국의 비틀스’로 명성을 날렸다. 당시 키보이스의 멤버는 차중락(싱어), 김홍탁(리드기타), 옥성빈(리듬기타), 차도균(싱어 겸 베이스기타), 윤항기(드럼)였다. 아주 쟁쟁한 멤버들인데, 그 출발은 차도균과 윤항기의 만남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미8군에서 활동하던 1960년대 초반, 해병 군악대에 복무 중이던 윤항기를 가끔 만났는데 그가 그룹사운드를 만들자고 제의했다. 윤항기가 제대한 뒤에 미술학도인 사촌동생 차중락을 불러들이고 윤항기가 김홍탁, 옥성빈을 영입해서 키 보이스가 탄생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그룹사운드였다.”

    차도균은 요즘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일이 있다. 키보이스 1기 멤버들이 다시 모여 해체된 지 약 40년 만에 공연을 여는 것. 그는 “7월28일 부산시민회관에서 열리는 재회공연은 한국 최초의 그룹사운드가 다시 모인다는 점에서 대중가요사적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포다이나믹스’는 1960~70년대에 미8군에서 실력을 연마해 1970년대 중반 이후 ‘쇼쇼쇼’의 고정멤버로 쇼의 진수를 보여주는 등 198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다. 젊은 시절에도 돈독한 사이였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정이 더 깊어졌다. 사흘에 걸쳐 인터뷰하는 동안 네 사람으로부터 가장 많은 들은 얘기는 “우린 행복합니다”였다.

    김준·장우·박상규·차도균 ‘포다이나믹스’
    윤필립

    1954년 충남 부여 출생

    호주 Miller College of NSW(TAFE) 졸업

    한국 ‘시문학’, 호주 ‘MEAN-JIN’ 지로 등단

    2001년 WCP 문학상 수상

    저서 : 시집 ‘부끄러운 시들’ (공동), ‘시드니 랩소디’, 산문집 ‘시드니에는 시인이 없다’


    네 사람은 60대 중반으로 접어든 ‘젊은 할아버지들’이다. 그들은 9월25일에 열리는 ‘불우한 원로가수들 돕기 자선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박상규씨는 “우리는 그나마 운이 좋았던 셈인데, 둘러보면 고생하는 선배가 너무 많다. 부디 공연이 성공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박수갈채가 사라진 음악당처럼 적막한 곳이 또 있을까. 오랜만에 떠난 추억여행의 애틋한 감흥과 이런저런 아쉬움을 남기고 공연이 끝나자 남자는 또다시 혼자가 됐다. 그는 어둠에 묻힌 시드니 타운홀 뒷골목의 텅 빈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맥주 맛이 유난스레 썼다. 그렇게 시드니의 가을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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