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 강점기부터 6·25, 4·19, 5·16, 5공, 6공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군인, 학자, 외교관, 국회의원, 국무총리, 각종 사회단체장을 역임해온 강영훈 전 총리. 그의 삶은 곧 한국 현대사의 생생한 기록이다. 그가 들려주는 그때, 그 사람, 그 사건들.
한적하던 이 동네도 최근 뉴타운 바람이 불면서 조금 부산해졌다. 1, 2년 내로 이사를 가야 하는 게 아니냐고 강 전 총리는 걱정이 많다. 웬만하면 이 집에서 생을 마치고 싶다는 바람을 숨기지 않는다.
뒷집에는 초대 내무장관을 지낸 윤치영 선생이 사셨다고 한다. 강 전 총리가 5·16 후 반혁명으로 구속됐다 100여 일 만에 풀려났을 때 윤치영 선생이 그를 찾아와 “형무소가 자진해서 갈 데는 아니지만, 생각에 따라서는 거기서도 배울 게 있다”고 한 말을 그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고지식하고 고집 센 벽창호
1921년생으로 올해 87세인 강 전 총리가 지난 5월에 회고록 ‘나라를 사랑한 벽창우’를 펴냈다. 그 책에는 어린 시절 평안도 고향 이야기부터 광복 후 군에 들어간 과정, 6·25, 4·19, 5·16 등 한국의 현대사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먼저 회고록 출판 얘기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아 필요하면 보충설명을 하겠다며 큰아들 강성룡 변호사가 배석했다.
▼ 회고록을 쓰게 된 동기가 있나요.
“처음에는 순전히 가족적인 동기에서 시작했어요. 손자들에게 할아버지로서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나 광복이 되고 독립국가를 이뤄나갈 동안 우리 민족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주고 싶었지요. 또 하나, 내 한평생은 나 혼자만의 창작물이 아니라 수많은 분의 도움으로 이뤄졌다는 걸 깨닫고 그분들께 대한 사은(謝恩)의 마음을 담아 쓰게 된 거지요. 이건 일종의 도리(obligation)라고 생각했어요.”
▼ 회고록에 보면 1949년 12연대장 시절 옹진반도에서 치른 북한군과의 교전 당시 연락병 이름부터 여순반란사건 직전 광주에 머문 여관 이름까지 자세하게 나옵니다. 그걸 어떻게 다 외우고 계십니까.
“이번에 회고록 쓰면서 일기 안 써놓은 걸 후회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생활이 단순해 웬만한 건 다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이었지요.”
큰아들 강 변호사의 설명에 의하면, 강 전 총리가 회고록을 처음 준비한 것은 1985년 바티칸 주재 대사로 근무할 때였다고 한다. 바티칸 대사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아 시간 여유가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국회의원, 국무총리 등으로 일할 때는 엄두를 못 내다가 1994년 적십자 총재로 부임한 후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을 흔히 ‘벽창호’라고 한다. 이 말은 평안북도 벽동군과 창성군 사람 중에서 고집 센 사람을 일컫는 말로, 강 전 총리의 고향이 바로 평북 창성군이다. 압록강과 접한 국경지역으로 교통의 중심지였다. 벽창호의 고향답게 창성군과 벽동군에서 기르는 한우도 예로부터 힘이 좋고 동시에 말 안 듣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회고록 제목에 나온 ‘벽창우’는 여기서 따온 것으로 자신과 이미지가 닮았다고 한다.
그의 군대기록은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잘 안 되는 초고속 진급의 연속이다(건군 초기 장교들이 대개 그러했지만). 1946년 3월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해 두 달 만에 소위 계급을 달고, 2년 후에는 국방장관 비서실장이 된다. 그 후 연대장, 육군본부 인사국장, 군단 참모장, 사단장, 연합참모본부 본부장, 군단장, 육사 교장 등 1961년 강제 예편할 때까지 15년간 거의 모든 요직을 두루 맡는다. 그럼에도 그의 옛날 사진을 보면 예전의 장군답지 않게 홀쭉한 편이다. 평생 배 한번 나오지 않아 다이어트는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무슨 비결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평생 소식(小食)하고, 중학교 때 배운 테니스로 운동을 했다는 것.
최남선 “학병은 조선독립 첫걸음”
1960년 4월26일 성난 군중이 ‘서대문 경무대’라 불린 이기붕씨의 집에서 가재들을 꺼내 불태우고 있다.
최근 민족문제연구소가 내놓겠다고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등에는 육당이 빠지지 않는다. 육당은 독립선언서 기초를 이유로 징역 2년 반을 언도받았으나 이듬해 풀려난다. 그 후 총독부 조선사 편찬위원, 총독부 중추원 참의 등을 거쳐 1943년에는 학병권유에 적극 나선다. 결국 이 때문에 1949년 친일반민족행위로 기소됐으나, 병보석으로 석방되고 다음해 6·25가 나면서 흐지부지된다. 육당 자신이 광복 후 친일반민족행위로 기소돼 있을 때 써낸 자술서에 따르면 “학병 권유는 민족의 기간요원을 양성하기 위한 좋은 기회”라고 했다. “젊은 청년들이 조직과 전투에 능한 사회 중핵층을 형성하게 하여, 다가오는 신운명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강 전 총리도 육당은 결코 친일파가 아니라고 말했다.
“육당은 우리 민족이 살기 위해 친일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 어떡하면 우리가 힘을 길러 독립하는가를 고민하던 분입니다. 내가 건국대에 입학하던 날 육당 선생이 하신 말을 잊지 못합니다. ‘지금 일본 사람들이 내선일체니 동조동근이니 하는데 다 소용없는 말이다. 너희는 조선 사람임을 한시도 잊지 마라!’고 분명히 말했어요. 다만 학병 권유 때문에 친일파로 몰리는 건데, 우리한테도 학병 나가라고 했어요. ‘그게 조선독립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이 좋은 기회를 살려야 한다’고 말했어요.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나는 지금도 육당이 일본에 충성하기 위해서 학병 권유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운이라고 할까, 학병으로 갔지만 그는 훈련을 마치고 육군 견습사관으로 일본 센다이에 있다 종전(終戰)을 맞는다. 전투는 구경도 못하고 끝난 셈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때의 경력을 발판으로 다음해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서 바로 장교가 된다. 이북 고향을 찾아가기 위해서라도, 나라의 장래를 봐서라도 군인이 되는 게 가장 좋겠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의 학병 동기로는 전해종 전 서강대 교수(역사학)가 있다. 그와 전 교수는 4개월간 신병훈련을 같이 받으며 우의를 쌓는다. 그가 1949년 처음 1사단 12연대장을 맡았을 때, 전임 연대장은 광복군 국내지대 참모장으로 있다가 광복 후 귀국한 전성호 장군이었다. 전해종 교수의 아버지였다. 묘한 인연이다.
“이기붕은 부모처럼 모시던 분”
4·19 혁명은 1960년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28일 이화장으로 물러나면서 마무리됐다. 그러나 실제는 4월28일 새벽 경무대 부속가옥에서 이기붕 국회의장 일가족이 자결하면서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당시 일부 언론은 이 의장 가족이 강영훈 6군단장에게 일시 피난 보호를 요청했으나, 강 군단장이 이를 거절해 그 사건이 일어났다고 보도했다. 강 전 총리는 이 때문에 한동안 여러 사람으로부터 의리 없는 사람, 몰인정한 사람이라는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과연 강 전 총리와 이 의장은 어떤 사이였을까. 왜 하필이면 그에게 피난 요청을 했을까.
1948년 정부 수립 후 초대 국방장관은 이범석 국무총리가 겸임했다. 몇 달 후 국방장관은 신성모씨로 바뀌었고, 1951년 5월에는 이기붕씨가 국방장관이 됐다. 강 전 총리는 당시 국방부 예산관리국장 겸 병기행정본부장이었다. 경리, 관리, 병기 3국의 실무책임자였으므로 장관과는 업무상 밀접한 사이였다.
그 무렵 국회에서 국방예산 심의를 놓고 강영훈 국장과 국회의원들 사이에 고성이 오갔다. 전시이므로 예산을 제대로 배정해달라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국회 국방위원들이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자 주무국장으로서 잠시 발끈한 해프닝이었다. 어쨌든 국회에서 무례한 행동을 했으므로 그는 책임을 지겠다며 장관에게 국장직 사의를 표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기붕 장관은 “잘했어. 젊은 장교들이 그만한 용기쯤은 있어야지. 그만두기는 왜 그만둬”라며 오히려 위로했다고 한다.
이 의장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부정적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사실상 권력을 사유화한 1공화국의 최고 실력자였다는 평이다. 그러나 강영훈 전 총리는 뒷날의 평가에 관계없이 이기붕 의장은 성품이 온화하며 이해심이 많고 부하를 쓰면 믿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1989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 김재순 국회의장과 환담하는 강영훈 총리(왼쪽).
“처음에는 창동에 있는 검찰총장 별장을 목적지로 서대문 관저(현재 4·19도서관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 가보니 전화가 없어 다시 포천 6군단까지 오게 됐다고 하더군요. 일단 군단장 숙소로 모셨는데 다음날 사태가 안정되니까 이 의장 가족은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4월25일 대학교수들이 거리로 나서면서 시위가 격화되니까 다시 나를 찾아왔어요. 그 무렵 시위대가 이기붕 의장 잡으러 미아리고개를 넘었다는 보고도 있어 임시로 부군단장 숙소로 모시고 나는 다음날 원주 군사령부 회의에 갔습니다. 그동안 경무대(현 청와대) 경관들이 이 의장 가족을 모시러 와서 경무대로 갔다가 일가족 자살로 끝난 것이지요.”
그가 후일 듣기로는, 이승만 대통령이 김정렬 국방장관에게 이 의장 가족의 미국 망명을 지시하고, 경무대 경찰에게는 6군단에 머물고 있는 이 의장 가족을 경무대 경내로 안내하라는 지시를 했다고 한다. 이기붕 의장의 미국 망명을 놓고 김 국방장관이 미 대사와 가진 면담은 4월27일 밤 10시에 끝났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일찍 이 대통령이 이 의장에게 이 사실을 알릴 예정이었는데, 밤사이 이 의장 가족이 자결했다고 한다.
“내가 부모처럼 모시던 분인데, 어떻게 우리 부대에서 쫓아내겠어요? 돌아가신 분을 놓고 왈가왈부할 일도 아니어서 그동안 가만있었던 거지요.”
“5·16은 일어나선 안 될 일”
4·19 후 그는 1군 사령관으로 나가는 이한림 장군의 후임으로 육사 교장이 된다. 그리고 거기서 5·16을 맞는다. 군인으로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가 ‘반혁명’으로 몰려 구속된 것은 5·16의 성패를 좌우하는 육사생도 혁명지지 시가행진을 막았기 때문이다. 이한림 1군사령관, 김형일 육군참모차장과 함께 그의 처남인 김웅수 6군단장도 이때 같이 구속된다.
▼ 군에 있을 때 박정희 장군과는 같이 근무한 적이 없었나요.
“내가 6군단장일 때 박 대통령이 1군사령부 참모장이었어요. 그런데 6군단은 작전상 미1군단의 지휘를 받았기 때문에 군사령부와 크게 부딪칠 일이 없었어요.”
▼ 5·16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장면 정권이 무능했기 때문이지요. 미군이 있는데, 미군의 지휘통제를 받는 한국군이 어떻게 쿠데타를 할 수 있느냐는 안이한 태도가 쿠데타의 가장 큰 성공 원인입니다. 군인들끼리도 그때 조금 위험한 거 아니냐 하는 얘기만 주고받다 만 거지요. 지도자는 어떤 위험에도 대처해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지금은 5·16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지요. 그러나 당시 정치상황으로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봅니다. 정도(正道)는 아니지만, 그 후 한국의 산업화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합니다.”
1962년 초 그는 이한림, 김형일, 최석, 황헌친 장군 등과 함께 유엔군사령부로 오라는 통고를 받는다. 군사혁명을 반대한 퇴역장군들에게 미 국방부에서 1년간 미국 대학 유학을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받은 것.
처음 1년은 뉴멕시코 주 앨버커키에 있는 뉴멕시코주립대학에서 보낸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3년 남가주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공산주의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채용돼 본격적인 미국생활을 하게 된다. 부인이 이때 미국으로 오고, 그해 10월에 큰아들이 합류한다. 딸과 둘째아들은 1967년에 미국으로 건너와 온 가족이 모이기까지는 5년이 걸렸다.
“노태우는 자잘하지 않다”
박 대통령과의 불편했던 관계는 1969년에 풀린다. 닉슨 미 대통령과 회담하기 위해 그해 8월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한 박 대통령이 노신영 LA총영사를 통해 강 전 총리에게 “도울 일이 있으면 연락하시라”는 사신(私信)을 보낸다. 한국문제연구소 개설로 분주하던 그는 고심 끝에 박 대통령에게 재정지원을 요청하는데, 그는 이 때문에 나중에 여러 뒷말을 듣게 된다. 그의 한국문제연구소가 유신정부의 대미(對美) 로비활동을 했다는 비판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이 연구소가 펴낸 계간지 ‘저널 오브 코리안 어페어스(Journal of Korean Affairs)’를 보면 이런 주장은 당치 않다고 잘랐다.
1976년말 15년간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그는 귀국했다. 당초에는 국민대 학장직을 제의받고 왔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다음해 한국외국어대 대학원장으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1년 후 외무부 외교안보연구원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17년 만에 복귀한 공직이었다.
1990년 평양에서 개최된 고위급회담. 왼쪽 첫 번째가 강영훈 전 총리다.
전두환 정부 출범 후 강 전 총리는 영국 대사를 맡게 된다. 이 과정에는 그의 육사 교장 시절 제자이던 최창윤 전 총무처 장관과 박용옥 전 국방부 차관, 그리고 노신영 외무부 장관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자유민주주의의 발상지인 영국 대사를 맡는다는 건 외교관에게 커다란 영광으로 꼽힌다. 그는 후일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당시 제자 신세를 좀 졌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3년 반쯤 되던 때 대사관 직원 한명이 공금 5만달러를 횡령한 뒤 귀국명령에 불복하고는 가족과 더불어 미국으로 도주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감독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다. 정부는 이 문제를 덮고, 가톨릭 신자인 그를 바티칸 대사로 발령냈다. 그로서는 불감청고소원이었다.
그가 후일 노태우 정부 두 번째 총리를 맡은 것은 바티칸 대사 시절과 연관 있다는 말이 있다. 바티칸을 찾은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에게 강 대사가 전 대통령의 국정방향에 대해 쓴 소리를 했는데, 노 대표가 이때부터 그를 마음속으로 존경하게 돼 후일 총리로 기용했다는 이야기다. 이에 대해 강 전 총리는 기억에 없다며 선을 그었다.
그의 총리 시절(1988.12~1990.12)은 88올림픽 이후 각계의 욕구가 폭발적으로 분출되던 시기였다. 5공청산과 맞물려 노동계의 투쟁이 본격화했다. 그럼에도 정국은 여소야대와 대통령의 우유부단한 통치 스타일로 되는 일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는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부동산 가격이 본격적으로 널뛰어 분당, 일산 등에 신도시를 급히 만들던 때였다.
▼ 총리를 맡게 된 과정을 말씀해주시죠.
“당시 나는 13대 국회의 민정당 전국구 초선의원으로 있었어요. 그런데 12월 초 청와대로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대통령께서 국정 전반에 대해 의견을 듣고 싶다는 거였어요. 대통령께서 저더러 민정당 대표를 맡아달라는 겁니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거절했지요. 초선 의원이 어떻게 집권당 대표를 맡습니까. 그런데 그날 오후에 다시 부르시더니 국무총리를 맡아달라는 겁니다. 당시 총리감으로 강원룡 목사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특정 종교의 성직자에게 총리를 맡기는 게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해 제게 부탁한다는 겁니다. 나는 군대 외에 행정 경험이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대통령께서 ‘누구는 경험이 있어서 합니까? 하다 보면 경험도 생기는 것 아닙니까’라고 하면서 극구 권하시더군요. 미국에서 공부한 민주정치 발전이론을 현실에 적용해볼 수도 있겠다 싶어 수락한 겁니다.”
▼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별명이 ‘물태우’였지요.
“물은 세상의 근본이니 나쁜 뜻이 아니지요. 전임 대통령과 비교해 유하게 정국을 이끌어 그런 별명이 붙은 것 같은데 사실은 원칙주의자입니다. 총리에게 맡긴 일은 일절 터치하지 않았어요. 결코 자잘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또 저 자신은 언제든지 그만둘 각오로 소신껏 일했다고 자부합니다.”
‘김일성 주석 각하’
그에게 총리 시절 가장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 일은 3차례에 걸친 남북총리회담이라고 한다. 남북한 간에 총리급 회담이 열린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자신이 군인, 학자, 외교관 등을 지낸 것이 모두 총리회담을 준비하기 위한 과정이 아닐까 싶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총리회담 중 두 가지 일을 겪게 된다. 하나는 김일성 주석의 호칭 문제이고, 또 하나는 북한에 살던 누이동생을 만난 일이다.
▼ 김일성 주석과의 면담은 예정된 일이었나요.
“1차 서울회담 때 북한 연형묵 총리가 청와대로 노 대통령을 예방, 면담했기에 나도 평양에 가면 주석궁을 방문할 기회가 있겠거니 생각했지요. 2차 회담 이틀째인 날 오후 3시에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널찍한 홀을 지나 한참 걸어가니까 응접실같이 보이는 문 앞에 김 주석이 서서 기다리고 있더군요. ‘이 사람이 6·25를 일으킨 사람이로구나’ 생각하니 적지에서 적군 사령관을 만난 듯한 긴장이 느껴지더군요. 그러나 거만하거나 무례하지도 않았고 먼 길 온 친구를 맞아주는 촌로의 인상이었습니다.”
강 전 총리는 평양으로 떠나기 전 한 친구가 김일성을 만나더라도 문익환 목사처럼 껴안지 말라는 충고를 했다고 한다. 그런 충고에 관계없이 자신도 껴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고 한다. 다만 김일성 주석에 대한 호칭을 어떻게 하느냐가 고민거리였다.
전체 회담 일정을 보내는 동안 모든 절차는 상호주의 원칙에 따르자고 남북대표단 사이에 합의돼 있었다. 김일성 주석에 대한 예절도 연형묵 총리가 노 대통령에게 표시한 예절에 상응하는 정도만큼만 하자는 게 남측의 계획이었다. 또 국민감정을 고려해 김 주석에 대한 호칭은 ‘주석님’ 정도로 하고 각하란 호칭은 안 쓰기로 정했다. 그런데 대화 도중에 김일성이 “강영훈 총리 각하”라고 하는 바람에 그도 할 수 없이 ‘주석 각하’라는 호칭을 썼다고 한다. 상대가 그렇게 나오는데 자신만 옹졸하게 굴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당시 이 회담에 배석했던 김종휘 청와대 외교안보보좌관의 기록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 김일성 주석 : 총리회담을 위해 평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강영훈 총리 : 남측 회담 대표를 위해 바쁘신 시간을 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제가 서울을 떠날 때 노태우 대통령께서 김 주석님께 간곡한 안부 인사를 전하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 김일성 주석 : 고맙습니다. 총리 각하께서 돌아가시면 노 대통령께 감사하다는 말씀 전해주시기 바라며 또 내 안부 인사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 강영훈 총리 : 그렇게 하겠습니다. 주석 각하, 이번 총리회담에서는 연 총리의 환대를 많이 받았습니다만 회담 자체에 관해서는 아무 공동 담화문 같은 것을 내지 못해 유감이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나가면 발전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이하 생략)
김일성 주석에게 ‘각하’라는 호칭을 쓴 것에 대해서는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이 아니냐는 의견이 나올 만큼 민감한 문제였다고 한다.
여동생 이용한 北의 계략
강 전 총리의 가족은 6남매였다. 그는 1946년에 친구들과 함께 먼저 내려왔고, 부모님과 동생들은 2년 후인 1948년에 내려왔다. 그보다 세 살 아래인 여동생은 그때 이미 시집가 월남하지 않았다. 그런데 평양에서 열린 2차 남북총리회담 마지막 날인 1990년 10월18일, 밤 12시 가까운 시각에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보니 북측 연락관들이 한 할머니와 함께 서서 자신의 누이동생을 모셔왔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학병으로 나가기 전에 출가한 동생을 45년 만에 만난 셈이다.
만나기도, 안 만나기도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는 자신보다 10년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동생을 일단 방으로 들어오게 했다. 동생은 계속 울먹이는 소리로 “위대한 수령님 밑에서 잘살고 있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이 일은 다음날 북한 측이 우리 기자단에 슬쩍 흘리는 바람에 바로 ‘들통’났다. 언론은 재빨리 “이산가족 문제가 해결되기도 전에 총리가 동생을 비밀리에 만났고, 그 같은 사실을 비밀에 부친 것은 부도덕하고 공인으로서의 자격을 의심케 하는 행위”라며 비판했다. 강 전 총리는 이에 대해 10월19일 평양에서 돌아오자마자 예정된 대통령 보고를 하고 난 다음에 국민에게도 발표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북한 측은 당시 자신들에게 의외로 강경한 강 총리를 곤란하게 해 총리 교체를 노린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있었다. 이 문제는 며칠 후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도 질문이 있었다.
▼ 패널 : 동생을 비밀리에 만나지 않고 왜 공개적으로 만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비밀을 지키려다가 북측의 술책에 말려드는 우를 범한 것은 아니었습니까?
▼ 총리 : 동생을 비밀리에 만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동생이 왔을 때 내 주변에는 남에서 간 여러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이것은 비밀로 만나는 것이니 비밀로 해달라고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귀국 즉시 대통령께 보고하면서 동생을 만난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이후 공개적으로 국민들에게 동생을 만난 이야기를 하고자 했는데, 서울에 온 북측 기자가 먼저 광고를 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내가 비밀리에 만난 것이 탄로난 것처럼 된 것입니다. 그렇게 당하고 보니 처음부터 북측의 계략이었던 것으로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그 여동생에 대한 소식은 그 후 들은 바가 없다고 한다.
“인도적 대북지원은 민족의 의무”
▼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간의 대북정책이 ‘퍼주기’라는 보수층의 비난이 있어 이명박 정부는 요즘 대북관계에 주춤하고 있는 듯합니다. 대북지원을 포함한 남북관계는 어떠해야 한다고 보는지요.
“인도적인 대북지원은 최대한 해야 한다고 봅니다. 공산주의 체제가 잘못됐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지원해야 합니다. 동족이 굶어죽는데, 그걸 보고 있는 건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아요. 북한이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있겠지요. 그래도 도와줘야 합니다. 다른 나라 사람도 돕는데, 우리나라 사람이 맘에 안 든다고 안 도와주면 됩니까. 내가 이북 출신이라서가 아니라 이건 같은 민족끼리의 의무라고 봅니다.”
▼ 요즘 김정일 사망설 등 북한의 불안한 전망이 가끔 나오고 있습니다. 북한의 장래를 어떻게 보십니까.
“김정일은 이미 죽었고, 북한은 이미 정상국가가 아니죠. 북한에서 제대로 되는 게 뭐가 있습니까? 지금 북한은 공산주의 하면 이 꼴 난다고 선전하는 것과 다름없어요.”
강 전 총리는 2남1녀를 뒀다. 두 아들은 미국에서 변호사가 돼 모두 서울의 법무법인에서 일하고 있다. 사위는 전 한국에너지연구소장을 지낸 오정무 박사로 오천석 전 문교부 장관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