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림픽 9전 전승 호언은 말뿐, 사실상 목표는 동메달”
- “금메달 터닝 포인트는 첫 경기 미국전, ‘올인’ 했다”
- “최소 2만5000명 수용 최신 구장 가진 곳만 연고권 줘야”
- “WBC 대비 대표팀 감독 선임문제부터 해결, 상비군 만들 터”
- “현대구단 인수협상 과정 보안 실패 인정, 책임회피 안 해”
- 사무총장 취임 후 적지 않은 실수…“이렇게 많은 욕 먹은 건 처음”
2008베이징올림픽에서 야구대표팀 단장 격으로 선수단을 뒷바라지한 한국야구위원회(KBO) 하일성(59) 사무총장. 아직도 한국야구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야구선수로서, 해설가로서 수천 경기를 경험한 그지만 “이번처럼 긴장되고, 짜릿하고, 흥분된 게임은 처음”이라고 했다.
바야흐로 한국야구의 르네상스다. 1905년 필립 질레트 선교사가 이 땅에 야구를 이식한 지 103년이 지난 지금, 한국야구는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고, 프로야구는 500만 관중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다.
어린이들은 장롱 속에 처박혀 있던 글로브를 꺼내 들고 캐치볼을 하고 있고, 어른들은 야구얘기를 술안주로 삼는다. 대통령은 이승엽이 선물한 야구모자를 쓰고 청계천을 돌고, 팬들은 야구유니폼을 걸치고 야구장을 찾는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할 때 내건 ‘어린이에겐 꿈을, 국민들에겐 여가선용을’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되살아나는 분위기다.
서울 도곡동 야구회관에서 KBO 하 총장을 만났다. 그는 특유의 구수한 목소리로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의 뒷얘기와 인기 절정으로 치닫는 프로야구의 부활, 한국야구의 숙제와 미래에 관한 생각들을 털어놨다.
베이징올림픽에서 김경문 감독이 이끈 야구대표팀은 예선 7경기와 준결승, 결승까지 9경기를 모두 이기는 ‘9전 전승 퍼펙트 골드’를 기록했다. 야구 종주국 미국을 무너뜨리고, ‘숙적’ 일본을 두 차례나 격파했다. 1992년 야구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도입된 뒤 세 차례나 우승한 아마추어 최강 쿠바마저 격침시켰다. 선수들에게도, 국민에게도 꿈만 같은 결과다. 하 총장은 올림픽 금메달 얘기를 시작하자 그때의 전율이 되살아나는지 한숨부터 내쉬었다.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한국야구대표팀. 뒷줄 중앙에 하일성 총장이 보인다.
“네덜란드전(10-0 8회 콜드게임승) 외에는 한 게임도 편안하게 본 적이 없어요. (눈을 감으며) 야~. 진짜 꿈만 같아요. 선수들이 어떻게 그런 긴박한 상황을 모두 극복했는지 모르겠어요. 참 대단한 것 같아요. 우리 선수들이나 코칭스태프나.”
그의 말대로 게임마다 드라마였고, 영화였다. 9회말 3아웃이 되는 순간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한 명승부였다. 그리고 승리는 결국 한국의 몫이었다. 8월13일 예선 첫 경기인 미국전부터 피 말리는 싸움이었다. 8회까지 6-3 리드. 의외로 쉽게 풀리는 듯하던 경기 양상은 9회초 마무리 투수 한기주의 ‘불쇼’로 인해 6-7로 뒤집혔다. ‘다된 밥에 코 빠뜨린 격’이 됐다. 그러나 한국은 뒷심을 발휘하며 9회말 기적처럼 8-7 재역전승을 거뒀다.
“사실 미국전에서 그런 게임을 한 게 전화위복이 됐어요. 그때 우리가 역전패했으면 결과는 몰랐을 겁니다. 재역전에 성공하면서 선수들이 자신감을 갖게 됐고,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 혼연일체가 되는 계기가 됐다고 봅니다. 미국전에 졌다면 일본전도 글쎄요. 아마 겨우 4강에 턱걸이하지 않았을까요? 그랬으면 우리에겐 최상의 결과가 동메달이었겠죠.”
그는 예전 마이크를 잡고 해설하던 시절로 돌아간 듯 미국전을 술술 복기했다. 그러더니 올림픽 참가 직전 한국팀이 구상했던 전략의 단면도 공개했다.
“올림픽 가기 전에 모두들 9전 전승 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그냥 그렇게 말했던 거죠. 목표는 동메달이었어요. 사실 전략은 이랬죠. 중국이야 우리가 쉽게 이길 수 있다고 보고, 강팀으로 꼽히는 미국 일본 쿠바 3팀 중 하나는 반드시 잡아야 1차 목표인 4강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동안의 경험상 거꾸로 대만 네덜란드 캐나다 3팀 중 어느 한 팀에는 물릴 수도 있다고 봤어요. 전승 우승이라는 건 생각도 안 했죠. 실제로 미국전에 선발투수 봉중근에 이어 류현진 김광현 다 스탠바이 돼 있었어요. 왜냐하면 우리 스케줄이 미국전 다음날 중국전이었잖아요. 그래서 첫날 미국전에 무조건 다 간다, ‘올인한다’고 계획했죠.”
어쨌든 미국전 승리는 금메달로 가는 터닝 포인트가 됐다. 그러나 여정은 험난했다. 내심 콜드게임 승까지 생각했던 2차전 중국전에서 좀처럼 점수를 뽑지 못하며 0-0으로 진행되더니 6회말 선두타자 이종욱 타석 때 결국 우천으로 ‘서스펜디드(일시정지) 게임’으로 선언되기에 이르렀다.
“사실 그날 중국전이 계속 이어졌으면 낭패를 당하는 일이 생겼을지 몰라요. 미국을 기껏 이겨놓고 중국한테 졌으면 오히려 피해가 더 클 뻔했죠. 우리가 항상 중국전에서는 고전해요. 부산 아시안게임 때도 중국전에서 7회까지 0-0으로 갔잖아요. 희한하더라고.”
하 총장의 금메달 예지몽
결승전 상대는 쿠바였다. 예선에서 7-4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이전까지 네 차례 열린 올림픽 야구에서 우승만 3번, 준우승 1번을 차지한 강호였다. 하 총장은 쿠바와의 결승전을 앞두고 꿈을 꿨다고 했다.
“희한한 꿈이었어요. 죽은 이종사촌이 나타나는 거예요.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혼자 자취생활을 하면서 컸어요. 이종사촌은 나하고 처지가 비슷하게 자란 동갑내기였는데 일찍 죽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그렇게 꿈에 선명하게 나타나기는 처음이었어요. 진짜 이게 행운이 오는 건지, 반대가 되는 건지…. 어쨌든 잠에서 깨는 순간에 기분이 굉장히 좋더라고요. 그래서 좋은 일이 있겠구나 생각하게 됐죠. 나랑 친한 친구였으니까. 나에게 힘을 주려고 나타난 게 아닌가, 이거 큰일 내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예지몽(豫知夢)이었을까. 한국은 1회 초 시작하자마자 일본전에서 홈런포 감을 잡은 이승엽이 또다시 2점짜리 홈런포를 쏘아 올렸다. 1회말 솔로홈런을 내줬지만 그 스코어는 그대로 이어졌다. 7회 초, 올림픽에서 단 1개의 안타도 때리지 못한 9번 타자 박진만이 2사후 안타를 치고 나갔다. 1번 타자 이종욱의 볼넷 이후 이용규의 우익선상 2루타가 터지며 3-1. 아쉬운 것은 ‘번개발’ 이종욱이 아웃카운트를 착각해 스타트가 늦어 홈에 들어오지 못하고 3루에 멈춰선 일이었다. 하 총장은 이에 대해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김동주가 경기 전에 박진만한테 그랬대요. ‘너 안타 하나는 치고 한국 가야 할 거 아니냐’고. 농담 삼아 했던 말인데 실제로 박진만이 정말로 필요할 때 대회 첫 안타를 치면서 3점째를 뽑았잖아요. 어휴, 그 점수가 아니었으면…. 그리고 얼마나 긴장했으면 야구도사인 이종욱이가 아웃카운트를 착각했겠어요. 그 발빠른 이종욱이 홈에 못 들어왔잖아요. 그 한 점 때문에 연장까지 안 가나 싶기도 했죠. 나도 미치겠더라고요. 2아웃이면 무조건 타구소리가 나면 뛰어야 하는데. 선수들이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 만했죠.”
KBO 하일성 총장은 베이징올림픽 기간 내내 수염을 깎지 않았다.
상대 타자는 메이저리그에서도 눈독 들인다는 구리엘. 그러나 유격수 정면 땅볼. 유격수 박진만~2루수 고영민~1루수 이승엽으로 이어지는 더블플레이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금메달 확정. 한국선수단은 모두 그라운드로 뛰쳐나와 얼싸안고 울었다. 역사의 현장인 우커송 메인필드를 찾은 관중도 만세를 불렀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일지라도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뜨겁게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날은 충분히 울어도 좋은 날이었다.
“솔직히 얘기하면요. 마지막 더블플레이 하는 장면을 저는 현장에서 못 봤어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어릴 때부터 혼자 살았고, 월남전에도 참전해 제가 굉장히 독한 면이 있는 사람인데 그 순간만큼은 못 보겠더라고. 진짜. 너무 초조해서 야구장에서 나와서 담배를 피고 있는데 순간 굉장한 함성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안타를 내줬나, 타자를 잡았나 싶어 뛰어올라가려는데 거기에 설치된 TV 화면에 더블플레이 장면이 다시 나오더라고요. 저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죠.”
쿠바전 끝까지 못 본 까닭
선수들은 손과 손에 태극기를 들고 그라운드를 돌았다. 그리고 김경문 감독, 대한체육회 이연택 회장이 태극전사들로부터 헹가래를 받았다. 단장인 하 총장도 빠질 수 없었다.
“전 어릴 때부터 야구를 했지만 가는 팀마다 약해 우승하고는 인연이 없었죠. 제가 지금까지 헹가래를 쳐본 일도 없고, 헹가래 받은 일도 없었죠. 정말 몸도 마음도 하늘을 날았어요. 좋아하는 일에 종사하면서 금메달도 따보고…. 아마 내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해설가로서 감격적인 순간 현장에도 많이 있어봤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어요. 제가 죽어서 묘 앞에 비석이 세워진다면 2008년 올림픽 금메달을 땄을 때 단장이었다고 꼭 써달라고 할 거예요.”
그는 올림픽 기간 내내 면도를 하지 않았다. 하얀 수염이 얼굴을 뒤덮었다. 주위에서는 “바지 벗는 시늉만 하면 짝퉁 나훈아”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평소와는 달리 그는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대표팀 경기들을 지켜봤다.
“60 평생 살아오면서 그렇게 하나의 일에 집중하고 올인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태어나서 처음이었어요. 수염 기른 건 사실 징크스라고 할 것까지는 없어요. 징크스라면 이번에 해설을 맡은 김성근 감독이 압권이죠. 김 감독이 하루는 양말을 안 신고 해설했더니 한국이 이겼다면서 계속 맨발에 구두 신고 나와서 마이크를 잡았어요. 하기야 이기면 속옷도 안 갈아입는 양반이니….”
그렇다면 그는 왜 수염을 길렀을까.
“과거 해태가 우승할 때 일인데요. 당시 해태 버스기사가 털보였어요. 제가 김응룡 감독한테 ‘그 친구 수염 좀 깎으라고 그러세요. 도사가 온 것도 아니고’라고 했더니 김 감독이 ‘야, 걔는 우리 우승할 때까지 수염 안 깎는다고 했어’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해태 선수들이 버스기사 말을 가슴속에 담아두진 않았겠지만 버스 타고 내릴 때 보면서 기사의 말이 생각났을 거 아니에요. 그런 분위기가 우승으로 몰고 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저도 수염을 한번 길러봤죠. 우리 대표팀 선수들이 느꼈는지 안 느꼈는지는 모르지만 버스 타고 내릴 때 총장을 보면서 ‘금메달을 딸 때까지 수염 안 깎는다고 했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금메달 따고 숙소에 돌아가서 새벽에 깎았어요. 처음엔 깎기 싫더라고. 멋있다는 얘기도 있어서.(웃음) 그냥 이대로 한국에 들어갈까도 생각했지만 시원하게 밀었죠. 참 우승이라는 것이 허탈하더라고요. 희열은 그 순간인 것 같아요. 모두들 그라운드로 뛰어나갈 때 그 순간.”
국내로 눈길을 돌리면 프로야구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는 1995년 역대 최다관중 540만명을 기록하며 인기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올 시즌, 13년 만에 두 번째 500만 관중 돌파를 기대할 만하다. 지난해 기록한 410만명을 이미 뛰어넘었다. 그야말로 프로야구 열풍이다.
KBO 내 기획부 신설
하 총장은 계획했던 만큼 프로야구 붐이 일어났다고 보는 것일까. 그는 “반반이다”는 말부터 꺼냈다.
“일단 목표가 500만 관중인데, 어쨌든 목표인 500만 관중 돌파 가능성이 생겼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죠. 누군가가 그러더라고요. 아파트 옆에 초등학교가 있는데 어린이들이 요즘 전부 야구를 하더라고. 예전에는 축구나 농구를 하고 있었는데. 결국 야구 금메달로 조성된 이 분위기를 지속적으로 끌고 갈 수 있는 힘이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겠죠. 또 하나의 문제는 롯데 중심으로 500만 관중이 돌파되는 것 같아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 특정팀 중심보다는 모든 팀의 관중이 느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운동장 시설 개선입니다. 이번 올림픽 때 신상우 총재님이나 저나, 8개 구단 사장님들이 관중석에서 경기를 봤거든요. 총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3시간, 3시간 반, 4시간 반 의자에 앉아 야구를 보는데 힘들더라’고.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결국 팬들이 야구장에서 편안하게 야구를 즐길 수 있어야 600만, 700만 관중도 바라볼 수 있는 거죠. 프로야구의 발전을 위해선 제도상 여러 가지 고칠 점이 있지만 역시 가장 시급한 게 운동장 시설개선 문제입니다. 제가 총장에 취임했을 때 돔구장을 지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는데 총장이 되고 보니 돔구장보다 더 중요한 게 현재 있는 구장이라도 편안한 시설로 빨리 바꾸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의 말은 사실 10년 전에도 나온 얘기다. 그러나 실행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야구인들은 “요즘 사람들은 식당도 주차장이 없는 곳에는 잘 안 간다”면서 낙후된 야구장 시설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 총장은 이에 대한 구상도 밝혔다.
“KBO도 기획 능력을 보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금메달을 계기로 프로야구가 나아가야 할 5년 후, 10년 후를 빨리 대비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KBO 내에 별도의 조직을 만들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KBO라는 조직을 총장으로서 관리하다 보니 두 가지를 느꼈어요. 프로야구를 컨트롤하는 리그 운영 능력은 상당히 뛰어나다는 거죠. 그렇지만 기획 능력이 조금 부족하지 않나 싶어요. 프로야구가 앞으로 어떻게 가야 할 것이냐, 우리나라 실정에 8개 팀이 좋으냐, 10개 팀 혹은 12개 팀이 좋으냐 하는 큰 밑그림부터 완성해야 합니다. 또 앞으로 수도권에 돔구장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팀들이 연고지 이전을 원할 경우 현재의 연고지가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죠.”
KT가 발 뺀 이유
그렇다면 KBO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을까. 그는 “기획부를 신설해 기획 능력을 극대화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특단의 조치도 필요하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성급한 면도 있지만 프로야구가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사회나 단장회의를 통해 결정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에 어느 시점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최소 2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구장이 신설되지 않으면 프랜차이즈를 옮길 수 있다는, 극단적인 결단이 나와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지금 1만명이 들어가는 구장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특히 지방구장은. 주차 문제, 먹는 문제, 화장실 문제…. 최소 2만5000명, 3만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최신시설을 갖춘 운동장이 없는 도시에서는 프로야구를 안 하도록 해야죠. 그 도시에는 야구 연고권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시간적 여유는 줘야겠죠. 준비기간과 공사기간도 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구단이나 KBO가 결단을 내려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양적 팽창에 성공한 프로야구지만 질적 성장도 도모해야 하는 상황이다. 프로야구는 올 시즌을 앞두고 큰 홍역을 치렀다. 현대구단을 인수할 기업을 찾지 못해 방황했다. KBO는 농협, STX, KT 등 견실한 기업과 현대구단 인수협상을 진행했으나 성사 일보직전에서 일이 틀어지기도 했다. 결국 1월초 가까스로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를 끌어들여 우리 히어로즈 구단을 창단해 8개 구단 체제를 유지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히어로즈는 가입금 납입 문제를 비롯해 갖가지 잡음을 내며 프로야구 판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KBO의 일처리 미숙에 대한 비판도 잇따랐다. 하 총장은 이런 비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물론 프로는 과정이 중요한 게 아니라 결과가 중요하니까 우리 보고 실책이라고 하면 그 책임에 대해 회피는 안 하겠어요. 그렇지만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은 현대구단 문제는 저하고 총재님이 취임하기 전부터 불거진 문제였습니다. 6년 전부터 있던 문제인데 저희에게 모든 잘못을 덮어씌우니 답답하기도 하죠. 물론 우리가 미숙한 면이 있었죠. 말이 앞섰고, 성사되기 전에 너무 일찍 암시를 주기도 했으니까. STX 경우는 제가 서툴렀어요. 협상을 하기 위해 직접 회사로 찾아갔으니까요. 당시 엘리베이터에 STX 직원들하고 같이 탔더니 대뜸 ‘우리 회사 야구해요?’라고 묻더라고요. 보안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했던 거죠. 그 다음부터는 협상하는 회사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하게 됐어요. KT와 만날 때는 큰 호텔도 아니고, 자그마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고 그랬죠. STX는 창단하기로 해놓고 정보가 새는 바람에 일이 틀어졌죠. KT는 단장 정재호, 감독 김시진, 플로리다 전지훈련 일정까지 다 잡아놨어요. 유니폼도 정하고. 그리고 KT에서도 직접 창단 발표를 했잖아요. KT가 발을 뺀 것에 대해 지금은 말 못해요.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질 것입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할 말 없죠.”
베이징올림픽 당시 김경문 감독과 함께.
“최근 경제상황이 어려워졌지만 관심을 갖는 데가 5~6개 있어요. 프로야구 창단 비용은 얼마나 드느냐, 연고권은 어디를 줄 수 있느냐, 선수 수급은 어떻게 해줄 수 있느냐고 문의를 해오는데 어떻게 열매를 맺느냐가 중요하죠. 우리 능력이기도 하고. 우리도 실패를 경험해봤고, 복안도 가지고 있어요. 쉽지는 않은 문제들이 버티고 있지만 풀자고 하면 쉽게 풀립니다. 극비리에 많은 부분이 진전되고 있어요. 내부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있고. 보안이 중요하기 때문에 나중에 다 밝히겠지만 우리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까 지켜봐주세요.”
야구는 최근 세계화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면서 국제대회가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2005년부터 한국 일본 대만의 프로야구 우승팀과 중국 대표팀이 참가하는 아시아시리즈가 개최되고 있고, 2006년에는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모두 참가하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 열렸다. 내년 3월에는 제2회 WBC가 열린다. 한국야구는 2006년 WBC 4강 신화와 이번 올림픽 금메달 획득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동안 세계야구의 변방에 머물러 있었으나 주류로 편입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맞은 셈이다. 하 총장은 한국야구의 질적 수준은 이미 세계 정상급으로 올라섰다고 진단했다.
“이렇게 봐야 될 거예요. 우리 야구수준을 오히려 우리가 낮게 보고 있지 않았느냐. 국내에서 평가하는 것보다 높은 수준이었는데. 한국야구가 세계 수준으로 올라섰다는 징후는 여러 가지가 있었어요. 웬만한 외국인 선수는 이제 한국프로야구에서 안 통하잖아요. 우리나라에서 실패한 용병이 일본에서 성공하기도 하고, 일본에서 괜찮다는 평가를 들은 선수가 우리나라에서 실패하고. 물론 풍토가 다르고 환경도 달라 적응문제라는 변수도 있겠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롯데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 그랬잖아요. 우리나라 올스타 정도면 메이저리그와 붙어볼 만하다고.
WBC, 김경문 감독 또 지휘봉?
1990년대 슈퍼게임만 해도 일본을 이긴다는 생각을 못했죠. 쿠바요? 삼성 김응룡 사장이 그랬잖아요. 콜드게임패만 안 당하면 잘한 거라고. 제 생각에는 한국야구가 WBC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게 아닌가 싶어요. 잘 생각해보세요. 현재의 우리 국가대표 선수들로 한 팀을 구성하고, 8개 구단의 나머지 프로야구 선수 중 한 팀을 만들어 7차전을 붙는다면 과연 누가 이긴다고 장담할 수 있겠어요? 그만큼 우리 선수층도 두터워진 거라고 볼 수 있죠. 과거에는 국가대표 한 팀을 만들면 그 다음 팀은 못 만들었어요. 이제는 만들 수 있어요.”
WBC 4강 신화에 이어 올림픽 우승까지 차지하면서 한국야구는 세계의 관심을 받는 동시에 견제의 대상으로도 떠오르고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이제는 세계정상권의 위치를 어떻게 지켜나가느냐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 그만큼 부담도 커진 상황이다.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데 솔직히 지금은 금메달 딴 것만 즐기고 싶어요. 이후는 생각하고 싶지 않죠.(웃음) 문제는 WBC를 어떻게 준비할 것이냐 하는 것인데, 실제로는 발표가 안 돼서 그렇지 준비하고 있어요. 어디서 묵고, 어디서 훈련할 것인지 다 결정해놨어요. 이제 선수구성만 하면 돼요. 제일 중요한 게 누구를 감독으로 선임하느냐 하는 문제죠. 대표팀 감독에 따라 코칭스태프와 선수구성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있어요. 사실 올림픽 갔다 와서 김경문 감독하고 WBC 감독 문제에 대해서 딱 한 번 얘기를 하긴 했어요. 그런데 김 감독도 지금은 금메달만 즐기자고 하더라고요. 결론은 그렇게 하고 끝냈어요. 김 감독도 지금은 시즌 막바지라 소속팀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잖아요. 김 감독이 대표팀을 비롯해 감독을 다시 맡을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한국시리즈까지 끝나면 감독 선임문제부터 빨리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이번 올림픽의 성과 중 하나로 ‘세대교체’를 꼽았다. 2006년 WBC만 하더라도 구대성 이종범 등 기존의 베테랑 선수들이 필요했지만 이번 올림픽에서 김광현 류현진 윤석민 등 마운드의 영건들이 맹활약을 펼쳤고, 타선에서도 김현수 이용규 이종욱 정근우 이대호 강민호 등 젊은 타자들이 주축세력으로 부상했다.
하일성 총장의 야구해설가 전성기 때 모습.
“고무적인 일이죠. 세대교체가 다 이뤄졌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유격수에서 박진만을 대체할 선수가 아직 확실히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려요. 박진만의 수비는 차원이 다르잖아요. 욕심 같아서는 국가대표 상비군을 계속 유지하고 싶기도 하죠. 김현수 같은 선수도 상비군에서 나왔으니까. WBC가 내년 3월에 열리는데 대표팀 연습경기 상대도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선 대표팀과 상비군이 2월 중순쯤 소집돼야 하는데 문제는 프로팀들이 한창 스프링캠프를 치를 시점이라 훈련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점이죠. 그래서 고민이에요.”
1979년 동양방송에서 해설을 시작해 29년 동안 마이크를 잡은 그는 2006년 5월 임기 3년의 제11대 KBO 사무총장에 취임했다. 2년 반가량의 시간이 흘렀고 그동안 우여곡절도 많았다. ‘국민 해설가’로 입지전적 신화를 쓴 그지만 한국프로야구를 총괄하는 사무총장 자리에 앉은 다음에는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저는요, KBS에서 해설 그만둘 때 방송국으로부터 백지계약서라는 것도 받아봤어요. KBS에서 원하는 거 다 들어주겠다고. 해설가로서 행복하게 살아온 거죠. 2002년 1월 심장병으로 쓰러져 수술을 받았는데 4월에 다시 마이크를 잡았어요. 당시 방송 쪽에서 ‘저 사람 일을 시켜야 산다’면서 해설을 시켰는데 정말로 그게 다시 건강을 회복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어요. 그런데 당시 사무총장을 꼭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미친놈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면서 해설을 그만뒀죠. 처음에는 의욕만 앞섰고, 계획도 뒷전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실수도 많았고. 지나고 보니 ‘이게 아니다,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사실 살아오면서 이렇게 욕을 많이 먹은 적도 없죠. 자존심도 자존심이지만 가족들에게, 아는 사람들에게 하일성이가 어떻게 비칠까 당황스럽기도 하고. 지금 와서 보니 욕 먹을 때는 ‘나의 말이나 행동이 그렇게 비칠 수도 있었겠구나’ 알겠더라고요.”
그의 마지막 꿈은 무엇일까. 그는 사무총장 자리에서 물러나더라도 다시 ‘해설가 하일성’으로 살아갈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해설할 일 다시 없다”
“이젠 해설할 계획은 없어요. 큰 대회 객원해설가나 스페셜게스트로 방송사의 요청이 온다면 한두 번 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전문적으로 마이크를 잡는 일은 없을 것 같아요. 능력이 있다면 사무총장 그만두면 리틀야구 쪽에 관여해 일을 하고 싶어요. 꼭 하나 해놓고 나가고 싶은 건 있어요. 실업야구 부활입니다. 유소년야구를 많이 얘기하는데, 유소년야구 발전을 위해서라도 실업야구가 부활해야 합니다. 지금 실업팀이 없으니 프로팀 지명을 못 받은 선수들은 갈 데가 없죠. 사회인으로서 생활할 수 있는 터전이 있어야 어린이들이 야구를 하지 않겠습니까. 실업야구 1~2팀이라도 만들어 연맹의 틀을 잡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야구가 수업을 제대로 받고 야구를 하는 풍토를 먼저 만들어야겠죠. 물론 이것은 대한야구협회에서 할 일이지만, KBO와 대한야구협회도 밀접한 관계가 있고 나도 야구를 한 사람이기 때문에 협력해서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아요. 야구선수가 야구기계만 돼서는 안 됩니다. 야구선수 출신이 회사에서 일도 잘한다는 평판이 자꾸 나와야 실업야구팀이 계속 생길 것 아니겠어요? 일본의 사회인 야구, 그런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돼요. 그리고 해야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