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싸우는 자의 삶이란 고단한 것이다.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1970년대, 강력한 반공주의의 벽이 온 사회를 뒤덮고 있던 시절, 그 벽에 도전하겠다고 나섰던 리영희의 인생 역정이 바로 그러했다. 당대의 청년들과 지식인들에게 ‘폭탄 같은 충격’을 던져주었던 그의 책은 한국이 민주화 과정을 거치고 동서냉전이 해체되는 적잖은 시간 동안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의식화의 원흉’으로 지목당해 반복된 투옥과 해직은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시대에든 궤변은 필요한지 모르겠다. 리영희는 1974년 6월 ‘창비신서’ 제4권 ‘전환시대의 논리’를 내놓으면서 머리말에 자신의 글이 ‘가설’이라고 ‘궤변(?)’하는 구절을 넣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발표된 때로부터 500년이 더 지난 1974년에도 ‘가설’들을 묶어 책으로 내놓다니, 2000년대를 8년이나 경과한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이게 도대체 어느 시절의 케케묵은 이야기인가 싶다. 그러나 그때는 ‘정치적 신학’의 도그마가 지배하던 때였고, 가설로라도 지적 굶주림을 채워야 할 만큼 우리 사회는 허기져 있었다.
훗날 리영희는 ‘전환시대의 논리’(이하 ‘전논’으로 약칭)를 내놓은 이유와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재량을 지니는 자율적인 인간의 창조를 위하여, 당시 사회를 지배했던 광신적 반공주의에 대해 저항적 입장에서, 군인통치의 야만성 반(反)문화성 반지성을 고발하기 위하여, 시대정신과 반제 반식민지 제3세계 등에 대한 폭 넓고 공정한 이해를 위하여, 남북 민족 간의 증오심을 조장하는 사회현실에 반발하면서 두 체제 간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다는 입장에서 글을 썼다.” (권영빈, ‘책과 시대/저자를 찾아 -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교수’, 중앙일보 1993년 2월20일자)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
‘전논’은 출간되자마자 우리 독서계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특히 대학생들을 비롯한 젊은 지식인 사회에 미친 영향은 폭탄 같았다. 김동춘이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고까지 한 ‘전논’은 과연 어떤 책이었나. 1970년대 중반의 암울한 시기에 대학 초년생이던 조희연은 “유신교육 아래서 이미 나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냉전적 의식 및 사고의 깊은 중독상태에서 벗어나는 지적 해방의 단비를 이 책에서 맛보았다”고 하면서, “유신 말기 젊은 지식인들의 비판의식의 세례 현장에 언제나 이 책이 있었다”고 했다.
밤새 ‘전논’을 읽고 또 읽은 김세균은 자신이 만나는 동료 후배들에게 ‘전논’을 권했다. ‘전논’이 그에게 전해준 메시지는 “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상식을 버려라. 네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많은 것은 허위의식 혹은 미신들이다. 그런 것들을 네 머릿속에 주입한 이 우상(偶像)들의 세계의 본질을 꿰뚫는 새로운 눈으로써 이 세계를 다시 보라”는 것이었다. 김세균은 그런 메시지를 받아들이려면 “내가 진실로 믿고 있던 것, 내가 나의 ‘건강한 상식’에 비추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것을 먼저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진실에 관한 최초의 반응은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진실을 받아들이려면 괴로움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런 괴로움 속에서 종전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깨부술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974년 그해는 긴급조치 1호에서 9호까지 줄지어 발동된 해였다. 문인 간첩단 사건,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 등으로 사회는 꽁꽁 얼어붙었다. 서슬이 퍼렇고 흉흉하던 그해 초여름에 리영희의 첫 저서가 간행되어 단박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소설가 이호철은, 그러나 그렇게 될 만한 충분한 까닭이 있었다고 했다.
“바로 그 전환시대의 전환시대적 요소에 주로 서슬 퍼런 칼을 들이댄 것이 그런 일련의 사건들이었고, 끝내 1975년 초봄, 황사 불던 날 무더기 처형까지 감행되는 속에(민청학련 및 인혁당사건 관련자 8명 전원에 대해 대법원이 사형 확정판결을 내린 지 18시간 만에 사형 집행. 이들은 2007년 재심 끝에 전원 무죄판결을 받고, 이어서 사상 최고액의 국가배상판결을 받음), 정작 바로 전환시대의 논리를, 그 불가피성 불가역성을 정정당당하게 논파한 저서는 시중을 휩쓸고 있었으니, 이것이 아이러니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호철, ‘산 울리는 소리 : 이호철 문학비망록’, 정우사, 1994)
흥미롭게도 당시 학계의 떠오르는 별이었던 노재봉은 리영희의 ‘전논’ 뒷표지에 이런 추천사를 썼다.
“가설의 증언이라는 형식에 담은 이 책의 내용은 기실 증언에 의한 시대의 심판이다. 여기에 우리는 혼탁한 정치의 기류를 고발하는 양식과 지성의 용기를 본다.”
위에서 언급된 인물들은 모두 지적 작업에 종사하는 전문적 교양인이었거니와, 이들보다 훨씬 많은 청년 대학생 샐러리맨 노동자 등에게 리영희가 준 충격은 더욱 컸고 심층적이었다. 한국사회의 기득권적 또는 상투적 의식세계의 덫에 갇혀 있던 신념체계가 일제히 붕괴되면서 그들은 모두 아찔한 현기증에 사로잡혔다.
‘의식화의 원흉’으로 몰리기도
광복 후 30여 년, 오로지 반공 냉전 극우논리가 휩쓸고 있던 우리의 정신풍토에서 리영희는 광기 어린 국가권력과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날카로운 비판의 면도날을 들이댄 것이다. 1974년 유신의 한복판에서 리영희는 ‘전논’을 통해 인간해방, 사상과 언론의 자유, 권위에 대한 저항, 이성의 승리 등 일관된 신념을 보여주었다. 그는 대부분의 지식인이 체념에 빠졌을 때 중국의 부상, 베트남전쟁, 한미·한일관계 등 당시 가장 민감한 주제들에서 비켜서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다.
리영희는 베트남전쟁이 최고조에 이른 상황에서 냉전시대의 신화·우상의 실체를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전쟁과 국가의 기만성을 비판했다. 한국 국민이 닉슨의 중국 방문에 대해 하늘이 무너질 듯 놀라는 것을 보고 그는 탄식했다. 그는 ‘전논’을 통해 남한적 가치관 및 이데올로기의 허구성과 진실을 위장했던 굳고 딱딱한 ‘가면’을 벗기려고 했다. 가치의식의 총체적 해체를 의도한 것이다. 극우 반공정권이 그 책과 저자를 ‘의식화의 원흉’으로 단정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전논’은 중국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지식을 담고 있다. 저자 자신은 중국 문제에 관한 한 ‘해설자’ 이상을 자처한 일이 없다고 했지만, 이 책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중국 종합보고서였다. 중국은 우리의 영원한 적(敵)일 수밖에 없다고 확신하던 1970년대에 이 책은 정치 외교 역사 등 거의 모든 부분에 걸쳐 중국의 전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시 중국은 4000년에 이르는 전통적 정신문화의 토양에 서구적 전통과 사상을 접목시키는 거대한 실험을 전개하고 있었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자본주의의 물질적 요소들에 과감하게 문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리영희는 이 책을 통해 중국 화교의 역할, 무역·군사대국화, 동북아시아 국제정치에서의 위상 등을 내다보았다. 30여 년이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도 이 중국 종합보고서는 사실관계의 현실성에서 뿐만 아니라 전망에서도 전반적으로 일치하는 분석이었다.
‘전논’에서 그는 1970년대 동북아 국제정치의 격변기에 일본 재등장의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했으며, 그 정치대국화 군사대국화의 본질을 정확하게 투시하고 있다. 미국의 대리자로서 중국을 견제하는 역할을 떠맡은 일본이 과거 역사를 되풀이할 수 있음을 리영희는 일찌감치 경계했다. 일본 자위대의 역할이 방위력에서 공격력으로 변질되고 일본산업의 군사화와 평화헌법의 개헌 가능성 속에 아시아를 위협할 일본의 미래를 리영희는 그 시절 이미 구체적으로 예측한 것이다.
옛 국가안전기획부 남산 청사의 지하 취조실.
우상에 대한 이성의 도전
1975년 4월30일 베트남이 패망하자 한국사회는 완전히 병영(兵營)체계로 돌변했다. 1972년부터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있던 리영희는 1976년 제1차 교수재임용법에 의해 교수직에서 강제 해임되어 실업자가 되었다. 리영희는 해직 6개월 만인 1977년 9월 창작과비평사에서 ‘8억인과의 대화 : 현지에서 본 중국대륙’을 펴냈다. 리영희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하여 우리 정부도 중공을 ‘비적성국가’로 규정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공식 명칭도 사용하며, 종래의 제한조치의 일부를 해제하는 등 이해성 있는 정책으로 전환한 지도 몇 해가 되었다. …체제가 다르고 살아온 배경이 다르다 하더라도, 거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리영희, ‘8억인과의 대화 : 현지에서 본 중국대륙’, 창작과 비평사, 1977)
중국 하면 우리와 역사적으로 가장 관계가 오래고 깊은 나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프랑스 영국 같은, 중국 땅에서 가장 먼 곳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사실들을 정작 바로 이웃인 우리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알면 재미없다”는 음험한 편견이 그때까지 우리를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산 중국의 이데올로기와 정치 경제 사회체제, 문화정책이나 홍위병이 어떻고 하는 얘기는 숱하게 들어왔지만, 대개는 관념적인 것이어서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이었다.
정작 8억(1977년 당시)이라는 인구가 와글거리는 실체를 우리는 접해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 미망과 금기를 깨고 리영희는 사실 자체에 정직하고 간명하게 다가갔다. 세계인구의 6분의 1을 차지하고 있던 중국에 대해 사실 자체를 사실대로 알리려 한 것이다. ‘8억인과의 대화’가 일으킨 지적 파동은 ‘전논’이 나갔을 때 못지않게 컸다.
이어서 3개월 후인 1977년 11월1일 리영희는 한길사에서 ‘우상과 이성’을 냈다. 훗날 한국일보의 평가에 따르면 이 책은 “한번도 의심 받지 않았던 당시 한국사회의 도그마(우상)들에 대한 ‘이성’이란 이론의 도전장”이었다. 저자의 표현대로 “지식인들의 자기부정적 직무유기의 시대”에 출판된 이 책이 지식인 사회, 특히 대학가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대학가 서점에는 ‘우상과 이성’을 찾는 이들이 줄지어 늘어섰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던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리영희는 ‘우상과 이성’의 서문에 책 제목과 관련하여 이렇게 썼다.
“(내가)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곳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져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
옥중에서 쓴 장문의 상고이유서
리영희는 중국 지식인 노신(魯迅)을 자신의 정신적 스승으로 생각했다. 그 노신의 글 가운데 진실을 안다는 것은 괴로운 일임을 토로한 대목이 있다. 리영희는 이렇게 전했다.
“빛도 공기도 들어오지 않는 단단한 방 속에 갇혀서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벽에 구멍을 뚫어 밝은 빛과 맑은 공기를 넣어주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를 궁리하면서 고민하는 상황의 이야기가 있다. 방 속의 사람은 감각과 의식이 마비되어 있는 까닭에 그 상태를 고통으로 느끼지 않을뿐더러, 자연스럽게까지 살아(죽어)가고 있다. 그런 상태의 사람에게 진실을 보는 시력과 생각할 수 있는 힘을 되살려줄 신선한 공기를 주는 것은 차라리 죄악스러운 일일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말이다.”
‘우상과 이성’이 나온 직후 리영희는 남영동의 대공분실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검찰에서 다시 조사를 받은 뒤 12월27일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8억인과의 대화’와 ‘우상과 이성’이 다 “해외 공산집단을 고무 찬양”했으므로 반공법 위반이라는 게 이유였고, 그전에 낸 ‘전논’까지 문제가 되었다.
리영희가 기소된 바로 그날 리영희의 어머니는 86세로 사망했다. 그는 감방 이불에다 어머니 빈소를 마련해 사과, 건빵, 관식과 김지하가 준 사탕을 차려놓고 임종도 못한 불효자가 되어 소리 죽여 울었다. 리영희는 2심에서 징역 2년에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았다. 한심한 것은 2심 판결문이 검사의 기소장을 글자 하나 안 바꾼 채 검사 이름만 판사 이름으로 바꾸어 나왔다는 것이다.
그해 겨울 매서운 추위 속에서 2심의 기소장과 똑같은 판결문의 내용을 기억력만으로 떠올리며 리영희는 공중에서 구름 잡듯이 대법원에 제출할 상고이유서를 썼다. 리영희는 추위에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참고할 단 하나의 자료도 없이 1주일 동안 갖은 고생 끝에 200자 원고지로 121매 분량의 상고이유서를 썼다. 글자수로 2만4200자였다. 옥중에서 쓴 글로는 가장 긴 글이었고 논리 정연한 내용이었다. 이 글은 1987년 두레출판사에서 나온 ‘역설의 변증 : 통일과 전후세대와 나’에 실렸다.
1979년 대법원 최종 확정판결도 2심과 다름없었다. 확정판결을 받은 후 리영희는 다른 죄수들과 굴비처럼 엮인 채 광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 빨간 딱지를 왼쪽 가슴에 붙이고 용산역에서 일반객차의 한구석에 탔다. 비타민 결핍증으로 머리에서는 진물이 줄줄 흘렀다. 시베리아의 죄수들이 혹형을 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박정희의 사망소식을 광주교도소에서 전해 들었을 때, 리영희는 감격에 벅차 눈물과 함께 웃음이 터져 나왔다고 뒷날 술회했다. 그때 리영희는 자신이 역사를 선취하고 살았다는, 새로운 역사가 바야흐로 실현된다는 감회에 젖었다.
르몽드, ‘사상의 은사’로 평가
리영희는 1980년 1월 광주교도소에서 나왔지만, 5월17일 이번에는 신군부에 끌려갔다. 바로 이틀 전 비상계엄령 해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지식인 134인 선언’에 참여한 것뿐이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남산 중앙정보부 암굴 지하3층 감방에 끌려간 것이다. 거기서 두 달가량 감금되었다가 7월에 석방되어서야 리영희는 자신이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기가 막혔다. 그가 지하실에 감금되어 햇빛도 보지 못하던 그 기간에 이른바 제5공화국의 틀과 구도가 완성되고 있었다.
석방된 리영희는 대학에서 이미 해직된 상태였다. 그러나 리영희의 분신이던 책들은 판금조치로도 결코 가둬지지 않았다. ‘전논’은 1979년부터 불온서적으로 지목돼 시판이 금지되었으나 학생운동권에서는 ‘필독서’가 되어 비밀리에 읽히고 있었다. 초판 발행 당시 정가 1300원짜리가 헌책방에서 1만원 이상에 불티나게 팔렸을 정도다. 웃지 못할 일은 당시 검찰 관계자들까지 출판사에 ‘전논’을 단체로 주문하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우상과 이성’도 금서목록에 올랐지만 1986년 7월초까지 7만여 부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리영희가 1977년 펴낸 저서 ‘우상과 이성’.
지식인의 삶 앞에 던져진 과제들을 회피하거나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얼버무리는 태도를 경멸했던 리영희에게는 그 후 많은 고통이 뒤따랐다. 1980년부터 4년 여의 세월을 리영희는 호구지책을 위해 주로 번역일을 하며 보냈다. 이 기간 중 그는 주로 ‘편역’ 작업을 했고, 그 결과 1982년에 ‘중국백서’, 1983년에 ‘10억인의 나라 : 모택동 이후의 중국대륙’(두레) 등을 잇따라 펴냈다. 그중 ‘10억인의 나라’는 ‘8억인과의 대화’ 속편이라고 볼 수 있다.
해직 기간이던 1984년 1월 리영희는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각급 학교 북한 찬양모임’ 사건으로 반공법에 위반되어 또다시 구속 기소되었다. 리영희에게는 이 사건이 정말 황당무계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결국 리영희는 기소유예로 두 달 정도 만에 석방되어 해직 4년2개월 만인 1984년 7월 한양대학교에 다시 복직할 수 있었다. 전두환 정권의 이른바 유화정책 덕분이었다.
노신의 삶과 글이 길잡이 노릇
1980년대에 리영희는 그밖에도 1984년 ‘분단을 넘어서’(한길사), 1985년 ‘베트남전쟁 : 30년 베트남전쟁의 전개와 종결’(두레)을 출간했으며, 1987년에는 ‘역설의 변증 : 통일과 전후세계와 나’(두레)를 내놓았다. ‘역설의 변증’에 실린 ‘우상과 이성 일대기’라는 글에서 그는 “노신의 글에는 현학적인 요소가 없고 자신이 사는 시대에 한정된 역할로 만족하는 소박한 태도가 보여 좋다”고 했다. 리영희는 이에 앞서 ‘신동아’ 1977년 7월호 ‘명사를 감동시킨 119권의 책’에서 ‘노신선집’을 들며 자신의 글쓰기 철학을 넘어서 삶의 궤적에 이르기까지 노신은 자신의 스승이면서 자신의 삶 속에 녹아 있다고도 했다.
“노신의 작품에서 나는 구체적 상황 속 개인의 삶을 배운다. 변혁의 사상을 배운다. 그리고 앞으로는 질타하면서 뒤로는 울고 있는 그의 따뜻한 마음을 느낀다. 노신은 55년간의 길지 않은 인생을 유감없이 살다 갔다. 혹독한 권력의 탄압과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불굴의 정신으로 ‘5억의 우매한 머리’를 깨우쳤다. 그는 해군사관, 광산·철도 기사, 의학도, 생물학 교사, 문학교수, 문학가, 사상가의 길을 걸었다. 꽤나 우여곡절이 많은 인생이다. 나와 비슷한 인생 궤적 때문에 더욱 타인 같지 않다.”
리영희는 1987년 8월부터 1988년 2월말까지 한 학기 예정으로 미국 버클리대학의 초청을 받아 아시아학과에서 ‘한민족 현대정치운동사’를 강의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 1988년 3월 리영희는 창작과비평사에서 ‘역정 : 나의 청년시대’란 자전적 에세이를 출간했다. ‘책을 내는 변명의 말’에서 리영희는 ‘자기에 관한 이야기’를 내놓으려니 독자에 대한 도덕적 의무감에서 한마디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1960년대부터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이른바 ‘의식화의 원흉’으로 몰아치는 권력에 의해서 60년대, 70년대, 80년대에 각기 한 차례씩, 그에 대한 정권의 보복으로 세 차례 반공법에 의한 옥고를 치러야 했다.… 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혁명의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으로 권력에 의한 탄압을 받는 법정에서 ‘전환시대의 논리’를 비롯한 나의 저서들이 문제의 발단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국가권력의 대리인인 검찰의 논고는 사건마다 나의 저서들을 열거하며 매도했다.… 그로 인해서 나는 수많은 재판의 증인으로 지정되고 또 증인대에 서야 했다.”
반골에의 ‘역정’
“권력의 핍박을 받는 그들 정의감에 넘치는 고결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자신의 저서를 처음으로 접한 뒤부터 겪은 내면적 변화에 따르는 희열과 갈등, 그로 인한 실천적 삶의 과정에서 당한 시련과 고통에 관해서 리영희는 무한한 기쁨과 동시에 무거운 도의적 부담을 느꼈다. 그들의 삶의 질과 내용과 방향에 일어난 변화에 일단의 책임을 느낀 리영희는 자신의 삶과 살아온 과정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의 ‘배후 조종자’의 한 사람으로 땅속에 갇혔다가 풀려 나온 1982년 겨울부터였고, 이 책에 등장하는 리영희의 인생역정은 소년시절부터 1963년까지였다.
리영희의 삶을 반골로 ‘전향’시킨 계기로는 주로 군대생활의 체험이 언급되고 있다. 6·25전쟁의 무의미에 대한 회의,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사건, 후방에서 겪은 한국이라는 국가의 실체, 무엇보다 군복무 중에 일어난 동생의 사망사건이 리영희를 그렇게 몰고 간 것으로 되어 있다. 또 다른 계기로는 합동통신사와 조선일보사 기자 시절에 겪은 체험을 들 수 있다. 국제정세에 대한 정보를 신속하게 접하면서 1960년대에 알게 된 베트남전쟁과 중국의 문화혁명 등이 리영희의 세계관을 바꾼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대생활을 하면서 군대의 부정과 부패, 민간인 학살사건, 가족의 사망(소식)에 접한 사람은 리영희만이 아니다. 같은 논리는 리영희의 기자 생활에도 적용된다. 그 무렵 같은 정보에 접하고 일하면서도 전화에 자동차까지 구입하고 ‘섰다판’을 벌이며 호화로운 생활을 한 기자가 훨씬 더 많았다.
그렇다면 리영희는 언제 무슨 계기로 반독재 반냉전 민주화의 투사가 되어갔는가. 그의 반골정신은 언제 형성되었는가. 리영희는 1929년 12월 평북 운산군 북진면에서 출생, 그 후 이웃 삭주군 외남면 대관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경성공립공업학교에 입학했다.
2006년 5월 제1회 ‘기자의 혼’상 수상자로 선정된 리영희 교수가 한국기자협회 정일용(오른쪽) 회장으로부터 상패를 받고 있다.
분단과 전쟁을 체험하면서 리영희는 민족분단에 대해 느리지만 분명하게 눈떠 갔다. 군대생활은 리영희에게 ‘의식화’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지리산’이 리영희에게도 서서히 다가왔다. 1950년 지리산의 ‘공비토벌’에 리영희는 두려움 없이 끼어들었다. 지리산에서 ‘태백산맥’의 염상진과 리영희가 서로 적으로 대면할 수도 있었다는 말이고 보면 민족적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 시기를 통해 리영희의 의식에 이데올로기적 당파성이나 충성심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순진하고 직선적인 정의감에 불타는 애국주의자였던 것 같다”고 그 무렵의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후방에 배치된 뒤 리영희는 본격적으로 ‘현장체험 학습’을 했다. 그는 우선 한국군대의 무원칙하고 비효율적이며 즉흥적인 인사배치에 놀랐다. 또한 미국군대가 사용하다가 철수하면서 남긴 재산을 접수하며 ‘군사원조’의 실체를 똑똑히 목격했다. 예컨대 “이 전기소켓은 신품이 1달러짜리인데 인계인수 서류에서는 중고품 가격으로 30센트, 콘크리트 보도는 거의 무상”이라는 식이 미군의 군사원조 계산법이었다. 미군 장교의 복장이 바뀌어 그때까지 입고 있던 폐품을 지급하면 한국 군대는 덥석 받아 들고 ‘한국군의 장교 정복’으로 만들어버렸다.
리영희가 7년간 지낸 군대는 인간에 대해 ‘근원적으로’ 아무런 인식이 없던 사회였으며 본질적으로 반민중적이었다. 이북에서 내려온 한 청년의 내면에 끊임없는 회의와 질문, 허위와 가식으로 가려진 진실을 밝혀내려는 종교적인 신념이 자리 잡아갔다. 리영희에게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사회주의의 실패, 어떻게 봤나
소심하고 착하며 유순하고 순응적인 리영희가 이러한 모순과 부패 속에서 ‘돌아버리지’ 않고 살았으니 그 가슴속에 쌓인 것이 무엇이고 얼마만큼이었을까. 마침내 포화상태를 분출할 기회가 왔다. 군대에서 익힌 영어로 통신사에 입사한 것이다. 거기서 리영희는 ‘미친 듯이’ 공부하고 일했다. 체험이 토대가 되고 지식과 관찰을 통한 인식이 덧붙여져 그의 내면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반공주의의 비이성적인 색맹상태도 극복되었다.
뒤늦게야 역량이 발휘되는 대기만성형의 리영희는 30대 말까지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위해 공부하며 자신의 생각을 글로 썼다. 리영희의 해직과 투옥의 역사는 리영희식 실천의 증언이다. 1964년 조선일보 기자로 있을 때 ‘아시아·아프리카(AA) 외상회의에서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안 검토 중’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써서 리영희는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되었다. 2심에서 선고유예판결을 받고서 풀려났다.
1960년대에 리영희는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파병에 대한 반대 입장 때문에 신문사 안팎으로부터 거센 시달림을 받다가, 1968년 결국 조선일보에서 쫓겨났다. 1970년에 합동통신 외신부장으로 있었으나 이듬해 ‘64인 지식인 선언’으로 합동통신에서 다시 해직되었다. 1972년에 한양대학에 들어간 리영희는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에 가담, 1976년 교수재임용법에 의해 교수직에서 강제 해직당했다. 리영희는 언론사에서 두 번, 대학에서 두 번 해직당했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 아래서 두 번, 전두환 정권 때 두 번, 노태우 정권 때 한 번 등 모두 다섯 번에 걸쳐 구속되어 세 번의 유죄판결을 받고 총 1012일을 감옥에서 보냈다.
리영희는 1989년 12월 화갑을 맞았다. 그때 그는 “아무리 의로운 일도 어떤 선에서 멈출 줄 모르면 오만이 된다”(리영희, ‘자유인, 자유인 : 리영희 교수의 세계인식’, 범우사, 1990)고 하면서 “지나온 생의 한 장을 접고 새 삶의 장을 열기에 앞서 잠시 자신을 성찰해야 할 건널목”에 섰다. 리영희의 성찰은 1990년대 내내 침묵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지식인은 대개 솔직하지 못하다. 권력의 탄압에 굴복해 오직 ‘공부’로만 얻은 기존의 사회과학이론에 숨어 한국 현대사의 온갖 현실 해석과는 담을 쌓거나 고답적인 알레고리 속으로 잠수해버리기 일쑤다.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서구 사회과학은 학문의 세계 속에서 일종의 우상이 된다. 이들은 법칙상의 효용에 묻혀 현실적인 사회환경의 변화에 대해 속수무책이거나 외면하기 일쑤였다.
1991년 1월 리영희가 강연 아닌 간담 형식으로 술회한 ‘지적 고민의 고백’은 지식인 사회에 상당한 파장을 몰고 왔다. 그는 ‘사회주의의 실패를 보는 한 지식인의 고민과 갈등 : 사회주의는 이기적 인간성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인가?’를 통해서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패배를 솔직히 인정했다. 그는 이 간담에서 지식인 집단의 환경예측 능력 상실의 시대를 고백했다. 이날의 간담 내용은 그해 ‘신동아’ 3월호에도 게재되었다. 수많은 리영희의 제자가 아우성쳤다.
2006년 9월 서울 교보문고 강남점에서 독자와의 만남을 가진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가 저서에 사인하고 있다.
“나는 지금 거대한 역사적 변혁 앞에서 지적, 사상적 그리고 인간적 겸허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심정입니다. 그와 동시에 주관적 오류나 지적 한계가 객관적 검증으로 밝혀질 때, 부정된 부분을 ‘사상적 일관성’이라는 허위의식으로 고수할 생각은 없습니다.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진실은 균형 잡힌 감각과 시각으로만 인식될 수 있다. 균형은 새의 두 날개처럼 좌와 우의 날개가 같은 기능을 다할 때의 상태다. 이 자연의 법칙은 인간 사유에 있어서도 가장 건전한 상태다. 진보의 날개만으로는 안정이 없고 보수의 날개만으로는 앞으로 갈 수가 없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균형 잡힌 인식으로만 안정과 발전이 가능하다. 리영희는 1994년 7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두레)에서 이런 이치를 역설했다. 이 책의 제목은 리영희의 1990년대에 걸친 대표적 화두였다.
‘역사비평’ 1995년 여름호 인터뷰 ‘리영희 - 냉전 이데올로기의 우상에 맞선 이성의 필봉’에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라는 그의 화두는 좀 더 상세하게 설명되었다. 김동춘이 리영희에게 그의 책이 반공체제라는 거대한 우상을 무너뜨리는 효과적인 무기로서 중국이나 베트남의 경우를 끌어들인 것 같고, 그러다 보니 중국이나 베트남 사회를 지나칠 정도로 이상화한 측면이 있지 않으냐고 질문하자, 리영희는 그에 대해 대체로 인정했다.
“우리의 상황에 직접적으로 사상의 칼을 들이대거나 대항할 수가 없어서, 외부의 유사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투쟁이나 대안을 비추어줌으로 해서 같은 효과를 얻으려다 보니, 마치 시계의 추가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이쪽 끝과 저쪽 끝을 맞추어야 하는 것 같은 의미에서 그렇게 됐습니다. 그 후 더 많은 정보가 자유롭게 들어오면서 지난날에는 밑에 깔려서 밝혀지지 않고 숨겨지고 잠재해 있던 그런 일면의 사실들을 보게 되는 것 같아요.…그런 측면은 분명 시인합니다.”
1998년에 들어 리영희는 시민적 유대를 통한 계몽적 사회개혁 운동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 운동을 관통하는 이념은 폭력이나 제도, 계급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인간의 행복, 생명의 존중을 동기와 목적으로 하는 아주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문제여야 한다고 했다. 이어서 1999년 리영희는 “휴전선 남과 북에는 지옥도 없고 극락도 없다”고 하면서 ‘반세기의 신화’(삼인)를 출간했고, 그해 말 고희 기념선집으로 ‘동굴 속의 독백’(나남)을 냈다.
‘연세대학원신문’은 1999년 12월 ‘20세기 인문과학 분야에 가장 영향을 끼친 학자의 저작’란을 마련, 교수와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리영희는 그때 국내학자 중 첫째로 꼽혔다.
그는 무슨 ‘주의자’인가
1990년대에 이르러 리영희는 30여 년 동안 사회현실과의 끊임없던 긴장관계, 자신과의 내면적 싸움을 반납하고 소용돌이의 시대상황에서 한걸음 물러나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러던 2000년 말 리영희는 느닷없이 닥친 뇌출혈로 쓰러졌다. 시대와 역사 앞에 너무 혹독하게 자신의 기를 다 소진한 탓이리라. 그 후 한동안 사고와 행동과 언어의 장애 속에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 그러던 중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리영희는 파병반대 시위현장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전논’을 집필하던 때 리영희는 서울 제기동의 대지 26평에 건평 13평짜리 허름한 집에 기거했다. 당시 그의 서재는 여느 지식인 또는 독서인의 그것과는 판이했다. 그의 서재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손때 묻고 낡은 스크랩북과 파일들이었다. 국제정세 관계기사를 오려 붙인 스크랩북은 누런 포장용지를 접고 자르고 구멍을 뚫고 풀로 붙여서 만들었다. 거기에는 미국, 중국, 베트남, 제3세계 등 국제정세에 대한 사실이 만재되어 있었다. 특히 미 국무부, 국방부, 의회의 비밀문서와 공청회 기록 등은 좀처럼 개인이 입수하기 어려운 고급정보였다.
‘단순한 생활, 드높은 정신’은 리영희의 생활신조다. 물질에 대한 집착은 도덕적, 정신적 성숙도에 반비례한다고 리영희는 보았다. 글을 쓸 때 그는 통계수치 하나를 찾기 위해 온 자료실을 뒤져 20년 전 그날의 관련 보도자료를 찾아내는 작업을 반복한다. 늘 새로운 발상, 새로운 근거자료를 찾아 헤맨다. 그는 또 새로운 지식과 정보, 독자의 판단을 위한 균형 잡힌 자료 제시, 자료에 대한 관점, 의미, 사실성에 특별히 공력을 들인다.
리영희는 글을 쓸 때 ‘난해하게 꼬아 트는 문화주의적 세련’을 혐오한다. 그런 허영스러운 지적 논리 대신 글 한 편 한 편에서 이유와 근거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이론적 틀을 단단하게 구축한다. 그는 연구를 하거나 학문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형이상학적 사변에 의한 이론조작을 중시하지 않는다. 무슨 문제든지 치밀하게 구성하는 것, 문제의 구조를 통계나 보고서 등을 통해 실증적으로 분석하는 데 집중했다. 중요 문제를 족집게처럼 정확하게 짚어내는 현실분석의 탁월함이 이로부터 나왔다.
글을 쓸 때 리영희가 바치는 에너지는 자료수집에 70%, 나머지 10%는 구성에, 20%는 쓰는 데 할애되었다. 200자 원고지 몇 장을 쓰기 위해 예닐곱 권의 책을 뒤적이는 일이 보통이며, 칼럼 한 편을 쓰기 위해 미국 상원의원 회의록 1200쪽을 읽어 겨우 한두 가지 통계자료를 찾아낼 때도 있었다. 독한 기자정신이며 실증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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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로가 폐쇄되고 사실과 진실의 발설에 억압이 가해지는 상황에서 리영희의 글쓰기는 그 자체가 지식인의 실천이었다. 변화무쌍한 한국사회, 그것도 추상이 아닌 현실의 세계를 실증적으로 다룬 지식인 중 리영희처럼 오랜 세월 인구에 회자된 인물은 드물다.
리영희와 평소 허물없이 지내는 이호철은 인간적인 정을 듬뿍 담아 리영희를 “꼼꼼하고 쫀쫀하고 깐깐한 좁쌀영감”이라고 했다. 그를 두고 무슨 ‘주의자’라고 규정하고 싶은 이들도 있겠지만, 현상을 분석함에 있어 이론이나 법칙이 아니라 사실과 진실에서 출발하는 그의 태도를 놓고 볼 때, 리영희는 차라리 ‘무(無)주의자’ 또는 ‘반(反)이데올로기 주의자’, 아니 ‘진실주의자’일지 모르겠다. 혹시 그런 ‘주의자’도 있을 수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