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호

애플 CEO 스티브 잡스

위기, 그리고 기회

  • 전원경│주간동아 객원기자 winniejeon@hotmail.com│

    입력2009-05-06 11: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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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양아 출신으로 대학을 중퇴했다. 스무 살, 집 창고에 ‘애플’이라는 이름의 컴퓨터 회사를 차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억만장자가 됐다. 서른 살,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마흔둘, 다시 CEO로 복귀해 아이팟, 아이폰을 연달아 내놓으며 애플을 세계 최고의 우량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창조와 혁신의 대명사, 스티브 잡스 애플 CEO의 이야기다.
    애플 CEO 스티브 잡스
    지난 1월14일 애플의 최고경영자(CEO) 스티브 잡스가 건강 문제로 6개월 동안 병가를 냈다는 뉴스가 발표되자 애플 주가는 8% 이상 추락했다. 이후 ‘애플이 잡스의 건강상태에 대해 사전에 공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주주들이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등의 소식이 잇따라 보도됐다. 잡스는 2004년 7월 췌장암 수술을 받았다. 그 후 한동안 건강해 보이던 그가 지난해 초췌한 모습으로 공식석상에 나타나자 암 재발설을 비롯한 각종 루머가 난무했다.

    ‘애플’은 미국의 자존심이다. 지난해 4/4분기에 매출이 101억달러, 순익이 16억달러(약 2조원)에 달했다. 이 기간 250만대의 매킨토시와 2,270만대의 아이팟, 430만대의 아이폰을 팔았다. 경제전문지 ‘포천’은 2008년에 이어 2009년에도 ‘가장 존경받는 기업’ 1위로 애플을 선정했다.

    최우량 기업 애플 주가가 ‘CEO의 병가’라는 이유로 폭락했던 이유는 뭘까? 잡스가 ‘단순한 한 사람의 CEO’가 아니기 때문이다. 2007년 기준으로 애플의 브랜드 가치는 110억달러에 달하는데(‘비즈니스위크’ 평가), 이 브랜드 가치의 절반 이상이 스티브 잡스 한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누구나 안다. 이 남자가 놀라운 창조성과 혁신의 주인공이며, 타협을 모르는 완벽주의자, 프레젠테이션의 귀재인 동시에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를 동시에 평정했다는 점을. 스무 살에 애플을 창업해서 25세에 2억5000만달러 이상의 자산을 보유했으며 스물여섯 살에 ‘타임’ 지 표지모델로 등장했고, 서른 살에 애플에서 쫓겨났다. 마흔 살에 세계 최초의 100%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를 제작했고 마흔둘에 애플의 임시 CEO로 복귀해 회사 주가를 스무 배 이상 올려놓았다.

    스티브 잡스라는 ‘신화’



    애플은 스티브 잡스 주도로 아이맥, 아이팟, 아이폰, 아이튠 등 시대를 선도하는 컴퓨터와 통신기기, 디지털 플레이어, 온라인 음악스토어를 탄생시켰다. 픽사는 ‘토이 스토리’에 이어 ‘벅스’ ‘몬스터 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 ‘인크레더블’ 등의 애니메이션을 히트시키며 디즈니에 버금가는 세계 최고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 부상했다. 스티브 잡스는 컴퓨터, 할리우드에 이어 음악 산업까지 리드하는 시대의 아이콘이다.

    그는 또 냉혹하고 인정사정없는 협상의 달인이다. 애플사 직원들이 행여 그와 마주칠까봐 그와 겹치는 시간대에 사내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그는 독재자형 보스이기도 하다. ‘유능하고도 무서운 폭군’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스티브 잡스의 전부일까? 물론 잡스는 천재적인 혜안과 통찰력을 가졌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인생에서 여러 번의 위기를 겪었다. 그리고 다른 평범한 사람과는 달리, 그 위기를 기회로 탈바꿈시켰다. 아마도 이것이 스티브 잡스의 ‘가장 남다른 점’일 것이다.

    잡스는 언론과의 접촉을 꺼린다. ‘포천’ 등 오래전부터 그와 ‘특별한 관계’를 구축해온 몇몇 언론사를 빼놓고는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는다(이 때문에 애플 직원들은 기자들과 만날 때 대체로 익명을 요구한다. 심지어 잡스에 대해 찬사를 보낼 때도 마찬가지다). 이런 ‘은둔자 잡스’가 자신의 지난날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2005년 8월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장에서다. 졸업식 연사로 나선 잡스는 “나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 오늘이 내가 대학 졸업식장에 가장 가까이 온 날이다”라고 말문을 열면서 자신의 살아온 날들을 ‘세 개의 이야기’로 요약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자신이 블루칼라 가정의 입양아로 자라다가 대학을 중퇴한 사연이다. 두 번째는 애플을 창업해 승승장구하다 서른 살에 애플에서 축출된 사연, 그리고 마지막으로 애플에 복귀해 보란 듯이 성공하지만 췌장암 선고를 받고 회복되기까지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방법으로 이 세 가지 위기를 벗어났을까?

    “생모는 미혼의 대학원생이었기 때문에 나를 입양 보내기로 결정했다. 생모는 내가 꼭 대졸 학력 부모에게 입양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래서 태어나기 전까지 나는 변호사 부부에게 입양되기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내가 막 태어나기 직전, 변호사 부부는 마음을 바꾸어 여자아기를 원한다고 말했다.”(2005.8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식 축사 중)

    스티브 잡스

    ● 1955년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출생

    ● 1972년리드 칼리지 입학, 입학 후 한 학기 만에 중퇴

    ● 1976년스티브 워즈니악과 컴퓨터회사 ‘애플’ 설립

    ● 1980년애플, 미국 증권거래소 상장

    ● 1985년애플 이사회 스티브 잡스 CEO직에서 축출. ‘넥스트’ 설립

    ● 1986년루카스 필름의 컴퓨터그래픽 파트 인수해 ‘픽사’로 개명

    ● 1991년스탠퍼드 대학 MBA 과정에 재학 중이던 로렌 파월과 결혼

    ● 1995년‘토이스토리’ 개봉, 1995년 최다 흥행수익 영화로 기록됨

    ● 1997년임시 CEO 자격으로 애플 복귀

    ● 1998년애플, ‘아이맥’ 출시

    ● 2001년애플 정식 CEO로 임명됨

    ● 2004년스탠퍼드 대학 부속병원에서 췌장암 수술 받음

    ● 2007년애플, ‘아이폰’ 개발로 휴대전화 시장에 진출

    애플 CEO 스티브 잡스

    미국 스탠퍼드대 졸업식에 내빈으로 참석한 스티브 잡스.

    출생과 입양, 대학 중퇴

    잡스는 1955년생으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전 회장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그러나 빌 게이츠의 부모가 변호사와 대학 이사라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데 비해 스티브의 환경은 딴판이었다. 원래 스티브를 입양하기로 했던 변호사 부부가 막판에 마음을 바꾸는 바람에 스티브는 해안경비대원 출신인 폴 잡스와 클라라 부부에게 갈 수밖에 없었다. 폴은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스티브의 생모는 무척 화를 냈다. 입양을 성사시키기 위해 폴과 클라라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스티브를 대학 교육까지 시키겠다”고 약속해야만 했다.

    스티브의 친부는 시리아인이다. 친부 압둘파타 잔달리는 훗날 시리아에서 정치학과 교수가 됐다. 스티브의 친부모는 대학원을 마친 뒤 결혼했으나 딸 하나를 낳고 이혼했다. 이들의 딸(스티브의 여동생) 모나 심슨은 소설가가 됐다. 스티브는 성공한 후에 친모인 조안 쉬벨과 여동생 모나를 만나기도 했다. 그는 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친모를 어머니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그에게 부모는 이미 세상을 뜬 폴과 클라라 잡스뿐이었다. 폴과 클라라 부부는 툭하면 집안의 전자제품을 망가뜨리는 스티브를 전혀 말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이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무엇이든 부수고 맞추도록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스티브는 고교 시절 자신이 입양됐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친부모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그렇지 않아도 반항적이고 집요한 스티브의 성격은 더욱 강해졌다. 그는 자신이 가치 없는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뭔가 확실하고 대단한 일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친부모에 대한 공허함과 슬픔을 잊기 위해 스티브는 컴퓨터를 파고들었다.

    ‘취미로 컴퓨터를 조립하는’ 천재 엔지니어 스티브 워즈니악을 만난 것도 이 때쯤이었다. 워즈니악이 잡스보다 다섯 살 위였지만 ‘두 스티브’는 곧 공통분모를 확인하고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워즈니악 역시 대학 홈페이지를 해킹하다 콜로라도대에서 퇴학당한 괴짜 중의 괴짜였다. 훗날 스티브는 워즈니악을 설득해 자신의 집 창고에서 ‘애플’을 창업하게 된다.

    캘리포니아 쿠페르티노에서 성장한 스티브는 꼭 시애틀의 리드 대학교(Reed College)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이 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스티브는 1학년 1학기만 마치고 자퇴하는데, 그 이유에 대해 스티브 본인은 이렇게 말한다. “대학교 등록금은 굉장히 비쌌고, 그 때문에 부모님은 평생 모은 저축 대부분을 써야 할 형편이었다. 굳이 그같이 비싼 등록금을 내면서 학교 강의를 들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결정을 내리게 된 데에는 자신이 잡스 부부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도 분명 작용했을 것이다.

    스티브는 20대의 전반을 히피 생활로 보냈다. 게임제작업체에 취직해서 돈을 모아 인도 여행을 떠나는가 하면, 마약에 손을 댄 적도 있었다. 그는 인도와 히말라야 일대를 돌아다니다 옴에 걸리기도 하고, 마른 개울바닥에서 모래구덩이를 파고 잠을 자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스티브는 내면에서 들끓는 열정과 공허함, 친부모에 대한 상실감을 메우고 싶었을 것이다.

    인도를 떠돌던 스티브는 삭발한 머리에 노란색 법복을 입고, 맨발에 샌들을 신은 차림새로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 여행은 스티브의 나머지 인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스티브는 불교도이자 엄격한 채식주의자가 돼 있었다. 억만장자임에도 그리 크지 않은 집에서 살고 늘 검은 티셔츠와 리바이스501 청바지, 맨발에 캔버스 운동화를 고집하는 그의 절제된 생활은 이 같은 젊은 날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간결하고 금욕적인 삶의 방식은 그의 생활뿐만 아니라 아이맥과 아이팟 등 디자인 철학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75년 가을, 워즈니악이 컬러 화면을 구동할 수 있는 회로기판을 만들어 스티브에게 보여주었다. 회로기판을 본 순간,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어 팔면 장사가 되겠다는 직감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는 워즈니악을 꼬드겨 1976년 자신의 집 창고에서 컴퓨터 회사 ‘애플’을 창업했다. 그즈음 스티브는 오리건 주의 사과농장에서 선(禪) 애호가들과 자주 참선수양을 했는데, 이 때문에 회사 이름이 자연스럽게 ‘애플’이 됐다. 그러나 회사 이름 때문에 스티브는 자신이 광적으로 좋아하는 비틀스의 ‘애플 레코드’와 오랫동안 상표 분쟁을 벌여야만 했다.

    아무튼 스티브는 이렇게 해서 젊은 시절의 방황을 접었다. 입양, 대학 중퇴, 열정적이고 충동적이며 집요한 성격, 어디로 보나 스티브는 비뚤어지기 쉬운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선불교와 동양사상, 그리고 컴퓨터에 의해 스티브는 첫 번째로 찾아온 인생의 위기를 벗어났다.

    회사가 설립되고 워즈니악이 개인용 컴퓨터 ‘애플I’과 ‘애플II’를 만들어내자, 스티브는 놀라운 마케팅 능력과 시장을 읽어내는 혜안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애플I과 애플II의 개량 버전들이 계속 출시되며 ‘개인용 컴퓨터’, 즉 PC의 시대가 열렸다. 1980년 12월, 창업 4년 만에 애플은 증시에 상장되었고, 상장 하루 만에 주가는 32% 상승했다. 4년 전까지 맨발에 샌들을 신고 다니던 히피 청년 스티브는 나이 스물다섯에 2억5000만달러 이상을 보유한 억만장자가 됐다.

    애플을 잃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고, 애플은 10년 만에 직원 두 명인 회사에서 종업원 4000명에 20억달러 규모의 회사로 성장했다. 애플은 최고 걸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다, 나는 막 서른이 됐고, 그리고 해고당했다.” (2005.8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식 축사 중)

    첫 번째의 위기가 개인적인 문제였다면, 두 번째 위기는 좀 더 심각하고도 복잡했다. 애플은 스티브를 이사회 결정을 통해 축출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스티브는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누구보다 새로운 비전을 일찍 알아차리고, 놀라운 마케팅 능력을 갖고 있지만 스티브는 너무도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한 CEO였다. ‘포천’ 표현대로라면 그는 ‘벤츠를 거리낌 없이 장애인 주차지역에 주차하는’ 사람이었다. 완벽주의자인데다 타협을 모르는 경영 스타일을 구사하는 잡스는 신제품 개발의 하나하나를 다 챙기며 직원들을 가혹하게 독촉했다. 사내에선 점점 그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82년 스티브가 ‘타임’ 신년호 표지모델로 실렸다. 불과 스물 여섯 살의 청년에게는 대단한 영광이었다. 그러나 ‘타임’ 지를 펴본 스티브는 경악했다. 기사 도처에 가시가 돋친 말들이 박혀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직원은 스티브에 대해 “프랑스 왕이 됐으면 잘할 사람이다”라고 빈정거렸고, 죽마고우이자 공동창업자인 워즈니악마저 “스티브는 회로판 하나, 코드 하나도 직접 만들지 않았다”고 그를 비난했다. 기사 속 스티브는 뛰어난 엔지니어들을 교묘하게 조종해서 떼돈을 벌어 챙기는 사기꾼 같은 인상을 주었다. 스티브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스티브는 고집스럽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고치지 못했다.

    애플 CEO 스티브 잡스

    최근 잡스의 건강 이상설로 애플의 주가는 대폭 하락했다. 사진은 2008년 3월 아이폰 관련 기자회견 모습.

    마침 회사 경영실적도 하락세였다. 매킨토시에서 쓸 수 있는 소프트웨어의 가짓수가 적다는 이유로 소비자는 매킨토시를 외면했다. 매킨토시 판매가 1984년 들어 월 1만대 이하로 떨어졌다. 스티브와의 갈등으로 유능한 엔지니어들은 회사를 떠나기 시작했다. 1985년에는 그와 함께 애플을 창업했던 워즈니악마저 떠났다.

    결국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의 진원지는 애플의 이사회, 그중에서도 1983년 스티브가 직접 펩시콜라에서 영입한 마케팅 전문가 존 스컬리였다. 이사회는 스컬리를 애플의 CEO로 임명하고 스티브에게는 ‘프로덕트 비저너리(Product Visionary)’라는 이상한 직함을 줬다. 실질적 권한은 없는 명목뿐인 직함이었다.

    뒤늦게 반란을 눈치 챈 스티브는 사태를 되돌리기 위해 온 힘을 다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사회 멤버들은 스티브의 독선과 아집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1985년 5월28일, 스티브는 회사 내 유일한 친구인 마케팅 이사 마이크 머리에게 전화를 걸어 이사회가 자신을 축출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었지만 머리는 스티브가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가구 하나 없는 스티브의 집은-지금도 스티브는 집에 가구를 거의 들이지 않고 살고 있다- 어둠에 싸여 있었고 스티브는 매트리스 위에 누워 울고 있었다. 머리가 다가가 그를 안아주자 스티브는 한 시간 동안 말없이 눈물만 쏟았다. 아무리 천재 기업가라도 해도 스티브는 갓 서른의 청년이었다. 그는 10년 동안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지켜온 회사를,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스티브는 유럽으로 갔다. 이탈리아와 스웨덴을 자전거로 돌면서 머릿속을 떠도는 상념들을 모두 잊으려고 애썼다. 그는 막 시작된 민간인 우주왕복선 탑승을 NASA에 신청하는가 하면, 정치인이 되기 위해 정치 컨설팅 회사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여의치 않았다. NASA는 챌린지호에 탈 최초의 민간인으로 여교사인 크리스타 매콜리프를 선발했다(아이러니하게도 매콜리프가 탑승한 챌린지호는 1986년 1월28일 발사 73초 만에 폭발했다).

    유럽을 떠돌던 여름, 스티브는 불현듯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무엇을 제일 잘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뛰어난 인재로 작은 팀을 구성해서, 그들과 함께 새롭고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어 파는 일, 이것이 내가 제일 잘하며 또 즐기는 일이다. 바로 애플II나 매킨토시를 만들 때처럼.” 새로운 영감이 떠오르자 눈앞을 가리고 있던 장막이 걷혔다. 스티브는 ‘뉴스위크’에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서른 살이다. 아직 뒤에 물러나 선생 노릇 할 때는 아니다. 나는 물건을 만드는 게 꿈이다. 애플에 그런 일을 할 자리가 없다면 내가 그런 자리를 찾아야 한다…. 애플에서 보낸 10년은 내 삶에서 최고의 날이었다, 후회는 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내 인생을 살고 싶을 뿐이다.’ 스티브는 컴퓨터 회사 ‘넥스트’를 설립하고, 컴퓨터 애니메이션 제작 스튜디오를 조지 루카스 감독에게서 인수해 ‘픽사(‘픽셀Pixel의 동사형)’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음’이라는 뜻인 ‘넥스트’라는 이름이 의미심장하다. 그에게 ‘처음’은 언제나 애플이었다.

    이후 10년간, ‘넥스트’는 고전했지만 ‘픽사’는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스티브는 정말 중요한 것은 컴퓨터의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사용자에게 꿈과 감동을 주는 ‘콘텐츠’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픽사’를 인수했던 것이다. 최초의 CG 애니메이션인 ‘토이 스토리’가 개봉된 1995년까지 스티브는 파산 직전의 상황까지 몰리며 천문학적인 자금을 ‘픽사’에 쏟아 부었다. 1991년 디즈니와 후원계약을 맺지 않았다면 픽사는 진작에 파산했을 것이다.

    1995년 ‘토이스토리’가 개봉됐을 때 스티브의 자금상황은 최악이었다. 빚잔치를 하기 위해서는 ‘토이스토리’가 최소 1억달러는 벌어주어야 했는데, 본격적인 영화도 아닌 애니메이션이 그 같은 수익을 올린다는 건 영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그해 11월 개봉된 ‘토이스토리’는 3억5800만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이후 개봉된 픽사의 애니메이션 ‘벅스’‘몬스터 주식회사’‘니모를 찾아서’‘인크레더블’은 차례차례 전작의 흥행기록을 갱신해나갔다. 창조성과 기술을 결합하겠다는 스티브의 과감한 투자가 대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픽사는 2006년, 74억달러의 가격으로 디즈니에 매각됐다. 스티브는 디즈니 주식의 7%를 보유해 디즈니의 개인 최대 주주로 올라섰다).

    왕의 귀환, 애플로 돌아오다

    오 헨리의 작품 중에 ‘인생은 회전목마’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이 말은 스티브의 인생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 아닌가 싶다. 스티브의 승승장구에 반비례하듯, 애플은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어갔다. 1995년, 즉 스티브가 애플을 떠난 지 10년 후 애플은 컴퓨터업계 시장점유율 8%의 초라한 기업으로 전락했다.

    1997년 ‘타임’에 ‘스티브 잡스의 임무: 애플을 살려내는 것’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애플 내에서도 ‘위기에 빠진 회사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잡스뿐’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스티브는 애플의 요청을 거절하고 애플 주식 150만주를 팔아치운다. ‘나는 애플에 미련이 없다’는 제스처를 취한 셈이다. 그러나 속마음은 다르지 않았을까? ‘첫사랑’인 애플을 스티브가 버릴 수 있을까? 애플 CEO였던 길 어밀리오는 1998년 출간된 회고록 ‘애플에서 보낸 500일’을 통해 스티브가 이미 1995년 자신을 찾아왔다고 털어놓았다. 스티브가 어밀리오에게 자신이 애플에 복귀할 것이라며, 이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여론에 떠밀렸던 것인지, 아니면 3년에 걸친 치밀한 계획의 결과였는지는 미지수지만(어쩌면 둘 다였을지 모른다) 스티브는 1997년 ‘임시(Intern) CEO’라는 직함을 달고 애플에 복귀했다. 그리고 스티브는 다시 한 번 미다스의 손을 움직인다. 영원한 라이벌로 여겨졌던 마이크로소프트의 후원계약을 이끌어낸 데 이어(이를 통해 마이크로소프트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맥에 탑재되었다), 컬러풀한 차세대 컴퓨터 ‘아이맥’, 디지털 음악네트워크 ‘아이튠’, 음악재생기기 ‘아이팟’ 등을 연달아 개발해냈다. 이를 통해 한물간 기업 애플은 디지털 시대의 총아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스티브가 복귀한 지 3년 만에 애플 주가는 여덟 배 이상 상승했다.

    2000년 애플 이사회는 ‘임시’ CEO인 스티브를 정식 CEO로 임명했으며 스톡옵션 1000만주와 4000만달러가 넘는 전용제트기를 선물한다. 그러나 한때 스티브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듯 사용했던 임시CEO(I-CEO)라는 직함은 이제 스티브 잡스의 새로운 직함처럼 굳어졌다. I-CEO 즉, 그는 아이맥, 아이팟 등과 더불어 애플을 상징하는, 아니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CEO가 된 셈이다.

    췌장암 그 후 이야기

    “1년쯤 전에, 암 진단을 받았다. 단층촬영에서 췌장에 붙어 있는 종양이 명확하게 보였다. 의사들은 췌장암은 치유 불가능하다며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 더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5.8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식 축사 중)

    스티브가 췌장암 진단을 받은 것은 2003년 10월의 일이다. 췌장암은 가장 치명적인 암이지만, 요행 스티브가 걸린 췌장암은 치료가 가능한 희귀한 종류였다. 의사들은 수술을 하면 최소 10년 이상 생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스티브 본인이 수술을 거부했다. 서양의학에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스티브는 처음에는 식이요법을 통해 암을 고쳐보겠다고 선언했다. 이후로 9개월간, 애플 경영진은 피 말리는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만약 스티브가 암으로 갑자기 죽게 된다면? 그건 애플의 사망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애플이 생산하는 모든 제품의 성능과 디자인, 심지어 애플 사옥 내의 카페테리아 디자인까지 스티브의 최종 승인 없이는 결정될 수 없었다. 애플 주주들이 스티브의 부재를 인정할지도 미지수였다. 그 누구도 스티브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미 증명되지 않았는가.

    결국 스티브는 식이요법만으로는 역부족임을 인정하고 2004년 7월31일 스탠퍼드대 부속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 스티브는 애플 커뮤니티 e메일을 통해 자신이 한때 죽음의 문턱까지 갔지만, 수술로 암 세포를 떼어냈음을 알렸다. 애플의 주가는 ‘겨우’ 2.4% 하락하는 데에 그쳤다.

    그러나 2008년 초부터 다시금 스티브의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조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스티브의 몸무게가 확 줄어든 것이다. 2008년 6월 제3세대 아이폰 발표회장에 스티브가 수척해진 모습으로 등장하자 업계에는 그의 건강을 둘러싼 각종 루머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7월21일 ‘뉴욕포스트’가 ‘스티브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보도를 내보내자 애플의 주가는 9% 하락했다. 며칠 후 ‘뉴욕타임스’가 ‘스티브의 건강이상설 소문은 과장된 것’이라고 반박했지만 불안감은 가라앉지 않았다.

    2008년 8월28일, 그야말로 ‘요상한’ 사건이 터진다. 블룸버그 통신에서 스티브의 죽음을 알리는 짤막한 부고 기사가 송고됐다. 이 기사는 오보였고 블룸버그 측은 사과와 함께 신속하게 기사를 내렸다. 그러나 이 때문에 업계의 불안은 증폭되었다. 유명 언론사가 부고 기사를 준비해두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스티브의 건강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 아닌가?

    이해 12월, 애플 측은 2009년 1월 열리는 애플의 신제품 발표회 ‘맥월드’(스티브가 신기에 가까운 프레젠테이션 솜씨를 보여주는 바로 그 무대)에서 스티브 대신 부사장인 필 쉴러가 기조연설을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다시 애플 주가는 6% 하락했다. 애플 측이 스티브의 건강 문제에 대해 아무런 공식 발표를 하지 않자 ‘포천’은 ‘스티브의 건강은 사생활 문제이지만, 애플은 여기에 대해 성실하게 발표할 의무가 있다. 스티브의 건강이 단순히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회사의 운명이 걸린 일이라는 건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라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잡스의 병가와 애플 위기설

    그렇다면 스티브는 과연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인가? 암이 재발했다는 소문은 사실일까? 애플이 공식적으로 밝힌 것은 ‘호르몬 불균형 때문에 단백질이 생성되지 않아 살이 빠지고 있다’는 정도다. 그러나 지난 1월 병가를 떠나기 직전에 보낸 메일에서 스티브는 ‘내 건강 문제가 생각보다 복잡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최소한 호르몬 불균형보다는 더 심각한 이상이 발견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현재도 스티브는 애플 CEO 직함을 유지하고 있고, 회사의 주요한 전략 결정에 여전히 참여하고 있다. 1월 중순 ‘뉴욕타임스’는 ‘잡스가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호르몬 이상보다는 스트레스가 더 큰 이유이며, 주치의가 일에서 잠시 떠날 것을 권유했다’고 보도했다. 그렇다면 스티브의 병가는 심각한 건강 이상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스티브는 ‘포천’ 2008년 3월호와의 인터뷰 중 ‘만약 당신이 없다면 애플은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은 행여 내가 버스에 깔려 죽기라도 하면 애플이 같이 죽어버릴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사태가 터지면 파티가 열릴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 없이도 최고운영책임자(COO)인 팀 쿡을 비롯한 여러 유능한 사람이 애플을 잘 이끌어나갈 것이다. 내가 애플에서 수행하는 업무 중에는 후계자를 키우는 것도 있다.”

    애플은 6월8일부터 12일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2009 세계개발자컨퍼런스(WWDC)’에서 3세대 아이폰 후속 모델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때 스티브 잡스가 새로운 아이폰을 들고 센세이셔널하게 복귀할 것이라는 것이 업계의 희망 섞인 관측이다. 사람들은 이미 여러 번 인생의 큰 위기를 뛰어넘은 스티브 잡스가 마지막 위기 역시 보란 듯이 극복하고 6월의 WWDC 무대에서 특유의 현란한 프레젠테이션 솜씨를 보여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스티브는 일찍이 애플의 신제품들에 대해 “이것은 기술이나 과학의 영역을 넘어선, 예술품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는 또 애플 제품들의 성공 이유에 대해 “고객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제품을 만드는 것, 그것이 애플의 목표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컴퓨터라는 차가운 기계, 사무실 책상 위에 놓인 회색 기계덩어리에 인간의 숨결과 꿈을 불어넣은 창조성의 대가 스티브 잡스. ‘꿈이 있는 컴퓨터’와 ‘혁신의 애플 문화’를 전도해온 스티브 잡스는 이제 그 자신이 바로 많은 이의 꿈, 즉 영원한 아이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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