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호

“왜 술을 마셔야만 하는지 샐러리맨 인생 그리고 싶었다”

웹툰 ‘미생’ 작가 윤태호

  • 강지남 기자│layra@donga.com

    입력2012-10-23 15: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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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부장님이 생애 첫 구입한 만화책이라며 ‘미생’을 꺼냈다. “술 한잔하며 후배들과 하고 싶은 얘기가 여기 다 있다”며. 그래서 만난 미생의 작가 윤태호. 직장생활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는 그는 어떻게 샐러리맨의 눈물 젖은 소주잔을 실감나게 그려낼 수 있었을까.
    “왜 술을 마셔야만 하는지 샐러리맨 인생 그리고 싶었다”

    ‘미생’68수 중에서

    일에는 철두철미하지만 사내 정치엔 젬병이라 승진에서 뒤처진 만년 과장이 팀원들과 함께 동료 직원의 부정을 밝혀냈다. 이 직원은 검찰에 형사 고발됐고, 결재 라인에 있던 상사들은 줄줄이 한직으로 물러났다. 조직을 위해 큰일을 한 셈인데, 거참 세상 묘하지. ‘왜 조용히 처리하지 못했느냐’ ‘동료를 버렸다’ ‘너희는 깨끗하냐’…. 싸늘한 시선이 등 뒤에 꽂힌다. 만년 과장은 말한다. “이것만 기억하자. 우린 해야 할 일을 한 거다.”

    샐러리맨이라면 직접 겪었거나 보았거나 들었을 법한 이 이야기는 포털 다음에서 연재되고 있는 웹툰 ‘미생(未生), 아직 살지 못한 자’의 한 대목이다. 미생은 어려서부터 바둑을 두었지만 프로 입문에 실패한 ‘고졸 백수’ 장그래가 대기업 종합상사에 입사해 겪는 직장생활을 그린 작품이다.

    미생의 인기가 뜨겁다. 장기간 다음 웹툰 중 인기 1위, 평점 1위에서 내려올 줄 모른다. 일본 유명 만화 ‘시마과장’을 뛰어넘었다는 평도 듣고 있고 ‘직장인 필독서’란 별칭도 붙었다. 평소 만화를 사보지 않던 30대 중후반 직장인들이 미생 단행본을 앞 다퉈 구매해 예약판매 기간에 이미 재판(再版)에 들어갔다고도 한다. 직장생활에 대한 적확한 묘사, 바둑에 빗대 풀어내는 직장생활의 순리, 무엇보다도 그저 ‘시민, 서민, 대중으로 퉁 쳐서 평가받던’(작가의 말) 샐러리맨에 대한 위로가 월급쟁이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원인터내셔널 영업3팀에 천 과장이 새로 와 김 대리와 장그래 사원의 군기를 잡다가 오 팀장에게 혼쭐난 10월 9일 오후, 미생의 윤태호 작가(43)를 만났다. 그의 눈은 빨갰다. 밤새 작업하고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세종대에 강의를 다녀온 뒤 한 시간 자다 깼다고 했다. 미생은 145회까지 매주 두 편씩 연재할 예정인데 10월 중순 현재 막 절반 지점을 통과했다.

    “바쁘지만 요즘처럼 맘 편한 때가 없어요. 데뷔 이후 주변 사람들이 제 작품을 읽는 모습을 목격한 건 처음이거든요. 제 인생에서 가장 반응이 뜨거운 작품이에요.”



    윤 작가는 강우석 감독이 2010년 동명영화로도 제작한 웹툰 ‘이끼’(2008)로 유명 작가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끼는 대한민국만화대상 우수상, 부천만화상 일반만화상 등 각종 상을 휩쓸었고, 영화도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에도 불구하고 300만 이상의 관객이 찾았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을 소름 끼치게 풀어낸 이 스릴러물이 대중 일반에 확산되기엔 한계가 있었다. 이 만화 후반부에는 ‘삼덕기도원 집단살인’ 장면이 나온다. 살인마의 눈빛, 뒤엉킨 시체, 흥건하게 고여 밟히는 피…. 주인공 유해국의 아버지와 이장 천용덕의 비밀이 밝혀지는 이 장면은 너무도 서늘하고 섬뜩하다.

    “월급쟁이 남편, 이해하게 됐다”

    “왜 술을 마셔야만 하는지 샐러리맨 인생 그리고 싶었다”

    윤태호 작가는 “미생은 내 인생에서 반응이 가장 뜨거운 작품”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렇게 디테일하게 그릴 생각은 없었는데 첫 신을 그리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풀려나갔어요. 연재도 3개월 더 길어져 연재 초반부터 끝나기만 기다리던 영화 제작진이 많이 힘들어했죠. 이끼는 결이 예민한 작품이라 항상 아슬아슬했고 저 스스로도 불안했어요.”

    미생은 다르다. 그의 동년배들은 “내 얘기”라 하고, 그 아내들은 “남편을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그의 작품인 줄 모르고 미생 단행본을 사서 읽은 이웃 주민들과 아이들 친구 부모들에게 뒤늦게 사인해주기도 했단다. 그는 “이끼가 이름을 만들어준 작품이라면 미생은 그 이름을 단단하게 해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생은 3년 전 출판사가 제안한 기획에서 시작됐다. 허영만 화백의 ‘꼴’이 상업적으로 성공하자 출판사는 그에게 바둑의 고수가 위기십결(圍棋十訣·바둑을 두는 데 명심해야 할 열 가지 비결) 등을 동원해 세상 사람들에게 일갈하는, 직장인들에게 도움 될 만한 정보가 집약된 작품을 주문했다. 그래서 제목도 ‘고수’였다. 하지만 그는 “직장생활 한 번 안 해본 내가 무슨…”하며 기획 의도를 바꿔나갔다.

    “별일 없어 보이는데도 매일 상사를 흉보고, 그러면서도 왜 집에 안 가고 회사에 남아 있으려 하는지 궁금했어요. 또 술은 왜들 그렇게 많이 마시는지. 지금까지 보통의 샐러리맨을 위한 작품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관찰해보자 했습니다. 스포트라이트가 아니라 가로등과 같은 은은한 불빛을 비춰 얼추 보이는 지점만 그려내더라도 이 사람들은 자체 발광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까. 샐러리맨으로 살면서 자기 입장을 대변받지 못한 부분이 반드시 있을 것도 같고….”

    “누구 한 명의 땀방울로 되고 안 되는 시절이 아냐. 한다, 안 한다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하느냐도 아니라, 언제 하느냐의 문제가 더 많아. 왜 자꾸 혼자 떠안으려고 해? 당신 아니어도 될 일은 돼야 한다고.” - 김 부장

    “자기가 먼저 설득되지 못한 기획서는 힘을 갖지 못해요. 누군가는 이 기획서를 믿고 사막 한가운데를, 망망대해를 지나야 할지도 모르는데. 스스로 설득되지 않은 기획서를 올리는 건 책임을 다하지 못한 거죠.” - 맞벌이주부 선 차장

    평생 한 번도 직장 다녀본 적 없다는데, 미생은 회사 생리에 대해 C레벨 간부급 내공을 보여준다. 윤 작가는 “모두 취재에 응해준 기업인들 덕분”이라고 공을 돌렸다. 그는 미생의 배경을 대기업 종합상사로 삼고 취재할 곳을 알아봤지만 번번이 퇴짜 맞았고, 우여곡절 끝에 몇 명의 샐러리맨에게 취재 도움을 받게 됐다고 했다. 미생 ‘고문역’들의 직급을 묻자 “그것도 비밀. 취재원 보호는 확실해야 하니까” 한다. 우리나라에 대기업 종합상사는 예닐곱 개에 불과한데….

    “아, 찍지 마세요(웃음). 제가 직급과 직책을 구분할 줄도 몰랐거든요. 대리-과장-차장-부장 순이라는데 그럼 팀장은 뭐지? 그랬어요. 그런 저를 붙들고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실제 경험을 들려주는 분들이세요.”

    “왜 술을 마셔야만 하는지 샐러리맨 인생 그리고 싶었다”

    ‘미생’52수 중에서

    미생의 또 다른 재미는 바둑이다. 프로바둑 입문에 실패한 장그래는 바둑이란 거울로 회사와 조직을 들여다본다. 늦은 밤 퇴근길에 김 대리가 말한다. “나 하나쯤 어찌 살아도 사회는, 회사는 아무렇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 일이 지금의 나야.” 이런 김 대리를 보며 장그래(혹은 윤태호)는 조치훈 9단의 말을 나지막이 읊조린다.

    “바둑 한 판 이기고 지는 거…. 그래 봤자 세상에 아무 영향 없는 바둑. 그래도 바둑. 나에겐 전부인 바둑. 내게 허락된 세상….”

    “바둑에 이런 말이 있어요. ‘전체가 부분을 결정한다.’ 네모난 바둑판이 바둑을 결정하죠. 인생도 마찬가지예요. 내 뜻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환경을 무시할 수 없어요. 또 내가 한 번 두면 상대가 둘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게 바둑이고 인생이죠. 한 수 두면서 앞으로 둘 수에 대해 아무리 계획해봤자 상대가 계획대로 따라와주지 않아요. 계속 수정하고 재설정하는 게 인생인 것 같아요. 처음 설정한 방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끔 노력하면서요.”

    노숙하며 만화 배워

    그는 1969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서울, 전북 군산, 그리고 다시 광주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삼형제 중 막내인 꼬마 윤태호는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신문에 4컷 만화를 연재했고, 각종 미술대회에서 상을 휩쓸었다. “하지만 그 시절 그림 그리는 재능은 부록 같은 것”이었다. 육성회비도 제 때 못 내는 가난한 집 아이가 미대 진학을 꿈꾸거나 만화를 업으로 삼겠다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상장은 액자에 넣어 걸어놓는 것이란 걸 남의 집에 가보고서야 알았어요. 우리 어머니는 밥풀 묻혀서 붙여놓곤 하셨거든요.”

    가세가 기울어 고등학교 2학년 때 고향으로 돌아와 광주 살레시오고로 전학했다. 고3이 되자 학교는 전교 석차가 위에서 1~30등인 학생들과 밑에서 1~30등인 학생들, 그리고 예체능계 몇 명을 섞어 한 반을 만들었다. 그의 짝꿍은 전교 10등인 아이. 공부는 뒷전이고 매일 밤 광주 시내를 배회하며 방황하던 그에게 짝꿍은 “일요일에 학교 나오지 않을래?” 했다. 수십 명이 독서실에 앉아 자습하는 신기한(?) 공간을 경험하며 그는 처음으로 대학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학비가 싸고 장학금도 많다는 국립대 미술교육과는 실기 반영비율이 10%에 지나지 않았다. 불합격 통보를 받은 날, 그는 부모님에게 “만화가가 되겠다”고 선언한 뒤 상경했다.

    “강남 대치동 은마아파트 안에 있는 공원 아세요? 주로 거기서 노숙했어요. 만화학원이 그 근처였거든요. 120원짜리 안성탕면 하나로 하루를 버티다가 학원 애들이 불쌍하다고 밥 사주면 고맙게 얻어먹고…. 그때는 ‘어떻게든 견뎌내자’라는 생각이 강했어요. 정말 만화가 너무 하고 싶었거든요.”

    이후 허영만, 조운학 문하생을 거쳐 1993년 스물다섯의 나이에 ‘월간 점프’를 통해 데뷔했다. 하지만 인쇄돼 나온 자기 작품을 보고 “이건 쓰레기다” 싶어 다시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스토리가 너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소설책만 열심히 읽으면 글 쓰는 능력이 생기겠거니 했는데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2년 동안 그림은 접고 스토리에만 매달렸어요. 그때도 컴퓨터가 있었지만 손으로 쓰고 또 썼어요.”

    “땅에 발 딛고 사는 놈이 누굴 흉내 내는 기고? 신이라도 될라캤나? 내는 인간이 될라 캤다!” - ‘이끼’에서 천용덕

    영화 이끼의 줄거리는 원작과 거의 다를 바 없고 대사의 상당량도 원작에서 그대로 따왔다. 그만큼 윤태호의 작품은 구성과 대사가 탄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은둔의 2년’ 동안 그는 드라마 ‘모래시계’대본과 최인호의 소설들을 몇 번씩 베껴 썼다. 글을 손으로 익히기 위해서다. 또 하나의 소재를 가지고 이리저리 연구했다. 가령 ‘연인’이 소재라면 평범한 스토리를 하나 쓰고, 그걸 코믹한 버전으로 바꿔보고, 또 궁상맞은 이야기로 고쳐봤다. 그림 없이 스토리만 짜고 또 짰다. 그는 “굉장히 지루한 작업이지만, 나는 나를 학대하는 걸 좋아한다”며 웃었다.

    “그러다 정말 웃긴 얘기를 만들었다 싶어 선배에게 보여줬더니 ‘야, 이거다. 다시 데뷔해!’ 하는 거예요. 난생처음 스토리를 인정 받아봤어요.”

    이 작품이 바로 성인 코미디물 ‘혼자 자는 남편’(2004)이다. 섹시한 여성과 결혼하는 게 꿈인 한 남자가 군인 출신 아버지가 낙점한 거구의 여자와 혼인한 뒤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만화다. 이후 그는 ‘야후’ ‘로망스’ ‘수상한 아이들’ ‘연씨별곡’ 등을 발표하며 점차 이름을 알려갔다.

    장그래와 노홍철

    평생 만화에 매진했다지만 윤 작가는 바둑 10급이기도 하고 사주, 관상, 풍수지리, 심지어 점성술(astrology)까지 배웠을 정도로 잡학에도 능하다. 그는 “인정받고 싶은데 잘 안 돼서, 그래서 내 팔자가 궁금해 공부했다”며 웃었다. 가난이란 부모가 아이 말에 귀 기울일 형편이 못 된다는 것. 그래서 아이는 자신감이 없어지고 자기 뜻을 감추는 데 익숙해진다는 것. 그런 유년 시절을 보내왔기에 내 이야기로 인정받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다고 했다.

    “상업적인 성공보다는 내가 하려고 했던 의도 그대로 이해받는 것. 그게 제 목표예요. 미생이 그런 것 같아요. ‘이끼’도 그렇고 ‘야후’도 그렇고, 그동안 네거티브한 작품을 많이 했는데, 이제 긍정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거든요. 한계 있는 샐러리맨이지만 굳이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아도 훌륭하게 살 수 있는 샐러리맨들을요. 많이들 좋아해주시니까 정말 좋죠.”

    주인공 장그래의 이름은 무한도전에서 ‘긍정교’ 창시자로 나온 노홍철에게서 힌트를 얻었다.

    “노홍철 씨가 한참 ‘웃으세요’ ‘예스, 예스’ ‘긍정의 힘’을 얘기했잖아요. 예스? 그래, 그럼 ‘그래’라고 하자 했지요.”

    장그래는 인턴 기간을 거쳐 2년짜리 계약직으로 채용됐다. 앞으로 남은 10여 개월의 연재 기간.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장그래는 어디까지 성장할까.

    “대학도 안 나온 장그래가 대기업 정직원이 되면 좋은 대학 나와도 취업하기 어려운 이 땅의 수많은 청년이 분하지 않을까요? 그래가 열심히 사는 건 사는 거고, 현재 시스템이 그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지금 고민하는 포인트예요. 지켜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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