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호

권재현의 심중일언

‘가인 김병로’ 펴낸 한인섭 서울대 교수

‘독립적 지식인’, 그 한국적 전범의 재발견

  • 권재현 기자 | confetti@donga.com

    입력2017-12-31 09: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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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인 김병로에 대한 ‘변호인적 이해’를 위해 집필기간 10년, 920쪽 분량의 방대한 전기를 펴낸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가인과 동행하면서 20세기 대한민국 법조사를 정리했다”면서 자신이 집필한 책에 남겨진 가인의 발자취를 하나하나 소개했다. [조영철 기자]

    가인 김병로에 대한 ‘변호인적 이해’를 위해 집필기간 10년, 920쪽 분량의 방대한 전기를 펴낸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가인과 동행하면서 20세기 대한민국 법조사를 정리했다”면서 자신이 집필한 책에 남겨진 가인의 발자취를 하나하나 소개했다. [조영철 기자]

    한국 사회의 고질적 병폐 중 하나가 반(反)지성주의다. 이성보다는 ‘국민감정’이 앞서고, 양심보다는 ‘진영논리’가 더 중요하다. 근거와 논리를 따지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에 입각한 비판이 먼저고, 근거와 논리는 입맛대로 갖다 붙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게다가 자신의 양심에 근거하기보다는 ‘내편 네편’의 흑백논리에 입각해 ‘네편’이다 싶으면 쌍심지를 켜고 ‘내편’이다 싶으면 두둔하기 바쁘다. 그렇다 보니 ‘행동하는 양심’이란 표현에서도 방점은 ‘양심’이 아니라 ‘행동’에 찍히기 일쑤다. 


    한국의 지식인은 이런 반지성주의 퇴치가 아니라 조장에 앞장섰다. 일제강점기와 군부독재기 전향, 변절, 훼절한 지식인의 수가 얼마이던가. 또 민주화 이후엔 선거철마다 유력 후보의 캠프에 줄 서는 폴리페서는 왜 계속 늘어나는 것일까. 그 탓에 한국에서 지식인은 권력에 빌붙어 곡학아세를 밥 먹듯이 하는 기회주의적 속물 취급받기가 다반사다. 

    광복 후 발표된 전광용의 소설 ‘꺼삐딴 리’ 속 주인공을 닮은 이런 인간군상이 왜 한국 지식인의 전형이 된 것일까. ‘독립적 지식인(Independent Intellectual)’의 전통이 취약해서다. 과거시험을 중시하는 유교문화권에서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지식인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을까. 게다가 고질적 당파싸움으로 독립적 사유가 발붙일 곳은 더욱 없었다. 결정적으로 일제강점과 군부독재의 역사가 그 터전을 황무지화해버렸다. 

    그럼 이 땅에서 독립적 지식인의 씨는 다 말라죽은 것일까. 아니다. 드물지만 존재한다. 일제강점기 항일변호사로 법정투쟁을 벌였고 해방공간에서 토지분배와 친일청산, 남북 통합을 주장한 사람. 그러면서 대한민국 법전 편찬을 진두지휘했고, 1948년 남한 정부 수립 이후 초대 대법원장으로서 청렴 강직한 법관상과 사법부 독립의 초석을 쌓은 사람. 70세의 나이로 대법원장을 정년퇴임한 이후엔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의 보루’가 된 사람. 가인 김병로다.

    집필 기간 10년, 920쪽 분량

    그 가인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밝혀낸 책이 출간됐다. 920쪽 분량의 대작이다. 집필 기간도 10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저자는 한인섭(59)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법무부 법무·검찰개혁위원장을 맡아 법조개혁의 한 축을 맡은 그가 ‘한국 사법의 창조주’라고 표현한 가인에 대한 방대한 전기를 펴냈다는 것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한 교수는 가인의 평생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지공무사(至公無私·지극히 공정해 사사로움이 없음)’를 제시하며 ‘통합적 민족주의자’이자 ‘민주헌정의 수호자’로서 가인의 진면목을 다시 되새기자고 강조했다. 강의와 개혁안 마련, 저서 홍보로 바쁜 그를 2017년 12월 8일 서울대 관악캠퍼스 연구실에서 만났다. 

    일제강점기 ‘항일변론의 트로이카’로 불리는 허헌, 김병로, 이인을 다룬 ‘식민지 법정에서 독립을 변론하다’(2012)를 펴낸 바 있다. 그런데 유독 가인에 대해서만 다시 심층적으로 인물을 탐구한 이유가 무엇인가. 




    “한국 법정 역사를 관통하는 3가지 작업의 대미를 장식하는 일이었다. 첫 번째는 홍성우 변호사와 대담을 통해 1970, 80년대 인권변호사들의 법정투쟁을 다룬 ‘인권변론 한 시대’(2011)였다. 두 번째 작업은 1920, 30년대 생생한 항일법정투쟁을 다룬 ‘식민지 법정에서 독립을 변론하다’였다. 가인은 1940~60년대까지 활약한 분이란 점에서 앞의 두 작업과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인 동시에 한국 법조사에서 가장 우뚝한 존재를 종합 정리한 작업이었다.” 

    이미 전기가 2권 나와 있다. 김진배의 전기와 김학준의 평전이다. 


    “두 분의 책도 의미가 있지만, 언론인과 정치학자로서 접근하다 보니 정작 가인의 본령인 법률가로서 내면으로 깊숙이 파고들지 못하고 밖에서 빙빙 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가 쓴 법리 논쟁, 법률 제정 과정과 법률조항의 미세한 차이에 초점을 맞춰 법조인으로서 가인을 온전히 규명하고 싶었다. 이를 통해 우리 사법체계의 원류를 정리하고 싶었다.” 

    책을 읽으며 인간으로서 가인에 흠뻑 매료돼 있음을 여러 군데서 느낄 수 있었다. 


    “20세기 한국사라는 것이 참 사람이 온전하게 살기 힘든 시대였다. 식민지 경험과 광복 후 분단과 전쟁을 겪으며 훼절, 변절, 전향, 이런 압력을 견디며 심지 굳게 산다는 게 어렵잖은가. 그런 와중에서 올곧고 떳떳하게 산 삶이라는 게 드물지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감동이었다. 파고들면 들수록 그 인간적 면모에 자꾸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가인에 대한 ‘변호인적 이해’

    가인이란 호를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뜻의 가인(佳人)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거리의 사람이란 뜻의 가인(街人)인데 이게 요즘 말로 ‘홈리스’라는 뜻이더라. 

    “원래는 ‘작은 돌’이라는 뜻의 소석(小石)이란 별호를 썼다. 단구지만 강단 있는 그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호다. 하지만 망국의 설움을 겪으면서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어느 한 곳 거처할 곳 없이 거리를 방황하는 거지와 같은 사람이란 뜻에서 가인을 호로 삼은 것이니 얼마나 애절한가. 개인적으로 근현대 인물의 호 중에서 김구의 백범(白凡)과 안창호의 도산(島山)과 함께 가장 멋있는 호라고 생각한다. 백범은 천민인 백정과 평민인 범부를 합친 단어가 가장 밑바닥 인생을 돌보겠다는 뜻이 담겼고, 도산은 하와이 풍경을 보고 조국의 아름다운 ‘반도강산(半島江山)’을 떠올리며 지은 것이다.” 

    가인 관련 자료를 모으고 집필한 세월이 10년이면 ‘인권변론 한 시대’와 ‘식민지 법정에서 독립을 변론하다’를 집필하는 기간과도 겹쳤다. 책에서 그 긴 세월을 가인과 동행하며 대화를 나눈 기분이라고 밝혔다. 

    “1927년 잡지 ‘별건곤’이 유명 인사들에게 공통 질문을 던졌다. ‘최근 통쾌한 일이 있었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대부분 “통쾌할 일이 뭐 있겠느냐”는 말로 식민지 현실을 비꼬았다. 그런데 가인은 “무죄판결을 받았을 때 기뻤다”고 답했다. 1920~30년대나 1970~80년대 시국사건에선 무죄판결이 거의 없었다. 홍성우 변호사와 대담할 때 무죄판결을 받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던져봤다. 홍 변호사가 살인사건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적이 있는데 시국사건의 무죄판결을 받은 것만큼 기쁘다고 하더라. 가인에게 묻고 싶은 질문을 홍 변호사에게 대신 물어보며 대화를 나눈 셈이다.” 

    그래서인지 이번 책은 평전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가인에 대해 궁금한 점을 가인의 발언이나 관련 사료를 통해 풀어가는 형식을 취했다. 

    “가인에 대해 ‘변호인적 이해’를 하려고 했다. 변호인은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의뢰인의 마음을 읽어내야 하고 그의 억울함과 애환에 공감해야 한다. 그래서 섣부른 평론, 비평보다는 제대로 된 이해를 하기 위해 ‘가상의 공감적 대화’라는 방식을 택했다. 당시에 만들어진 원사료에 입각해 가인의 생각을 읽어내려고 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가인과 동행 취재를 한 셈인데 주변 인물이 계속 바뀌더라. 1920년대는 허헌·이인을 주로 만났고, 1930년대 창동 시대(가인이 전 재산을 정리하고 경기도 양주 창동 일대 4000평 농장을 사들여 자급자족하며 은인자중하던 시절)에는 함께 은둔했던 홍명희·정인보·송진우와 대화하고,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법전편찬위원들과 지내다가 6·25전쟁 때는 부산 피난지에서 홀로 불을 밝혀놓고 법전을 써 내려가는 작업을 지켜보며 대화하는 식이었다.”

    교수, 판사, 변호사

    1927년 10월 18일 조선일보에 실린 조선공산당사건의 변호사들. 앞줄 맨 오른쪽이 가인 김병로이고 그 뒤로 허헌(오른쪽), 이인 변호사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박영사 제공]

    1927년 10월 18일 조선일보에 실린 조선공산당사건의 변호사들. 앞줄 맨 오른쪽이 가인 김병로이고 그 뒤로 허헌(오른쪽), 이인 변호사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박영사 제공]

    우리도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가인의 삶을 더듬어보자. 가인이 일본 유학을 떠나기 전 20대 전후의 나이에 여러 항일의병 활동에 관여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당시 전라북도가 구한말 의병의 본산지였다.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던 간재 전우의 문하에서 3년간 수학한 가인 같은 열혈 유생이 나라를 잃고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다. 면암 최익현과 백낙구·김동신 같은 전북지역 의병장과 의기투합해 모병 활동에 나섰다. 중간에 수포로 돌아가거(면암)나 성공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최종 단계에서 참전을 유보(백낙구·김동신)하긴 했지만 그들을 접하면서 느낀 항일의식은 이후 그의 인생에 나침반이 됐다.” 

    일찍이 일본 유학을 다녀왔기에 가문이 부유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가난한 고학생이었더라. 학비와 생활비 부족으로 학업을 두 차례나 중단하고 귀국했다가 다시 유학 생활을 이어갔다. 1년여 넘는 학업 중단 기간을 포함해 일본대 정치학과를 거쳐 메이지대 법학과에 편입하고 오늘날 법대 대학원 과정까지 전 과정을 5년 만에 마쳤다. 

    “집안이 지주는 아니고 부농 정도였던 것 같다. 게다가 어린 나이에 조실부모까지 한 터라 가난한 고학생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최하층민의 애환도 잘 알았던 것 같다. 일제강점기 화전민, 농민, 노동자 같은 밑바닥 사람들의 변론을 많이 맡았다. 그래서 광복 후 한국민주당(한민당) 창당멤버였지만 지주 출신이 많은 한민당의 당론과 달리 토지개혁과 친일파 처벌의 필요성을 강조해 한민당과 거리를 두게 된다.” 

    1915년 귀국해 경성전수학교(서울대의 전신) 교수이자 보성법률상업학교(현 고려대)에서 강사로 있다가 1919년 조선총독부 판사로 임용되고 다시 1년 뒤 변호사로 개업했다. 5년여 사이에 교수, 판사, 변호사를 모두 거친 셈이다. 

    “검사 빼고는 다 했다고 보면 된다(웃음). 가인은 학업을 마치고 변호사 시험을 보려 했으나 1920년대가 될 때까지 조선인에겐 응시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법학을 가르쳤는데 당시 가인처럼 법학 논문을 발표하는 법학자가 없었고 그 후로도 드물었다. 1910년대 조선 땅에 존재하는 법률가로서 넘버원이었다. 일본은 1918년부터 법률 지식이 뛰어난 조선인을 판사로 임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경성전수학교 교수는 공무원으로 직급이 판사와 같았다. 그래서 판사로 임용되자 임기를 딱 1년만 채우고 사직한 뒤 원래 목표했던 변호사가 됐다. 허헌은 구한말에 변호사 자격을 획득했고, 이인은 1923년에 공개 시험을 거쳐 변호사가 됐다.”

    ‘유조리(有調理) 최열렬(最熱烈)’

    ‘항일변론의 트로이카’ 허헌, 가인, 이인을 서로 비교한다면 흥미로울 것 같다. 

    “허헌은 1920년 3·1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변론으로 ‘천하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는 점에서 항일변론의 선구적 존재다. 호남형의 인격자로서 자녀에 대한 애정이 컸다. 가인은 아주 카랑카랑하고 열정적인 변론으로 ‘유조리(有調理) 최열렬(最熱烈)’이라는 칭호가 따라다녔다. 법률가로서 조리 있다는 말은 실력이 뛰어나다는 소리고 열렬하다는 것은 열정이 있다는 소리다. 인간의 능력은 실력 곱하기 열정이 될 때 최대로 발현된다는 점에서 최강도의 칭찬이라 생각된다. 이인은 ‘팩팩 내쏘는 성질이 있다’지만 ‘선의의 호사가,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물산장려회와 조선어학회 활동과 지원에 열심이다 결국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셋 중에서 가장 힘든 옥고를 치른다.” 

    세 사람 모두 일본 메이지(明治)대 출신이란 공통점도 지닌다. 하지만 광복 후 행보가 달랐다. 허헌은 남로당 당수를 맡다 월북해 최고인민회의 의장과 김일성종합대 총장이 됐다. 이인은 이승만 정부 초대 법무장관이 됐고 가인은 초대 대법원장이 됐다. 

    “세 분 다 변절이나 전향이나 그런 것 전혀 없이 깨끗하게 산 통합적 민족주의자였다. 다만 분단 상황에서 각자 서 있는 위치가 달랐기에 고향과 인연 따라 갈라졌을 뿐이다. 허헌은 고향이 함경도인 데다 열혈 사회주의자였던 딸(허정숙)의 흡인력에 이끌려 북으로 갔고, 가인은 전라도, 이인은 경상도 출신이라 남에 남은 것이다.” 

    가인을 중도적 통합주의자라고 규정했다. 

    “가인의 가장 친한 친구 대여섯을 뽑자면 같은 호남 출신에 일본 유학파인 송진우·김성수가 한 그룹, 허헌과 이인이 한 그룹, 그리고 홍명희·원세훈이 한 그룹을 이룬다. 중도우 내지 중도좌에 걸쳐 있는 사람들이다. 또 변호인으로서 상해임정을 세운 여운형과 안창호뿐 아니라 조선 최고의 사회주의 이론가이자 혁명가로 불린 박헌영과 이재유의 변론도 맡았다. 지하운동가였던 박헌영을 지상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누구였겠는가. 두 번이나 변론을 맡은 가인 아니었겠는가. 실제 1947년 좌익의 비밀문서를 보면 우파 중에 마지막까지 대화가 가능한 인물로 김병로와 홍명희를 뽑고 있다.”

    ‘나를 지키는 방법’을 제시한 ‘창동 시대’

    가인이 변론을 맡은 주요 독립투사들의 구금 당시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여운형, 안창호, 이재유, 박헌영. [박영사 제공]

    가인이 변론을 맡은 주요 독립투사들의 구금 당시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여운형, 안창호, 이재유, 박헌영. [박영사 제공]

    이번 책을 읽으며 가장 감탄한 대목은 일제강점기 가장 엄혹한 시기를 대비해 창동으로 낙향해 자립 공간을 마련하고 홍명희·정인보·송진우 같은 친우를 불러 모아 일제의 회유와 압박을 견디고 지조를 지켜낸 점이다. 1931년 자신이 회장으로 있던 신간회가 해체되고 만주사변이 발생한 다음 해 내린 결단이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계속 팽창하다 결국 영국·미국과 부딪치게 될 것이고 그럼 더 악랄해질 것임을 내다봤기에 가능한 일 아니었을까. 가인의 집이 지금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자리에 있었는데 이를 팔아 창동에 4000평의 농장을 마련하고 15~20명 되는 식솔과 내려가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살았다. 특히 1930년대 후반부터 식량과 일상품에 대한 배급제가 이뤄지는데 창씨개명을 안 하면 배급을 안 줬기 때문에 큰 부자가 아닌 이상 굶어 죽지 않으려면 창씨개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가인은 농사짓고 가축을 키운 것으로 자급자족하며 버텼으니 대단한 혜안이 아닐 수 없다. 담배와 술도 배급했는데 애연가·애주가로 유명했던 가인은 8년간 술·담배를 모두 끊고 버티다 1945년 8월 15일 저녁에 다시 술·담배를 시작했다고 한다. 가인의 손자 김종인 전 의원과 송진우의 손자 송상현 전 국제형사재판소(ICC) 소장도 창동에서 태어났다. 홍명희와 정인보는 거기서 사돈이 됐다.” 

    기존 전기에선 1932년 창동으로 낙향한 뒤 가인이 일체의 공적 활동을 접고 칩거에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번 책에서 변론 활동과 보성전문대 강연 등 공적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음을 밝혀냈다. 

    “1932년이면 가인 나이가 마흔넷 한창때다. 그 나이에 과연 모든 공식 활동을 접고 살 수 있을까. 인간은 그럴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이인의 증언에 따르면 조선어학회 사건(1942)이 나기 전까지 이인과 책상을 마주하고 변호사 사무실을 같이 썼다는 것 아닌가. 그래서 법정 기록을 찾아보니 변호사로서 계속 활동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조선공산당재건사건과 수양동우회사건 같은 형사소송뿐 아니라 토지소송 같은 민사소송을 맡았다. 고등법원에 상고이유서를 가장 많이 쓴 변호사가 가인이었다. 또 홍명희 아들 홍기문이 창동에서 당시 직장이던 조선일보까지 출퇴근했다는 기록을 봤다. 그래서 보성전문 교무 기록을 뒤졌더니 1938년까지 형법과 형사실무 강의를 계속했다는 자료가 나왔다. 그렇게 역사에 빠져 있던 13년의 기록을 채워 넣었다.” 

    유교권 국가인 한·중·일의 근현대사를 돌아보면 이념이나 진영논리에 휩싸이지 않고 자신의 양심에 투철한 독립적 지식인을 찾기가 힘들다. 창동 시대 대목을 읽으면서 가인이야말로 그런 독립적 지식인의 한국적 전범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대화가 이뤄지면서 독립적 지식인이 출현할 3가지 통로가 생겨난다. 학문적 독립이 가능한 대학과 경제적 독립이 가능한 전문직 그리고 언론이다. 가인은 대학교수이자 변호인이었다. 또 하나가 언론인데 가인은 1957년 정년퇴직한 이후 각종 신문 기고와 인터뷰를 통해 이승만·박정희 정권을 맹렬히 비판한다. 특히 1958~1959년 필봉을 휘두른 글을 읽어보면 사실상의 언론인이었다. 대학, 전문직, 언론에 있다고 다 독립적 지식인이 되는 게 아니다. 호연한 기개로 혼자서도 떳떳한 호연독존(浩然獨存)이 있어야 한다.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비로소 대의에 헌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인이야말로 그 모범을 보였다 할 수 있다.”

    호연독존(浩然獨存)의 지식인

    가인은 한민당 창당 멤버였지만 토지개혁 문제로 한민당과 거리를 둔다. 또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으로부터 비서실장 자리를 제안받지만 거절한다. 1946년 미군정의 사법부장이 되면서 정치권과 거리를 두지만 중도파로 좌우합작을 시도한 김규식을 지지한다. 

    “미군정의 사법부장은 사법행정과 검찰 행정을 다 틀어쥔 자리였다. 사법부장 아래 대법원장과 검찰총장이 있는 구조였다. 따라서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좌우합작 같은 국가적 어젠다를 놓고 성명이 발표될 때 이름을 넣는 식의 활동을 했다. 당시엔 홍명희 이름이 있는 곳에 가인의 이름이 같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 그러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로 홍명희가 북으로 넘어가고 가인은 남에 남으면서 갈리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이 가인을 ‘김규식 사람’이라며 탐탁지 않게 여겼음에도 초대 대법원장이 된 것이 우리 국민의 복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이승만은 다른 사람을 염두에 두고 이를 언론에 먼저 발표하려 했다. 법제처장인 유진오가 절차상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야 한다고 제동을 걸었다. 그래서 국무회의 안건으로 올렸다가 다른 각료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김병로 아니면 법무장관 그만두겠다’는 이인의 강수에 밀려 가인이 대법원장이 된 것이다. 1949년 상반기 가인이 맡은 직책을 보라. 대법원장,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장, 반민특위 재판부장. 사법부 수장이 사실상 입법(법전편찬)과 일반재판, 특별재판을 다 틀어쥐고 있었다. 요즘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가인이 출중하고 사심이 없다는 것이 인정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한민국 사법의 창조주

    1948년 8월 11일 초대 대법원장 취임 직후 집무실에서. [박영사 제공]

    1948년 8월 11일 초대 대법원장 취임 직후 집무실에서. [박영사 제공]

    가인은 법전편찬위원장으로서 대한민국 법률의 기초를 마련했다. 하지만 헌법 제정에도 그가 깊숙이 관여했다는 이야기는 낯설다. 초대 법제처장을 맡은 유진오의 역할이 가장 크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건 유진오의 주장일 뿐이다. 초대 법무장관을 지낸 이인이 1970년대 (가인이 위원장을 맡았던) 법전편찬위원회 헌법기초위원회 안이 주안이었다고 했을 때 아무 말이 없다가 나중에 그렇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유진오 안을 보면 ‘조선은 민주공화국이다. 국가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인민에게서 나온다’라고 돼 있다. 법전편찬위 안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로 돼 있다. 어느 쪽이 지금의 헌법에 더 가까운가. 헌법 전문은 100% 유진오 안에서 채택된 게 맞다. 하지만 유진오의 기여도는 4분의 1, 5분의 1 정도로 보는 게 맞다. 1945~1948년 사이 법률가들이 모였다면 누가 그 중심에 서겠는가.” 

    특히 형사소송법에서 가인의 역할이 컸다. 


    “일제하 항일변호사로서 일본 형사소송법에 의한 인권침해와 인권남용을 누누이 봐왔기에 이를 극복할 제도적 방안 마련이 가인에게는 필생의 화두였을 것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구속 기간의 단축이었다. 일제강점기 모든 악행의 근원이던 예심제를 폐지하고 현재처럼 경찰의 구속 기간을 10일 이내로 단축한 이가 가인이다. 또 구속재판에서 구속 기간을 1심 6개월, 항소심 4개월, 대법원 상고심 4개월의 틀을 마련한 것도 김병로의 창안이었다. 일본은 지금도 예심제가 살아 있어 구속 기간의 상한이 없다. 사린가스 테러를 저지른 옴진리교 교주는 미결수임에도 구속 상태로 10년 이상 재판하고 있다. 변호인의 조력을 의무화하고 의사 진료를 받을 권리를 보장한 것도 가인의 덕분이었다.”

    창조주가 만든 법을 고치며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왼쪽)와 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 가인이 민주헌정의 수호자였다면 우남은 제왕적 대통령주의자였기에 두 사람은 재임기간 내내 불편한 사이였다. [국가기록원 제공]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왼쪽)와 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 가인이 민주헌정의 수호자였다면 우남은 제왕적 대통령주의자였기에 두 사람은 재임기간 내내 불편한 사이였다. [국가기록원 제공]

    보안법, 간통죄, 동성동본금혼 등에서도 가인은 진보적 의견을 지녔음에도 국회와 여론에 밀려서 보수적 법안을 받아들인 것을 놓고 보수주의자, 전통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였다고 비판했다. 

    “가인은 어린 시절 유학을 공부해 엄격한 윤리관을 지녔다. 그렇지만 합리적 민주주의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를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적용할 때는 신중했다. 동성동본에 대해서도 그 자신은 8촌 이내의 혼인 금지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국회 속기록을 보면 동성동본금혼 조항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다. 자신이 좋아하지 않은 것을 적극 주장하지 않은 것이다. 이를 읽어내지 못하고선 가인에게 부당한 비판을 가한 경우가 많다. 가인은 그 시대적 한계 속에서 한 걸음이라도 내디디려는데 ‘왜 열 걸음을 내딛지 않았느냐’고 한 셈이다.” 

    2017년 8월부터 법무부 법무·검찰개혁위원장을 맡았다. 가인이 창조했다고 말한 사법체계를 개혁하는 일의 한 축을 맡은 것인데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겠다. 

    “법률은 혁명적 방식이 아니라 개혁적 방식으로 바꿔 가는 것이다. 눈으로는 열 보 앞을 보더라도 실제론 한 걸음씩 내디디는 것이다. 그 한 걸음 내디디는 것에도 현실에선 엄청난 저항을 겪게 된다. 가인이 형사소송법을 개혁할 때도 당시 경찰의 반발이 엄청났다. 그래도 가인이 여기에 크게 두 걸음 정도를 내디딜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초안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입법 과정에서 갈등 협상 양보 타협을 거쳐서 입법안이 완성된다. 그렇게 완성된 입법안 역시 바로 국민의 피부에 와닿는 것만은 아니다.” 

    국민적 관심 사항은 아무래도 공수처 신설과 검경수사권 조정이 아닐까 싶다. 

    “수사권 조정에 대해선 복잡해서 아직 개혁안을 내지 않았고, 공수처 도입안은 이미 제출했다. 공수처 신설은 국민 염원이 담긴 시대적 과제다. 대선이나 총선은 그 시대의 과제가 무엇인지를 중간 정리해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지난 대선에서 공수처를 만들자는 것이 여야 가릴 것 없이 주요 대선주자의 공통 공약이었다. 이렇게 국민 합의가 있는 개혁과제는 정치권도 노력하고 국민도 압박하고 해서 관철해야 한다.” 

    며칠 전엔 인권침해를 방지하기 위해 심야조사 금지 조항을 도입하라는 안을 냈다. 

    “오후 8시까지 조사하고 부득이한 경우에도 밤 11시 안에 조사를 마치자는 안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반발이 있을 수 있다. 그래도 8시를 기준으로 안을 던지면 7~10시 사이 어느 시점으로 정해지지 않겠느냐. 일본에는 철야 수사가 없다. 인간이면 누구나 잠을 자야 하는 것 아닌가. 인권침해다. 또 피의자 조사 시 2시간마다 10분 이상의 휴식시간을 보장하라고 하며 이는 피의자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권리라고 못 박았다. 시종일관 민주주의자였던 가인도 충분히 동의해줄 개혁 법안이라 생각한다.”



    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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