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9년 9월11일 국회에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하는 노태우 대통령.
냉전시대의 대립은 20세기 후반의 신 세계질서로 대체됐고 분단 40년의 남북한 관계도 불신과 갈등관계를 청산하고 화해와 협력을 모색하게 됐다. 남한에서는 노태우 대통령에 이어 김영삼 대통령이 문민시대를 열었으며 북한에서도 49년 동안 장기 통치했던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장남인 김정일이 후계체제를 확립했다.
탈(脫)냉전시대의 격랑 속에 북핵 문제라는 새로운 쟁점이 부각되면서 남북관계는 부침을 거듭했다. 노태우, 김영삼 정부의 10년 동안 남북한 기본합의서 체결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그리고 북-미 간 제네바합의 등으로 탈냉전시대의 새로운 질서가 구축되는 듯싶었다. 하지만 경색된 남북관계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고, 김영삼 정부가 한반도 문제의 국제화라는 유산을 남긴 채 IMF 구제금융이라는 사상 초유의 경제 위기 속에 퇴장함으로써 남북관계의 발전과 분단해소의 과제는 차기 김대중 정부의 몫으로 넘겨졌다.
탈사회주의와 탈냉전의 물결
1988년 2월부터 1993년 2월까지 노태우 대통령이 재임하던 5년은 대한민국이 정상적인 국가로 우뚝 서는 시기였다. 1970년대 후반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1980년대 제2의 경제성장기를 맞이해 튼튼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데 이어 1987년 6·10 민주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는 등 정치적 민주화에서도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뤄냈다.
이 같은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노태우 대통령은 군부 권위주의 통치를 종식하고 새로운 5년 단임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 자신 군 장성으로서 전임 전두환 정부에서 주요 직책을 역임했으나 민간 정치지도자로 변신하면서 민주화 투쟁에 빛나는 김영삼, 김대중 후보를 제치고 당선됨으로써 민주화의 정통성을 인정받으면서 대통령에 취임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하계 올림픽을 주최하는 영광을 안았으며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건국 40년을 맞은 대한민국이 세계 무대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새로운 대한민국의 지도자로서 입지를 강화하는 데는 시운(時運)도 크게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동서 냉전의 종식이라는 20세기 후반 최대의 역사적 변혁의 혜택이 바로 그것이었다.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 고르바초프의 신(新)사고, 개혁·개방정책에 힘입어 차례로 탈사회주의를 선언했다. 동유럽 각국의 급격한 체제변혁운동은 사회주의 진영의 맹주이던 소련마저 탈사회주의로 급속히 재편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덩샤오핑(鄧小平)의 확고한 지도력이 발휘되던 중국도 개방과 개혁을 더욱 가속화해 시장경제를 대폭 확대함으로써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서 벗어났다.
마침내 1989년 12월 몰타에서 개최된 미-소 정상회담에서 부시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정식으로 냉전 종식을 선언함으로써 탈냉전시대의 서막을 장식했다. 탈냉전시대 각국은 이데올로기에 의한 협력과 갈등관계보다는 새로운 세계 질서에 따라 평화를 정착시키면서 자국의 이익을 위한 치열한 생존경쟁에 돌입했다.
이 같은 대내외적 환경의 변화는 남한의 대북관(觀)을 변화시켰으며 과거 체제경쟁을 전제로 한 대립 정책은 북한을 동족으로 포용하는 정책으로 탈바꿈했다. 노태우 정부는 집권 후 북한을 적대시하거나 경쟁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함께 살아가야 할 공동운명체로 간주하면서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다각도로 모색하고 나아가 재통합을 달성하기 위한 전향적인 통일방안을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