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월5일 민노당 강기갑 대표가 국회 사무총장실에서 탁자 위로 뛰어오르고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사사건건 찬성과 반대의 난투극을 벌여야 하는가? 보수와 진보는 무슨 철천지원수이기에 일마다 사생결단을 내려 하는가? 보수 성향이건 진보 성향이건 각 단체의 시위현장에 등장하는 구호만 보아도 그 표현이 어찌나 격한지 소름이 끼친다. 우리는 원래부터 이렇게 싸우기만 하는 민족인가?
물론 한국인은 한없이 싸우다가도 위기에 처하면 다시 뭉쳐 위대한 힘을 발휘해왔다.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 2002년 한일월드컵 때 보여준 단결력은 위대했다. 그리고 태안 기름유출사건 때 온 국민이 해변의 그 수많은 자갈을 일일이 손으로 닦아낸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보수와 진보의 ‘끝장 대결’을 보면서 이 문제만은 한국인의 저력만 믿고 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보수-진보 갈등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되짚어봐야 한다고 여겼다. 사사건건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싸우는 한 ‘선진 한국’을 향한 우리의 꿈은 이뤄지기 어렵다.
보수의 기원은 왕권수호 세력
정치철학의 틀로 보수주의를 논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사상가는 두말할 것도 없이 영국의 버크(Edmond Burke)다. 그는 프랑스혁명(1789~1794) 때 왕권을 타도한다는 명분 아래 자행된 군중의 무질서한 행동에 실망하고 이러한 폭력적 행동이 영국으로 번질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한 것 같다.
그는 ‘프랑스혁명에 대한 성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이란 저술에서 보수주의(Conservatism)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 세상에는 없앨 가치도 있지만 보존하고 지킬 가치도 있음을 피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왕권 타도가 요구되더라도 국가를 경영할 능력이 없는 폭도에 의한 파괴적 행동은 역사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러한 버크의 주장이 일부 세력에게 이론적 무기가 되었음은 당연하다. 이 때부터 왕권수호를 도모하는 세력에게는 보수주의자(Conservative)라는 이름표가 붙었으며, 왕권을 무너뜨리고 민중의 세상을 열려는 세력에게는 혁명주의자(Revolutionary) 혹은 급진주의자(Radical)라는 이름표가 붙었다. 한마디로 현실을 지키려는 주장은 보수주의로 불리고 현실을 부정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생각에는 혁명 혹은 급진주의(Radicalism)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보수의 상대적 개념은 진보가 아닌 급진 혹은 혁명이다.
이러한 대칭성은 왕권이 타도되고 자유주의 국가가 성립한 뒤에도 유용하게 적용됐다. 다시 말하면 자유주의 국가가 세워진 뒤에 마르크스(Karl Marx)의 공산혁명론이 대두되자 자연스럽게 자유주의를 수호하는 세력에게는 보수라는 이름표가 붙었고, 공산주의자에게는 혁명 혹은 급진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수나 급진이라는 용어는 특정한 주의, 주장을 가진 이념이 아닌 단순한 이름표에 그친다는 것이다. 즉 그 주장이 무엇이든 간에 현실의 논리를 지키려는 세력에게는 보수라는 꼬리표가 붙고 현실을 바꾸려는 세력(특히 급작스럽게 바꾸려는 세력)에게는 혁명 혹은 급진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내면(혹은 무의식)에는 현실을 따르려는 욕망과 현실을 부정하려는 욕망이 대립한다. 초자아와 자아이상이라는 두 개의 원초적 욕구로 설명해보자. 초자아란 현실의 원리(Reality Principle)를 따르려는 욕망이며, 자아이상은 기쁨의 원리(Pleasure Principle)를 따르려는 욕구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때 기쁨의 원리를 따르는 것은 현실에서 도덕이 무엇이든 간에 자기가 원하는 바를 실천하려는 욕망을 의미하는데,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현실을 부정하는 논리와 연결성을 갖는다. 자아이상이란 현실을 부정하면서 자기의 이상만을 추구하려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원초적인 양대 욕구가 존재하는 한 인간 세상에는 언제나 현실을 지키려는 세력과 현실을 부정하려는 세력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 역사는 이러한 양대 세력 간의 갈등을 통해 변화했다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