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호

왕따 당한 한국외교의 외로운 늑대

외교부 인사난맥상 폭로파문 이장춘 대사

  • 송문홍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대우

    입력2006-11-27 15: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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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엇이 이장춘 대사로 하여금 ‘튀는 행동’을 하게 했을까? 한국외교의 장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애국심의 발로였을까? 아니면 그가 그동안 겪은 인사상 불이익으로 인한 불만 때문이었을까? 》
    “…그레고리 헨더슨이 쓴 ‘소용돌이의 한국정치’란 책을 보면, 조선왕조 기간중 가장 효율적이었던 세종대왕의 통치기간(이때 황희는 약 23년간 정승직에 있었다)을 빼고는 참으로 가관이다싶을 정도로 보직이동이 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한 예로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에 해당되는 한성판윤은 조선왕조 518년 동안 1375번이 바뀌었는데, 평균 재직기간이 약 130일이었다.”

    ‘서울경제신문’ 2월14일자 독자칼럼 난에 재미있는 글이 하나 실렸다. 내친 김에 ‘관료사회 잦은 보직이동 없어야’라는 제목이 붙은 이 글을 조금 더 인용해보자.

    조선시대 관료와 현대 관료

    “태조는 대사간을 1년에 1.7번 바꿨으며, 그의 아들(태종)은 그 자리를 평균 1년에 3번 바꿨다. 그리고 1400년부터 1406년까지는 대사간이 평균 60일마다 새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계산도 있다. 이러한 교체비율은 그 이후에도 줄어들지 않았다. 세조 때는 연간 평균 3.6명, 성종때는 2.5명, 그리고 연산군 때는 4.2명, 중종의 처음 12년 동안에는 6.6명, 그 이후에는 수십년 동안 평균 4.7명을 기록했다. 1571∼1574년의 단기간 동안에는 평균 거의 매달 새로운 대사간이 임명되었다.

    대원군은 분명히 대사간의 불만과 권력을 억누르기 위하여 대사간을 1864년 1월3일부터 1873년 12월16일까지의 기간 동안에 183번이나 교체하였는데, 이는 약 10년 동안 평균 20일에 한 사람꼴로 갈아치운 셈이다. 1860년대초 같은 기간에 대사간의 또 다른 주요 관리인 대사헌은 193번 교체되었다. 조선관리들의 경력을 보면 약 30년의 관직기간 중 100회 또는 그 이상 보직을 바꿨다는 기록이 있다. 율곡은 대사간을 수일간씩 두 번 했다.”



    투고자가 ‘kangilee@hotmail.com’으로만 돼 있는 이 글은 외교통상부 이장춘(李長春·특1급·59) 본부대사가 2월10일자 ‘문화일보’ 포럼난에 기고한 글을 읽고 ‘서울경제신문’에 낸 글이다. 투고문 말미에서 ‘kangilee’씨는 “국제회의 때마다 대표가 바뀌어 우스갯거리가 되고 있다는 이대사의 말에 슬픔을 느낀다”고 썼다.

    이장춘 대사는 외교통상부의 인사난맥상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문화일보’ 기고문으로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외교통상부는 다음 날인 11일 이정빈(李廷彬) 장관 주재로 대책회의를 열었다. 정부 일각에선 이대사에 대한 징계까지 거론됐지만 곧이어 “문제가 더 이상 확대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하고 징계하지 않기로 입장을 정리했다. 한편 이대사 자신은 ‘문화일보’에 칼럼이 실린 10일 외교통상부에 사표를 내버렸다. 도대체 그가 뭐라고 썼길래 이 난리일까?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지 1년 10개월 남짓 지나는 사이에 3번째 외무장관이 등장했다. 이런 추세면 현정부에서 7명 정도의 외무장관이 나올것 같다. 5년 단임 대통령제에서 한 사람의 외무장관이 5년 동안 계속 재임하더라도 외교에는 속성(速成)이 있을 수 없는 그 자체의 속성(屬性)상 5년이 결코 길다고는 볼 수 없다. (중략)

    우리는 이번에도 우리 식으로 외무장·차관을 한꺼번에 바꾸었다. 재임 6개월밖에 안 된 차관보급 직원도 교체하였다. 신설한 지 9년도 안 된 외교정책실에 11번째의 장이 임명되었다. 그 자리에서 겨우 1년을 넘긴 자는 단 한 명이고, 3명이 6개월 이내에 자리를 떠났다. 그럴 때마다 국제회의 수석대표가 바뀌게 되어 국제외교가의 우스갯거리가 되어 왔다.

    엇갈리는 반응들

    지난 1년10개월 동안 한 자리에서 1년 반도 못 채우고 국비 외유에 가깝게 지내다가 퇴임한 재외공관장과 1년 미만으로 외무본부의 국장급 간부직에서 물러난 자가 50여명에 이른다. 조직 전체의 규모로 볼 때 굉장한 요동이고 국가적으로 엄청난 낭비다. 관료조직의 기초부서장인 과장들도 예비후보들의 압력에 밀려 한 자리에서 1년 이상 버티지 못한다. (후략)”(문화일보 2월10일자 ‘외교부 인사·조직 이대로 안된다’에서)

    조선조 이래 우리의 ‘유구한 전통’은 관료사회의 잦은 인사교체에까지 이렇듯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안면과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사회에서, 그것도 ‘국제적 젠틀맨의 집단’인 외교통상부에서 잔뼈가 굵은 최고참 외교관이 공개리에 이런 식의 지적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은퇴 시기를 얼마 안 남긴 처지라면, 설령 다소간 불만이 있더라도 ‘점잖게’ 옷을 벗고 나오는 게 한국사회의 미덕처럼 돼 왔던 게 사실이다.

    무엇이 이장춘 대사로 하여금 ‘튀는 행동’을 하게 했을까? 떠나는 선배로서 뒤에 남는 후배들을 위해서 남기는 충정(衷情)의 발로였을까? 혹은 한국 외교의 장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애국심의 발로였을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가 그동안 겪었을지도 모르는 인사상 불이익으로 인한 불만 때문이었을까?

    “이대사의 문제 제기는 대부분 옳은 말이다. 그런데 예전에 ‘잘나가던’ 시절에는 가만히 있다가 왜 하필이면 지금 그걸 밝히는가.”(외교통상부 산하 외교안보연구원 관계자 A씨)

    “그런 지적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이 30년 이상 몸담았던 조직에 대한 문제 제기를 굳이 언론에 기고하는 방식으로 해야만 했을까?”(외교통상부 중견 간부 B씨)

    “이장춘 대사의 이번 기고문은 단지 외교부 조직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한국 외교의 장래를 위해서 매우 적절한 발언이었다고 생각한다.”(전직 원로 외교관 C씨)

    그의 이번 행동에 대한 반응은 갖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먼저, 외교통상부 현직 간부들의 표면적 반응은 ‘당연히’ 비판적인 쪽이 강하다. 외교통상부의 한 내부 인사는 “이대사는 5월이 되면 어차피 대명(代命) 제도로 인해 옷을 벗어야 할 처지였다”며 “이번 언론기고는 그런 맥락에서 그동안의 인사불만에 대한 반격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대명제도란 외무공무원법상 공관장에 임명되지 않은 채 1년이 지나면 자동 퇴직하도록 돼 있는 제도다(그러나 대명제도의 규정에 따라서 옷을 벗은 외교관은 2000년 2월 현재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외교통상부 내부에서는 “이대사가 이번에 후배들을 위해서 큰 일을 했다”는 얘기도 조심스레 나온다. 그동안 우리 외교가 청와대나 안기부에 휘둘려온 건 사실이고, 그런 맥락에서 이대사의 이번 기고는 방법은 좀 서툴렀는지 몰라도 정당한 지적을 했다는 것. 다만 현직 공무원으로서 이런 식의 ‘긍정적인’ 평가를 드러내놓고 하지는 못할 뿐이라는 것이다.

    한편 외교통상부 바깥의 반응은 압도적으로 이대사 편이다. 대부분 언론들이 이대사가 지적한 내용을 비중있게 다룬 것이 그 예다. 처음 정부 일각에서 이대사 징계 얘기가 나올 정도로 격앙된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해서도 “내부 고발자를 ‘왕따’시켜서 자기 조직의 치부를 가리려는 방어술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외교통상부는 이를테면 ‘전문가 집단’이다. 바깥 사람들로서는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어떤 조직원리로 운영되는지, 웬만하면 알기가 어렵다. 이는 업무의 특수성 탓도 물론 있지만, 구성원들의 조직이기주의 탓도 크다. 외교통상부의 인사 문제에 대해서도 그동안 이런저런 비판들이 제기돼왔지만 대부분 피상적인 비판에 그쳤고, 이대사처럼 구체적으로 사실을 적시해가며 비판한 예는 없었다. 이장춘 대사는 과연 어떤 배경에서 이번 파문을 일으켰을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장춘 대사가 어떤 사람인지부터 알 필요가 있다.

    호불호(好不好) 뚜렷한 강성

    이대사는 자신이 4·19 핵심 주역 중 한 사람이라는 데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일로 그는 정부로부터 건국포장(63년)까지 받았다. 그는 또 대한민국 엘리트들의 상당수가 이런저런 온갖 이유로 군 복무를 면제받거나 짧은 기간만 복무한 데 비해 자신은 공군장교로서 4년 4개월을 복무한 뒤 외무부에 들어왔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은근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상대적으로 뒤늦은 출발 때문에 관료생활에서 손해본 측면이 없지 않지만, 도덕적인 면에서는 한점 꿀릴 게 없다는 것.

    이런 이력에다 그의 ‘강한’ 성품은 그를 보수적인 관료사회에서 상대적으로 ‘튀는 존재’로 만들었다. 퇴직한 한 원로 외교관은 이대사에 대해서 “굉장히 똑똑하고 부지런한 사람이다. 그러나 입바른 소리를 많이 해서 고위층 중에는 그를 싫어하는 이들도 꽤 있었다”고 말했다. 일례로 그는 상사의 지시라도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대들었다고 한다.

    과거 해외공관에서 함께 근무했던 외교부의 한 중견 간부는 이대사에 대해서 “한 마디로 자기보다 더 똑똑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는 유형”이라며 “그 분을 영어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eccentric(괴짜)’쯤 되지 않을까”라고 덧붙였다. 업무와 관련해서는 “본인이 관심을 가진 분야, 예컨대 ASEM이나 ASEAN 같은 분야에선 탁월한 능력을 보였고 외교철학적인 담론을 즐겼지만, 관심이 덜한 부분에서 일하는 이들은 모두 ‘놀고 먹는 인간’으로 취급했다”고 한다.

    과거 이대사를 접했던 기자들의 평가도 엇비슷하다. 이대사가 외교정책기획실장이던 시절 외무부를 출입했던 한 기자는 “자기 부하든 기자든 일 잘하고 마음에 들면 확실하게 봐주고, 빌빌거리면 사람 취급도 안했다”며 “기본적으로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가 오스트리아 대사였던 시절에 특파원으로서 그를 만났다는 한 중견 언론인은 “공문서에서 3인칭 단수 동사에 붙이는 ∼s, ∼es까지 챙길 정도로 철저한 사람”이었고 “본국에서 오는 훈령도 대사 본인이 직접 챙겨 보고 돼먹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 자리에서 쓰레기통에 쳐넣었다”고 술회했다. 그의 얘기를 좀 더 들어보자.

    “그가 오스트리아 대사였던 시절 북한 핵문제가 국제사회에서 핫이슈로 부각됐다. 한국은 당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이사국이어서 이대사가 IAEA 이사로서 회의에 참석했는데, 그는 북한 핵문제에 관한 한 시종 정공법으로 일관해 북한측을 괴롭혔다. 한번은 연설 도중에 북한 김일성을 ‘미스터 김일성’이라고 지칭해서 북한측 대표가 미쳐 날뛴 적도 있었다.”

    종합하면, 이장춘 대사는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으로 보인다. 대인관계에서도 호불호가 분명한 만큼 외교통상부 안에서 그에게 호감을 가진 이도 있겠지만, 적 또한 많아 보인다. 이번에 그가 언론 기고를 통해 외교통상부의 인사난맥상을 비판한 것에 대해서 많은 간부들이 내용의 진위 여부는 젖혀두고 일단 부정적인 반응부터 보인 것도 그의 이런 성품이 어느 정도 작용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의 고별사”

    그러나 대국적으로 보면, 보신(保身)과 처세술에 능한 공무원 사회에서 소리내지 않고 지내는 것이 꼭 능사는 아니다. 잘못된 것을 보고도 못본 체 지나치는 조직이기주의가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나라 구석구석을 얼마나 멍들게 하고 있는가? 오히려 조직의 발전은 적당히 대세에 순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조직의 잘못을 용감하게 고발하는 ‘호각부는 사람(whistle blower)’의 존재로 인해 이뤄진다는 것을 역사상 수많은 사례에서 볼 수 있지 않은가?

    ‘기고문 소동’이 일어난 지 사흘 후인 13일, 시내 모 호텔 커피숍에서 기자와 마주친 이대사는 신문에 칼럼을 쓰게 된 배경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영어로 얘기하면 그건 ‘valedictory report’ 즉 고별사다. 30여년 봉직했던 외교부를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 글을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양에도 대사로서 고별사를 써서 유명해진 사람이 있다. 지금 기억에 이름이 핸드릭슨인가 하는 영국 외교관인데, 79년 5월 마가렛 대처 영국수상이 취임하기 직전에 세계적인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지에 글을 기고했다. 그는 이 글에서 당시 영국경제가 쇠퇴하고 나라가 기울어가는 이유를 적시하면서 대외관계에 대한 몇 가지 건의를 했다. 이걸 은퇴 직전에 써서 영국사회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내가 주영대사관 참사관으로 런던에 주재할 때 있었던 일이다.”

    그는 또 그 날 아침 자신이 존경하는 선배 외교관이 전화를 걸어와 “미국의 러스크 전 국무장관 시절에 조지 볼 국무차관이 존슨 대통령의 외교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썼는데, 현직 외무차관이 그런 글을 썼는데도 차관직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는 얘기를 해주면서 자신을 위로하더라고 말했다.

    “굳이 언론에 기고하는 센세이셔널한 방식으로 할 수밖에 없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부적으로도 공관장회의 같은 자리에서 많이 얘기했다. ‘우리가 모두 천재냐. 이렇게 자주 자리가 바뀌니까 해외에 나가서 상대방 말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 지도 모르고, 주재국에 친구를 만들 여유도 없고…’ 이렇게 입이 아프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퇴직하면 정치를 한다는 소문도 있던데…”라고 질문하자 그는 “10여년간 태극기를 매단 차를 타고 다니던 대사가 일개 초선의원보다 못하단 말인가”라며 화를 냈다.

    “영어 표현에 ‘Professional soldier and professional diplomat are not expandable’이라는 말이 있다. ‘직업 군인과 직업 외교관은 마음대로 팽(烹)하면 안된다’는 말이다. 나는 우리나라 외교관의 처지가 안타까워서 그 글을 썼고, 이제 공직을 떠나지만 외교관으로서의 자부심은 갖고 간다.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일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기실 이대사가 ‘물의’를 일으킨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전에도 그는 ‘중요한 고비마다’ 조직이 아닌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내왔다. 비근한 예가 이번 정부 출범 직전인 98년 1월 외무부에서 외교통상부로의 개편에 반대하는 칼럼을 쓴 일이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외교통상부’ 아이디어는 비현실적이다. 외교통상부가 되려면 절실한 외교 과제가 없고 통상도 이미 개발되어 있는 나라에서는 가능하다. 우리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 (중략) 외교통상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의 논거 중에는 해외시장 개척을 위해 외무부 산하에 있는 재외공관을 지휘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지나친 과장이다. (중략)

    집시(gypsy)와 같은 직업 외교관만으로 구성되는 우리 외무부가 기업을 상대로 하는 독특한 산업정책상의 이해와 종합적인 무역정책상의 필요성을 조화하여 전문적 기능분야에 해당하는 대외통상 교섭을 잘 수행해 나가리라고 기대하는 것도 비현실적이라고 보아야 한다.(후략)” (‘서울신문’ 1998년 1월20일자).

    당시 정부조직 개편과정에서 외무부는 ‘외교통상부’ 관철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런 차에 이대사(당시 일본 게이오대 방문교수로 연수 중)가 불쑥 제기한 이같은 비판으로 외무부가 매우 당혹스러워했음은 물론이다.

    이 외에 1991년 11월8일 노태우 대통령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구축을 위한 선언’을 발표했을 때, 당시 이장춘 주(駐) 오스트리아 대사는 대통령, 안기부장 등을 일일이 거명해가면서 공개적으로 비판, 정부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다른 한편, 이대사의 공직자 철학의 단면을 보여주는 예로는 다음의 칼럼이 있다.

    “구시대적 전통과 유산이 여러 군데 반영되어 있는 우리의 각 부처에는, 우리의 은행들과 마찬가지로 주인이 없다. 빈번한 장관의 경질에 따라 거의 자동적으로 바뀌는 각 부처의 차관은 대개 공무원으로 있다가 그 자리에 임명되면 정무직이 되어 버린다. 차관이 장관으로 올라가는 것이 모든 의미에서 과연 승진인지를 우리도 이제 물어볼 때가 되었다. 각 부처가 수행하는 정책문제에 대한 책임자는 장관이나, 정책을 집행하고 법을 지켜야 할 책임을 맡은 각 부처 자체의 주인은 관료출신 차관이어야 한다.

    선진국에서 차관은 차관으로 은퇴한다. 교사와 경관과 집배원이 존경을 받아야 할 다원주의 사회의 가치체계상, 직업관리의 마지막 자리인 차관이 장관보다 반드시 못하지 않은 나라가 선진국이다. 군의 참모총장이나 경찰, 검찰 등 전문직업의 총수를 지내고도 초선 국회의원이 되려 하거나 전문직업의 가치와 권위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연명을 위해 납득하기 어려운 자리로 옮기는 풍조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바람직스럽지 못하다.(후략)”(한국일보 97년 12월27일자).

    이를테면 정치적으로 임명되는 ‘명 짧은’ 장관 밑에서, 정책집행과 실질적인 ‘집안 살림’을 도맡아야 할 차관이 현실에서는 자기 역할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은근한 비판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번에 벌어진 그의 기고문 파동은 결코 즉흥적으로 나온 게 아닌 것으로 보인다. 길게는 자신의 외교관 생활 전반에 걸쳐, 짧게는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지난 2년간 일도 없이 봉록을 받으면서” 켜켜이 쌓아온, 외교통상부의 인사행정에 대한 소회의 결정판이라는 것. 그러면 김대중 정부에 들어와 구체적으로 무엇이 이대사로 하여금 친정에다 ‘독한 소리’까지 하게끔 만들었을까.

    2년간의 기다림

    이장춘 대사는 고위직 외교관 중 김대중 정부 들어와 ‘찬밥’ 신세가 된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그 단초는 이번 정부의 첫 번째 박정수(朴定洙) 외교통상부 장관 취임식(1998년 3월4일)에서부터 나타났다.

    이날 박장관은 취임 일성으로 “외무공무원법상 정년 잔여기간이 2년 6개월 미만인 간부와 이미 공관장을 3회 이상 역임한 간부는 재외공관장직에 보임하지 않겠다”고 공표했다. 이는 그 즈음 외무공무원법 개정으로 외교관 정년이 특1급은 65세에서 64세로, 특2급은 63세에서 62세로 1년씩 깎인 터라, 재외공관장 발령 기회를 박탈당할 고위직이 30여명에 달하는 폭탄 발언이었다. 이 방침대로라면 차관급에 해당하는 특1, 특2급 대사 중 절반이 1, 2년 이내에 옷을 벗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20일도 지나지 않아 갖가지 예외조항이 만들어졌다. 즉 ▲대통령이 특별 임용 필요성을 인정하는 경우 ▲정무직 역임 후 공관장이 되는 경우 ▲공관장 재직 중 장관이 특별히 인정하는 사유로 당해 공관장 재직기간이 2년 미만인 자나 특수지 공관장을 역임한 자 ▲정년까지의 잔여기간이 2년 이상인 자로서 장관이 특별히 임용 필요성을 인정하거나 아그레망 취득이 불필요한 국제기구 대표부의 공관장이나 총영사 임용 대상자 등은 위의 규정에서 예외로 한다는 것(98년 3월23일자 ‘재외공관장 보직인사지침’).

    박장관의 이 인사방침에 대해서 한 퇴직 외교관은 “한 마디로 원칙없는 원칙이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정무직을 역임한 후 공관장이 되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은 논리상으로도 맞지 않는다. 정무직이란 정권과 거취를 함께 하는 자리인데, 이전 정권에서 정무직을 한 사람을 직업 외교관보다 우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또 공관장 연임 횟수 제한이라는 것도, 예컨대 주일대사관이나 주미대사관의 차석은 타지역 공관장을 역임한 이후에 임명되는 경우가 많고, 중소 규모의 공관장보다도 오히려 선호된다는 점 등에 비춰보면 억지 논리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대사는 계급정년이 5년 3개월, 공관장 근속정년이 3년 이상 남아 있던 상황이었다. 이대사와 고시 동기인 홍순영, 박수길씨 등은 이미 공관장을 네 차례 역임했고, 현직 공관장들 중에도 여러 명이 4번째 공관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던 터라 당시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으로 다음 보직을 기다리던 이대사로서는 부당하다고 여길 소지가 충분히 있었다는것(이대사는 이 때까지 3차례 공관장을 역임했다). 더욱이 3월23일에 발표된 예외조항까지 감안한다면, 박장관의 인사방침에 따라 옷을 벗어야 할 사람은 사실상 이대사와 J모 대사 두 사람만 남게 되는 상황이었다. 이대사로서는 자신을 ‘표적’으로 한 인사방침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 소식통에 의하면, 박정수 장관과 이장춘 대사 사이에는 한 차례 ‘악연(惡緣)’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96년 11월 그가 필리핀대사 시절 당시 김대중 총재 일행이 마닐라를 방문했다. DJ의 수행원 중에는 박정수 의원도 있었다. 당시는 필리핀에서 열리는 아태정상회담(APEC)을 며칠 앞두고 김영삼 대통령의 방비(放比) 준비로 대사관이 굉장히 바쁠 때였다고 한다.

    비행기 트랩에서 내린 박의원이 이대사에게 양주 두 병을 건네며 “필리핀 집권당의 누구누구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대사는 이를 건네받아 대사관 직원에게 건네줬다.

    문제는 그 뒤에 일어났다. 대사관측으로부터 선물을 제대로 전달했는지 여부를 통보받지 못한 박의원이 국회 통일외무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거론한 것. 이에 외교부 본부에선 이대사에게 상황파악을 문의했고, 대사관측은 뒤늦게 선물을 당사자에게 전달했다고 박의원측에 통보했다. 이 얘기를 전해준 소식통은 “사소한 일이지만, 이 때의 앙금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아무튼 박정수 장관이 입각한 이래 홍순영(洪淳瑛)장관, 그리고 현 이정빈 장관에 이르기까지 이장춘 대사의 ‘수난’은 계속됐다. 99년 5월에는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직에서 본부대사로 발령받으면서, 1년만 지나면 자동적으로 퇴임해야 하는 위기에까지 몰리게 됐다. 이대사와 가까운 한 인사에 따르면, 이대사는 그 사이 몇 차례에 걸쳐 장관들에게 자신이 스스로 퇴임해야 할지, 아니면 더 기다릴지의 거취를 문의했으나 이렇다 할 답변을 듣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2년에 세 번 바뀐 기획관리실장

    그러면 이대사가 기고문에서 제시한 외교통상부 인사난맥상의 실체는 어떠한가. 이대사는 이 글에서 ▲“이 정부 출범 1년 10개월 남짓 지나는 사이에 세번째 외무장관이 등장했고, 이런 추세면 현 정부에서 7명 정도의 외무장관이 나올 것 같다.” ▲“신설한지 9년도 안된 외교정책실에 11번째 장이 임명되었다.” ▲“지난 1년 10개월 동안 한 자리에서 1년 반도 못 채우고 국비 외유에 가깝게 지내다가 퇴임한 재외공관장과 1년 미만으로 외무 본부의 국장급 간부직에서 물러난 자가 50여명에 이른다.” ▲“관료조직의 기초부서장인 과장들도 예비 후보들의 압력에 밀려 한 자리에서 1년 이상 버티지 못한다.” 등을 지적했다.

    외국 대사로 나가서 1년 반도 채우지 못하고 돌아온다면 ‘정상적인’ 외교를 기대하기 어려우리라는 건 불문가지다. 현지 사정을 파악하고 주재국 관리들과 안면을 트는 등 적응하는 데에만 1년 정도는 걸리기 때문이다. 나라의 외교정책을 재단하는 실무책임자인 외교정책실의 주인 역시 1년이 멀다하고 바뀐다면 정책의 치밀함과 일관성을 얼마나 기대할 수 있을까.

    서울에 주재하는 외국 대사들의 모임인 주한(駐韓) 외교단의 경우, 1999년 5월 현재 5년 이상 주재한 사람이 12명, 4년 이상 주재한 사람은 17명, 3년 이상 주재한 사람은 37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주한외교단의 전체 인원이 100명 남짓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외국 대사들의 경우 대체로 3년 혹은 그보다 조금 더 오래 주재한다는 얘기가 된다. 한 원로 외교관은 “5년째 서울에 와 있다는 한 외국 대사를 만났더니 자기가 있는 동안에 한국의 외무장관이 6번 바뀌었다고 하더라”며 부끄러워 했다.

    최근에는 외교부에 2명의 ‘차관’이 존재하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작년 12월에 후임 차관으로 내정된 뒤 귀국한 반기문(潘基文) 주오스트리아대사와 선준영(宣晙英) 차관(선차관은 2월15일 주유엔대사로 발령받았다)이 함께 업무를 보는 상황이 1월27일 반차관이 정식 발령을 받기 전까지 몇 주일 동안이나 계속된 것.

    사실, 국외자로서 외교통상부의 인사기록을 낱낱이 밝히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닌 한 매년 발간되는 외교통상부 인사현황 자료집을 봐도 인사 현황을 온전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인물별로 보직 현황과 임명시기가 나와 있지 있지 않고, 보직별로만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 정부 들어와 언론의 인사이동난에 실린 자료만 참조해봐도 외교부 인사에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은 금새 알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외교부 인사를 포함해 조직관리를 총괄하는 장관의 핵심 참모인 기획관리실장 자리에 이번 정부 들어와 세 명이나 바뀌었다. 현재의 기획관리실장은 박양천(朴楊千)씨. 박씨는 주홍콩총영사로 있다가 98년 5월4일 주루마니아대사로 발령을 받았고, 다시 99년 1월13일자로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부장으로 온 뒤, 올해 1월29일 기획관리실장에 임명됐다. 루마니아대사로는 약 7개월만 재임했고, 지난 2년 사이에 세 차례나 자리를 옮긴 셈이다.

    학연에 의한 인사의 예로, 한 퇴직 외교관은 “박정수 장관 시절에는 차관보급 이상 8명 중에서 박장관의 모교인 경기고 출신이 5명이나 됐었다”고 말했다. 외교부에 원래부터 경기고 인맥이 막강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고위직에 이렇게 많은 경기고 출신이 동시에 포진한 일은 일찍이 없었다는 것.

    따지고 보면 한반도 주변 4강 대사 중에서 지난 2월15일 교체된 김석규(金奭圭) 주일본 대사와 이인호(李仁浩) 주러시아 대사, 이시영(李時榮) 주유엔대표부 대사 등도 2년을 못 채운 셈이다(98년 3월24일 내정). 더욱이 이들의 후임자가 작년 말에 사실상 내정되면서 그 후 레임덕 기간을 거쳤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대사직 수행기간은 더 짧아진다.

    외교부가 슬프다

    사실 외교부의 인사 로비행태는 공직사회에서는 공지의 사실이다. 해마다 인사철이면 대표적인 인기 지역인 워싱턴·유엔·제네바에 부임받기 위해서 사무관에서부터 고위급 대사에 이르기까지 전 직원이 인맥·학맥·지연을 총동원해 치열한 로비전을 벌인다. 청와대·장관 비서실·총무과를 거친 직원은 좋은 보직을 맡는다는 관례를 일컫는 이른바 ‘청·비·총’의 전통은 세월이 흘러도 약화될 줄을 모른다. 외교부 주변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외교부의 고질적인 문제는 고시제도에 있다. 요즈음에는 외무고시를 통해서 해마다 30명씩 뽑는데, 각 기수별 동기들이 저마다 장·차관이 되는 경력을 쌓으려고 애쓰는 게 문제다. 그러다 보니 외교부의 인사정책이 전문가를 기르기보다는 가급적 많은 외교관을 골고루 모두가 바라는 노른자위 임지나 보직에 잠깐씩이나마 근무시키는 데에 중점을 두게 된다. 이른바 나눠먹기인 셈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외무공무원 공채에서 일반직은 일부만 뽑고, 나머지 다수는 전문직으로 뽑는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각자 가는 길이 다르다는 걸 안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고시출신들이 60세가 넘어서 대사직을 하려고 애쓰고, 그러다보니 젊을 때부터 경력관리에만 온통 신경을 쓰게 된다.”

    이렇게 보면, 이장춘 대사가 이번에 외교부의 인사난맥상을 공개적으로 거론한 것은 기실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다. 다만 이번 일이 세간에 화제가 된 것은, 이대사처럼 고위 외교관으로 있던 인물이 조목조목 문제점을 적시해가면서 인사상의 문제점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외교부가 “집안 밥상 위에 놓인 반찬이 어떤 순서로 누구에게 가는지를” 동네방네에 까발긴 그를 ‘배신자’ 취급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장춘 대사가 한국 외교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잘못된 것은 이제 고치자는 차원에서 그런 글을 썼든, 아니면 자신에게 가해진 불이익 때문에 그런 글을 썼든, 그는 용기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우리 사회에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잘못된 것을 보고도 못본 척 지나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점에서 앞서 “이대사의 글을 읽고서 슬픔을 느낀다”는 ‘kangilee’씨의 말처럼, “이대사를 일단 비난부터 하고 왕따 놓는” 우리 외교부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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