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동이 불편한 농촌 노인이 멀리 떨어진 투표소로 가는 건 힘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농촌에서는 승용차나 승합차로 노인들을 투표장으로 실어 나르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여기에 부정이 개입된다.
길게 줄지어 선 농촌 유권자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없음.
“자네 올해 나이가 몇인가?”
“우리 나이로 68세입니다.”
“아직 한창이네, 자네가 마을 청년회장 맡으면 되겠구먼.”
전직 군수에게 전해 들은 얘기다. 80세 이상 고령 인구가 대부분인 시골 마을에서 60대 후반이면 ‘청년’축에 속하는 게 작금의 농촌 현실이다.
투표장 가는 길
대한민국이 산업화로 고도성장을 누리는 동안 인구가 도시로 대거 이동해 농촌은 ‘노인촌’으로 전락했다.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떠난 시골에는 70대 이상 80대 노인 인구가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고령의 인구가 많아지면서 농촌의 풍경은 사뭇 달라졌다. 모내기철에 두 사람이 논 양쪽 끝에 줄을 잡고 여러 사람이 나란히 줄지어 모내기를 하던 정겨운 풍경이 사라졌고, 가을 추수 때 여러 사람이 한 줄로 늘어서서 낫으로 벼를 베던 모습도 아스라한 옛 추억거리가 됐다. 젊은이들이 떠난 농촌에는 트랙터와 이앙기, 탈곡기 등 농기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농사일을 전담한다.
농번기 풍경만 달라진 게 아니다. 고령의 노인이 모여 사는 시골마을에는 유모차처럼 생긴 보행 보조기구를 앞세워 마을을 거니는 노인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보행 보조기구의 도움으로도 걷기 힘든 노인은 전동보행기를 타고 다닌다. 시골에 거주하는 고령의 노인이 집에서 100여m 남짓 떨어진 노인정에 가려 해도 보행 보조기구 없이 거동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전남 무안군의 한 이장은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노인은 건강이 양호한 편”이라며 “우리 마을 노인정 앞에는 전동보행기 8대, 보행 보조기구 10대 정도가 세워져 있다”고 말했다.
유동인구가 적은 농촌은 대중교통 수단도 턱없이 부족하다. 노인들이 읍내에 있는 병원에 다녀오려면 한 시간에 한 대꼴로 읍내를 순회하는 마을버스를 기다렸다 타야 한다. 버스와 지하철이 수시로 도심을 오가는 분주한 도시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은 차분하고 고요한 농촌 풍경을 두고 ‘한가롭다’고 부러워할지 모른다. 하지만 정작 시골에 사는 고령의 노인들은 불편한 다리와 부족한 대중교통 수단으로 ‘이동권 사각지대’에 놓인 경우가 많다.
거동이 불편한 농촌 노인들이 한 해 건너 한 번꼴로 찾아오는 선거 때마다 짧게는 수백 m에서 길게는 수 km 이상 떨어져 있는 투표소로 가서 투표를 하는 것은 힘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있는 노인이라면 마을버스라도 타고 다녀올 수 있지만 보행 보조기구 없이는 걷기조차 힘든 노인과 전동보행기를 타고 다녀야 하는 노인은 투표장에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투표 당일 농촌에서는 승용차 또는 승합차로 노인들을 투표장으로 실어 나르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의 참정권 보장’을 명분으로 투표 날 승용차로 노인들을 투표소로 실어 나르는 게 연례행사처럼 굳어졌다. 문제는 노인들을 투표장에 실어 나르는 과정에 해괴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전남에서 20여 년간 정치권에 몸담아 온 박호원(53·가명) 씨 얘기다.
▼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투표장에 모셔가는 것은 좋은 일 아닌가.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특정 후보 선거운동원들이 조직적으로 실어 나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 투표장에 데려다줬다고 꼭 특정 후보를 찍는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시골 현실을 잘 모르고 하는 얘기다. 어르신 가운데는 순박한 분이 많다.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으면 보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다. 승용차로 투표소까지 이동하는 편의를 제공하고 ‘할매, OO 후보가 우리 마을을 위해 좋은 일을 한다고 합디다’라면서 투표를 유도한다. 심한 경우에는 투표용지를 크게 확대해서 특정 후보 이름 옆 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도 한다.”
▼ 노인마다 지지하는 후보가 다를 수 있는데, 그게 가능한가.
“투표소에 태워 갈 때는 지지 성향을 봐가면서 차에 태운다. 투표 며칠 전부터 ‘할매, 내 차에 타쇼’라고 미리 약속하고 태워 간다.”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전남의 한 마을.
6·4 지방선거를 120일 앞둔 2월 4일, 예비후보 등록과 함께 제6차 전국동시지방선거의 막이 올랐다. 지방선거에 나서려는 입지자들이 자신의 얼굴이 새겨진 명함을 나눠주며 이름 알리기에 나서면서 선거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덩달아 시골 농촌 마을도 들썩인다. 지방 일꾼을 잘 뽑으려는 유권자의 관심도가 높아서가 아니다. 선거 때 한몫 챙기려는 선거 브로커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진 까닭이다. 전남의 한 자치단체장에 출마하려는 A씨는 “벌써부터 불법, 타락 선거 조짐이 나타난다”고 우려했다.
▼ 선거 준비는 어떻게 하고 있나.
“걱정이 많다. 이번 선거가 또다시 조직 동원, 돈 선거로 흐르는 건 아닌지….”
▼ 투표일까지 100일도 더 남았다. 벌써부터 선거운동이 시작된 건가.
“법정 선거운동이 시작되려면 시간이 남았지만 이미 음성적으로 선거운동이 시작됐다. 가장 큰 문제가 조직 동원인데, 이번에도 같은 현상이 재현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 어떤 움직임이 있나.
“투표 날 노인 수송을 위해 마을단위로 조직을 구축한다는 얘기가 들린다. 우리 지역에 자연부락이 600개쯤 되는데, 투표 날 유권자 수송을 위해 조직을 꾸려 차량 600대를 확보하라는 용역을 줬다는 얘기도 들린다.”
A씨가 출마하려는 자치단체는 인구 8만 명에 유권자는 6만 명 정도다. 자연부락이 600여 개 되고, 4개에서 10개의 마을이 모여 ‘리’를 이루고 있다. 1개 읍면은 다시 4개에서 12개의 리로 구성돼 있다.
선거 조직은 대개 마을-리-읍면 등 각 단위 책임자를 두는 피라미드 형태로 조직된다고 한다. A씨는 “마을 담당자는 ‘대리’, 리는 ‘과장’, 읍면 책임자는 ‘국장’으로 대기업 회사 명칭을 써가며 선거운동조직을 꾸린다”며 “선거운동을 위해 조직된 이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투표 당일 ‘유권자 수송’을 책임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남의 시 단위 자치단체에서 기초의원 출마를 준비 중인 B씨는 4년 전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그는 “‘지역에 봉사하겠다’는 순진한 마음으로 선거판에 뛰어들었다가 조직의 쓴맛을 톡톡히 봤다”고 털어놨다. 그의 얘기다.
“시골의 선거는 철저하게 조직 중심으로 치러진다. 아무리 열심히 뛰어다녀도 골목까지 촘촘히 조직을 갖춘 후보를 이기기 힘든 구조다. 조직을 갖춘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나. 선거운동 기간에는 활동비조로 자금을 내려 보내고, 투표 당일에는 유권자를 승용차로 실어나르기 위해서다. 결국 동원선거, 돈선거가 판친다.”
B씨가 출마하려는 선거구는 달동네가 속한 구(舊)도심이다. 산 중턱에 다닥다닥 붙은 구가옥에는 독거노인이 주로 거주한다. 대부분 기초생활수급자로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으로 연명하는 이가 많다. 그런데 선거 때가 되면 이들 기초생활수급자의 어려운 형편을 이용한 타락선거가 기승을 부린다고 한다.
“산 중턱에 사는 돈 없는 노인은 평소 마을 어귀 가게에서 외상술을 먹는다. 그런데 선거 때면 특정 후보 선거운동원이 그분들 외상값을 대신 갚아준다. 그러고는 투표 당일 차로 투표소까지 태워다 준다. 그런 행태만 막아도 공정한 경쟁이 이뤄질 텐데….”
“어르신 가운데는 순박하고 순진한 분이 많다. 만 원짜리 한 장 손에 쥐여드리면 그것이 ‘정’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서울 같은 도시에서는 말도 안 된다고 하겠지만.”
달동네 골목 어귀에서 만난 C씨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이번 지방선거 출마를 준비 중이다.
조직선거의 폐해
2010년 지방선거 때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D씨도 ‘조직적인 유권자 실어 나르기’ 병폐를 지적했다.
“내가 출마한 지역에는 배를 타고 나와야 투표를 할 수 있는 섬이 여럿 있다. 투표 날 특정 후보 진영에서 조직적으로 배를 동원해 유권자를 실어 나르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공정선거는 간데없고 조직동원 선거가 판친다. 조직선거를 방치하면 유권자 표심에 왜곡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농촌은 정치 신인의 무덤’이라는 얘기가 현장을 둘러보니 실감이 났다. 자신이 몸담은 분야에서 이름을 떨친 이들이 이름값을 믿고 ‘지역에 봉사하겠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출사표를 던졌다가,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촘촘히 얽혀 있는 조직 앞에 맥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농어촌에 똬리를 틀고 있다.
B씨는 “지방자치제도가 부정부패의 늪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구조가 선거운동 과정에서부터 만들어진다”며 “선거를 깨끗하게 치르도록 공영제를 강화해야만 선거 이후 깨끗한 지방자치제도 운영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기초의원 한 사람이 1년 동안 받는 보수는 총액 기준으로 4000만 원에 조금 못 미친다. 4년 임기 동안 최대 1억6000만 원 정도 받게 되는 셈. 그런데 석 달 남짓 기초의원 후보 한 사람이 공식 선거비용 외에 비선 조직을 가동하는 데 쓰는 돈이 억대가 넘는다고 한다. B씨의 얘기다.
▼ 기초의원 선거를 치르는 데 억대의 비용이 드는 이유가 뭔가.
“비선 조직을 가동해 선거운동을 하기 때문이다. 조직으로 선거운동하려는 사람은 투표 당일까지 최소 3번 이상 활동자금을 내려 보낸다.”
▼ 언제 자금을 내려 보내나.
“예비후보 등록 이후부터 정당 공천 전까지는 선거운동원들에게 ‘커피값’ 명목으로 자금을 내려 보낸다. 선거운동이 시작되면 유권자에 가장 근접한 하부 운동원은 일당 개념으로 8만 원에서 10만 원, 중간계층은 15만 원에서 20만 원, 읍면단위 보스급 책임자는 수백에서 많게는 수천만 원을 받고 활동한다고 알려졌다.”
▼ 모두가 선관위에 신고하지 않고 집행되는 비용인가.
“비선 조직을 가동하는 데 드는 비용을 선관위에 신고할 리가 있겠나. 무엇보다 선거운동 때보다 투표 당일 더 큰돈을 쓴다. 차량 대여비, 운전자 수고비까지 따로 줘야 하니까.”
차량등록제 시행하자
전남의 한 지역에서 활동하는 현직 이장과 생활체육회 간부, 전직 군수의 참모 등 다섯 사람이 함께한 자리에서는 농어촌 선거 현실에 대한 즉석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그들의 얘기는 “6·4 지방선거가 역대 선거처럼 치러지면 또다시 조직 선거가 판칠 것”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참석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막강한 조직을 갖춘 후보가 투표 당일 선거운동원을 동원해 ‘유권자 차떼기’를 하는 행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조직선거의 폐해를 숱하게 지켜봤다는 이정문(55·가명) 씨는 “선관위가 특정 후보 선거운동원이 선거 날 유권자들을 투표소에 실어 나르는 행태만 제대로 감시해도 조직선거의 폐해는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참석자들은 조직선거, 동원선거, 돈선거의 폐해를 막기 위한 대안을 이렇게 제시했다.
“선관위가 금품 제공은 물론 음식 접대도 못하도록 법을 대폭 강화한 이후 돈선거 병폐는 많이 사라졌다. 여기서 한발 더 나가야 한다. 시골 선거는 투표 당일 유권자를 투표소에 실어나르는 과정에 부정이 개입한다. 무엇보다 투표 당일 특정 후보 진영에서 ‘유권자 차떼기’를 하지 못하도록 차량등록제를 시행해야 한다. 거동이 불편한 유권자의 투표 참여를 보장하려면 선관위에 등록된 차량에 한해 운행을 허용하고, 그 외 차량은 투표소로 유권자를 실어나르지 못하도록 강력한 처벌규정을 마련해야 한다. 아울러 선관위 등록 차량에 공정선거감시요원이 동승하도록 하면 어느 정도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6·4 지방선거가 10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깨끗한 선거, 공정한 선거는 과연 가능할까. 시골에 거주하는 이들은 회의적이었다.
“국회의원이든, 기초의원이든 ‘당선’된 사람은 누구나 기득권을 갖는다. 그 사람들이 당선하기 위해 지역에 이미 촘촘히 ‘조직’을 갖춰놨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선뜻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내려놓고 공정한 선거의 룰을 갖추려고 하겠나. 선거가 깨끗해져야 정치가 바로 서고 국민 삶이 나아질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