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호

알맹이 없는 ‘정치선언’ 민부론(民富論)

‘백화점식 지적질’로 대전환 외쳐서야

  •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입력2020-01-22 14: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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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티(Anti) 문재인’으로 일관

    • MB · 朴 때도 못한 고성장률 달성 공언

    • 黃 “더 많이 일해라”…Again 1970

    2019년 9월 22일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민부론’ 국민보고대회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있다. [장승윤 동아일보 기자]

    2019년 9월 22일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민부론’ 국민보고대회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있다. [장승윤 동아일보 기자]

    새삼스레 애덤 스미스(Adam Smith)가 소환됐다. 자유한국당이 스미스의 고전 ‘국부론’(國富論)에 빗대 ‘민부론(民富論)’을 내놨기 때문이다. 민부론 집필은 2020경제대전환위원회가 맡았다. 경제대전환위에는 교수 41명, 전문가 22명, 현역 국회의원 27명이 참여했다. 전 경제학·법학 관련 학회장, 전 대기업 경제연구소 임원, 전 공기업 사장, 전 민간경제연구소장, 전 국책연구원 박사 등 참여한 민간 인사들의 이력도 화려하다. 황교안 대표 취임 후 가장 큰 규모의 프로젝트다. 방점은 ‘민간 자율성 극대화’에 찍혀 있다.

    무조건 문재인과 거꾸로 간다?

    처음에는 황 대표의 ‘스티브 잡스 코스프레’가 눈길을 끌었다. 2019년 9월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민부론’ 국민보고대회에서 황 대표는 하늘색 스트라이프 셔츠와 남색 바지 차림에 스니커즈 형태 운동화를 신고 연단에 올랐다. 이어 무선 헤드셋 마이크를 단 채 PPT(파워포인트) 화면을 등 뒤에 두고 90분간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그는 “소득주도성장 같은 ‘천민 사회주의’ 정책이 대한민국을 중독시키고 있다”면서 “민부론이 대한민국 ‘경제 중병’을 치료할 특효약”이라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혹평이 적지 않다. ‘안티(anti) 문재인’으로 일관하다 보니 총론 격 ‘정치 선언’에 그쳤다는 이유에서다. 한국당은 165페이지 두께의 민부론 책자를 발간했다. 분량의 상당수는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이다. 경제대전환위는 이를 ‘현황 진단’이라고 명명했다. 가령 문재인 정부 들어 ‘성장률이 추락’하고 ‘기업이 해외로 탈출’하고 ‘주력산업이 위기’를 겪고 ‘실업률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분배구조가 악화’하고 ‘중산층 비율이 하락’하고 ‘민간소비 위축이 심화’하고 ‘국가 채무 비율이 상승’하고 있다는 식이다. 

    ‘안티 문재인’은 거시경제 영역 바깥으로도 나아간다. 예컨대 ‘현금성 복지로 지방 재정이 위기’이고 ‘공공기관 부채가 증가’하고 ‘이념 편향 교육정책으로 교육경쟁력이 하락’하고 ‘탈원전·4대강 보 해체, 해외자원 개발 중단으로 국가 인프라가 파괴’됐다고 한다. 그야말로 ‘백화점식 지적질’이다. 같은 지적을 중언부언(重言復言)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숨이 가쁠 정도의 지적을 읽고 나야 겨우 방향과 과제에 다다른다. 민부론의 정책 방향은 경제 활성화, 경쟁력 강화, 자유로운 노동, 지속 가능한 복지 등 4가지다. 그 안에 20대 세부 정책과제가 담겨 있다. 그중 첫 번째가 ‘소득주도성장 정책 폐기’다. 그 아래 약 4줄 분량의 글이 적혀 있는데, 그중 절반은 또 ‘지적질’이다. 그 뒤에서야 “탄력근로기간 확대, 옵트 아웃(Opt Out)제도 도입, 사무직·전문직 제외 등 근로시간 규제예외 인정제도 도입. 최저임금제도는 중위권 소득과 연동하는 방식 등으로 개혁”이라는 문구가 나올 뿐이다. 구체적 방법론은 없다.



    10년 후 국민소득 5만 달러 찍겠다?

    그나마 ‘법인세 조정’ ‘상속세·증여세 개혁’ ‘재정건전화법 제정’ ‘도시의 융·복합 개발’ ‘경영권 보호와 승계 관련 법안은 글로벌 기준에 맞게 개정’ ‘한국형 하르츠 개혁(Hartz Reforms) 추진’ 등의 각론이 나오지만 역시 선언적 의미에 그칠 뿐이다. ‘선진국 수준의 주택 융자(구입 가격의 90% 이상 융자)’ ‘부동산 거래세 인하’ ‘자영업에 있어 프랜차이즈 활성화’ 등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 과정에서 빚어질 부작용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저성장 시대를 헤쳐나갈 구조 개혁에 대한 논의는 빈약하다. 

    노동정책에서는 ‘안티 문재인’이 유독 도드라진다. 한국당은 문재인 정부가 “뒤틀린 노동정책을 폈다”고 비난하면서 “①파업기간 중 대체근로 전면 허용 ②직장 점거 금지 ③부당노동행위에 대한 형사처벌 삭제”를 주장했다. 셋 다 그간 경영계가 줄기차게 강조해 온 사항이지만 논란의 소지가 다분하다. ③의 경우 “노동쟁의와 관련된 우리의 역사적 경험에 비춰 입법 의도를 고려해야 한다”는 최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3부 판례도 있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출신 현직 의원(임이자)도 경제대전환위에 속해 있지만 노사관계 한 축인 노동계 의견은 반영하지 않았다. 

    목표에 거품이 잔뜩 껴 있다는 점도 문제다. 한국당은 민부론을 통해 2030년까지 1인당 국민소득 5만 달러, 가구당 연간소득 1억 원, 중산층 비율 70% 등 3대 목표를 달성하겠다고 공언했다. 숫자가 나온 근거는 이렇다. “약 10년 후 4만 달러는 평균 성장률 및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현재의 3만 달러와 유사한 수준이다.” 그러니 “안정적 선진국 반열에 도달하려면 5만 달러 수준까지 도약해야 한다.”(‘민부론’ 45쪽)는 것이다. 한국당은 앞선 목표를 달성하면 뒤의 두 가지 목표를 자연스럽게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국당이 집권하던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에도 경제성장률은 평균 2~3%에 그쳤다. 10년 뒤 국민소득 5만 달러에 가까이라도 가려면 매년 성장률이 적어도 4.5%를 웃돌아야 한다. 정작 민부론에 담긴 정책 과제 상당수는 보수 정권 때도 나왔던 주장이다. 당 대표는 박근혜 정부에서 총리를 지냈다. 경제대전환위에 참여한 의원의 다수는 박근혜 정부 장·차관, 청와대 수석비서관 출신이다. 비슷한 사람들이 비슷한 목소리를 내는데, 왜 과거에는 불가능했고 이번에는 가능한지에 대한 설명은 전무하다. 

    이와 관련해 경제대전환위 위원장인 김광림 의원(정책위의장)은 기자들과 만나 “민부론이 총선, 대선 공약집이 되는 것”이라며 “다만 앞으로 법으로 만들 것, 정책(으로) 만들 것 등 구체화 작업을 해야 하고 이를 위해 방향 밑그림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뒤 한국당은 매달 ‘민부론 후속 입법세미나’를 열고 있지만 20대 국회 임기는 몇 달 후면 끝난다.

    포장지 2020, 내용물 1970

    백화점식 지적질과 선언, 거품 낀 목표가 뒤섞이다 보니 언론계 은어를 빌리자면 ‘야마’(주제의식)가 없다. 이러니 황 대표가 꺼내는 메시지의 초점도 명확하지 않다. 황 대표는 지난해 12월 6일 서울대 경제학부 특강에서 “(근로시간을) 주52시간으로 줄인 것은 과도하다”며 “(대한민국은) 좀 더 일해야 하는 나라”라고 말했다. 이어 “젊은 사람들은 애들 키우고 돈 쓸 데가 많으니 일을 더 해야 하는데 (주52시간 근무제가) 그걸 막아버린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민부론을 대안이라고 홍보했다. 

    그간 황 대표는 민부론을 두고 ‘국민을 부자 되게 하는 경제’라고 강조해 왔다. 워라밸(일과 생활의 균형)에 관심이 큰 20대 대학생들을 앞에 두고 ‘더 많이 일해서 부자 돼라’고 외친 꼴이다. 그간 한국당이 경제 효율을 강조해온 점을 고려하면 일관성도 없는 모양새다. 이 때문에 민부론을 두고 ‘포장지는 2020, 내용물은 1970’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당장 대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시점에서 ‘5만 달러 가겠다’는 선언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면서 “현 정부가 경제를 못하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면 진단과 선언을 넘어 목표 달성을 위한 상세한 전략이 나왔어야 했다. ‘경제를 살리겠다’고만 하는 현 정부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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