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캔서테인먼트 회사 ‘박피디와 황배우’를 통해 암 인식 개선 활동을 하고 있는 황서윤 씨. 황씨는 우리 사회가 암 생존자의 손을 잡아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김도균 기자]
“복직 초기 비니를 쓰고 다녔다. 그때 한 아이가 장난으로 모자를 벗기려다 깜짝 놀라 ‘선생님 대머리예요?’ 하던 게 기억난다. 나는 ‘아니, 선생님이 암 치료를 받아서 그래. 이제 곧 다시 머리카락이 자랄 거야’ 하고 답했다. 아이들 앞에서 아팠던 걸 숨기지 않으니 오히려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요새는 학생들이 많이 자란 내 머리카락를 보면서 ‘선생님 이제 대머리 아니네요’ 하고 까르르 웃는다. ‘내가 다시 건강을 찾아 이렇게 일할 수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말기암 딛고 사회 복귀
암진단 당시 이정훈 씨의 PET-CT 사진과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하던 시절의 이씨.
이씨는 “그래도 생존 확률이 있다”는 한 마디에 희망을 걸었다. 휴직계를 내고 바로 항암 치료를 시작했다. 3일 만에 체중이 10kg 줄었다. 독한 약의 영향으로 위에 구멍이 났다. 세수하다 손이 머리 쪽을 스치기만 해도 머리카락이 빠졌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치료 효과가 있었다는 점이다.
5개월간 이어진 병원 생활을 끝내고 퇴원했을 때 이씨에게 가장 간절한 건 여행이었다. 그는 처음엔 국내 내륙, 그다음엔 제주도로 조금씩 범위를 넓혀가다 2017년 1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어서 남미, 유럽까지 80일 동안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
이씨는 지금 암 진단을 받기 전 몸담았던 바로 그 회사에서 다시 일하며, 청년 암환자 지원 커뮤니티 ‘당신을 또 봅니다(줄임말 또봄)’를 운영하고 있다. 단체 이름에는 ‘당신의 건강한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와 ‘아픔을 이겨내고 또다시 봄을 만났다’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한때 ‘암=죽을병’으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앞선 두 사례처럼 암이 상당히 진행됐다는 판정을 받고도 건강을 회복해 사회에 복귀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암 추적검사를 하지만, 여느 만성질환자와 다를 바 없이 일상적 삶을 살아간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24일, 암 확진 후 5년 넘게 살고 있는 이른바 ‘암 생존자’ 수가 100만 명이 넘었다고 발표했다. 관련 통계를 낸 이래 최초 기록이다.
암 생존자 100만 명 시대
국내 전체 암환자 수는 약 187만 명. 그중 절반 이상(55.7%)이 생존 기간 5년을 넘겼다. 5년은 일반적으로 암이 완치됐다고 판단하는 기준점이다. 이날 정부가 내놓은 암 관련 통계가 하나 더 있다. 2013~17년 사이 암 진단을 받은 환자의 5년 상대생존율(생존율)이 70.4%라는 것이다. 생존율은 암환자와 일반인의 5년 기대생존율 비(比)를 가리키는 용어다. 암환자 10명 중 7명 정도가 진단 후 5년 이상 산다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암환자 3명 중 2명은 ‘완치’ 얘기를 듣는 세상이다.국내 암 생존율은 1993~95년 42.9%를 기록한 이후 빠른 속도로 상승 추세다. 2001~2005년 54.1%를 거쳐 이제 70%를 넘겼다. 현재 갑상샘·전립샘·유방암 환자의 생존율은 90%가 넘는다. 여전히 췌장암(12.2%), 담낭 및 기타담도암(28.9%), 폐암(30.2%) 등 상대적으로 치료가 어려운 암이 없지 않지만, 해당 질환자 가운데서도 ‘희망의 증거’는 계속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사회 인식이 의학 발전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데 있다. 상당수 암환자는 치료 전후 직장을 잃고, 사회 복귀에도 어려움을 겪는 게 현실이다. 1982년생 황서윤 씨도 그중 한 명이다.
뮤지컬 배우로 일하던 황씨는 2016년 샤워를 하다 가슴에서 멍울을 발견했다. 조직검사 결과 유방암이었다. 1기에서 2기로 넘어가는 단계라고 했다. 림프전이도 없었다. 황씨는 “놀라긴 했지만 세상이 무너질 만큼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잘 치료하면 괜찮아지겠지’ 생각했다”고 말했다. 수술과 방사선 및 호르몬 치료 과정도 견딜 만했다. 치료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뒤 그는 스페인 산티아고로 여행길에 올랐다. 오랜 세월 마음에 품고 있던 ‘버킷 리스트’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돈이 많이 들까 봐, 다음에 언제든 갈 수 있겠지 하는 생각에 차일피일 미뤄뒀던 꿈을 이참에 이루자고 생각했다. 현지에서 한 달간 800km를 거뜬히 걸었다. 그리고 전과 다름없는 일상이 펼쳐질 것을 기대하며 돌아온 한국에서, 그는 예상 못한 현실과 맞닥뜨렸다.
“암 선고 받고 1년쯤 현장을 떠난 동안 나를 둘러싼 환경이 달라진 거다. 배우는 캐스팅을 받아야 일하는데 불러주는 데가 없었다. 내가 연기를 지도하던 아이들은 그사이 모두 다른 선생님을 찾아갔다. 아직 젊은데 세상이 나를 외면하는 것 같았다. ‘멘탈’이 무너지고 감정이 바닥을 쳤다. 암에 걸렸다는 말을 들은 때보다 이때가 훨씬 힘들었다. 남들 잘 사는 모습이 보기 싫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도 탈퇴했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바리스타 자격증, 숲해설사 자격증 등을 땄지만 미래가 막막했다.”
암환자라는 자격증
암환자의 삶을 유쾌하게 그린 뮤지컬 ‘아미고, 아미가’의 한 장면.
“내가 암 확진을 받은 건 공연 준비로 한창 바쁘던 시기다. 그때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의사한테 ‘공연이 한 달도 안 남았다. 어쩌라는 거냐’고 했었다. 암이 뭔지 잘 몰랐고, 내 몸 아낄 줄도 몰랐다. 이후 치료를 받으면서 내 몸으로 암에 대해 알고 느끼게 됐다. 누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든 돕고 싶었다.”
그래서 박씨는 치료받는 병원의 신규 유방암 환자를 돕는 멘토, 이른바 ‘핑크메이트’로 활동했다. 좋은 평가를 얻었고 이름이 조금씩 알려졌다. 2017년 어느 날, 서울 한 보건소가 운영하는 암환자 자조 모임이 박씨를 ‘암 전문가’로 초청했다. 박씨는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내가 전문가라니’ 하며 웃었다”고 털어놓았다.
“생각해 보니 암 진단과 치료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내가 가진 전문성이 있더라. 암환자라는 게 감추려들면 약점처럼 느껴지지만 드러내면 강점이 될 수도 있는 거구나 싶었다. ‘암에 걸린 덕에 자격증이 하나 생겼네’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마침 그 무렵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우울감에 빠져 있던 ‘황배우’가 박씨에게 연락을 해왔다. 박씨는 자신이 얻은 깨달음을 전했고, 그게 황씨에게 새로운 희망이 됐다. 두 사람은 2018년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암 경험담과 위로는 암환자에게!’를 표방하는 팟캐스트 ‘내가 암이라니’를 만들었다. 현재는 우리나라 최초의 캔서테인먼트(Cancer+Entertainment) 기업 ‘(주)박피디와 황배우’를 세운 상태다. 이 회사를 통해 암 경험자의 삶을 유쾌하게 그린 뮤지컬 ‘아미고, 아미가’를 제작한다. 황씨는 “그동안 여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암환자 자격증만큼 진입 장벽이 높은 게 없었다. 갖기 어려운 자격증을 갖고 있으니 사회에 도움이 되게 잘 사용하자고 ‘박피디’와 의기투합했다”며 웃었다.
두 사람 앞에 힘든 일이 없는 건 아니다. 박씨 항암수첩 겉장에는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 몸은 쓰면 쓸수록 강한 정신력이 나온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그가 매순간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유방암 발견 후 16차례에 걸친 항암 치료와 수술, 방사선 치료를 경험한 박씨는 2018년 자궁내막암이 발견돼 또 한 번 수술대에 누웠다. 혹독한 치료를 견디는 사이 당뇨, 부정맥 등 다른 질병까지 생겨났다. 현재 치료와 재활을 병행하며 공연 제작까지 하는 상황이다. 종종 통증이 찾아올 때면 고통에 몸부림치기도 한다. 그래도 지금 삶이 무척 행복하다며 박씨는 눈을 반짝였다.
“암을 일찍 발견해 잘 치료한 황배우는 ‘조기 진단, 조기 치료’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조기 발견의 아이콘’이다. 반면 나는 ‘극복의 아이콘’ 같다. 암 확진 당시 이미 림프까지 전이된 상태였다. 2차 암도 생겼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즐겁게 산다. 열심히 운동하고, 좋은 걸 먹으며 내 몸을 챙긴다. 암 치료법은 계속 개발되고 있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암을 관리하며 살게 될 거다. 암 때문에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암을 극복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박씨 얘기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이두리 씨도 ‘암을 이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1987년생인 그는 지난해 4월, 첫아이를 낳고 두 달도 안 된 시기에 암 진단을 받았다. 결혼 후 호주로 이주한 이씨는 현지에서 출산했다. 이후 모유가 나오지 않고 가슴 통증이 날로 심해져 병원을 찾았지만 젖몸살이라는 얘기만 들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어 한국행 비행기를 탔고, 뒤늦게 유방암을 확인했다. 이름도 생소한 삼중음성유방암, 병기는 이미 3기를 넘어간 상태였다. 이씨 얘기다.
유병장수 시대, 버티면 낫는다
삼중음성유방암 인식 개선 활동을 하고 있는 이두리 씨(왼쪽)와 임구슬 씨. 임씨는 암 진단 후 결혼식을 올렸다.
그에 따르면 유방암 앞에 붙은 ‘삼중음성’은 세 가지가 없다는 뜻이다. 각각 에스트로겐 수용체, 프로게스테론 수용체, 그리고 HER-2 수용체를 의미한다. 최근 유방암 환자 생존율이 크게 높아진 건 항호르몬 치료와 HER-2 표적 치료 기술이 발전한 덕분이다. 삼중음성유방암에는 이런 약이 듣지 않는다. 뾰족한 치료제가 없다. 이 때문에 ‘치료가 어렵다’는 평을 듣는다. 그래도 이씨는 갓 태어난 아이를 생각해 용기를 냈다. “딸아이가 커가는 걸 보면서 같이 성장하는 엄마가 되고 싶다”는 바람에 관련 자료를 뒤지며 열심히 공부했다. 알아보니 4기 진단을 받고도 문제없이 사는 환자가 무척 많았다. 몸 관리를 잘 한다면 언젠가 혁신적인 치료법이 개발될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이 생겼다.
“요즘은 어차피 유병장수 시대다. 암이라고 다른 병과 다를 게 없다. 암은 누구에게나 감기처럼 찾아온다. 내가 잘못해 아픈 게 아니고, 이 병 때문에 곧 죽을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훨씬 나아졌다.”
현재 이씨는 삼중음성유방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구하고, 어려움을 겪는 동료 환자들을 돕기 위한 비영리재단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그와 함께 아이디어를 나누고 있는 또 다른 삼중음성유방암환자 임구슬 씨는 1988년생으로 이씨보다 한 살 어리다. 국악을 전공하고 공연기획자로 활동하던 임씨는 2019년 2월, 결혼식을 한 달 앞두고 암을 발견했다. 결혼을 다시 생각하려 했지만 시가 어른들과 예비남편이 펄쩍 뛰며 말렸다. 암 치료를 바로 시작할 수 있게 오히려 결혼 날짜를 당기자고들 했다. 임씨는 암 진단 직후 식을 올렸고, 현재 남편과 함께 항암 치료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있다. 그는 “처음엔 많이 망설였는데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다. 그때 결혼을 포기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힘들었을 것 같다. 매순간 남편이 큰 힘이 된다”고 털어놓았다.
2040 암환자의 꿈과 사랑
연애와 결혼, 출산은 젊은 암환자들의 큰 고민거리 가운데 하나다. 최근 암 발생 연령이 낮아지면서 이 문제로 고통받는 청년이 더욱 많아지고 있다. 2018년 위암 3기 진단을 받은 대학생 권은율 씨(가명)는 “암 확진 후 가장 먼저 떠오른 게 여자친구 얼굴이었다”고 했다. “내가 그 친구를 계속 만날 수 있을까. 언젠가 결혼하고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권씨는 아직 같은 여자친구와 잘 만나고 있지만, 여자친구 가족은 그의 투병 사실을 모른다. 전문가들은 이 또한 암에 대한 편견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라며 안타까워했다.한 전문의는 “여성의 경우 항암제 난자 또는 생식 호르몬 분비에 영향을 미쳐 임신을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생기곤 한다. 반면 남자는 정자 수와 기능이 정상적이면 일반적으로 암 치료 후 6개월 정도 지나면서부터 임신 계획을 세울 수 있다”고 밝혔다. 최근엔 여성 암환자 난임을 개선할 다양한 의학 기술도 개발되고 있다고 한다.
삼성서울병원 유방외과 이정언 교수 연구팀은 2017년, 치료 중인 유방암 환자의 난소 기능을 일시적으로 떨어뜨려 폐경 상태를 유도할 경우 항암 치료 후 임신과 출산이 가능하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방법을 통해 2002년 1월부터 2012년 4월까지 유방암으로 수술받은 20세 이상 40세 이하 기혼 환자 41명 중 15명이 임신과 출산에 성공한 것으로 확인됐다. 출산을 원치 않은 11명을 빼면 임신 희망자(30명) 절반이 아이를 품에 안았다. 이 중 조산한 환자 1명을 제외하곤 유산이나 기형아 출산도 없었다.
최근에는 항암 치료 시작 전 암환자의 난자·정자나 수정란을 동결 보관해 추후 임신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의학기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암환자들을 진짜 고통스럽게 하는 건 질환 자체가 아니라 ‘암환자는 안 될 것’이라는 편견”이라고 입을 모은다.
암 치료 넘어 사회 복귀
이는 암환자의 사회생활에도 큰 장애 요인이 된다. 2017년 5월 국립암센터가 일반인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 ‘암이 있는 직원은 동료를 배려해 사내 행사에 참석하지 말아야 한다’(54%)는 응답이 절반을 넘었다. ‘암 생존자의 직업 능력은 일반인보다 낮다’(57%) ‘가족 중 암 생존자가 있는 사람과의 결혼을 피하고 싶다’(63%)는 응답도 매우 높게 나타났다.분당서울대병원 재활의학과 양은주 교수와 심혜영 박사팀이 국내 직업환경의학과 전공의 및 전임의 4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75%(33명)가 ‘직장에 복귀한 암 생존자를 진료해 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는 기업체와 연계한 특수건강검진, 사업장 보건관리 등을 담당한다. 이들이 의료 현장에서 직장인 암환자를 거의 접하지 못한 셈이다. 국내 위암 생존자 중 46.6%가 암 진단 후 실직했다는 통계도 있다. 양 교수는 “암 생존자는 후유증으로 신체적 한계가 있지만 재활 치료를 받으면 업무에 복귀할 수 있다”며 “기업과 국가에서 치료 및 검사를 위한 유급휴가, 탄력근무 방안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암 생존자들도 강력히 요구하는 내용이다. 국가암통계에 따르면 국내 암 생존자 중 약 57%가 만 65세 미만이다. 한창 사회생활을 할 나이다. 5년 이상 생존율이 꾸준히 높아지는 지금 이들을 일자리에서 배제하는 건 경제적 관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조주희 삼성서울병원 교수(암교육센터장)는 “그동안 우리 보건 당국은 암환자를 위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에 집중해 왔다”며 이제는 암생존자의 사회 복귀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암환자 직장 복귀, 언제가 좋을까
(도움말 · 삼성서울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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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생존자의 직장 복귀를 정책적으로 지원하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암=죽음’ 인식을 깨는 데 도움이 된다. 전문가들은 암환자에게 직업 활동은 암 진단 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암환자는 사회생활을 함으로써 신체적 피곤에 적응하고, 자존감을 높이며 심신의 건강을 되찾는다.
그렇다면 암환자가 다시 일을 하기에 적절한 시기는 언제일까. 이는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상황과 직장 요인(업무의 물리적, 정신적 강도) 및 치료 일정에 따라 달라진다. 직장 복귀를 고려하는 암환자는 먼저 자신의 활동 시간, 피로 수준 등을 기록해 현재 체력이 어느 정도인지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게 좋다. 에너지 수준은 매일 다르므로 일주일 동안 기록하는 게 바람직하다. 방법은 다음과 같다.
➊ 기상 시간부터 하루 동안 한 모든 활동을 시간대별로 적는다(낮잠, 식사 포함).
➋ 어떤 활동인지 간단하게 기입한 후 소요 시간을 기록한다.
➌ 활동 이후 체력 소모 정도를 낮음에서 매우 높음의 5단계로 체크한다.이렇게 정리하면 활기를 불어넣는 활동과 소모시키는 활동을 구분할 수 있다.
➍ 체력이 부족한 시간에는 일의 양과 강도를 줄인다. 반대로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일은 컨디션이 좋은 시간으로 배정한다.
조주희 삼성서울병원 교수(암교육센터장)는 “암생존자의 직장 복귀는 환자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이뤄지기 어렵다. 각 기업 인사담당자를 대상으로 한 인식 개선 교육, 자영업 암환자를 위한 지원 시스템 마련 등 정책적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