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도 다시 한번, 민진당 집권 연장
경제 실정·인사 난맥 차이잉원 큰 표 차 再選
최저임금 인상·노동시간 단축으로 고용률·실질소득 감소
脫원전 정책으로 극심한 갈등 빚어
시진핑이 선거대책본부장? 中경제보복·홍콩시위 도움 받아
젊은 유권자 ‘100年 정당’ 외면
대만의 청년 유권자들은 1월 11일 총통 선거에서 차이잉원의 손을 들어줬다. [뉴시스]
1월 11일 치러진 대만 대선에서 재선(再選)에 성공한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의 심중(心中)에는 이러한 생각이 들어 있지 않을까. 차이잉원이 평소 날을 세워온 시진핑 주석과 홍콩 시민에게 감사할 것이라 상상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2020년 1월 11일 대만 총통·입법원 동시선거가 치러졌다. 승리의 여신은 차이잉원 현 총통에게 미소를 지었다. 개표 초반부터 여유 있게 앞서 나가던 차이잉원은 오후 8시 30분 타이베이(臺北) 베이핑둥(北平東)로 민진당 선거대책본부 앞에서 ‘당선 선언’을 하고 지지자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 무렵 국민당 한궈위(韓國瑜) 후보는 대만 남부 가오슝(高雄)에서 패배를 인정했다.
대만 중앙선거위원회 최종 개표 결과, 민진당 차이잉원은 57.13%(817만231표) 득표율로 38.61%(552만2119표)에 그친 국민당 한궈위를 18.52%포인트(264만8112표) 차로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차이잉원은 1996년 총통 직선제 복원 이후 최다 득표 총통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썼다. 2016년 선거에서 56.1%(689만4744표)를 얻은 것과 비교해도 의미 있는 결과다.
고용률·실질소득 감소
지역별로는 22개 지방자치단체(직할시·현·시) 중 신주(新竹)·먀오리(苗栗)·화롄(花蓮)·진먼(金門)·롄장(連江)현, 신주시 등 6곳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차이잉원이 승리했다. ‘현직’ 가오슝 시장 한궈위는 가오슝에서도 34.63%를 득표하는 데 그쳐 62.22%를 얻은 차이잉원에게 더블스코어에 가깝게 패하는 굴욕을 당했다. 가오슝시 8개 입법원 선거구도 모두 민진당에 돌아갔다. 동시에 치러진 입법원 선거에서 집권 민진당은 전체 113석 의석 중 절반을 상회하는 61석을 획득했다. 국민당은 38석에 그쳤다. 차이잉원과 민진당으로서는 불과 1년 2개월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을 결과가 나온 것이다.2016년 1월, 차이잉원과 민진당은 총통·입법원 선거에서 압승해 ‘사상 첫 여성 총통’ ‘사상 첫 민진당 단독 과반 집권’ 시대를 열었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도 민진당이 승리해 새로 출범하는 차이잉원호(號)는 중앙·지방, 행정·입법 권력을 장악한 상태였다.
대만 정치사의 새로운 기록을 쓰며 화려하게 총통부에 입성한 차이잉원의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집권 초기부터 미숙한 국정 운영이 도마에 올랐다. 인사 문제가 주요 원인이었다. 취임 후 사법원(대법원 해당) 원장·부원장으로 지명한 셰원딩(謝文定)과 린진팡(林錦芳)을 내정 철회했다. 셰원딩은 1979년 발생한 대만 최대 민주화운동 사건 ‘메이리다오(美麗島)’ 때 담당 검사였다는 전력이 지지층의 반발을 샀다. 린진팡은 논문 표절이 문제가 됐다.
경제 사정도 지지율 하락을 부채질했다. 대만 독립 성향의 민진당 집권 후 ‘하나의 중국(一個中國·중국과 대만은 하나이며 분리할 수 없다)’ 원칙을 내세운 중국의 압박이 지속됐다. 중국의 경제 보복으로 인해 대(對)중국 의존도가 높은 대만 경제는 직격탄을 맞았다.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을 골자로 한 노동정책도 문제였다. 재계·노동계의 반발 속에서 추진한 정책은 부정적 효과를 양산했다. 임금·물가 수준에 비춰볼 때 과도하다 할 수 있는 매년 5%대 최저임금 인상으로 고용률이 저하됐다. 법정 근로시간 축소로 노동자의 실질 소득은 감소했다.
날개 없는 지지율 추락 극복
총통 친인척을 둘러싼 잡음도 일었다. 2016년 4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는 조세회피처 파나마 투자자 현황 보고서, 이른바 ‘파나마페이퍼스’에 차이잉원의 오빠 차이잉양(蔡瀛陽)의 이름이 올라 있다고 폭로했다. 인사도 구설에 올랐다. 총통 취임 2년 차인 2018년 2월 개각에서 이종사촌 언니 린메이주(林美珠)를 행정원 노동부 부장(장관)에 임명했다. 그 무렵 조카 차이위안스(蔡元仕) 검사가 총통 직속 사법개혁국시회의(國是會議) 검찰 대표로 선출됐다. 국민들은 “언젠가 차이잉원이 키우는 고양이도 ‘부장’이 되겠다”며 냉소했다.외교·안보 분야에서도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취임 2개월째인 2016년 7월 대만 해군의 슝펑(雄風)-3 미사일 오발 사고로 어민이 사망했다. ‘무력 도발’에 항의하는 중국에도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 무렵 일본 해상보안청이 해역(海域) 분쟁 지역인 오키노토리시마(沖鳥礁) 부근에서 조업 중이던 대만 어선 선장을 불법 조업 혐의로 체포했다. 외교 채널로 문제를 해결하려던 차이잉원은 ‘저자세’라고 비판받았다. 외교 고립도 심화됐다. 중국의 전방위적 외교 공세 속에서 ‘샤오펑유(小朋友·‘작은친구’라는 뜻의 대만의 공식 수교국)’들은 단교를 선언했다. 2016년 5월 차이잉원 취임 시 22개이던 수교국은 2019년 9월 15개로 줄었다.
내우외환 속에서 차이잉원의 지지율은 날개 없는 추락을 지속했다. 취임 무렵 70%에 육박하던 지지율은 3개월 만에 50% 선이 무너졌다. 이후 매년 평균 두 자릿수 하락세를 이어갔다. 2017년 12월 24일 차이잉원이 ‘산타 복장’을 한 자신의 반려묘(猫) 사진과 크리스마스 인사를 페이스북 계정에 게시하자 누리꾼들은 노동법 개정에 빗대 “고양이는 초과 근무를 했는지 피곤해 보인다”는 둥의 댓글로 조소했다. 언론은 이를 ‘차이잉원의 크리스마스 굴욕’이라고 보도했다. 그 무렵 지지율은 30% 전후를 기록했다.
2018년 11월 치러진 지방선거는 차이잉원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수도 타이베이 등 22개 광역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민진당은 6석을 얻는 참패를 당했다. 반면 제1야당 국민당은 15석을 차지했고, 타이베이 시장은 무소속 후보에게 돌아갔다. 차이잉원은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지고 당 주석직에서 사임했다. 지지율은 20% 언저리였다.
千載一遇 놓치지 않은 차이잉원
차이잉원이 곤경에 처했을 때 국민당에서는 새로운 스타가 탄생했다. 한궈위가 혈혈단신 국민당 불모지 가오슝 시장 선거에 뛰어들어 승리한 것이다. 언론들은 한궈위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했고 유권자들은 ‘한궈위’를 환호했다. ‘한궈위 현상’이 일었고 일약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 부상했다.2019년 차기 선거전이 본격화됐다. 범(汎)국민당 진영에서는 ‘라이징 스타’ 한궈위에 더해 ‘선거의 왕자’ 주리룬(朱立倫) 전 신베이(新北) 시장, ‘정계의 부도옹(不倒翁)’ 왕진핑(王金平) 전 입법원장 등 거물들이 당내 경선에 뛰어들었다. ‘장외 다크호스’도 있었다. 대만 최대 부호 궈타이밍(郭台銘) 폭스콘 회장도 가세한 것이다. 본선 승리가 확실해 보이는 상황에서 치열한 당내 경선이 치러졌다. 7월 한궈위가 후보로 낙점됐다. 차이잉원이 직선제 이후 처음으로 재선에 실패한 총통으로 기록될 것이라는 전망이 절대 우세했다.
그 무렵 대만해협 건너 홍콩에서 범죄인인도자법(본토송환법)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는 날로 격렬해졌다. 시위 규모에 비례해 홍콩 당국의 진압 수위도 높아졌다. 여파는 대만으로도 파급됐다. 일국양제(一國兩制·덩샤오핑이 제시한 ‘한 나라 두 체제’ 통일 방안)에 대한 불안·불만 수위도 고조됐다. 대만 국민들은 ‘홍콩은 대만의 미래’라고 생각했다. 차이잉원 취임 후 경제보복, 무력 위협을 일삼는 중국에 대한 반감도 커져갔다. ‘차이잉원이 마음에 들지 않으나 중국은 더 싫다’는 생각이 대만 국민 사이에 퍼졌다.
차이잉원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홍콩 민주화 시위 지지 의사를 적극 피력했다. ‘중국과 다른 홍콩’ ‘민주 기지로서 대만의 가치’도 강조했다. 떠나갔던 민심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가파르게 상승하는 지지율이 이를 증명했다. 시진핑과 중국 당국의 일국양제 통일 방안 수용 압박이 커질수록, 홍콩 시위 진압이 거칠어질수록 차이잉원의 지지율은 높아져 갔다.
중국의 대만 선거 개입 폭로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1월 11일 대만 뉴타이베이시의 한 투표소에서 시민들과 함께 줄을 서고 있다. [뉴시스]
한궈위의 친중 행보도 문제시됐다. 2019년 4월 ‘세일즈 시정(市政)’을 명분으로 중국·홍콩을 방문해 경제협력과 관련이 없는 중롄판(中聯辦·중앙인민정부 홍콩 주재 연락판공실)·국무원대만사무판공실(중국의 대만 통일기구) 주임과 회동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농산물을 팔러 간다더니, 대만을 팔아치우는 매국노(賣臺奴) 짓하고 다닌다’는 부정 여론이 비등했다. 지난해 11월 호주발 외신도 치명상을 안겼다. 호주에 망명을 신청한 중국인 왕리창(王立强)은 자신이 중국 정부 스파이였다고 고백하며 “중국 첩보 당국이 차이잉원 재선을 저지하기 위해 2018년 지방선거부터 조직적인 선거 공작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말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는 차이잉원이 20%포인트 이상의 차이로 압승할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실제 선거에서 이 같은 예측은 현실이 됐다. 차이잉원이 시진핑과 홍콩에 감사를 표해야 할 이유다. 결과적으로 시진핑은 자신의 의도와 정반대로 ‘어둠의 선거대책본부장’ 역할을 한 셈이다.
200만 표 이상 벌어진 선거 결과를 두고 황신하오(黃信豪) 중국문화대 교수는 “대만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주권 의식이 강한 젊은 세대, 특히 첫 투표를 하는 유권자들의 표심이 승패를 갈랐다. 국민당은 청년 세대 민심을 완전히 잃었다”고 분석했다.
한국당도 국민당 꼴 난다
대만 총통선거 결과는 한국 총선과 대선에도 시사하는 점이 적잖다. 차이잉원 총통은 최저임금의 가파른 인상, 근로시간 단축 등으로 경제에 나쁜 영향을 끼쳤다. 인사 난맥을 일으켰으며 탈(脫)원전 정책으로 논란도 키웠다. 한궈위의 참패 원인에는 자질 논란도 빠지지 않는다. 한궈위는 밀레니얼 세대에도 어필하지 못했다.대만 총통선거는 총선을 앞둔 한국의 야당에도 시사점을 던져준다. 대통령과 집권 여당의 헛발질이 계속돼도 야당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제대로 된 후보를 내지 못한다면 선거에서 승리하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또한 젊은 세대 표심을 잡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보여준다. 한국의 올해 4월 총선은 18세 이상 유권자로 선거 시작 연령이 낮아졌다. 정당, 특히 대만 총통선거는 보수정당의 대대적인 인적 청산, 이미지 쇄신 없이는 선거 승리가 요원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여줬다. 대만 젊은 유권자들에게 ‘100년 정당’ 국민당은 노쇠하고 부패한 기득권 정당 냄새를 풀풀 풍긴다. 꼰대 이미지를 가진 것이다. 한국당도 국민당 꼴이 될 공산이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