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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색, 계’의 명대사다. 이 작품은 중국 항일전쟁 시기 거물 한간(漢奸·민족반역자) ‘리(李)’ 역의 량차오웨이(梁朝偉)와 민족반역자를 암살하기 위해 접근했지만 ‘금단의 사랑’에 빠져 작전에 실패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왕자즈’ 역을 맡은 탕웨이(湯唯) 사이의 복잡 미묘한 감정 변화, 농도 짙은 정사 장면으로 화제를 모았다.
‘색, 계’는 1939년 12월 발생한 ‘시베리아 모피점 사건’을 모티프로 삼았다. 실제 주인공은 정핑루(鄭平如·1918~1940). 중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그는 19세에 당시 상하이(上海) 최고 인기잡지 ‘양우(良友)’ 표지 모델로 선정될 정도로 재색(才色)을 겸비했다. 1930년대 상하이 사교계의 꽃으로 불렸다.
민족의식이 높던 그를 국민당 조사통계국이 눈여겨봤다. 스파이로 포섭해 훈련했고, 암살 지령을 내렸다. 대상은 딩모춘(丁默邨·1901~1947). 국민당을 변절해 중일전쟁 시기 난징(南京) 괴뢰정부 정보·방첩기관 ‘76호’ 고문기술자로 변신, ‘상하이의 도살자’ ‘국민당의 힘러’ 별칭을 얻은 인물이다. 딩모춘의 비서가 돼 기회를 엿보던 정핑루는 암살을 꾀했지만 실패해 총살당함으로써 중국 현대사에 실패한 미인계 사례로 기록됐다.
미인계에 넘어간 日외교관
영화 ‘색, 계’의 소재인 미인계가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중국은 36계 중 하나인 미인계를 비롯해 각종 스파이 공작에 능하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2005년 5월 6일 상하이. 미명(微明)이 비칠 무렵 한 일본인이 자택 창틀에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자신의 상관과 가족 앞으로 유서 5통을 남겼다. 유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한 중국인이 비열한 협박을 했다. 나라를 팔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몰렸다. 나는 절대로 나라를 팔 수 없다.”
이국땅에서 자살로 삶을 마감한 이는 주(駐)상하이 일본 총영사관 전신관(電信官)이었다. 본국 외무성과 영사관 사이를 오가는 전문(電文) 담당자였다. 일본 외교관의 불행은 한 해 전 이른 봄 시작됐다. 가족을 일본에 두고 혈혈단신 부임한 외교관은 영사관 직원들과 어울려 가라오케를 찾곤 했다. 그곳에서 ‘류(劉)’라는 접대부를 알게 됐다. 친구 사이로 시작된 관계는 육체관계를 맺는 사이로까지 발전했다.
여성과 관계가 깊어졌을 때 ‘탕(唐)’이라는 남자를 소개받았다. 남자는 중국 정보기관원. 일본 외교관의 불륜을 영사관에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며 묵인 대가로 기밀 유출을 요구했다. 일본 영사관 직제표 등 하급 기밀에서 시작된 요구의 수위가 점점 높아졌다. 급기야 일본 외무성의 재외공관 전문 암호해독 시스템을 건넬 것을 강요했다.
중국 정보기관원 ‘탕’의 협박도 잇따랐다. ‘탕’은 외교관과 ‘류’의 정사 장면이 찍힌 사진을 내밀었다. 궁지에 몰린 일본 외교관은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류’는 2003년 성매매 혐의로 공안 당국에 체포됐다가 스파이가 되는 대가로 풀려난 전력(前歷)을 갖고 있었다.
호주 의회에 ‘스파이 의원’ 심으려 해
2011년 7월, 대만 타이베이(臺北) 국방부 고등군사법원 법정. 한 퇴역 장성이 법정에 섰다. 재판부는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죄목은 ‘간첩죄’와 ‘공무상 뇌물수수죄’였다. 대만 군 역사상 최초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 불명예를 안은 군인은 뤄셴저(羅賢哲) 소장(少將·한국군 준장 해당)이다. 그는 상교(上校·대령)이던 2002~05년 주태국대표부(대사관 해당) 무관으로 근무했다.2004년 뤄셴저에게 호주 국적의 한 중국계 여성이 접근했다. 두 사람은 곧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여성은 유흥비 명목으로 거액을 건네기도 했다. 관계가 깊어지자 그 여성이 본색을 드러냈다. 고위 정보장교이던 뤄셴저만 접근할 수 있는 국방 기밀정보 누설을 요구했다.
덫에 걸려든 뤄셴저는 조국을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 정보를 건넬 때마다 10만~20만 달러를 받았다. 귀임 후 뤄셴저는 2008년 1월 소장으로 진급했고 국방부 통신전자 책임자가 됐다. ‘거물 간첩’이 된 그는 지속적으로 기밀 정보를 넘겼다. 미국-대만 간 군사정보통신망, 육해공군 정보통신망 등 ‘극비’ 정보가 중국으로 넘어갔다.
대성공을 거둔 이 미인계를 실행한 여성의 이름은 리페이치(李佩琪)다. 그는 뤄셴저를 상대로 한 공작의 공로를 인정받아 중국 국가안전부 제4국(대만·홍콩·마카오 담당) 대만 데스크로 승진했다. 지난해 11월, 호주 정계가 한바탕 소동을 겪었다. 중국 정부가 의회에 ‘스파이 의원’을 심으려 했다는 사실이 언론과 정보당국을 통해 폭로돼서다.
시드니에 본사를 둔 민영방송 나인네트워크(Nine Network)는 시사 프로그램 ‘60분(60 minutes)’을 통해 중국 정보 당국이 호주인 자동차 딜러 보 자오에게 하원 의원 출마 대가로 100만 호주달러(8억9000만 원)를 건넨 의혹을 보도했다. ‘은밀한 유혹’을 받은 자오는 2018년 호주안보정보원(ASIO)에 신고했고, 2019년 3월 한 모텔방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中공산당이 호주 주권 잠식”
클라이브 해밀턴 호주 찰스스터트대 공공윤리학과 교수는 2019년 발간한 저서 ‘소리 없는 침략 : 중국공산당이 호주를 꼭두각시 국가로 만드는 방법(Silent Invasion: China’s Influence in Australia)’에서 “중국공산당이 체계적인 간첩 활동과 권모술수, 뇌물을 통해 호주의 주권을 잠식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40여 명의 전·현역 호주 정계 인사가 중국공산당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호주가 중국 스파이의 주요 활동 무대 중 하나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구체적인 실상이 드러난 것은 한 전직 중국 외교관을 통해서다.주(駐)시드니 중국 총영사관 정무영사로 근무하던 천융린(陳用林)이 2005년 5월 호주로 망명했다. 망명 후 그는 영사관 내부 자료 등을 공개하며 호주 내 중국 스파이 공작의 실상을 지속적으로 밝혔다. 천융린의 증언에 따르면 호주에서 암약하는 중국 스파이가 5000명이 넘었다. 더 큰 문제는 잠재적 스파이 집단 규모다. 2019년 기준 100만 명에 달하는 중국계 주민 중 3분의 1이 중국 본토 태생이다. 호주 내 중국인 유학생 수는 14만 명에 달한다. 호주 정보 당국은 중국계 주민과 유학생 집단이 스파이의 온상이라고 보고 있다.
중국 정보 당국이 호주에 공을 들이는 주된 이유는 호주가 ‘파이브 아이즈(Five Eyes)’ 서방 5개국(미국·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정보협의체 회원국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호주를 열쇠로 삼아 영·미의 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
“훔칠 수 있는 건 모두 훔친다”
2017년 4월 일본 시사주간지 ‘슈칸다이슈’가 일본 내 중국 간첩의 실상을 폭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일본 내 중국 간첩이 5만 명에 달한다. 상사 주재원, 유학생, 요식업·유흥업 종사자 등 다양한 직업으로 신분을 위장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도쿄 중국대사관을 거점으로 해 오사카·후쿠오카·나고야·나가사키·삿포로 등지의 총영사관을 중계 거점 삼아 현지 중국인 단체 간부의 지원을 받아 스파이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 스파이 공작의 주요 무대에는 미국도 빠지지 않는다. 핵심 정보기관 요원이 타깃이 되기도 한다. 2019년 11월 22일 미국 버지니아주 연방법원은 중국계 미국인 제리 촨싱 리(중국명 리전청·李振成)에게 징역 19년형을 선고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이던 리씨는 2007년 퇴사했다. 홍콩으로 이주한 그에게 중국 정보 당국의 마수가 뻗쳐왔다. 중국 스파이들은 “CIA 재직 시절 취득한 정보를 제공하면 건당 10만 달러를 제공하고, 노후를 책임지겠다”면서 유혹의 손길을 뻗쳤다. 리씨는 CIA 조직도, 정보 자산·정보원 현황 등을 넘기는 대가로 수십만 달러를 받았다. 그의 간첩 행위는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덜미를 잡혀 전모가 드러났다. 사건을 이첩 받은 버지니아지방검찰청은 보강 수사를 거친 후 간첩죄로 기소해 유죄 판결을 이끌어냈다.
날로 기승을 부리는 미국 내 중국 스파이 활동에 비례해 워싱턴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2018년 9월 크리스토퍼 레이 FBI 국장은 CNBC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중국의 스파이 활동이 광범위한 분야에서 이뤄지고 있다. 옥수수 종자에서부터 우주선까지 훔칠 수 있는 것은 모두 훔친다. 특히 지식재산권 도용이 심각해 미국이 매년 6000억 달러 이상의 경제적 손실을 입고 있다. 스파이 활동의 근본 목적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자급자족을 실현하려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미국 기업들을 세계시장에서 도태시키고 중국이 미국을 대신한 패권국가가 되려는 것이다.”
스파이 활동 본산은 국가안전부
중국 국가안전부 로고.
국가안전부는 직속기관으로 중국현대국제관계연구원, 국제관계학원, 장난(江南)사회학원을 두고 있으며 지방 조직으로 베이징·상하이·톈진·충칭 등 4개 직할시에 국가안전국, 허베이(河北) 등 28개 성(省)·자치구에 국가안전청이 있다. 구체적인 인력·예산은 공개되지 않으나 정보력에서 미국 CIA, 모사드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진 이스라엘 중앙공안정보기관(Central Institute for Intelligence and Security), 영국 비밀정보부(MI6)와 더불어 세계 최고 수준으로 꼽히고 있다.
천원칭(陳文清) 국가안전부장은 총경감(總警監·공안부와 국가안전부 최고 계급)으로 공안과 검찰 계통 요직을 역임했다. 2015년 국가안전부 중국공산당위원회 서기를 거쳐 2016년 11월 부장에 취임했다. 국가안전부 정보요원은 6~10년 단위 해외 장기체류를 기본으로 하는 전문요원, 기술·데이터 수집 활동을 하는 정보원, 여행객·기업인·유학생·연구원 등 잠재적 요원 등의 풀(pool)로 구성된다. 정식 요원 규모는 1200명 선으로 유지하면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3만5000명의 사야님(협조자)의 도움을 받아 첩보 활동을 펼치는 이스라엘의 모사드 운영 방식과 유사하다.
국가안전부는 협조자를 포섭하기 위해 인센티브를 제공하거나 본국으로 소환하겠다는 식의 ‘협박’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화교(華僑) 혹은 화예(華裔)라고 불리는 중국계 해외 교민의 숫자가 유대인에 비해 방대하다는 점에 비춰볼 때 ‘중국판 사야님(협조자)’의 수 또한 거대한 규모라고 추산할 수 있다.
미국에서 공자학원 퇴출 이어져
세계 각국 대학 및 학교에 설치된 500여 개 공자학원을 총괄하는 중국 정부기관 국가한판(國家漢辦)이 매년 주최하는 중국어 대회 한위차오(漢語橋). [동아DB]
공자학원·학당은 국무원 교육부 산하 국가한어국제보급지도소조(國家漢語國際推廣領導小組) 소속이다. 소조(태스크포스)에는 교육부를 포함해 재정부·상무부·외교부·문화여유부·국가발전개혁위원회·국가광파전영전시총국·국가신문출판총서·국무원 신문판공실·국가언어문자공작위원회 등 12개 부처가 참여한다. 공자학원이 전(全) 국가적 사업이라는 방증이다. 중화인민공화국국가한어국제추광영도소조판공실(國家漢語國際推廣領導小組辦公室·약칭 국가한판·國家漢辦)이 공자학원을 지휘한다. 현재 국가한판 이사회 주석은 쑨춘란(孫春蘭) 국무원 부총리 겸 통일전선공작부장이다.
설립 초기 공자학원은 소프트파워 외교의 일환으로 중국어 교육, 중국 문화 교류의 매개로 활용됐으나 2013년 3월 시진핑(習近平) 집권 후 성격이 변질됐다. ‘중국몽’ ‘중국부흥’을 슬로건으로 내건 시진핑 정부는 해외 선전활동을 강화했고, 공자학원을 체제 선전 도구로 활용했다. 2015년 ‘일대일로(一帶一路·육해상 실크로드)’ 전략 확정 후에는 일대일로가 지나는 국가에 공자학원을 집중적으로 설립했다. 공자학원이 ‘샤프 파워(sharp power·권위주의 정부가 은밀하게 펴는 정보전과 이데올로기 전쟁)’를 키우는 기관으로 전락한 셈이다.
공자학원이 중국 체제의 선전도구가 되면서 공자학원이 진출한 국가의 우려와 불안도 커졌다. 이는 유럽·미국의 공자학원 배척 운동으로 이어졌다. 2005년 유럽 최초로 공자학원을 개설한 스웨덴 스톡홀름대는 2015년 공자학원과의 계약을 해지했다. 미국에서는 2014년 시카고대·펜실베이니아주립대의 공자학원 폐쇄를 필두로 ‘공자학원 퇴출’이 이어지고 있다.
구미(歐美) 국가들이 퇴출에 나선 또 다른 이유는 ‘공자학원이 첩보 수집 조직으로 활용된다’고 의심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세계 첫 공자학원이 개원한 지 3년이 지난 2007년 6월 캐나다 발행 중국어신문 환구화보(環球華報)는 캐나다 정보기관 보고서를 인용해 “공자가 캐나다에서 스파이 활동을 하는가’ 제하 기사를 게재했다. 환구화보는 공자학원이 체제 선전과 첩보 활동을 위한 기관이라고 보도했다.
“공자학원이 在美 중국인 동향 감시”
미국 조지 메이슨대 공자학원에 붙은 포스터.
“공자학원이 중국공산당 사상 선전과 중국 정부의 스파이 활동에 이용되고 있어 수사 대상에 올랐다. 중국 정부가 공자학원을 비롯해 중국계 교수, 학생, 연구원을 정보수집원으로 활용하는 행태가 미국 전역에서 관찰되고 있다. 공자학원이 미국 내 중국 유학생과 중국 민주화운동, 인권 활동과 관련된 재미 중국인의 동향을 감시하는 거점으로도 악용되고 있다”
유럽에서도 사정이 비슷하다. 지난해 10월 벨기에 정부는 스파이 혐의로 브뤼셀자유대 공자학원 원장 쑹신닝(宋新寧)의 입국을 거부했다.
해외 각지에서 경고음이 들려오는데도 한국에서는 공자학원에 대한 경각심이 거의 없다. 아시아 최다 공자학원 보유국인 상황에서 현재도 각 대학들은 공자학원 유치에 적극적이다. 대학 관계자들은 중국과 교류 확대의 불가피성, 시중 학원 절반 수준 수강료로 중국어 교육을 제공한다는 점, 중국 정부가 제공하는 각종 인센티브(대학 관계자 초청, 장학금 지급) 등을 이유로 공자학원 유치의 불가피성을 내세운다.
한 대학 국제교류처 관계자는 “중국 대학과 교류협정을 맺거나 공자학원을 설치할 때 대학 내 정치 활동(중국공산당 활동) 자유 보장을 요구해 꺼림칙한 것은 사실이다. 공자학원이 이념·체제 선전기구 성격을 지니고는 있으나 스파이 기구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중국 스파이와 관련해 안일한 한국 분위기를 보면서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의 해석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공자학원이 스파이 행위를 했다는 분명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모든 객관적인 관찰자들이 ’공자학원이 스파이 활동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