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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요양원에서 바라본 노인 정책

아름다운 노년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하여

노인요양원에서 바라본 노인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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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톨릭계 수도회가 운영하는 실비노인요양시설에 입소한 지 10년. 65세에서 99세 사이 노인 69명이 살고 있는 이곳에서 나날이 벌어지는 진풍경!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상처들은 앞으로 노인이 될 이들에게 약이 되리라.
노인요양원에서 바라본 노인 정책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사제관 서쪽 벽에 바짝 붙어 2층 높이로 자란 몇 그루 자작나무 여린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척박한 땅에서 10년을 버틴 하얀 줄기들이 앙상하게 뼈만 남은 어느 노년의 창백한 모습을 연상케 한다. 같은 사물도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슬프게 보이기도 하고 아름답게 보이기도 한다. 지금 내가 음악을 연주한다면 분명 구슬픈 피리소리가 될 것이다. 그래도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프레드리히 횔덜린이 탄식했다. ‘만상은 늙어가면서 또한 젊어진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들은 자연의 이 아름다운 순환 법칙에서 예외가 되었을까?’이곳 생활 10년 동안 나도 여러 차례 이 질문을 반복했다.

지금의 장년이 노인이 되었을 때는 이곳 풍경과는 다르리라. 교양 있고 건강하고 활기찬 모습으로 인생의 말년을 보내게 되리라. 하지만 품위 있고 아름다운 노년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이곳 노인들의 외롭고 쓸쓸한 노후를 바라보며 오늘의 장년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내일, 스산한 바람 부는 갈대밭에 서서 허송세월을 후회하는 노년이 되지는 말라고.

오래된 바이올린 소리가 더 아름답다는데 청산의 한 마리 학처럼 아름답게 늙을 수는 없을까?

리디아 할머니와 율리따 할머니는 검푸른 잣나무 숲인 이곳에서 꽃을 활짝 피운 오동나무였다. 그토록 정감 어린 자매를 본 적이 없다.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율리따 할머니가 말했다.



“이곳에서 리디아를 만난 건 행운이었어요. 그러지 않았다면 너무 황량해서 견디기 힘들었을 거예요.”

잡고 있는 손목을 놓아라

그런데 어느 날 율리따 할머니가 다른 식탁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두 사람이 따로 놀기 시작한다. 보고 있는 내가 더 안타깝다. 그들의 우정은 한 자락 바람이 불면 꺼지고 말 불꽃이었다. 쉬 달아오른 냄비가 쉬 식는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 외로움을 주체할 수 없어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나는 너에게 갇히고, 너는 나에게 갇힌다. 노년의 삶이 평화로운 열정이기를 바란다면 자기 놀이터를 가져야 한다. 그 놀이터에서 혼자 놀 줄도 알아야 한다.

80을 눈앞에 둔 세꾼다 할머니가 입소했다. 여름에도 머리에 스카프를 휘날리며 산책을 나선다. 둘째가라면 서러운 멋쟁이에게 현재는 없고 과거만 있다니!

“시집갈 때 신랑 집에서 보내온 사주단자예요. 우리 집은 천석이었는데 신랑 집은 만석이었지요.”

저녁식사 후 2층 로비에서 한담 중이던 할머니 가운데 부러운 눈빛을 보내는 이가 없다. 70,80대 할머니들 앞에서 사주단자를 흔들며 세꾼다 할머니가 얻으려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일곱 평(23㎡) 크기 한 칸 방으로 올 때 서랍장, 반닫이 다 버려야 했을 텐데, 그때 사주단자를 버릴 수 없었던 세꾼다 할머니는 울었을까, 웃었을까?

아침저녁 식사 후 1층 로비는 할아버지들의 쉼터다. 그곳에서 왕따를 당한 고드릭 할아버지는 앉으나 서나 자식자랑하다 그렇게 되었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라 했다. 말수 적은 레오 할아버지가 드디어 한마디!

“돈 잘 벌고 효자라면 좋은 집에 일하는 사람 두고 부모 모셔야지….”

오죽하면 어느 모로도 쓸모가 없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에서 ‘자식자랑 팔불출’이란 말이 생겼을까? 노년의 행복이란 대단한 것이 아니다. 꽃밭에 꽃씨를 뿌리는 일, 손자에게 편지를 쓰는 일, 반짇고리를 정리하는 그런 소박한 일들이다. 작은 일들에 숨어 있는 즐거움의 조각을 찾아내 즐기는 것이다.

유스따 할머니는 애지중지 키운 외아들을 장가보낸 뒤 아들이 좋아하는 밑반찬을 날랐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식탁 위에 쪽지 한 장이 있었다.

“밤늦게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어. 자세한 이야긴 돌아와서 할게. 식탁에 아침 차려두었어.”

식탁의 아침상은 뚜껑이 덮인 프라이팬 하나였다. 식어서 기름이 엉겨 있다.

“개밥 같은 이걸 네가 아침이라고 먹느냐?”

얼굴이 잿빛이 된 엄마에게 아들이 한 대답이다.

“내가 괜찮다는데 왜 그러세요.”

순간 눈물이 비 오듯 쏟아져 뛰쳐나왔는데 집에 도착할 때까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돌아올 수 없는 강 저편에 서 있는 아들을 본 것이다. 그 사건이 할머니 인생에 홀로서기의 계기였다고 한다.

하반신을 쓸 수 없어 휠체어에 앉은 렐리아 할머니.

“난, 갈 거야. 내가 왜 이곳에 있어. 아들이 다섯인데….”

성화를 견디다 못한 수녀님이 모셔가야겠다고 전했다. 며느리 다섯! 하지만 할머니를 감당하겠노라 나서는 며느리가 없다. 행복한 사람은 버려야 할 신분을 스스로 버리는 사람이라 한다. 아들 다섯! 할머니는 그 자랑스러웠던 신분을 진작에 버렸어야 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지막 방법은 잡고 있는 손목을 놓는 것이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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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옥│시인 beata6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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