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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유친 군신유의

1920년대 서울

부자유친 군신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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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지난 회 이야기
  • 1919년은 고종의 죽음과 장례로 시작되었다. 죽은 고종은 한때 그의 백성이었던 국민을 궐기시켰다. 3월과 4월을 뒤덮은 전국적 저항으로 총독이 교체됐다. 새 총독이 상경하는 경부선 연도는 일본제국에 의해 도입된 10년간의 서구적 근대 풍경의 일면을 드러내고 있다. 기미년은 각자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강우규의 길, 안희제의 길, 한림의 길. 각각은 저마다 천만 개의 길 중 하나였다. 그 초입에서 전 임금 고종은 죽음으로써 자신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웅변했다.
(제8장)

부자유친 군신유의

고종(오른쪽)과 고종 국장(國葬) 당시의 순종.

1920년 4월. 한림은 신문의 창간 특집 이틀째 기사를 보고 있다. 거기에 고종(高宗)과 순종(純宗) 부자의 이야기가 크게 실렸다.

기미년 3월의 장례와 소요는 벌써 1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봄이 찾아왔다. 죽은 왕이 불러일으킨 만백성의 봉기는 사상자와 수형자를 남기고 가라앉았다. 연기되었던 왕세자의 혼인도 다시 날을 잡아 곧 치러지게 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 세계대전은 마무리되었다. 전쟁은 끝났는데 일본은 그 여세를 몰아 시베리아로 밀고 들어가며 새로운 러일전쟁을 벌이고 있다.

너무나 많은 일이 매일같이 생겨나고 있어서 사람들은 1년 전의 일을 기억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슬퍼했던 왕의 죽음도 어느새 잊혀간다. 왕이 사라진 것뿐 아니라 왕조시대 자체가 사라졌다. 독립을 말하는 사람은 많아도 왕조의 복원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중화민국이나 소련처럼 스스로 자기 왕조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건만 조선인들은 무너진 왕조를 기억에서 없애고 있다. 이 점에서는 저잣거리의 사람들이나 서대문감옥에 갇힌 운동가들이나 상해와 만주의 운동가들이나 마찬가지다.

한림은 작년 초 봄의 국상과 그 앞 겨울, 왕의 죽음을 회상한다.



치욕의 시간

이왕(李王·순종)은 소스라쳐 눈을 떴다.

주위는 아직 어둠이었다. 누군가 그를 불러 깨우고 있다. 혼몽 중에 오락가락하는 음색은 귀에 익다. 눈은 스르르 다시 감기고 의식은 쉬 깨어나지 않는데 몸이 저 혼자 경련을 일으킨다.

어머니의 음성은 아니었다. 점점 다가오며 다급해지는 그 소리는 상궁의 것인 듯하다. 꿈은 아니다. 여기는 그의 처소이며 그는 지금 안전하다. 그런데 어둠 속 이 소리는 무엇인가. 그리고 얼음장처럼 에워싸는 이 식은땀은 어인 일인가. 한겨울 밤의 냉기가 침전을 에워싸고 있다.

그의 잠을 깨우는 사람은 25년 내내 아무도 없었다. 그는 죽은 듯이 자고 죽은 듯이 살았다. 저 을미년 가을의 새벽에도 그는 지금처럼 어둠을 찢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쫓기듯 깨어났다. 그리고 어두운 경복궁 이곳저곳을 헤매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눈앞의 처소에서 참살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밤사이 안녕하셨는지 문안 인사 올리는 시각이 다가오고 있었다. 후들거리는 사지에 혼몽한 시선으로 바라본 북편 건청궁(乾淸宮)의 담장 밖 밤나무 숲 언덕 너머 가을의 소슬한 새벽 공기를 타고 때 아닌 연기가 피어올랐다. 추석을 지낸 지 닷새째였다. 그 중추가절에 역대 군왕의 초상을 모신 진전(眞殿)에 나아가 아버지와 함께 올렸던 다례(茶禮)의 향이 아직 생생했다.

진동하는 석유냄새와 함께 동트기 전의 경복궁을 뒤덮어가는 그 기괴한 연기의 주인이 어머니 왕비임을 알았을 때, 기절초풍하는 궁녀 신하들 사이에서 그는 기절도 하지 못하고 생지옥의 시간을 천형(天刑)인 양 감수했다. 원래 편치 못한 심신이었던 그는 1895년의 그날 이후 병세가 한층 악화되었다. 그의 배필인 세자빈 민씨(閔氏)는 그날부터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10년을 못 넘기고 1904년 요절했다.

그날 이후 그는 아버지 고종(高宗)과 더불어 헤아릴 수 없는 치욕의 시간을 겪어냈다. 하지만 그 숱한 고비의 어느 굽이에서도 그의 잠을 깨우는 일은 다시 없었다. 고뇌의 시간은 아버지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그도 형식적인 왕좌를 3년 잇고 물러남으로써 마침내 끝났다고 믿었다. 망국과 더불어 그는 순종(純宗) 황제라는 칭호를 거두고 이왕이라는 새로운 직함을 받았다. 아버지 역시 태황제 대신 이태왕(李太王)으로 불리게 되었다. 대한제국 황실은 이왕가(李王家)로 명칭이 바뀌었고 황실 업무를 담당하던 궁내부(宮內府)를 대신하여 이왕직(李王職)이라는 기구가 신설되었다. 그들의 생활비는 일본 궁내성(宮內省) 직속인 이왕직에서 수리되고 집행되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새삼 무슨 일인가.

등을 타고 선뜩한 전율이 흘렀다. 홀로 누운 그를 벽시계가 바라보고 있다. 6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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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이 기거했던 창덕궁 전경.

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야 타로(宇都宮太郞)가 한 달 전에 창덕궁으로 찾아와서 연말이라며 선물로 벽시계를 헌정한 일이 있다. 동경에서 직송된 160엔(円)짜리 신상품이라 했다. 덕수궁에 계신 아버지에게는 108엔짜리를 전달했다고 들었다. 해가 바뀌기 전인 1918년 12월 23일이었다. 저 시계가 그 시계던가.

밤사이 기온이 영하 10도로 급강하했던 그날은 우도궁 사령관의 58회 생일이라 했다. 용산의 사령관저에서 아침 7시 반에 목욕을 하는데 실내 온도가 영하 2.5도였다 한다. 창문 유리에 얼음 얼어붙은 것이 마치 아사히가와(旭川) 같았다고 했다. 북해도(北海道)의 중심지 아사히가와는 육군 제7사단 주둔지다. 그가 1914년부터 2년 넘게 사단장을 하던 곳이다. 거기서 오사카(大阪) 주둔 4사단장으로 옮겨 2년 더 복무하고 나니 4년간에 걸친 세계대전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어 1918년 올 여름 조선군사령관으로 부임한 그로서는 처음 맞는 서울의 겨울이다.

생일 이틀 전, 우도궁 사령관은 이왕이 보내온 포도주 12병들이 두 박스, 이태왕이 보낸 브랜디 12병들이 두 상자를 받았다. 관저의 뿌연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서쪽 1㎞, 철길 너머 용산역 북쪽으로 길게 뻗은 욱천(旭川)도 얼어붙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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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석│unomono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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