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은 더 피곤해도 됩니다”
“주요 민원이 제기되면 부구청장과 부서 직원들이 구청장과 직접 머리를 맞대는 ‘현안회의’를 해요. 취임 직후부터 했는데 600건 정도 했을 겁니다. 그 자리에서 결정하니 피드백도 빠르죠.”
현안회의에서는 주민들 삶의 질과 관련된 모든 민원이 주제가 된다. 도서관 건립 문제가 회의 주제라면 문화행정과와 재무과, 토목과 등 관련 부서 직원들이 한 자리에서 논의하고 구청장이 최종 결정하는 일종의 ‘원스톱 행정’. 한자리에 모여 결정하니 부처이기주의나 책임 떠넘기기도 없다고 한다.
▼ 구청 공무원들이 피곤하겠군요.
“피곤요? 더 피곤해도 됩니다. 제가 5기 민선 시장인데요, 진정한 민선 자치시대는 아직 멀었다고 봐요. 주민이 요구하는 행정 수준은 꾸준히 높아가는데 공무원들의 행정 서비스는 제자리예요. 관행과 전례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불법은 여전해요. 얘기해볼까요? (배석했던 직원을 보며) ‘청렴 대책’ 띄워보세요. 감사 담당자도 오시라 하세요.”
컴퓨터에 연결된 대형 TV 화면에는 경찰의 기자회견 자리에서나 등장할 법한 범죄 개요가 떴다. 구청 1300여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그의 청렴 강의 자료였다.
“25개 자치구에서 근무하는 기술직은 서울시장이 5년마다 순환근무를 시킵니다. 그런데 일반직은 본인 동의 없으면 다른 구청으로 보낼 수 없어요. 20년 넘게 서초구청에서 근무하는 사람도 수두룩해요. 3년마다 부서를 바꾸어도 토착세력과의 유착은 심각합니다. 이걸 해결해야 해요.”
그가 보여준 화면에는 자체 감사에서 공사 관련 비위사례를 적발한 내용이 떴다. 내용은 이렇다. 지난해 말 사회복지과의 한 담당자가 복지관 시설개선공사를 하면서 수의계약을 통해 아는 업체에 일감을 줬는데, 500만 원어치 공사를 1900만 원에 시공했다. 이를 알게 된 진 구청장이 공사현장인 복지관에 간부를 불러 모았다. 비위사실을 지적하며 일벌백계할 요량이었다.
“담당자가 비위사실이 없다고 펄펄 뛰니까, 일단 철수했어요. 이후 시공업체 사장을 불러 조목조목 지적하니 사실을 인정했어요. 그때 담당자도 잘못을 인정하더라고요. 전체 100m 수도관을 바꾼다고 해놓고 10m만 바꾼 겁니다. 어떻게 알았느냐. 제가 조순 서울시장 시절에 총무과장을 했어요. 수도관 공사를 하면 보온을 위해 스티로폼을 수도관에 대는데, 10m만 새로 돼 있고 나머진 뽀얗게 먼지만 쌓여 있고 교체 흔적이 없어요. 자체 감사를 시키고 나서 현장에 간부들을 모은 겁니다.”
수도관 10m 교체하고 100m 공사비 챙겨
▼ 부당 지급한 공사비 1400만 원은요?
“사장에게 뱉어내라고 했죠. 1400만 원 환수했어요.”
올해 1월에는 브로커와 짜고 공사 물량 등을 30% 부풀린 변조 견적서를 제출해 모두 1억3000만 원의 차액을 챙긴 공무원 2명을 서초경찰서에 고발했다. 서초서는 브로커의 차명계좌 거래내역을 바탕으로 리베이트를 받은 다른 공무원이 있는지 수사 중이다. 위법 건축물에 대해 이행강제금을 부과하지 않거나 노지불법전용을 묵인해준 공무원 30여 명도 엄중 문책했다. 서초구는 지난 2월부터 모든 계약을 공개 입찰하도록 했다.
“고이면 썩기 마련이에요. 아직도 이런 생각으로 공무원을 하고 있어요. 업무추진비를 부서장이 격려금으로 직원에게 지급한 것처럼 해놓고는 자신이 챙긴 사례도 있고요. 불만이 쌓인 직원들이 구청장 임기 말이 되니까 실명으로 고발을 해요. ‘눈 가리고 아웅’해서 되는 시대가 아니에요.”
▼ 구청장이 몰라서 넘어가는 경우도 허다하겠군요.
“그럼요. 밀폐된 거대 관료제, 법적 근거도 잘 모르고 전례를 답습하거나 ‘철밥통’만 믿고 일하는 공무원들은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구청장도 공부를 해야죠. (레바논 출신 시인이자 철학자인) 칼릴 지브란은 아이와 부모 관계를 화살과 활에 비유합니다. 활은 화살이 목표점으로 잘 나가도록 버팀목 역할을 하는 거죠. 가장은 가족이, 구청장과 공무원은 구민이 잘 살도록 버팀목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존경받아야 하고, 청렴해야죠. 구민 중심의 행정이 싫으면 저는 공무원 그만두라고 합니다.”
기자가 인사팀에 확인한 결과, 2010년 6월 진 구청장 취임 후 타 기관으로 전출을 희망한 공무원은 61명이었다. 진 구청장과 일하기 힘들다는 이유가 많았다. ‘물 좋은’ 서초구에서 이처럼 대거 전출을 희망한 전례가 없다는 게 구청 관계자의 설명이었다. 진 구청장은 지난해 7월 집중호우 당시로 시곗바늘을 돌렸다.
“지난해 7월 27일 오전 7시 50분에 반포빗물펌프장에 갔어요. 집중호우가 오면 낙뢰를 동반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현장에 가보니 펌프장의 고성능 펌프 17대가 낙뢰로 ‘올 스톱’ 상태였어요. 반포천은 막 범람하려고 하고, 인근 고속터미널에는 물이 무릎까지 차오는 긴박한 상황이었어요. 펌프장 옆에는 빗물 14만t을 모을 운동장이 있어요. 도수로(물 댈 도랑) 벽에 설치된 고무보 바람을 빼 운동장으로 하천 물을 옮겨야 했어요. 비상상황인데도 직원 1명뿐이에요. 제가 빗발치는 전화를 받았는데, 주민들은 ‘고무보의 바람을 빼라’고 난리를 쳤어요. 그런데 이 공무원은 하천수위가 6.8m(EL)가 되어야 바람을 뺄 수 있다는 겁니다. 낙뢰로 펌프 작동도 안 되고, 주민들은 아우성치는데 수십 년 된 매뉴얼을 붙잡고 있더라고요. 당장 바람 빼라고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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