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호

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中, 親소련파 ‘만주왕’ 제압 왜?

  • | 백범흠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입력2018-09-09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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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년 청·일 양국의 선전포고로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청군(淸軍)은 아산 앞바다와 평양에서 처참하게 무너졌다. 일본군은 압록강을 건너 펑황을 점령했으며 뤼순도 함락했다. 북양함대는 산둥반도에서 궤멸했다. 종전 협상은 랴오둥반도·펑후제도·대만 할양이 핵심이었으나 3국(러시아·프랑스·독일)간섭으로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잃는다. 3국간섭은 1904년 러일전쟁의 서곡이다. 러시아와 볼셰비키의 소련은 물론이고 미국도 만주에 군침을 흘렸다. 1928년 9월 소련군이 소·만 국경을 돌파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에도 소련은 뤼순·다롄과 남만주의 이권을 가졌다.
    청불전쟁 기록화. [위키피디아]

    청불전쟁 기록화. [위키피디아]

    19세기 중엽 일본 상황을 들여다보자. 초슈번(야마구치) 하기(萩)와 사쓰마번(가고시마) 가지야(加治屋)를 대표한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1868년 3월 도사번(고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주선으로 삿초(薩長·사쓰마-초슈)동맹을 결성했다. 삿초동맹은 에도-아이즈(도쿄-후쿠시마)가 주력인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왕정복고, 개혁·개방을 요체로 하는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켰다.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장편소설 ‘언덕 위의 구름’에 당시 일본 국내외 상황이 잘 묘사돼 있다.  

    청(淸) 실력자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은 조선의 친청파 민영준의 요청도 있고 해 1894년 6월 4일 청군의 조선 출병을 명했다. 일본은 대본영(大本營)을 설치해 전쟁을 준비했다. 정한론자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외무장관과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육군 중장 등 개전파가 대청정책(對淸政策) 주도권을 장악했다. 일본은 산둥반도와 랴오둥반도에서 인천까지가 자국에서보다 훨씬 가깝다는 것을 고려해 청군이 출병하기 이틀 전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공사가 지휘하는 1개 대대를 출발시켰다. 

    청의 녜스청(士成)은 선발대 800명을 거느리고 6월 8일 아산에 상륙했다. 일본군은 6월 9일 인천에 상륙했다. 조선 정부는 조선 영토가 전쟁터가 될 것을 우려해 6월 11일 동학군과 전주화약을 체결했다. 청·일군이 조선에 계속 주둔할 명분이 없어졌다.

    日, 호랑이 등에 올라타다

    리훙장. [위키피디아]

    리훙장. [위키피디아]

    오토리 공사는 많은 병력이 조선에 주둔하면 청나라와 군사 충돌로 이어질 것으로 보고 “필수 병력만 남기고 쓰시마(대마도)로 철수하자”고 건의했으나 무쓰 외무장관과 가와카미 중장은 무조건 전쟁으로 나아가려 했다. 일본은 전쟁 구실을 만들고자 일·청 공동으로 조선의 정치개혁을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청나라는 6월 21일 이를 거부했다. 일본은 한양 주둔군을 동원해 조선 왕궁과 4대문을 장악하고는 조선 정부에 청과의 국교를 단절할 것을 요구했다.  

    해양강국 영국의 1차 관심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 것이었다. 남진 저지에 도움이 된다면 청이든 일본이든 상관없었다. 영국의 2차 관심은 영국 회사가 대거 진출한 경제 중심지 상하이를 포함한 창장 하류로 전쟁이 확대되지 않게 막는 것이었다. 7월 18일 존 킴벌리 영국 외무장관은 청과 일본에 서울을 경계로 조선반도 북쪽은 청, 남쪽은 일본이 점령할 것을 제의했다. 임진왜란 시 명나라와 일본은 ①대동강 이남 일본 할양안 ②충청·경상·전라 3도와 경기 일부 일본 할양안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다. 



    청나라 군사력이 일본에 비해 열세인 현실을 잘 알던 리훙장은 킴벌리의 제안을 환영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했다.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시베리아 철도가 아직 개설되지 않아 러시아가 대군을 파병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서제는 주전론을 고수했다. 후광총독 장즈퉁(張之洞)과 호부상서 웡퉁허(翁同) 등 리훙장 반대파가 이에 동조했다. 북양함대는 청이라는 나라가 아니라 리훙장의 사병처럼 운용됐는데, 최근 10여 년간 신형 함정을 한 척도 구입하지 못해 일본 해군에 비해 열세였다. 포탄도 크게 부족했다. 여기에다가 청나라 해군은 각 성(省)에 소속돼 군령도 일원화되지 않았다. 

    리훙장은 7월 29일 황제에 대한 상주문(上奏文)에서 청과 일본의 해군력을 비교해 승산이 없음을 밝혔다. 리훙장은 끝까지 일본과의 전쟁에 끌려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 일본은 조선에 경부전신(京釜電信) 가설권과 조·청(朝淸) 조약 폐기 등 최후통첩을 내놓고는 조선 주재 청나라 총리공서를 공격하는 등 한양을 점령했다.  

    고종은 7월 24일 대원군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일본은 대원군에게 청군 격퇴를 요청한다는 요지의 국서(國書)를 보내줄 것을 강요했으나 대원군은 주저했다. 청과 일본, 어느 쪽이 승리할지 판단이 서지 않은 것이다. 

    8월 1일 청나라와 일본은 상대에게 선전포고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총리는 무쓰 외무장관에게 아산 공격 중지를 지시했으나 무쓰는 일본이 호랑이 등에 올라탄 기호지세(騎虎之勢) 상황이라고 판단해 전쟁으로 밀고 나갔다.

    전봉준에게 봉기 촉구한 이하응

    1894년 일본 군함이 청나라 북양함대를 공격하고 있다.

    1894년 일본 군함이 청나라 북양함대를 공격하고 있다.

    리훙장의 생각은 평양에 청군을 집결시켜 한양의 일본군 8000명과 맞서는 것이었다(1대 1 전선). 리훙장은 예즈차오(葉志超)가 지휘하는 2000명의 아산 주둔 청군을 평양으로 이동시키려 했다. 전선의 예즈차오는 리훙장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평양의 청군을 증강하는 한편 아산의 청군 병력도 증원해 한양 주둔 일본군을 남북에서 포위·협격하자고 주장했다(2대 1 남북 포위).  

    리훙장은 임차한 영국 선박에 추가 병력을 태워 아산으로 보냈다. 일본 해군은 7월 25일 아산 앞바다 풍도에서 청군이 탑승한 영국 선박을 기습 공격했다. 탑승한 청나라 병사 1200명 모두가 익사했다. 사기가 떨어진 청군은 7월 29일 벌어진 천안시 성환(成歡) 전투에서 일본군에 패배했다. 일본은 9월 13일 대본영을 히로시마로 전진시켰다. 예즈차오는 성환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거짓 보고하고는 충주, 춘천을 우회해 평양으로 도주했다. 리훙장은 평양의 청군 지휘관들이 불화한다는 보고를 받고 성환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예즈차오를 사령관에 임명했다. 평양의 청군 지휘부는 리훙장의 조치에 실망했다. 예즈차오는 압록강까지 후퇴해 일본군의 보급로가 길어진 틈을 타 공격할 것을 주장했으나, 다른 장군들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9월 15일 노즈 미치쓰라(野津道貫)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군 1만7000명이 청군 1만4000명을 포위했다. 평양성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일본군이 탄약이 떨어져 후퇴하려는 순간, 예즈차오의 명령에 따라 청군이 평양 성곽에 백기를 내걸었다. 평양전투에서 패배한 청군은 조선에서 퇴각했으며,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예즈차오에게 보낸 밀서는 일본군에게 노획됐다. 예즈차오는 나중에 참형을 당했다.  

    이하응은 경상·전라·충청 유력 양반 및 동학 지도자에게 밀사를 보내 의병 봉기를 촉구했다. 이하응은 1894년 8월 선무사를 파견해 전봉준·김개남 등 동학군 지휘부와 접촉해 봉기를 논의했다. 대원군이 선무사로 보낸 이건영은 전봉준에게 “왜구가 궐내를 범하고 종사에 화가 미쳐 나라의 명맥이 조석에 달렸으니 너희들이 서울로 북상하지 않으면 화가 닥칠 것”이라는 내용의 밀서를 보였다. 김개남에게는 “기병(起兵)해 한양으로 올라오라. 이것이 바로 대원군의 진의”라면서 궐기를 호소했다.  

    전봉준은 10월 중순부터 동학 남접(南接) 전라도를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했다. 남접의 봉기에 자극받은 손병희 등 북접(北接) 지도부도 전봉준을 지원해 함께 궐기했다. 11월 7일 17만 명의 동학군이 논산에 집결해 북진을 시도했다. 일본은 9월 하순 대원군과 동학지도부 간 비밀 접촉 사실을 파악하고는 철저하게 준비했다. 이하응을 두둔한 오토리 공사가 소환되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공사가 10월 27일 부임했다. 이노우에는 일본에서 파병된 1000여 명의 중무장 보병을 동원해 동학군 진압에 나섰다. 동학군은 11월 18일~12월 31일 공주와 천안 사이에서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정부군을 맞아 혈전을 벌였으나 참패했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군은 12월 4~7일 공주 우금치 일대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화력의 절대 열세로 인해 다시 한번 참패했다. 동학군 전사자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지방이 산야를 덮어 눈이 온 것처럼 보였다. 이하응은 퇴진을 강요당했다.

    북양함대, 전멸하다

    이에 앞선 9월 평양 전투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청나라는 뤼순항을 통해 함대를 추가 파견했다. 북양함대는 9월 17일 압록강 하구 하이양다오(海洋島) 인근에서 일본 함대와 조우해 5시간에 걸친 해전 끝에 참패했다. 패배한 북양함대는 뤼순 인근 다롄만(大連灣)으로 귀환했다. 일본군 제1군은 10월 압록강을 건너 펑황을 점령했으며 제2군은 11월 뤼순을 점령했다. 북양함대는 산둥반도 웨이하이웨이(威海衛)로 도주했다. 제1군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사령관은 베이징 공격을 주장했다. 야마가타의 폭주를 우려한 대본영은 야마가타를 노즈로 교체했다. 야마가타는 해임되기 전 선양(瀋陽), 랴오양(遼陽) 남부 군사요충지 하이청(海城) 점령을 명령했으며 일본군은 12월 하이청을 점령했다.  

    남방에서는 일본 해군이 대만의 부속도서인 펑후열도(澎湖列島)를 점령했다. 전선이 확대됨에 따라 일본의 군사력은 바닥을 드러냈다. 일본은 근위사단과 북해도 둔전병까지 동원했다. 본토를 지킬 병력이 거의 없는 상태가 됐다. 외부의 간섭에 취약해진 일본으로서는 적절한 시점에 전쟁을 종결해야 했다.  

    곤궁하기는 청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청나라는 영토에 대한 이해관계가 비교적 미미한 미국에 종전 협상을 주선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의사를 타진했다. 일본은 군사력이 바닥나고 있었는데도 웨이하이웨이로 도주한 북양함대를 전멸시킨 다음 전쟁을 끝내고자 했다. 이토 스케유키(伊東祐亨) 해군사령관은 딩루창(丁汝昌) 북양함대 사령관에게 항복을 권고했으나 딩루창은 이를 거부했다. 일본 해군은 1895년 2월 웨이하이웨이를 점령하고 류궁다오(劉公島)에서 북양함대를 전멸시켰다. 딩루창은 자결했다.  

    이토와 리훙장은 미국의 주선으로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정전 교섭을 했다. 일본에 의한 황화(黃禍·Yellow Perill·황인종에 의한 백인종 말살)를 우려한 독일은 일본이 청나라 영토 할양을 요구할 때 간섭하겠다고 선언했다. 독일은 영국에 청·일 협상에 함께 간섭할 것을 제의했으나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려면 일본이 더욱 강력해지는 것이 유리하다고 보고 독일의 제안을 거부했다. 일본은 청나라에 톈진과 산하이관 등의 할양을 요구했으며 뤼순에 정청대도독부(征淸大都督部)를 설치할 의사를 표명하는 등 강경하게 나갔다.

    러시아 품에 안긴 ‘Port Arthur’ ‘Port Dalian’

    시모노세키조약은 1895년 조인됐다. [동아DB]

    시모노세키조약은 1895년 조인됐다. [동아DB]

    크리미아 전쟁(1853~1856)에서 영국, 프랑스, 터키, 사르디니아 연합군에 패배한 러시아는 동아시아로 관심을 돌렸다. 러시아는 1858년 아이훈 조약과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헤이룽장-우수리장 이동(以東) 청나라 영토 150만㎢ 이상을 차지했다. 이로써 중국은 동해 출구를 상실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현재 북한의 나선항 등을 통해 동해로 나아가려 한다. 

    러시아는 영·미와 연결된 해양세력 일본의 굴기를 저지하려 했다. 청나라는 열강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러시아군 3만여 명이 북만주로 이동 중이라는 첩보가 들어오자 정전을 반대하던 일본 군부도 입장을 바꿨다.  

    일본은 청나라에 조선의 완전한 독립, 랴오둥반도와 대만 및 펑후열도 할양, 배상금 3억 냥 지불 등을 요구했다. 협상 끝에 일본의 요구 조건이 다소 완화된 시모노세키 조약이 4월 17일 조인됐다.  

    독일·프랑스·러시아 3국은 4월 23일 일본의 랴오둥반도 영유를 반대하고 나섰다. 일본 주재 3국 공사는 일본 외무부에 랴오둥반도 영유를 반대한다는 자국 정부의 뜻을 전했다. 일본은 히로시마 대본영에서 ①3국간섭 거부 ②열국회의(列國會議) 개최 ③3국간섭 수락 등 3가지 방안을 놓고 논의한 끝에 ②안으로 결론을 내렸다. 요양 중이던 무쓰 외무장관은 문병 온 이토 총리에게 열국회의가 개최되면 열강의 간섭으로 시모노세키 프레임 자체가 깨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면서 열국회의 개최에 반대했다. 그러면서 무쓰는 러시아를 상대할 힘이 없으면 분하더라도 3국간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4월 29일 일왕 메이지가 참석한 가운데 어전회의가 개최돼 랴오둥반도 반환이 결정됐다. 3국간섭은 러·일 전쟁으로 가는 서곡이었다. 일본에 대항하려면 러시아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리훙장은 1896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해 유효기간 15년의 청·러 비밀 군사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이 청나라와 조선, 러시아를 침략할 경우 상호 지원한다는 게 조약의 요지였다.  

    러시아는 청나라를 보호해주는 대가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북만주를 관통하는 동청철도(청나라 동부 철도라는 뜻·만저우리-하얼빈-쑤이펀허) 부설권을 획득했다. 러시아는 일본의 ‘랴오둥반도 할양’ 요구를 무산시킨 대가도 받아냈다. 러시아는 1898년 3월 청나라로터 랴오둥반도 남단에 위치한 뤼순항(Port Arthur)과 다롄항(Port Dalian) 일대를 조차(租借)했다.

    쑨원 “청조(淸朝)를 뒤엎자”

    전쟁에 패배한 청나라는 충격에 휩싸였다. 광서제를 포함한 국가 지도부는 물론 일반 사대부도 패전 소식에 분노했다. 과거를 보기 위해 베이징에 모인 캉유웨이(康有爲)와 량치차오(梁啓超) 등은 공동 상소를 통해 개혁을 청원했다. 이대로 가서는 나라의 앞날이 없다는 데 조야의 의견이 일치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두 갈래의 개혁 움직임이 일어났다. 하나는 황제가 중심이 된 위로부터의 개혁 운동이다. 다른 하나는 청조(淸朝)를 뒤엎자는 밑으로부터의 개혁 운동이다. 밑으로부터의 개혁 운동은 쑨원(孫文)과 루하오둥(陸皓東) 등 광둥 출신이 주도했다. 흥중회(興中會)를 구성한 이들은 1895년 9월 광저우(廣州)에서 무장봉기를 시도했으나 계획이 사전 누설돼 실패했다.  

    청나라 체제의 위기를 감지한 광서제는 1898년 6월 캉유웨이, 량치차오, 탄시퉁(譚嗣同) 등을 기용해 △정치개혁 △산업진흥 △군제개혁 △학교 설립을 중심으로 대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개혁에 호의적인 인물은 호남순무 천바오전(陳寶箴)과 공부상서 쑨자나이(孫家) 등 소수에 불과했다. 변법이라고 불린 이 개혁은 천바오전의 후원을 받은 후난성을 제외하고는 거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 보수파 실권자 서태후(西太后·함풍제의 후궁 출신으로 정식 명칭은 자희태후)는 권력을 잃는 게 두려워 개혁에 반대했다. 서태후는 군대를 통제하는 직례총독 자리에 조카 구왈기야 룽루(瓜爾佳榮祿)를 임명했다.  

    청일전쟁 시 보급을 담당한 위안스카이는 신건육군(新建陸軍)을 편성해 훈련시켰다. 개혁을 추진하려면 군사력이 필수인데도 캉유웨이, 탄시퉁 등 개혁파는 군대를 장악하지 못했다. 광서제가 개혁파 인물을 군기대신 장경(보좌관)에 임명하자 서태후가 행동을 개시했다. 서태후는 자파(自派) 장군들에게 병력을 황궁 부근으로 이동시킬 것을 명령했다. 위기를 감지한 탄시퉁은 신건육군이라는 최강의 무력을 보유한 위안스카이와 담판했다. 탄시퉁은 위안스카이에게 휘하 군대를 동원해 시태후가 거주하는 이화원을 포위해줄 것을 요청했다. 수일 동안 고민한 위안스카이는 변법파의 요청을 거부한 후 탄시퉁을 구왈기야 룽루에게 밀고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광서제는 위안스카이의 힘을 빌리고자 9월 16일 그를 시랑(侍郞)에 임명했다. 상황 전개를 주시하던 서태후는 9월 17일 친위 쿠데타(무술정변)를 일으켰으며, 9월 20일 광서제를 유폐했다. 탄시퉁과 캉광런(康廣仁) 등 변법파들은 처형되고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위로부터의 개혁은 이렇게 실패하고 말았다.

    아래로부터의 혁명만 남았다

    의화단이 외국인 거주지를 공격하자 일본 영국 미국 러시아 독일 등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으로 진군했다. [위키피디아]

    의화단이 외국인 거주지를 공격하자 일본 영국 미국 러시아 독일 등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으로 진군했다. [위키피디아]

    1897년 독일은 산둥성에서 자국 출신 가톨릭 신부(神父) 두 명이 살해된 것을 기화로 청나라를 협박해 자오저우만(膠州灣) 조차권과 함께 철도부설권을 빼앗았다. 독일 교회는 무력을 배경으로 산둥성 지역에서 포교해 중국인 신자를 다수 확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안(敎案)이라고 하는 반(反)기독교 민중운동이 빈번히 일어났다. 배외단체인 의화단은 부청멸양(扶淸滅洋)을 구호로 내걸고 외국인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배외적인 만주족 출신 위시안(毓賢)에 이어 산둥순무(山東巡撫)로 부임한 위안스카이는 외세의 호의를 얻고자 철도나 학교 등 서양과 관련된 모든 것을 파괴하던 의화단을 탄압했다. 위안스카이에 의해 산둥에서 쫓겨난 의화단은 인접한 허베이로 들어갔다.  

    서태후는 의화단을 이용해 서양 세력을 몰아내기로 결심했다. 1900년 6월 청 정부의 호응하에 의화단원 20만 명이 베이징에 입성했다. 서태후는 무술정변 시 광서제를 유폐하는 일에 동원된 반외세적인 둥푸샹(董福祥)의 감군(甘軍·간쑤성 군대)도 불러들였다. 의화단과 감군은 배외운동을 실행에 옮겨 베이징에 거주하는 공관원과 그 가족 등 외국인을 무차별 살해했다. 청나라는 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지방관들에게는 의화단과 함께 외세를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대부분의 지방관들은 정부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의화단이 베이징의 외국인 거주지 동교민항(東交民巷)을 집중 공격하자 일본, 영국, 미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로 구성된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으로 진군했다. 총병력 2만 명이었으며 일본군이 다수를 차지했다. 러시아의 반대에도 영·미는 일본이 대군을 파견하는 것을 지지했다. 일본 외에 공사가 살해당한 독일이 파병에 가장 열성을 보였다. 

    8개국 연합군은 8월 14일 베이징에 입성했다. 서태후는 베이징이 함락되기 직전 광서제와 함께 시안(西安)으로 도주했다. 1901년 9월 강화조약이 체결됐다. 러시아는 의화단운동을 이용해 만주에 대군을 진주시켰다. 이로써 아래로부터의 혁명만이 남게 됐다.

    浪人 동원해 중전 閔氏 시해

    장제스(왼쪽)와 마오쩌둥. [위키피디아]

    장제스(왼쪽)와 마오쩌둥. [위키피디아]

    조선으로 돌아가보자. 집권 민씨(閔氏) 일파는 3국간섭에 성공한 러시아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친러 정책을 밀고 나갔다. 러시아 세력의 조선 침투에 초조해진 일본은 1895년 10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공사로 하여금 미야모토 다케다로 등 일본군과 사무라이(浪人)를 동원하고, 친일 장교 이주회·이두황·우범선 등을 사주해 중전 민씨를 시해하게 했다. 중전 민씨가 시해당한 것은 △일본의 모험주의 △일본-러시아 간 세력경쟁 △조선 내 친일파-친러파 갈등 △민씨를 포함한 조선 지도부가 민심을 상실한 것이 주요 원인이다. 이 사건의 여파로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망명하는 등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은 다소 줄어들었다. 

    러시아에 밀린 일본은 절치부심했다. 일본은 1892년 2월~1893년 8월 1년 6개월간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한 적 있는 정보장교 후쿠시마 야스마사(福島安政) 등의 노력으로 개정된 영일동맹 조약에 힘입어 영국의 지원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1904~1905년에 걸쳐 조선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러시아를 제압한 일본은 남만주에 관심을 보인 미국의 간섭마저 뿌리치고 1910년 조선을 합병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은 19세기 중엽 만주 유일의 개항장이던 랴오허 하구 잉커우(營口)에 영사관을 설치할 만큼 만주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욕구는 소련으로 이어졌다.

    볼셰비키 혁명 직후인 1919년 7월 소련은 레프 카라한 외무장관을 통해 ‘소련은 러시아가 중국에서 획득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는 이른바 ‘카라한 선언’을 발표했다. 당시 소련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해 서진하던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주도의 혁명간섭군과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白軍)의 공세로 고전하고 있었다. 적군이 1920년 백군을 격파하고 반혁명 국제연합군이 철병하는 등 상황이 안정되자 소련은 만주 이권 포기를 거부했다.  

    1928년 국민당에 의한 중국 통일 후 장제스의 지지를 확보한 장쉐량(張學良)의 펑톈(奉天)군벌은 대(對)소련 강경책을 취했다. 만주 일대를 장악한 펑톈군벌은 1928년 7월 중동철도(중국 동쪽 철도라는 뜻·동청철도에서 개칭)를 접수하고 소련인을 추방했다. 소련은 펑톈군벌과의 교섭이 결렬되자 그해 8월 ‘원동군’을 조직해 소련-만주 국경 일대에서 대규모 무력시위를 벌였다. 개전 시 소련군 병력은 8만여 명으로 확대됐다.

    美 중개로 장제스-스탈린 우호동맹 맺어

    소련군은 1928년 9월 소·만 국경을 돌파했다. 소련군 아무르함대는 10월 공군기 엄호하에 헤이룽장-쑹화장 합류 지점에서 펑톈군벌 해군 함대를 섬멸했다. 소련군은 10월 말 하얼빈에 접근했으며 11월에는 내몽골 최북단의 만저우리 방면으로도 공격을 개시했다. 펑톈군벌은 전차와 공군기를 동원한 소련군의 공세에 괴멸되고 말았다. 소련군은 만저우리를 점령한 후 공격을 멈추었다. 펑톈군벌은 12월 항복과 다름없는 조건으로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소련은 미국의 중개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인 1945년 8월 14일 장제스 정부와 중·소 우호동맹 조약을 체결해 러·일 전쟁 패배로 상실한 뤼순·다롄 일대와 남만주철도 운영에 관한 권리를 회복(30년 기한)했다. 중국이 6·25전쟁 때 대군을 파병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소련을 등에 업고 별도 통화를 발행하는 등 ‘만주왕(滿洲王)’이 돼가던 중국공산당 동북국(東北局) 제1서기 가오강(高崗)을 제압하고 뤼순-다롄을 포함 만주 전역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일소하는 것이었다.


    백범흠
    ● 1962년 경북 예천 출생
    ●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정치학박사
    ● 駐중국대사관 총영사
    ● 現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관 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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